‘n번방 온상’ 해외 서버 손못대… 온라인 성범죄 되레 늘어
‘n번방 방지법’ 시행 1년
《디지털 성범죄물 유통을 막기 위한 이른바 ‘n번방 방지법’ 시행 만 1년이 지났지만 ‘제2 n번방’ 등 온라인 성착취 범죄는 끊이지 않고 있다. 은밀히 성착취물이 유통되는 메신저 텔레그램의 경우 서버가 해외에 있는 탓에 한국 경찰의 수사력이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경찰에 신고해도 “검거가 어려울 것 같다”는 말에 숨죽여 우는 피해자들이 적지 않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디지털 성착취물 피해자들이 경찰서에서 가장 많이 듣는 대답은 ‘(유통 경로가) 텔레그램이라 (범인을 잡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이라고 한탄했다. ‘온라인 수색’ 등 새로운 수사 기법을 도입해 수사 당국의 수사력을 강화하는 것이 현실적 대책이란 지적이 나온다.》
○ 비공개 대화방은 모니터링 못 해
지난해 12월 10일 시행된 n번방 방지법은 2019년 조주빈(27·수감 중)과 문형욱(27·수감 중) 일당의 텔레그램 불법 성착취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성폭력처벌법 등 6개 법 개정안을 가리킨다. 그러나 법 시행 이후 온라인 성착취 범죄는 더 증가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20년 2047건이던 통신매체 이용 음란 범죄 발생 건수는 2021년 5023건으로 늘었고, 올해는 7월까지만 5937건이 적발됐다.
n번방 방지법의 핵심은 인터넷 사업자의 불법 성착취물 삭제 및 필터링 조치를 의무화하고, 위반 시 형사처벌토록 한 전기통신사업법 및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다. 그러나 사업자의 모니터링·삭제 의무는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 등 공개된 대화방이나 게시판에만 적용된다. ‘사적 대화방까지 모니터링하고 규제하는 건 통신·비밀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의견이 많아 개인 및 단체 대화방은 대상에서 제외됐다. 불법 촬영물 온라인 유통을 모니터링하는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는 “개인 간 사적 대화방에서 발생한 범죄를 조사하는 것은 행정 당국의 역할이 아니라 수사의 영역”이라고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비공개 메신저 대화방을 통한 성착취물 유포는 끊이지 않고 있다. 이달 초에는 2018년 9월∼올해 8월 미성년자 73명을 대상으로 성착취물 1000여 개를 만들어 트위터 다이렉트메시지(DM)를 통해 유포한 현역 육군 장교가 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 텔레그램, 성착취물 삭제·수사 협조 요청 무시
더 큰 문제는 온라인 성착취물이 활발히 유통되는 플랫폼이 해외 메신저 텔레그램이라는 데 있다. 지난달 호주에서 검거된 ‘제2 n번방’ 사건의 유력 용의자(일명 ‘엘’) 역시 2020년 12월부터 올해 8월까지 텔레그램을 통해 지속적으로 미성년자의 성착취물을 유포해 왔다. 텔레그램은 러시아 개발자가 2013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사 등에 대한 정보는 여전히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텔레그램 측은 그간 우리 행정 당국의 불법 촬영물 삭제 요구를 무시해 왔다. 삭제 요구가 제대로 전달됐는지마저도 확실치 않다.
텔레그램에도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과 비슷한 ‘오픈 채널’이 있다. 방통위는 모니터링을 거쳐 텔레그램 오픈 채널에 올라온 불법 촬영물에 대해 삭제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행은 안 되는 실정이다. 방통위 관계자는 “텔레그램은 법인 소재지나 운영 주체가 드러나지 않아 모니터링 결과 등을 고객센터 e메일로 고지하고 있지만 삭제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텔레그램은 우리 수사 당국의 협조 요청에도 묵묵부답이다. 국내 플랫폼은 사적 대화방이라도 검경의 압수수색 등을 통해 증거를 확보하고 수사를 확대할 수 있다. 반면 텔레그램 등 서버를 해외에 둔 메신저는 대화 내용을 확보하려면 사실상 운영사 측의 협조를 받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텔레그램은 우리 당국의 수사 협조 요청에 한 번도 응한 적이 없다.
경찰은 n번방 사건이 터지고 2020년 텔레그램 본사에 조주빈 등 주범의 계정 정보를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회신을 받지 못했다. 경찰은 당시 텔레그램 본사가 있다고 알려진 아랍에미리트(UAE)로 건너간 뒤 인터폴 및 현지 경찰의 도움을 받아 텔레그램 본사 측과 접촉하려 했지만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본사가 있다고 알려졌던 곳에는 텔레그램과 무관한 업체가 영업 중이었다. ‘제2 n번방’ 사건에서도 우리 경찰은 용의자를 추적하기 위해 텔레그램 측의 협조를 받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 “수사력 강화가 현실적 대안”
텔레그램 접속을 금지하는 것도 불가능한 만큼 전문가들은 국내 수사 기관의 수사력을 강화하는 것이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입을 모았다. 경찰 관계자는 “소재도 파악되지 않는 텔레그램의 수사 협조를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했다.
이에 검경이 피의자의 컴퓨터나 휴대전화를 해킹해 범죄 증거를 수집하는 ‘온라인 수색’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온라인 수색이 도입되면 텔레그램 등 해외에 서버를 둔 메신저를 통한 성착취물 범죄도 서버 압수수색 없이 범죄자의 컴퓨터나 휴대전화 등을 통해 직접 범행 증거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온라인 수색의 적법성과 도입 방안에 대한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 이윤호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석좌교수는 “성착취물 범죄는 피해자에게 회복하기 쉽지 않은 피해를 남기고, 미성년자 피해도 많은 만큼 온라인 수색을 도입해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다만 범죄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범죄와 관련 없는 많은 정보가 입수돼 남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신중론도 나온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교수는 “온라인 수색이 도입된다고 해도 디지털 성착취 범죄에 한해 적용돼야 할 것”이라면서 “통신·비밀의 자유 침해 등의 논란이 예상돼 도입에 앞서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젠더법학연구소 역시 지난해 11월 국가인권위원회 의뢰로 작성한 온라인 수색 관련 연구 보고서에서 “온라인 수색 도입으로 침해될 수 있는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붙잡힌 피의자가 휴대전화 잠금을 해제하도록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을 수사 당국에 줘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경찰 관계자는 “호주, 프랑스처럼 피의자가 휴대전화 암호를 푸는 데 협조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했다.
해외 메신저를 단속하기 위해 국제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도 사이버 범죄에 대한 국제 형사사법 공조를 강화하는 ‘부다페스트 협약’ 가입을 서둘러야 한다”며 “국제 공조가 제대로 이뤄진다면 해외 사업자를 대상으로 한 현지 경찰의 수사 결과를 우리가 전달받는 일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했다.
이기욱 기자, 전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