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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시사 스크랩 근대식 건물이 있는 덕수궁 -1
심메마니 추천 0 조회 60 08.09.26 12: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덕수궁 - 1편 ]

 

 

덕수궁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한양으로 환도하였으나 백성들에 의해 궁궐들이 모두 불태워진 바람에 머무를 궁이 없어서 겨우 정릉동에 위치하고 있는 월산대군(月山大君) 의 집에 임시 행궁을 마련하였다. 그 뒤를 이은 제 15대 왕 광해군은 창덕궁 복구공사 가 마무리될 때까지 이 곳에 머물다가 광해군 3년(1611) 10월에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이때 이 행궁을 경운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광해군은 그 해 12월에 다시 경운궁으로 옮 겨 7년(1615) 4월에 창덕궁으로 이어하기까지 이 곳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에 경운궁은 처음으로 궁다운 체모를 갖추게 되었다

 

 - 【 덕수궁 자취 】

 

  임진왜란 때 모든 궁궐이 불타,

    1593년 선조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댁인 이곳을 행궁으로 사용

 

 □ 광해군이 1608년에 이곳에서 즉위,

    1611년 경운궁 이라 이름하여 정식 왕궁으로 삼음

 

 □ 1615년 광해군이 정궁을 창덕궁으로 옮겨 별궁이 됨

 

 □ 1623년 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이곳 즉조당에서 즉위

 

 □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옮겨와 다시 정궁이 됨

 

 □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여 황궁이 됨

 

 □ 1907년 양위받은 순종이 창덕궁을 정궁으로 삼아,

    고종상황이 머무는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바꿔 오늘에 이름

 

 □ 1919년 고종,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

 

 

 

 ⓒ 2008 삼공&샘데디

 

▲  입장권과 안내서

 

 

 

 

 

구분 시간
매표 및 입장시간 09:00 ~ 20:00
퇴장시간 09:00 ~ 21:00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입니다.
일반권
개인 대인(만18세 이상) 1,000원
소인(만7~18세) 500원
단체 대인(20인 이상) 800원
소인(10인 이상) 400원
무료 o 6세 이하 어린이
o 65세 이상 어르신
o 장애인(3급 이상은 보호자 1인 동반)
o 국가유공자
o 5·18유공자
o 상이군경
o 휴업토요일에 한해 소인 무료(매월 둘째, 넷째 토요일)
특별권
구분 이용시간 관람요금 비고
상시관람권 한달 중 언제나 09:00~18:00 10,000원 -구매일로부터 1개월간 사용가능
-사진1매 제출
-구입한 고궁만 입장가능
점심시간관람권 3개월간 점심시간 중에만 12:00~14:00 3,000원 -구매일로부터 3개월간 사용가능
-구입한 고궁만 입장 가능
시간제관람권 1년간 점심시간 중에만 12:00~13:00 30,000원 -구매일로부터 1년간 사용가능
-덕수궁, 창경궁, 종묘
100,000원 -구매일로부터 1년간 사용가능
-덕수궁, 창경궁, 종묘, 경복궁,14개능
 입장가능
-동반1인 무료
덕수궁미술관은 덕수궁의 관람권을 구입하시고, 미술관에서 별도의 관람권을 구입하셔야합니다.
모유수유실이 필요하신 분은 덕수궁사무실이나 정문에 상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관람규칙
학생단체 관람시 7일전 사전예약(인터넷예약, 선착순에 의한 일일 1,000명 인원 제한)
관람객은 궁내에서 식사를 할 수 없음.
사생대회 및 글짓기 행사 금지
애완동물·운동기구·놀이기구 등 반입금지
웨딩촬영은 토·일·공휴일을 제외한 평일만 가능(인터넷 예약)
수목 열매 채취금지
지정장소외 흡연 및 관람분위기 저해행위 금지
브로슈어를 미리 인쇄하여 읽고 오시면 관람에 훨씬 도움이 됩니다.
CCTV 설치

덕수궁관리소에서는 문화재훼손, 도난예방, 시설안전 및 화재예방을 위하여 경내에 CCTV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 2008 삼공&샘데디

▲ 대한문

 

 

 

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으로써 고종 때 그의 비서승인 유시만의 건의에 의해 개명되었다.
대한문은 궁궐 정문 치고는 드문 단층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 지붕은 우진각으로 지어졌다. 대한문의 현판은 당시 예조판서와 한성판윤을 역임하였던 남정철의 글씨이다.

 

 

 ⓒ 2008 삼공&샘데디

▲ 금천교

 

 

 

이 돌다리는 대한문에서 중화전으로 가기 전에 통과해야 하는 다리이다. 궁궐을 드나드는 모두가 맑고 바른 마음으로 나랏일을 살피라는뜻으로 건너게 했다. 사람들은 대한문을 들어오면서 이 다리에 대한 의식을 별로 가지지 않고 통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2008 삼공&샘데디

▲ 금천교에서 중화문으로 가는길

 

 

 

 ⓒ 2008 삼공&샘데디

▲ 중화문

 

 

 

중화전 앞에 커다란 문 하나가 외로이 서있는데 이 문이 중화전의 정문인 중화문(中和門)이다. 중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광무 6년(1902) 7월 7일에 정초(주춧돌을 놓음)하고 7월17일에 입주하고 8월12일에 상량(집을 지을때, 기둥에 보를 얹고 위에 마룻대를 올림)하였다. 그것이 1908년에 불에 탔다. 중화전과 함께 소실되어서 중화전이 단층으로 복구될 때 중화문도 단층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중화문은 1960년대에 중수되면서 보완되었는데 2층이던 것을 1층을 하자니 나약해 보였던지 지나치게 지붕을 크게 만들어 건축적으로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원래 중화문 좌우에는 행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오른쪽 끝부분에 약간의 형태만을 가지고 남아 있다.  ⓒ Daum신지식

 

 

 ⓒ 2008 삼공&샘데디

▲ 중화전

 

 

 

즉위식과 조회를 비롯한 주 행사를 치르는 덕수궁의 정전이다. 본래 중층이었으나 1904년에 불타, 새로 1906년에 단층으로 지었다.

 

 

 ⓒ 2008 삼공&샘데디

▲ 

 

 

 

법전 어귀에서는 다리가 셋이고 귀가 둘 달린 둥근 청동 솥을 보게 되는데, 이를 정이라 한다. 처음에는 흙을 구워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청동으로 만들었고, 주로 고대 종교 의례나 국가의 큰 잔치 때 사용되었던 예식용 그릇 가운데 솥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는데, 중국의 옛 기록에 따르면 천자는 9개의 정, 제후는 7개의 정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 구정(九鼎)은 왕권과 중국의 아홉 개의 주를 상징하며 또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하늘의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상징물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왕권의 상징물로 보여진다.

 

 ⓒ 2008 삼공&샘데디

▲ 중화전

 

 

 ⓒ 2008 삼공&샘데디

▲ 중화전

 

 

중화전 안에 있는 어좌는 부처의 자리와 같이 꾸며 높게 마련한 용상위에 놓는데, 머리 위에는 보개를 두고 포작으로 닫집을 짰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병풍을 쳐서 임금의 권위를 더욱 높이고 있다.

 

 

 ⓒ 2008 삼공&샘데디

▲ 중화전

 

 

 

내부 천장은 화려한 단청으로 시채한 소라반자로서 구성시켰으며 중앙에는 닷집형식으로 꾸몄다. 그 조각은 두 마리의 용이 힘차게 비천하고 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서운을 빈틈없이 배열시켰다. 이 조각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금채 장식의 용과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을 염원하는 서운에 채색된 화려한 단청의장이 돋보인다.

 

 ⓒ 2008 삼공&샘데디

▲ 석조전

 

 

2편에 자세히 설명되어있다.  > 덕수궁 2편 보기

 

 

 ⓒ 2008 삼공&샘데디

▲ 석어당

 

 

 

석어당은 임진왜란 후 선조 임금이 거처하셨던 건물로써 한자를 풀이하더라도 옛날 임금님이 머물렀던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조 임금이 이곳에서 16년간이나 머무시다가 1608년 승하하신 곳이다. 그 후 순종이 황태자 시절에 머물기도 하셨다.
현재의 모습은 1904년 화재 이후 중건된 것이며, 아래층은 정면 8 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인 팔작 지붕의 건물이다. 

 

 ⓒ 2008 삼공&샘데디

▲ 석어당 (흑백으로..)

 

 

 

석어당은 경운궁 내에서 유일한 2층 건물이며, 단청이 입혀져 있지 않아 눈에 띤다. 단청이 입혀지지 않은 것에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선조임금이 임진왜란 이후의 어려운 시기를 보내셨기 때문에 그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기 위해서 칠해지지 않았다고도 하고, 또 유교 사회의 검약을 강조하는 분위기 때문에 단청이 칠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 2008 삼공&샘데디

▲ 덕홍전

 

 

 

고종황제가 외국사신이나 고위 관료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외국세력을 통해 일본의 그늘에서 벗어나 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나 싶다.

 

 ⓒ 2008 삼공&샘데디

▲  덕홍전 내부

 

 

덕홍전은 전기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참고로 우리 나라 최초의 전등은 1887년 경복궁 내 건청궁에 설치된 바 있었다. 일상생활을 하는 곳은 아니므로 바닥을 온돌이 아닌 마루로 되어 있고, 특이하게 정면3칸, 측면 4칸으로서 측면이 정면보다 더 크다는 특징을 지닌다.

 

 ⓒ 2008 삼공&샘데디

▲ 함녕전

 

 

 

덕홍전과 이웃하고 있는 이 전각은 침전의 기능을 하던 곳이었다. 지금의 전각은 19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후 다시 중건한 것이다. 함녕전 앞에는 행랑이 둘러서고 있고 내시나 궁녀가 기거하면서 시중을 들었음을 보여준다. 훼손되기 이전에는 이러한 행랑이 밖에 하나 더 있었는데, 외행랑이라 불렀고 이쪽에 함녕전으로 들어가는 광명문이 있었다. 현재는 미술관 가는 쪽에 자격루, 흥천사종, 신기 전기화차 등을 넣어둔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어서 현재 문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다.

 

 ⓒ 2008 삼공&샘데디

▲ 함녕전과 덕홍전

 

 

 

  

 

함녕전의 행랑담을 보면 덕홍전과의 사이지점에 끝이 좀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곳에 담이 있어

함녕전과 덕홍전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는 증거이다.

 

함녕전 측면을 보면 지붕이 좌우대칭이 아니고 왼쪽의 2칸은 아궁이가 없는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 나중에 2칸을 다시 지었기 때문이다.

 

오른쪽의 아궁이가 1904년 화재의 진원지로서 온돌 수리 후 시험 삼아 불을 땐 것이 화근이었다고 한다.

단 시간 내에 불이 궁궐 전체에 옮겨 붙은 것이나 밤 10시나 된 늦은 시간에 시험 삼아 불을 땐 점 등이 의구심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이곳에서 승하하셨는데, 갑작스런 죽음이었기에 많은 의구심을 품게 했고 이는 장구의 운반일 이었던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 2008 삼공&샘데디

 

 

 

 

 

 

 

 

 

 

 

 

ⓒ 2008 삼공&샘데디

▲ 왕실 가족사진

 

 

 

좌로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기념하여 1918년 1월 21일 찍은 사진이다.

 

 

>  덕수궁 2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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