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건국과 경기도
1. 경기(京畿)의 의미
경(京)은 나라의 도읍이 되는 경도(京都)를 말하고, 기(畿)는 경도의 주변지역을 말한다. 사전(辭典)적 의미로 보면 경(京)은 높은 언덕(高丘)을 말하는데, 이는 인위적으로 높게 만든 곳이라는 뜻으로 자연적인 구능인 구(丘)와는 구분된다. 따라서 경이란 국왕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높게 만든 곳을 뜻하는 것이다.
경도(京都), 경사(京師)는 경(京)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이에 대하여 왕경(王京) 밖 5백리 이내의 땅을 기(畿)라 한다. 따라서 기내(畿內)는 경의 사방 5백리 땅을 말하며 기전(畿甸) 기보(畿輔)라고도 불리운다.
물론 한국은 중국에 비해 땅이 넓지 않고 지체도 다르기 때문에 꼭 5백리 이내의 땅을 기(畿)라고 할 수는 없다. 중국제도를 받아 들이되 실정에 맞게 크기를 조정하여 적절한 주변의 군현을 기(畿)로 책정했다.
한양(漢陽)은 조선의 수도였다. 고구려 때에는 이곳을 남평양(南平壤)이라 했고 신라 진흥왕때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라 했으며 뒤에 한주(漢州)라고 개칭하기도 했다.
983년(고려 성종 2)에는 이 지역을 양주(楊州)라 하여 12목(十二牧)의 하나로 정했고, 995년(고려 성종 14)에는 해주(海州)와 함께 개경(開京)의 좌우이보(左右二輔) 중 하나가 되었다. 그 후 경기에 6 적현(赤縣)과 7 기현(畿縣)을 두었는데, 여기에서 적현이란 경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성부사와 장단현령(長端縣令)이 각각 나누어서 관할했다. 즉 개성현(開城縣)이 정주(貞州)‧덕수(德水)‧강음(江陰) 3현을, 장단현이 송림(松林)‧임진(臨陣)‧토산(兎山)‧임강(臨江)‧적성(積城)‧파평(坡平)‧마전(麻田)을 각각 관할한 것이다. 이는 당육전(唐六典)의 在城內曰京縣 城外曰畿縣이라는 제도를 본딴 것이다.
고려 문종때에는 경기 주현을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누어 전시과(田柴科)의 과전(科田)을 지급하는 대상지로 삼았다. 경기의 관할 구역이 과전지급을 위해 대폭 확대된 것이다. 1069년(고려 문종 23)에 확대된 경기의 군현명은 다음과 같다.
개성‧정주‧덕수‧강음‧장단‧송림‧임진‧임강‧적성‧파평‧마전‧한양‧사주(沙州)․교하‧고봉(高奉)‧풍양(豊壤)‧심악(深岳)‧행주‧해주‧견주(見州)‧포주(抱州)‧봉성(奉城)‧김포‧양주‧부평‧동성(童城)‧석천(石泉)‧황조(荒調)‧황어(黃魚)‧부원(富原)‧과천‧인주(仁州)‧금천(衿川)‧남양‧수안(守安)‧영흥(永興)‧토산‧안협(安峽)‧승령(僧領)‧철원‧연안‧백두(百州)‧평주(平州)‧협주(俠州)‧신은(新恩)‧두봉(斗峯)‧통진‧안주(安州)‧봉주(鳳州)‧서흥(瑞興)
이 때의 경기는 1018년(고려 현종 9)의 경기 12현보다 19현이 늘어난 41현이다. 양광도(楊廣道)에서 한양 등 20현, 교주도(交州道)에서 인주 등 11현, 서해도(西海道)에서 연안등 10현이 경기에 포함된 것이다. 이것은 이전에 지방에 있어서 통제 불능이었던 과전을 중앙에 모아 관리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자 한 조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취지가 1271년(원종 12) 2월에 제정된 녹과전제(祿科田制)에서 사전경기원칙(私田京畿原則)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사전경기의 원칙은 1391년(공양왕 3) 5월에 제정된 과전법(科田法)에도 계승되었다. 그리고 1394년(조선 태조 3)에는 경기도를 좌‧우도로 나누어 확대했다. 과전지급을 위해서였다. 경기 좌‧우도의 관할 군현은 다음과 같다.
좌도: 장단‧파평‧견주‧사주‧포주‧풍양‧서원‧행주‧심악(深岳)‧한양‧부원‧과주‧철원‧영평‧ 승령‧삭령(朔寧)‧적성(赤城)‧임강‧마전‧송림‧연천‧고봉‧교하‧금주‧양천(陽川)‧남양 ‧안산‧인천‧토산‧안협(30현)
우도: 개성‧강음․해풍‧백주‧안안‧평주‧재령‧강화‧진강(鎭江)‧하음(河陰)‧교동‧서흥‧우봉(牛峯)‧신은(新恩)‧협계(俠溪)‧수안(受安)‧곡주(谷州)‧부평‧동성‧통진‧수안‧김포‧덕수(23현)
좌도는 장단을 중심으로 강원도‧충청도의 한강 중류 지역을, 우도는 개성을 중심으로 서해도의 한강중류 지역과 강화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한강 및 임진강 유역의 경기‧황해 평야가 경기도로 설정된 셈이다. 이때(1394년)의 경기에 강화도가 포함된 것이 1069년(고려 문종 23)의 경기 구역과 다른 점이다.
그러나 강화도는 서해안 경비의 요충지였으므로 이곳에는 과전 보다는 군자전(軍資田)을 두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1409년(태종 9) 1월에는 강화도와 교동에 있던 과전을 철폐하여 육지로 옮기게 했다.
그 뒤에도 경기의 관할 구역은 소폭적으로 개편되었다. 1399년(태조 8)에는 충청도 진위현을 경기좌도에, 1402년(태종 2) 8월에는 경기우도의 백주‧연안‧강음‧우봉‧토산 등 5현을 풍해도에 이속시키는 대신 충청도의 여흥(驪興)‧음죽(陰竹)‧양지(陽지)‧안성(安城)‧양성(陽城)등 5현과 강원도의 가평현을 경기좌도에 이속시키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1434년(세종 16) 11월에는 경기좌도에 있던 철원과 안협에 강무장(講武場)을 설치하기 위해 이를 강원도에 이속시키는 한편 충청도의 죽산(竹山)을 경기좌도에 편입시켰다.
고려시대부터 8도(八道) 양계(兩界) 체제가 확립되어 도에는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또 양계(兩界 : 北界‧西界)에는 도순문사(都巡問使)를 두고 계수관(界首官)을 매개로 하여 통치했다. 조선에서는 이 제도를 이어 받아 1393년(태조2) 11월 8도의 계수관을 새로 지정했다.
경상도: 계림(鷄林)‧안동(安東)‧상주(尙州)‧김해(金海)‧경산(慶山)
전라도: 완산(完山)‧나주(羅州)‧광주(光州)
양광도(충청도): 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수원(水原)
교주강릉도(강원도): 원주(原州)‧회양(懷陽)‧춘주(春州)‧강릉(江陵)‧삼척(三陟)
서해도(풍해도): 황주(黃州)‧해주(海州)
경기좌도: 한양(漢陽)‧철원(鐵原)
경기우도: 연안(延安)‧부평(富平)
1395년(태조 4)에 양광도는 충청도로, 서해도는 풍해도(황해도)로, 강릉교주도는 강원도로 개칭되었고, 1413년(태종 13)에는 서북면(西北面)을 평안도로, 동북면을 영길도(永吉道)로 개칭했으며 1414년(태종 14)에는 경기좌‧우도를 경기도로 합칭했다. 경기도의 치소(治所)는 수원에서 광주(廣州)로, 충청도의 치소는 청주에서 공주로, 전라도의 치소는 전주, 경상도의 치소는 경주에서 상주로, 강원도의 치소는 원주, 풍해도의 치소는 황주에서 해주로, 평안도의 치소는 평양, 함길도의 치소는 함흥에서 영흥으로 옮겨졌다.
국초에는 한양의 배도(陪都: 왕실을 호위하는 도시)로 고려의 서울이었던 개경(開京)과 태조의 고향인 전주(全州) 등을 정하였으며, 여기에 유수부(留守府)를 두고 유수(留守)를 파견했다. 뒤에는 개성‧강화‧수원‧광주 4도(四都)에 유수부를 두게 되었다.
고려초기에는 개경(開京)‧동경(東京;경주)‧서경(西京;평양)을 3경(三京)이라 했으나, 동경이 멀다고 하여 빼고 남경(南京;한양)을 포함시켜 국왕이 순수(巡守)했다.
2. 한양천도(漢陽遷都)
이성계(李成桂)는 1392년(공양왕 4) 7월 17일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했다. 즉위는 했으나 권지국사(權知國事)로서 국정을 장악했을 뿐, 국호를 그대로 고려로 했고 의장법제(儀章法制)도 그대로 인습했다.
당시 개경은 구귀족의 소굴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왕조 건국과정에서 정몽주‧이색‧김진양‧이숭인‧이종학 등의 중신들과 우왕‧창왕 등 왕씨들을 많이 죽인 곳이어서 민심이 뒤숭숭했다. 그리하여 심기일전(心機一轉)의 방법으로 천도(遷都)를 검토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이 동원되기도 했는데, 개경은 지덕(地德)이 쇠하여 새로운 도읍지를 정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었다. 신왕조가 개창되면 신도(新都)를 건설하여 민심을 일신(一新)하는 것은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다.
그리하여 1392년(태조 1) 8월 13일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하교하여 새로운 도읍지를 물색하도록 하고 15일에는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 이이(李怡)를 한양(漢陽)에 보내어 궁실을 개수하게 했다. 한양은 이미 고려 문종‧인종조에 남경(南京)으로 지정되어 국왕이 순수한 바 있었고 공민왕 때에는 이곳에 궁궐을 개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393년(태조 2) 1월에 하삼도(下三道)의 태실고증사(胎室考證使) 권중화(權仲和)가 계룡산(鷄龍山)이 신도로서 적합하다 하여 도읍도(都邑圖)를 올리자, 태조가 직접 영삼사사(領三司事) 안종원(安宗源)‧우시중(右侍中)‧김사형(金士衡)‧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지란(李之蘭)‧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등을 대동하고 이곳을 직접 답사했다. 이때 회암사(檜岩寺)에 있던 자초(自超; 無學)도 데리고 갔다. 이들은 2월에 신도읍지를 살펴보고 궁궐등 형세도(形勢圖)를 작성하고 돌아온 뒤, 김주(金湊)등을 보내 신도건설에 착수하게 했다.
계룡산에 신도건설을 추진하는 도중에 경기감사(京畿監司) 하륜(河崙)이 이곳이 반도의 남쪽에 치우쳐 있고 지세도 좋지 않다는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는 호순신(湖舜臣)의 지리서에 “水破長生 衰敗立至”라는 구절을 들어 “산(山)은 건방(乾方; 西北)에서 나오고 물(水)은 손방(巽方; 南方)에서 흐르는 것”이 그러한 징조라고 설파했다. 권중화‧정도전도 이에 동조하여 결국은 공사가 진행된지 10개월만에 심효생(沈孝生)을 보내어 공사를 중단하게 했다.
하륜은 계룡산 대신 한양의 무악(毋岳)을 신도후보지로 추천했다. 그리하여 태조는 하륜으로 하여금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되어 있는 풍수지리서를 검토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운관원인 유한우(劉旱雨)등이 반대했다. 이들은 개경 동쪽에 있는 불일사(佛日寺)와 선점(鐥店; 미상)을 신도읍지로 추천했다. 그런데 도평의사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394년(태조 3) 7월에는 권중화‧정도전‧하륜 등에게 음양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을 설치하게 하고 태조가 직접 무악(毋岳)을 답사했으나 역시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유한우는 송도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좋다했고, 서운관원 윤신달(尹莘達)은 개경(開京)의 부소산(扶蘇山)을 첫째로, 남경(한양)을 다음 후보지로 추천했다.
태조는 신도물색이 지지부진하자 크게 노했다. 이에 태조는 한양에 직접 머물면서 지금의 경복궁(景福宮) 뒷쪽 산기슭을 간심했는데, 자초(自超)도 이곳에 정도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하륜의 반대로 다시 양원식(楊元植)이 추천한 적성군(積城郡) 광실원(廣實院)과 민중리(閔中理)가 추천한 장단 도라산(都羅山)을 돌아보았으나,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은 먼저 본 경복궁 뒤쪽을 도읍처로 결정하게 되었다. 처음에 자초는 지금 청와대 뒤쪽 인왕산(仁旺山)에 동향(東向)으로 도읍을 정하면 백악(白岳)과 남산(南山)이 좌청룡(左靑龍)‧우백호(右白虎)가 되어 좋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하여 다스렸지 동향(東向)하여 다스렸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반대하고 자기는 지리서는 잘 모르지만 이곳은 너무 좁으니 조금 더 내려가 경복궁터를 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자초는 지금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2백년이 지나 내 말이 생각날 것이라 했는데 이는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을 예언 한 것이라 한다.
신라의 중 의상(義湘)의 ꡔ산수비기ꡕ(山水秘記)에는 “도읍을 택하는 자가 중〔僧〕의 말을 들으면 왕조가 조금 편안히 온존할 수 있으나 정(鄭)씨가 나와서 시비(是非)하면 5세(五世)가 안가서 찬탈(簒奪)의 화가 있고 겨우 200년이 지나면 난리가 날 것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한다.
이는 의상이 800년 뒤의 일을 미리 안 것으로 중은 무학(無學)이요,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은 정도전을 말한다는 야사가 전한다.
그러나 결국 새도읍지는 정도전의 주장대로 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지기(地氣)가 쇠한 개경을 떠나고 싶은 태조는 구 한양부의 객관(客館; 지금의 돈의동(敦義洞)의 객사)을 이궁(離宮)으로 삼아 머물면서 그해 11월에 궁묘(宮廟)‧성곽(城郭)의 조성을 명했다. 이에 공작국(工作局)을 두어 공사를 진행했는데, 그 뒤에도 무악(毋岳)을 다시 돌아보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하니 신도를 정하는데 있어서의 설왕설래(說往說來)는 쉽게 끝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 후에는 신도건설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12월 3일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에게 명해 황천후토(皇天后土)에게 공사의 시작을 고하게 하고,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김입견(金立堅)을 보내어 산천(山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게 한 후 정식으로 공사를 개시했다. 인민의 노고를 줄이기 위해 1345(태조 4) 정월에 승도(僧徒)를 모집하여 공역에 투입하였고, 7월에는 기호(畿湖)의 민정(民丁) 1만 5천명을 징발, 궁궐공사에 투입하여 결국 이달에 대묘(大廟)와 신궁(新宮)의 낙성을 보았다. 신궁은 경복궁(景福宮)으로 총 390여간이었다. 주위는 1,813 보(步), 높이 21척(尺) 1촌(寸)의 담장을 두루고, 동쪽에 건춘문(建春門)을 건설했다. 이 궁궐 관아의 명칭이나 문의 이름은 모두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또한 도성건축도감(都城建築都監)을 설치하여 정도전으로 하여금 성터를 정하게 하고 경상‧전라‧강원도 및 서북면의 안주(安州)이남, 동북면의 함주(咸州)이남 민정 118,070인을 징발하고 다시 강원‧경상‧전라도민 79,000인을 동원하여 전장 59,500척(尺)의 도성을 완공했다. 도성은 북쪽으로 백악(白岳), 동쪽으로 낙타산(駱駝山), 서쪽으로 인왕산, 남쪽으로 남산(南山)에 이르는 석성(石城)이었다. 그리고 도성의 8방(八方)에 성문을 설치했는데 정북(正北)에는 숙청문(肅淸門), 동북에는 홍화문(弘化門: 1511년, 중종 6년에 惠化門으로 고쳤는데 속칭 東小門), 동쪽에는 흥인문(興仁門; 속칭 東大門), 동남에는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혹은 南小門, 남쪽에는 숭예문(崇禮門; 속칭 南大門), 서남에는 소덕문(昭德門; 뒤에 昭義門으로 고침), 서쪽에는 돈의문(敦義門; 속칭 서대문, 처음에는 社稷洞 서쪽에 있던 것을 세종때 지금 서대문터로 옮김), 서북에는 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이라 했다.
성내(城內)에는 5부(部) 52방(坊)을 두었는데, 동부 12방, 남부 11방, 서부 11방, 북부 10방, 중부 8방이 있었다.
동부 : 연희‧숭교‧천달‧창선‧진덕‧건성‧서운‧연화‧숭신‧인창‧관덕‧흥성(12방)
남부 : 광통‧호현‧명례‧대평‧훈도‧성명‧낙선‧정심‧명철‧성신‧예성(11방)
서부 : 영견‧인달‧적선‧여경‧인지‧황화‧취현‧양생‧신화‧반석‧반송(11방)
북부 : 광산․양덕‧가회․안국‧관광‧진정‧순화‧명통‧준수‧의통(10방)
중부 : 정선‧경행‧관인‧수진‧징청‧장통‧서린‧견평(8방)
성 외에는 성저십리(城底十里)를 두었는데 동쪽으로 양주 송계원, 서쪽으로 양화도‧고양의 덕수원, 남쪽으로 한강 노량도(露梁渡)에 이르렀다.
5부의 방(坊) 밑에는 동(洞)이 있었고 성저십리(城底十里)의 밑에는 리(里)가 있었다. 성저십리는 5부의 소속이나 편제는 달랐다. 5부에는 관령(管領)이 46명 있었다.
1398년(태조 7) 8월에 태조가 병이 난 것을 기회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세자인 방석(芳碩)과 그 형인 방번(芳蕃), 또 그 당여인 정도전‧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등이 제거되고 태조의 둘째 아들인 방과(芳果)가 왕위에 올라 정종(定宗; 당시에는 靖安君)이 되었다. 정종은 동기간의 살육전이 벌어졌던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천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태조가 달가워하지 않아 우선 관아의 절반을 개경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리고 1월 13일에 정종은 개경 수창궁(壽昌宮)으로 이어(移御)했다. 군신들도 개경으로 옮겨가는 것을 좋아했다. 재이(災異)가 자주일어나는 것도 핑계가 되었다.
그러나 개경으로 옮겨간 지 1년만에 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은 박포(朴苞)가 방간(芳幹)을 꼬드겨 1,400년(정종 2) 1월 31일에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으로 박포는 죽임을 당했고 방간은 토산(兎山)으로 귀양갔다. 그리고 정종은 자신의 사병(私兵)을 방간에 보내어 난을 도운 죄가 있었기 때문에 방원을 세자로 삼았다가 그해 11월에 방원에게 양위(讓位)할 수 밖에 없었다.
1402년(태종 2) 7월에는 양경제(兩京制)를 채택하고 이궁설치도감(離宮設置都監)을 두어 한양에 이궁(離宮)을 경영했는데, 1404년(태종 4) 9월 태조가 한양천도를 주장하자 다음해 10월에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다음 달인 1400년 12월에 수창궁(壽昌宮)에 화재가 나는 등 천재지변이 계속 일어난 것도 천도의 계기가 되었다.
이 때에 하륜은 ꡔ동방비기ꡕ(東方秘記)를 들어 다시 무악(毋岳)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으나 태종은 유학자로서 미신을 배격해야 한다고 하면서 부왕이 정한 한양으로 천도했다. 종묘(宗廟)‧사직(社稷)이 한양에 그대로 있었던 것도 천도의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태조의 뜻이 한양신도에 있었다는 것이 태종으로 하여금 천도를 결심하게 하는 중요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때 태종은 본궁인 경복궁(景福宮)을 두고 이궁(離宮)인 창덕궁(昌德宮)을 새로 지었다. 태종은 처음에 연화방(蓮花坊)에 있는 조준(趙浚)의 집에 머물다가 10월 9일에 창덕궁이 완공되자 20일에 이곳으로 이어(移御)했다. 경복궁이 서정궐(西正闕)이라면 창덕궁은 동별궁(東別宮)으로서 118간(間)이었다. 경복궁은 고려 숙종때부터 남경의 옛 궁궐이 있던 곳이고, 창덕궁은 공민왕때부터 한양 궁궐이 있던 곳이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고려시대부터 궁궐터로 지정되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3. 한성부와 경기도의 제도 및 시설
한성부〔京〕에는 경복궁(景福宮)‧창경궁(昌慶宮)‧종묘(宗廟)‧사직(社稷) 등의 왕실 관계 시설과 의정부‧육조를 비롯한 80여개의 관아(官衙), 도성(都城), 개천(開川; 청계천) 등이 있었다. 이것은 한양천도의 일환으로 설치된 것이었다.
한성부에는 경관직(京官職)인 판윤(判尹; 정 2품)‧좌윤(左尹; 종 2품)‧우윤(右尹; 종 2품)‧서윤(庶尹; 종 4품)‧판관(判官; 종 5품) 각 1인을 두었다. 한성부 관아는 도성 안에 두었다.
고려시대 수도인 개성부(開城府)에도 경관직(京官職)인 유수(留守; 종 2품)을 두었다. 유수는 개성뿐 아니라 국초에는 이성계의 본관(本貫)인 전주(全州)에도 두었으나 조선중기 이후에 전주는 폐지하고 개성․강화‧수원‧광주(廣州) 4곳으로 확정했다.
경기도는 1390년(공양왕 2)에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누어 과전(科田) 지급대상자로 확대했다가 1402년(태종2)에 좌‧우도를 다시 합쳐 하나의 도(道)로 삼고 관찰사(觀察使; 종 2품)‧도사(都事; 종 5품) 각 1인을 두었는데, 그 감영(監營)은 서대문 밖에 있었다. 관찰사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겸하고 감영 소재지의 부윤(府尹) 또는 목사(牧使)를 겸했다. 경기도는 특히 국도가 있는 곳이어서 국방요충지인 평안‧함경도 등과 함께 정 2품 관원이 임명되기도 했다. 도사(都事; 종 5품)는 도의 관리들에 대한 감찰을 담당했으며 청환(淸宦)으로 처주었다.
관찰사영에는 그 이외에도 숭의전(崇義田) 감(監; 종 5품) 1원, 판관(判官; 종 5품) 5원, 찰방(察訪; 종 6품) 3원, 교수(敎授; 종 6품) 11원, 훈도(訓導; 종 9품) 26원, 심약(審藥; 종 9품) 1원, 검률(檢律; 종 9품) 1원, 역승(驛丞; 종 9품) 3원, 도승(渡丞; 종 9품) 7원을 두었다. 그런데 판관‧찰방‧교수‧훈도‧심약‧검률‧역승‧도승은 모두 월급을 받지 않는 무록관(無祿官)이었다. 향리는 외아전(外衙前)이라고도 하는데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방(房)의 6방(六房)의 일을 맡아 보았다. 이들 중 이방‧호방‧형방의 수리(首吏)를 3공형(三公兄)이라 하고, 그 중에서도 호방의 수석인 호장(戶長)은 수령 부재시에 수령의 직무를 대행했다. 향리의 밑에 가리(假吏; 書員)가 있어서 실제적인 이속(吏속)의 각종 업무를 맡는 색(色)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수령의 심부름을 하는 천인출신의 통인(通印)이 있었다.
군사의 속료(屬僚)로서 군사‧겸찰업무를 담당하는 군교(軍校)가 있었고 그 예하에 천인출신의 사령(使令; 皂隸‧日守‧羅將‧軍奴)이 있었다. 이들 사령은 소읍(小邑)의 군사‧경찰업무를 맡았다.
또한 이서(吏胥) 외에 관노비(官奴婢)가 있어 각종 잡무를 맡았는데 급창(及唱)‧고직(庫直)‧구종(驅從)‧방자(房子)‧기생(妓生)‧수급(水汲) 등이 그들이다.
아전(衙前; 吏屬)은 작청(作廳)에서, 군교(軍校)는 무청(武廳)에서 근무했는데, 이는 지방 자치기관인 향청(鄕廳)과 아울러 3청을 이룬다.
관찰사는 한 곳에 머물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년에 두 차례씩 예하 수령(守令)들의 근만(勤慢)을 감찰하기 위하여 순행(巡行)해야 했다.
경기도의 수령은 정 3품인 목사(牧使) 4원(廣州‧驪州‧城州‧楊州), 종 3품인 도호부사(都護府使) 7원(水原․江華․富平․南陽․利川․仁川․長端), 종 4품인 군수(郡守) 7원(楊根․豊德․安山․朔寧․安城․麻田․高陽), 종 5품인 현령(縣令) 5원(龍仁‧振威‧永平‧陽川‧金浦 ), 종 6품인 현감(縣監) 14원(砥平‧抱川‧積城‧果川‧衿川‧喬洞‧通津‧交河‧連川‧陰竹‧陽城‧陽智 ‧加平‧竹山)등 57원이 있었다.
판관(判官)은 좌도와 우도에 수운판관(水雲判官)이 있었고 광주(廣州)‧여주(驪州)‧수원(水原)에 각 1원이 배당되었다. 경기도의 수운판관은 충청‧전라 양도에 해운판관(海運判官)을 둔 것과 구별된다.
주(州)‧부(府)‧군(郡)‧현(縣)에는 향교(鄕校)를 하나씩 의무적으로 설치하고 학교교육을 일으키는 것을 수령 7사(守令七事)의 하나로 넣어 고과성적(告課成績)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게 했다. 수령 7사란 존심인서(存心仁恕)‧행기염근(行己廉謹)‧봉행조령(奉行朝令)‧권과농상(勸課農桑)‧수명학교(修明學校)‧부역균평(賦役均平) 등인데, 이중 수명학교가 여기에 해당한다. 1읍(邑) 1향교(鄕校)를 원칙으로 했으나 ꡔ경국대전ꡕ에 경기도 57군현중 교수 14원, 훈도 26원 합계 40원의 교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17개 군에는 아직 향교가 없거나 교관이 배치되지 않았던 것을 알수 있다. 향교의 학생 정원은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에는 90, 도호부 70, 군 50, 현 30인이었으며, 16세이하는 정원 내에 들지 않았다.
군현(郡縣)의 밑에는 면(面) 또는 사(社)‧방(坊)이 있는데, 권농관(勸農官)‧면임(面任)‧방수(坊首)‧방장(坊長)‧관령(管領)․사장(社長)‧검독(檢督)‧도평(都平) 등이 다스렸으며, 그 밑에는 동(洞) 또는 이(里)‧촌(村)이 있고 풍헌(風憲)‧집강(執綱)‧약정(約正)‧이정장(里正長)‧존위(尊位)‧약수(約首)‧동수(洞首)‧동장(洞長)‧리정(里正)‧두민(頭民)‧좌상(坐上)‧영좌(領坐)‧풍수(風首)등이 다스렸다.
리(里)‧방(坊)에서는 5가작통(五家作統)을 실시하였는데, 5호(五戶)를 1통(一統)으로 하여 통주(統主)를 두었다. 지방에는 5통을 리(里)로 하고, 몇 개의 리를 합쳐 면으로 삼아 권농관(勸農官)을 두었으며, 서울에는 매 방(坊)에 관령(管領)을 두게 되어 있었다. 면에는 동‧서‧남‧북면을 기초로 하고 고유명칭을 부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군․현마다 향촌 자치기구인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의 유향소(留鄕所)를 두어 서울에 있는 경재소(京在所)의 지휘 하에 인물의 천거와 지방교화를 담당하도록 했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사심관(事審官)의 유제(遺制)이다. 유향소에는 경재소에서 임명하는 좌수(座首)와 별감(別監)이 있었는데, 수령을 보좌하고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자치를 수행하는 역할을 했다. 유향소를 중심으로 향약(鄕約)을 실시하기도 했다.
반면에 향리들은 서울에 경저리(京邸吏; 營主人)를 두어 군현과 감영(監營)을 위한 연락과 정보수집을 하도록 했다.
각 군현에는 공적인 경비를 위한 아록전(衙祿田)과 공수전(公須田), 관둔전(官屯田) 등 늠전(廩田)과 제사경비에 필요한 제전(祭田), 향교운영을 위한 학전(學田) 등이 지급되었다.
아록전은 수령 및 예하 관원들의 급록(給祿)을 위해 주부에 50결(結), 군현에 40결, 참(站)에 5결, 원주(院主)에게는 대로(大路) 1결 50부, 중로(中路) 90부, 소로(小路) 45부, 도(渡)에는 8결 (津夫에게는 大渡 10결 50부, 中渡 7결, 小渡 3결 50부), 수릉군(守陵軍)에게는 매 1명마다 2결, 수부(水夫)에게는 매 1명마다 1결 35부, 빙부(氷夫)에게는 매 1명마다 1결을 주었다. 공수전은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에 15결(沿路는 大路 10결, 中路 5결을 더 줌), 역(驛)에는 대로 20결(황해도는 25결을 더 주고 兩界는 10결을 더 줌), 역장(驛長) 2결, 부역장(副驛長) 1결 50부, 급주전(急走田)은 50부, 대마(大馬) 7결, 중마(中馬) 5결 50부, 소마(小馬) 4결(緊路에는 急走田 50부를, 대마에 1결, 중‧소마에 50부씩을 더 줌)을 주었다. 관둔전은 주진에 20결, 거진에 10결, 제진에 5결,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에 각 20결, 현과 역에 각 12결을 주었으며 국둔전(國屯田)은 소재지의 진수군(鎭守軍)이 경작하게 했다. 마전(麻田)의 고려 태조‧현종‧문종‧충경왕(忠敬王)등 4왕을 모시는 숭의전(崇義殿)에는 제전(祭田) 2결을 주었다.
향교의 학전(學田)은 유수부에 50결, 대도호부‧목에 40결, 도호부에 30결, 도호부에 25결, 군에 15결, 현에 10결씩을 주었으며 향교노비는 유수관에 20호(戶), 대호부‧목에 15호, 도호부에 10호, 군에 7호, 현에 5호씩을 주었다.
군사조직은 중앙의 경우 3군(三軍) 체제에서 5위(五衛) 체제로 바뀌었는데, 한성부‧개성부‧경기는 5위(義興衛‧龍驤衛‧虎賁衛‧忠虎衛‧忠武衛)중 의흥위에 편제되어 있었다. 의흥위는 갑사(甲士) 17,500인와 보충대(補充隊; 無定數)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번상군(番上軍)이었다. 5위는 국방군이라기 보다는 정치보위군(政治保衛軍)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중앙군 5위 이외에 지방에는 육군인 육수군(陸守軍)과 수군인 기선군(騎船軍)이 있었는데, 그 중 육수군은 영진군(營鎭軍)과 수성군(守城軍)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방군은 중앙의 통제를 받기도 하지만 직접적으로는 지방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지휘를 받았다. 병사와 수사는 관찰사가 겸대했으며 각 도에 몇 개의 거진(巨鎭)을 두고 인근의 제진(諸鎭)을 중‧좌‧우익(中‧左‧右翼)으로 편제하여 지휘하게 했다. 이를 진관체제(鎭管体制)라 한다. 경기도에는 병사 1원을 두었는데 관찰사가 겸대했다. 관찰사가 겸대하는 병사나 수사 이외에 국방상의 요충지에 독진(獨鎭)을 두어 전임 병사나 수사가 지휘하게 했다. 경기도의 육군 진관(鎭管)은 광주(廣州)‧수원(水原)‧양주(楊州)‧장단(長湍)등 4곳에 있었으며, 수군 진관은 월곳(月㖜; 江華)에 있었다. 그리고 경기도의 독진으로는 남양(南陽)‧화양진(花楊津)‧교동(喬洞) 등이 있었다. 그러나 1555년(명종10)에 을묘왜변(乙卯倭변)이 일어나자 진관체제를 폐지하고 제승방략(制勝方略)체제로 전환했다.
군사와 교통에 긴요한 시설로서 역원(譯院)과 도로(道路), 봉수(烽燧) 등이 있었다.
경기도의 역에는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을 두었고 수십 개의 역을 하나의 도(道)로 삼아 찰방(察訪; 종 6품), 역승(驛丞; 종 9품)이 관장하게 했다. 경기도에는 영서도(迎曙道)‧양재도(良才道)‧평구도(平丘道; 迎華道라고도 함)‧중림도(重林道)‧경안도(慶安道)‧도원도(桃原道)가 있었고 요충지에 역(驛)‧관(館)과 원(院)‧참(站)을 두었다. 그리고 경기도의 도(渡)에는 벽란도(碧瀾渡 - 예성강)‧한강도(漢江渡 - 한강)‧임진도(臨津渡 - 임진강)‧노량도(鷺梁渡 - 한강)‧낙하도(洛河渡 - 임진강)‧삼전도(三田渡 - 한강)‧양화도(楊花渡 - 한강) 등이 있었고, 거기에 도승(渡丞; 종 9품)을 두어 관리하게 했다.
도로는 ꡔ경국대전ꡕ에 다음과 같이 규정 되어 있다.
1) 경도(京都) - 개성(開城) - 중화(中和) - 의주(義州)
2) 경도(京都) - 죽산(竹山) ꠆ 상주(尙州) - 동래(東萊)
ꠌ 진천(鎭川) - 성주(星州) - 통영(統營)
3) 경도(京都) - 직산(稷山) - 공주(公州) - 전주(全州) - 진주(晉州)
4) 경도(京都) - 포천(抱川) - 회양(淮陽) - 경흥(慶興)
5) 경도(京都) - 양근(楊根) - 강화(江華)
ꠌꠏꠏꠏꠏꠏ대로(大路)ꠏꠏꠏꠏꠏꠎ ꠌꠏꠏꠏꠏꠏ중로(中路)ꠏꠏꠏꠏꠏꠎ
대로와 중로 이외는 소로에 해당하며 대로는 원주(院主) 5호(戶), 중로는 3호, 소로는 2호를 정해 잡역(雜役)을 면제해 주었다.
봉수(烽燧)는 다음과 같은 다섯 길이 있었다.
1) 동북면 지역 - 북청(北靑) 석이(石耳) -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 - 한성(漢城) 목멱산(木覓山)
2) 동래(東來) 부산진(釜山鎭) - 충주(忠州) 망이산(望夷山) - 광주(廣州) 천임산(天臨山) - 한성(漢城) 목멱산(木覓山)
3)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 - 의주(義州) 통군정(統軍亭) - 개성(開城) 송악산(松嶽山) - 한성 목멱산
4) 의주 고정주(古정州) - 평양(平壤) 불곡(佛谷) - 개성 송악산 - 한성 무악서봉(毋岳西峯) - 한성 목멱산 (의주 - 해안 - 한성)
5) 순천(順天) 방답진(防踏鎭) - 진도(鎭島) 여귀산(女貴山) - 옥구(沃溝) 화산(花山) - 양성(陽城) 괴태곶(塊苔串) - 교동(喬洞) 규산(圭山) - 양천(陽川) 개화산(開花山) - 한성 목멱산
봉수는 변경의 적군의 침입을 긴급하게 알리는 통신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擧火), 밤에는 횃불을 들어 릴레이식으로 봉수대(烽燧臺)가 있는 산봉우리를 통해 서울의 남산까지 알리는 제도였다. 평시에는 횃불하나, 적이 나타나면 횃불 둘, 적이 변경에 접근하면 횃불 셋, 적이 변경을 침입하면 횃불 넷, 적과 전투가 벌어지면 횃불 다섯을 올리게 되어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구름이 많이 끼면 봉수군(烽燧軍)이 직접 달려가 역(驛)을 통해 알렸다. 봉수의 주요선(主要線)을 직봉(直烽)이라 하였고, 그 이외의 보조선(補助線)은 간봉(間烽)이라 했다. 봉수는 모두 경기도를 거쳐 한성 목멱산(木覓山)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봉수가 부실해지고 역은 공물운반에 치중하게 되자 주요도로에 파발막(擺撥幕)을 설치하게 되었다. 각 파발막에는 6-7명의 파발군이 있어 연락 업무를 담당했다. 조선시대 파발막은 다음과 같다.
서발(西撥; 서울 - 의주)
북발(北撥; 서울 - 경흥)
남발(南撥: 서울 - 동래)
세곡(稅穀)을 실어 나르는 데는 해로로 실어 나르는 조운(漕運)과 육로로 실어 나르는 육운(陸運)이 있었다. 전라도의 세곡은 호남의 법성창(法城倉)으로부터 태안반도의 안흥양(安興梁)을 거쳐 한강의 용산창(龍山倉)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고, 경상도의 세곡은 낙동강을 거쳐 죽령(竹嶺)‧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 가흥창(可興倉; 일명 可金倉)에 모았다가 남한강을 거쳐 한성 용산창으로 오게 되어 있었다. 강원도의 세곡은 대관령(大關嶺)을 지고 넘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 조선후기에는 돈이나 베(布)로 대납하게 하기도 했다. 서북‧동북면의 세곡은 국방을 위해 독립 채산으로 하여 운송하지 않았다. 경기도는 과전(科田)‧공신전(功臣田) 등에 충당했기 때문에 전주(田主)가 직접 수세(收稅)했다. 교통이 불편한 곳은 세납자가 직접 납부하게 했다. 세곡도 결국 경기도를 거쳐 서울의 용산창에 집결하게 되어 있었다. 경기도의 수운판관(水運判官)이나 전라‧충청도의 해운 판관(海運判官)은 세곡 운송을 담당하는 관료였다.
초시(初試)인 향시(鄕試)는 도별로 인원이 배정되어 있었다. 한성부의 초시는 한성시(漢城試)라 했다. 문과초시(文科初試)는 한성시에 40인, 경기도에 20인이 배정되어 있었으며,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의 초시는 한성시에 200인, 경기도에 생원‧진사 각 60인이 배정되어 있었다. 초시에 합격한 사람은 예조에서 실시하는 복시(覆試)와 임금 앞에서 보는 전시(殿試)에 차례로 응시하게 되어 있었다. 경기 향시는 뒤에 한성시에 통합되었다.
경기도는 수도에 가까운 만큼 능묘(陵墓)가 많았다. 우선 조선 왕릉의 소재지를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조선왕릉 일람표
첫댓글 봉화정씨는 저의 본관이고 저희종씨들의 모임터인 카페에 올라온 글중 괜찮(정말이까?)은 표제가 뵈길래 옮겨다 놉니다. 워낙 길어서.....좀그렇긴 하지만..근데 횐님들 죄다 귀성들은 하셨는지 궁금 합니다.간단히 한잔 어떨지요?
읽다보면 참을인(仁)字가 왜이리도 많을까? 구중궁궐에서 너무도 무지허게스리 참고 견뎠다는 야그가 아날런지...이또한 궁금함니다.....(대조동집에서 뒷방을 지키며)
역시 뒷방 늙은이 다우신...늘 안녕하시지요? 대조동 뒷방에서 저도 한잔 같이 할수 있었으면...이번에는 정말 졸지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