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모악산은 미륵불교의 근본도량인 금산사가 앉은 탯자리이다.
금산사는 진표율사가 변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오랜 고행 끝에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고 중창한 미륵신앙의 절이다.
모악을 더욱 모악이게 하는 것은 민중의 비원(悲願)을 품고 있기 때문이리다. 후백제 견훤, 역성으로 대동세상을 도모한 정여립, 동학농민전쟁의 전봉준, 해원상생(解寃相生)을 주장한 강증산이 모두 모악이 낸 인물들이다.
(금평저수지).
금산사 들머리인 원평마을을 지나면 금평저수지를 만난다. 이 저수지 주변이 흔히 ‘오리알터’라고 불리는 증산사상의 탯자리이다. 증산의 자연관은 요즘의 생태사회주의와 근사한 데가 있다. 그는 풀잎 하나 풀벌레 한 마리에도 신이 깃들어 있다고 보고, 낙태, 비명횡사, 자살 등등 살생적 요인이 질병과 전쟁을 일으킨다고 했다.
‘오리알터’라는 지명은 원래 ‘땅의 중심’으로서 모든 것이 여기로 모인다는 뜻으로, ‘올來터’라 불리던 것이 어느 때부터인가 ‘오리터’ ‘오리알터’로 변했다고 한다. 어원이야 어떻게 되었건간에 금평저수지에는 겨울이면 청둥오리를 비롯해 몇 종의 오리들이 날아와 겨울을 난다.
청둥오리는 겨울이면 전국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겨울철새이다. 개체수에서도 단연 앞선다. 개체수는 단순히 숫자의 많고 적음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이 지구상의 허구많은 새들 가운데 청둥오리가 우리의 고유한 자연환경과 궁합이 가장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단풍 가로수)
오리알터를 지나 금산사까지는 중국단풍 가로수가 길을 안내한다. 중국단풍 가로수는 아마 전국에 이곳 뿐일 것이다. 가을날이면 연노랑 단풍이 꽃처럼 화사하다.
중국단풍은 우리 토종인 신나무와 많이 닮았다. 중국단풍은 나무껍질이 산수유처럼 덕지덕지 일어나는 데 비해 신나무는 껍질이 일어나지 않는다. 둘다 잎이 세 갈래이지만, 중국단풍은 톱날이 없고, 신나무는 잎사귀 가장자리에 톱날이 나 있는 것이 차이점이다.
(미륵당)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는 아스콘으로 포장되어 있다. 시설지구를 지나면 도로 왼쪽 산자락에 문짝도 없는 단칸짜리 당우가 있다. 무속인들이 들고나며 켜 둔 10여개의 촛불이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타고 있다. 내부에 환기창이 없어서 촛불의 그으름이 빠져 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미륵불상에 새까맣게 앉아 잇다. 환기창이라도 하나 뚫어두면 될 일인데, 무관심하게 불상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 미륵의 성지에서 부처님에 대한 대접이 영 말이 아니다.
게다가 촛농이 흘러 화재 위험까지 도사리고 있다. 당우가 산자락에 붙어있어서 만약 화재가 난다면 대형 산불로 번질 위험이 높다. 금산사는 여러 차례 화마가 스치고 지나간 가슴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사부대중은 '오며가며 불조심, 자나깨나 불조심'을 염송처럼 외우고 다닐 일이다.
(견훤산성 성문을 지나)
견훤산성 옛 성문을 지나면 도로 주변으로 김제시에서 야생화학습장, 꽃길, 서구식 잔디공원 등을 조성해놓았다. 섬잣나무, 왕벚나무, 편백, 단풍, 쪽동백, 전나무, 왕버들, 느티나무, 무궁화, 은행나무, 소나무, 배롱나무 등등의 우리 나무들이 눈에 띈다. 대개는 심은 것들이지만, 갈참나무와 졸참나무 등 덩지 좋은 나무들은 자생목으로 보인다.
외래종으로는 메타세콰이어, 히말라야삼나무, 양버즘나무, 삼나무 등등 여러 종이 보인다. 전통사찰에서는 가능한 외래종 조경수를 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찰의 전통성은 이제 자연환경에까지 그 범주를 넓혀서 생각할 때이다.
(일주문 공사에 부쳐)
요즘 절에 가보면 절반 정도는 크고 작은 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큰 절은 아예 365일 내내 포크레인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금산사도 그 중 하나이다. 오는 날이 장날이었던지, 일주문 안 다섯 곳에서 동시에 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관광객 발길 뜸한 겨울을 택해서 한꺼번에 해치우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겨울산사의 호젓함과 적막함이 좋아서 찾아온 이들에게는 공사장 소음이 영 죽을 맛일 게다.
금산사는 옛날에 지은 일주문이 아무 탈 없이 잘 있는데 그것을 헐어내고 2배 규모의 웅장한 일주문을 다시 세우고 있다. 어른 두 사람이 덤벼들어도 껴안을 수 없을 정도의 기둥은 그 굵기만으로도 외국에서 들여온 나무임을 쉽게 짐작케 한다.
금산사 뿐만 아니다. 근래들어 굳이 외국 나무로 일주문을 세우려는 까닭은 오로지 스님들의 물량적 욕심 때문이다. 옛 조사들은 그 산중에서 나는 나무들로만 당우를 건사했음을 환경 차원에서 한번쯤 되새겨봄직도 하건만-. 욕심을 감당하지 못하면 그게 모두 업보가 된다는 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아니던가.
(경내 조경수들)
물소리 맑은 해탈교를 건너면 금강문-천왕문-보제루로 이어진다. 보제루를 지나 드넓은 마당 오른쪽으로는 미륵전, 가운데는 대적광전, 왼쪽으로는 대장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 마당 한 가운데 반송처럼 옆으로 퍼진 와송(臥松)이 청일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와송은 이름과 달리 잣나무이다. 누운 잣나무는 이곳 말고도 설악산 봉정암에 한 그루가 더 있다.
이 잣나무에는 애달픈 사연 하나가 깃들어 있다. 나라 안팎이 어지럽던 한말, 금광(金鑛)에 눈 먼 채굴꾼들이 금산사 경내까지 덤벼들어 채광(採鑛)하려고 했다. 이에 주지였던 용명당(龍溟堂)각민(覺民)대사가 소매를 걷어부치고 나서 사찰 경내 채광에 대한 금지령을 이끌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2년 겨울 이맘때 노다지에 눈 먼 꾼들이 금산사로 모여들어 난리를 피웠다. 그 과정에서 불량한 꾼들의 행패로 대사가 이 잣나무 아래에서 57세의 나이로 입적하고 만 것이었다. 사찰의 수행환경을 지키기 위한 최초의 순교였던 것이다.
잣나무 말고도 경내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있는 듯 없는 듯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밑둥이 찢어진 불구의 몸으로 부처님을 시봉하고 있는 미륵전 앞 늙은 산사나무, 나이 들어 갈 수록 속을 비우는 조사전 앞의 배롱나무, 늙은 불목하니를 연상케 하는 허리 굽은 감나무, 줄기에 검버섯이 듬성듬성 핀 노장 왕벚나무 등은 파란만장했던 금산사의 근대사를 말없이 보듬고 있는 노거수들이다.
그러나, 육당 최남선이 ‘순교자 용명대사가 지성으로 채집해다 심은 명화기훼(名花奇卉)’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미륵전)
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소실된 후 여러 차례 중창을 걸쳐서 오늘에 이른 건물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현재의 위치가 진표율사 당시 연못에 살던 아홉 마리 용을 항복 받고 세웠다는 그 자리인지는 고증할 길이 없다. 다만, 진표율사가 아홉 마리 용을 항복 받을 때 숯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적이 흥미로운 대목이다.
현대과학이 밝혀내고 있는 숯의 효능은 무궁무진하다. 옛 스님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숯이 가진 해독성을 터득하여 여러 면에서 실용화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방습과 방충과 방부를 위해 해인사 장경각 흙바닥에 소금과 함께 숯을 깐 것이다.
뿐만 아니다. 숯을 그 연못에 묻은 후 그 물로 목욕을 한 뒤 문둥병을 치료했다는 전설도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다. 숯의 수질정화기능은 장을 담글 때 숯을 넣는 옛 풍습에서보터 오늘날 정수기 필터에 이르기까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바이다.
미륵전 연못의 숯 전설은 숯의 고학을 바탕으로 한 친환경적 설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미륵전 기둥과 벽체)
미륵전 기둥들은 다듬지 않은 느티나무들이다. 그 자연성은 금강역사의 팔뚝을 연상케 한다. 절집의 오랜 건축물일 수록 자연성이 많이 살아있다. 옛 스님들은 굽고 휘어진 나무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건축의 자연성은 나무를 나무로 대접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요즘 지은 절집에는 휘어진 기둥이나 굽은 서까래를 볼 수가 없다. 나무를 나무로 보지 않고 단순한 목재(木材)로만 보기 때문이다.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금산사 흙벽체에 관광객들이 긁어놓은 낙서들이 사방 벽면에 빼곡하다. 우리 국민은 문화를 향유하기엔 아직 멀었다. 먹고 살만해졌다고 해서 국민들의 문화수준도 덩달아 올라가는 게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장이다.
(송대)
미륵전 옆 송대(松臺)는 사리탑과 오층석탑이 있는 계단(戒壇)이다. 송대는 경내에서 조경미가 가장 두드러진 곳이다. 늙은 소나무와 회나무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그 뒤로 활엽수들이 큰 키를 재며 봉긋이 우거져 있다. 특히 잎들을 다 떨군 활엽수들이 만들어 내는 숲은 ‘비움의 미학’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보제루에서부터 송계 계단 위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위치를 바꿔가며 바라보는 눈맛은 아무나 즐기는 것이 아니다.
(송대 영지)
송대로 오르는 석단 아래 조그만 연지가 있다. 연꽃을 띄우지 않은 걸 보면 ‘영지(影池)’가 제 이름임이 분명하다. 이 영지의 존재 이유는 주변의 풍광을 거울 같은 수면 위에 여여히 비춰보이는 데 있다. 영지는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미륵전의 아름다운 자태와 송대의 겨울숲 등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만, 연지에 풀어놓은 비단잉어들이 그 아름다운 물속 그림을 심술궂게 지우고 다니는 것이 유감이다. 옛 스님들이 사찰의 전통 영지에 굳이 물고기들을 풀어놓지 않는 까닭을 잘 말해주고 있다.
송대의 석단에는 눈향나무를 빙 둘러 심어놓았다. 세월이 좀 지나면 멋진 모습들을 보여줄 것이다.
(대장전 뒷숲)
삼성각 뒤로 가면 널찍한 빈 터가 골짜기로 이어져 있다. 거기 삼나무와 편백들이 어울려 숲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쓰레기 하치장 같은 주위 환경 때문에 도무지 낯이 나질 않는다.
대장전 뒤로는 왕대숲이 그윽하고, 왕대숲속에 직박구리 소리 요란하다. 직박구리는 금산사 주변의 조류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텃새이다. 겨울철 경내외에서 볼 수 있는 조류로는 박새류를 비롯하여 황조롱이, 큰오색딱다구리, 물까마귀, 어치, 산솔새, 붉은머리오목눈이 등이 있다.
(모악산 원경)
경내를 나오면 계곡을 따라 모악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나 있다. 날 보란 듯이 길손들의 눈길을 탐하던 가을날 한때의 들꽃도 쓰러지고, 동학군처럼 붉은 함성을 토하던 가을단풍도 지상에 쓰러지고... 초겨울 바람만 스산하니 불고 있다.
진표율사와 예덕왕사 탑이 있는 부도전 앞 쯤에서 오른쪽으로는 청룡사 가는 길이 나 있고, 왼쪽으로는 심원암 가는 길이 열려있다.
‘... 수선화 같은 것이 연해 발끝에 걸리는 것은 벌써 커진 무릇이었다. 제물에 쌉쌀한 미각(味覺)이 돌아서 봄 정조(情調)가 입속으로부터 생긴다. 감나무 오동나무 틈으로하여 냇가로 한참 내려가니, 큰 비석이 거머우뚝 서있는 것은 고려 혜덕왕사탑의 명(銘)이었다’
해방 전 육당 최남선이 어느 해 봄날 전주에서 산을 넘어 바로 이 산길로 금산사를 다녀갔다. 그 때 남긴 글 속의 꽃나무들은 계절의 끄트머리에서 쓰러지고 눈에 띄질 않는다.
부도전에서 심원암 가는 길 주변은 소나무, 참나무류, 쪽동백, 신나무, 층층나무, 팥배나무, 아그배나무 등등의 혼효림이 자리하고, 그 가장자리로 잣나무, 삼나무, 편백 등의 식재림이 군데군데 작은 숲을 만들고 있다.
아그배나무는 주로 중부 이북에 자라는 낙엽 지는 작은 교목이다. 열매의 모양이 작은 배를 연상케 한다고 해서 ‘아기배나무’라고도 부른다. 아이들이 설익은 아그배 열매를 따먹고 <아이구 배야!>하며 뒹군다고 아그배가 되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5월 중순에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 꽃이 짧은 가지에너댓송이 달리며, 꽃이 떨어진 자리에서 열매가 나서 가을에 붉은색으로 익는다.
(모악정)
다시 만난 갈림길에서는 모악정으로 가는 눌연계곡(訥然溪谷)과 심원사길이 갈라진다. 눌연계곡은 굴곡이 심하고 물흐름이 더디어서 물소리가 마치 말을 더듬거리는 것 같다고 해서 ‘말더듬거릴 訥’자를 썼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갈수기인데도 물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수량이 결코 적은 편은 아니다. 게다가 1급수 어종인 버들치가 갈림길에서 1킬로미터 위쪽까지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나쁜 환경만은 아니다. 그저 죽은 듯이 묵선에 빠져있던 겨울산도 가랑잎 하나 바스락거림에도 온몸을 뒤척인다.
(야생차밭)
심원암으로 가다보면 왼쪽으로 야생차밭이 자리하고 있다. 함부로 들어가서 차잎을 따면 혼을 내주겠다는 금산사의 경고판이 서 있다. 차나무는 난대성 늘푸른나무로, 모악산 이북으로는 자생지가 없다. 야생차나무는 키가 작아서 다른 나무들이 잎을 떨군 다음에야 비로소 한껏 태양을 마신다. 그래서 겨울에도 잎에 윤기가 반지르 흐른다.
(심원암)
심원암 가는 길은 외줄기이다. 어디나 암자로 가는 외길은 그 길 끝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듯한 까닭 없는 기대감 같은 것으로 늘 부풀게 한다. 심원암(深源庵)은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함께 건립한 암자이다. 지금의 암자는 원래의 자리에서 2백여미터 아래로 내려온 것이다.
조선 영조 때 제1의 대강백으로 손꼽히던 환성 지안대사가 심원암에 머물며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연 적이 있었다. 팔도에서 1천 4백 명의 대중들이 몰려들었다. 설법을 얼마나 잘 했는지, 하루는 그 소문을 듣고 신중(神衆)이 법회를 찾아왔다. 법당 안을 들여다보던 신중이 말했다.
‘큰 스님이 누군가 했더니 이제 보니 부처님 영산회상 당시 자벌레였구만 !’
(모악의 포유류)
심원암 뜰앞 감나무에 감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다. 어치와 직박구리가 삼동을 날 양식이다. 아랫마을에서 올라온 멧새 몇 마리가 관목숲 사이를 옮겨다니고 있다.
심원암 뒤로 정상으로 이어진 등산로가 나 있다. 그 길은 등산객들보다 모악산 멧돼지들이 다니는 나들목이다. 심원암 스님은 요 며칠 사이에도 몇 마리의 멧돼지 가족들이 지나다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모악산의 포유동물로는 이 밖에 삵, 오소리, 너구리, 노루, 고라니, 멧토끼, 고슴도치, 대륙족제비 등이 서식하고 있다. 1999년도 환경부 조사에서는 담비와 수달까지 보고된 바 있으나, 그 후 조사에서는 보고되지 않아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했거나 멸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야생동물들은 대개 야행성이기 때문에 생태조사가 쉽지 않다. 그래서 발견된 사체(死體)나 족적(足跡)이나 배설물 도는 보금자리 등으로 서식을 파악한다. 그리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탐문을 한 결과를 보조자료로 삼는다.
(정상 송신탑)
모악정을 지나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는 필요 이상으로 폭이 넓다. 군데군데 훼손이 심하다.
모악의 정상에 자리한 송신탑을 둘러싸고 전주, 김제, 완주의 시민들과 환경단체들이 요즘 뻔질나게 머리를 맞대고 있다. 모악산 정상 주변에 어지럽게 세워진 방송 3사와 한국통신의 송신탑들을 다른 데로 옮기라는 주장이다. 여러 가지 문제가 얼키고 설켜 있지만, 송신탑 이전 문제는 결국 토지소유자인 금산사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으고 있는 실정이다.
(청룡사 가는 길)
아까 지나온 부도전 갈림길로 다시 내려와 청룡사를 찾아간다. 아스콘을 깐 지 얼마 되지 않은 포장길이 사과밭을 끼고 쭈욱 나 있다. 그러나, 그 길 끝간 곳에 자리한 청룡사 말고는 마을도 없는데, 굳이 2차선 포장길을 낸 것이 좀은 의아스럽다 싶었는데, 그것이 임도라고 한다. 마침 김제시 산림조합에서 나와서 소나무, 조팝나무, 느티나무 등을 도로변에 심고 있다.
(소나무 군락)
청룡사를 향해 가다보면 왼편으로 잘 가꾸어진 솔밭을 볼 수 있다. 모악산에서는 소나무와 참나무의 자리가 뒤바뀌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른 지역의 식생분포와 달리 모악산의 소나무는 주로 중턱 아래쪽에 모여있다.
소나무나 잣나무는 추위에 강하기 때문에 겨울에도 푸르다. 이들은 숨구멍이 오목해서 마치 마스크를 한 것 같고, 아울러 숨구멍 수가 적어서 활엽수보다 물의 증발이 적다. 따라서 몸의 열을 빼앗기는 양도 적다. 또, 추위로부터 잎을 보호하는 물질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그러나, 날씨가 춥다고 성장을 아주 멈춘 것은 아니다. 나이테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오히려 겨울 나이테가 더 단단하다.
(참나무 군락)
멀리 모악산 능선이 달리고 있다. 능선에 줄지어 늘어선 참나무숲의 모습이 마치 싸리 울타리같다. 그 아래 사면은 신갈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상수리 등 온통 참나무숲으로 뒤덮혀 있다. 6백미터를 기준으로 위쪽으로는 신갈나무가 위세를 떨치고, 그 아래로는 굴참과 졸참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호연지기의 상징인 소나무는 오히려 그 아래쪽 능선과 개울가에 모여있다.
모악산 지질은 쥐라기(2억 1천만년-1억 4천만년 전)때 형성된 편마상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겉에서 보기에는 토심 깊은 육산 같아보이지만, 한겹 표토를 걷어내면 암맥이 금방 드러난다. 특히 경사지역은 표심이 얕아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쓰러진 나무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그리고, 김제(金堤), 금산(金山), 금구(金溝), 금천(金川) 등등 모악산 주변의 지명에 쇠 ‘金’자가 많이 들어 간 것도 모악산의 지질상에 나타나는 합금석영맥(合金石英脈) 때문이다. 과거에 이 지역에서 사금(砂金)이 많이 생산되고, 현재도 주변산에 광산들이 많이 있다. 따라서 <금산사지>(金映遂 편찬)에 나오는 ‘엄뫼=큰뫼=큰산=금산’ 지명유래설은 전개상 무리가 있어 보인다.
(청룡사 붉가시나무)
대웅전 옆에 붉가시나무 몇 그루가 튼실하게 자랐다. 붉가시나무는 주로 남도지역에 자생하는 난대수종이다. 이곳 붉가시나무는 비록 자생은 아니지만, 관리를 잘 해서 조경에 한몫을 하고 있다. 붉가시나무는 사철 푸른나무로, 절집의 조경수로 부족함이 없다. 김제와 포항을 잇는 영호남지역의 절집에서는 노지(露地) 월동도 가능하다.
(청룡사 임도)
요즘 청룡사는 임도(林道) 개설공사로 어수선하다. 임도는 임산물을 실어내거나 산불 진화 등을 위해 만든 길이지만, 최근들어 지자체의 무분별한 임도 개설로 많은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청룡사 주변 임도도 예외가 아니다.
경사지를 절개하여 물리적으로 낸 임도는 그만큼 산사태와 침식의 위험이 높다. 현재 임도가 대웅전 위쪽 직선거리 5~10미터 위치에서 지나가고 있어서 집중폭우 때 산사태가 일어나면 토사가 대웅전 지붕 위를 덮칠 위험이 상당히 높다.
임도의 시멘트 배수로는 지표수가 지하로 스며드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아 물을 다른 곳으로 빼돌리기 때문에 청룡사 주변의 지하수 체계에 심각한 변화를 줄 수도 있다. 또, 집중호우로 흘러내린 토사가 배수로를 막게 되면 빗물이 임도를 넘어 청룡사 경내로 쏟아져 들어올 위험도 없지 않다.
그리고, 또 안타까운 것은 임도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청룡사 주변의 30~50년생 나무들을 너무 많이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통)
금산사는 행정상으로는 김제시에 속하지만, 교통은 전주에서 가는 것이 더 수월하고 빠르다.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려 도보 5분 거리인 금암광장 정류장으로 가면 금산사 가는 버스가 20분마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