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려회 회원중 가장 적극적인 분이 11회 이수행선배이다.그는 고 3학년때 1년 꿇어서 12회로 졸업했는데 잘 조정해서 3년전 재경 총동창회장을 역임했다.그때,경기도 별내읍 남동면 "얼굴 박물관"에서 총동창회 모임을 가졌는데 우리 친구들도 많이 참석했고 여간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무리했다.지금은 일산 공원부지 근방에 땅 500여평을 구입해 놓고 정작 본인은 씨만 뿌려놓고 가꾸지를 않아 형수님의 불평이 대단하시다.인생사 모두가 씨를 뿌리기는 쉽지만 가꾸기는 어렵다.
또,12회 김대광 선배는 K.B.S에 계실 때 내가 M.B.C'허위 보도로 곤욕을 치룰 때 직접 나를 데리고 가서"해명기회를 준 고마운 분"이다.얼마전 후배와 같이 한강 파크골프장에서 랑운딩(?)을 '했다.
청산은 그간 직장을 4-5군데 옮기면서 별 다양한 체험을 하다가 주피터 국제결혼사업을 끝으로 임대사업으로 전환하여 자서전과 대필사업을 병행하면서 노후생활을 하고 있다.
14회 남성우 회원은 K.B.S 본부장을 끝으로 은퇴하여 ,한 때 노무현 대통령 시절 K.B.S사장 물망에 올맀으나 박근혜 정부가 들어 서며서 모든 것을 접고 은퇴했다. 어디 그게 맘대로 되는 일인가?함평 나비축제 회장.전남 김치 세계화 사업회장등을 역임하면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일려회원의 모교방문은 K.B.S본부장을 끝으로 몇년전 은퇴하고 귀촌한 14회 남성우 회장의 공이 컸다.현재 그는 함평에 전원 주택을 짓고 여유작작 생활하고 있다.시골 로 가니 회장자리가 맞지 않다고 본인이 극구 사양했지만"이사람아! 일년에 한두번만 모임자리를 만들면 되는데 가끔 서울오는 길에 어디 편한데서 만나면 될게 아닌가?"했는데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할까?그가 지난해 귀촌한 후 누가 말할 것도 없이 모교방문의 방향으로 마음이 모아졌다.
우리 일려회원은 실로 50여년만에 마음의 고향 광주 서중.일고를 방문했다.극히 우연한 계기로 모교를 방문케되었지만,이심전심으로 방문케 된 것 같다.초창기 1970년대 초부터 40년이상 서울에서 만났고 서울근교에 야유회를 자주 다녔지만 모교를 방문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안했다.우연인가?필연인가?이런 것을 신의섭리라고 하나?
K.B.S본부장을 끝으로 몇년전 은퇴한 14회 남성우 회장이 귀촌하여 공이 껐다.한 때 K.B.S 사장자리에까지 물망에 올랐지만 어디 그게 맘대로 되는 일인가?
그는 함평에 전원 주택을 짓고 여유작작 생활하고 있다.시골 로 가니 회장자리가 맞지 않다고 본인이 극구 사양했지만""이사람아! 일년에 한두번만 모임자리를 만들면 되는데 가끔 서울오는 길에 어디 편한데서 만나면 될게 아닌가?"했는데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할까?그가 지난해 귀촌한 후 누가 말할 것도 없이 모교방문의 방향으로 마음이 모아졌다.
우리들은 일단 모교앞 일송정 한식집에서 3.23일 12시에 만나기로 했다.서울에서는 각자 KT.X,고속버스로.승용차로 부부 또는 혼자서 편한대로 갔고,광주시내,고흥에서,함평등지에서 왔다.가는 내내 어릴 적에 소풍가듯 사뭇 들뜨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갔다.가는도중 카톡으로 언제 출발했느냐?어디쯤이냐? 그자체 만으로도 기분이 신선했다.12시에 이르자 모인회원이 부부합해서 15명정도 되었다.
청산이 광주 고속터미날에서 화장실을 가려는데 한 중년여성이 "고석홍씨! 반가와요."하고 불러서 순간 "고향에 오니 옛날 알던 여성을 만나다니.이런 횡재가 있나?"했는데, 왠 걸 9회 김진근 선배의 부인인 레지나 자매가 선배와 같이 온 것이었다.좋다가 말았지만 그것도 기쁨이었다.
우리는 서로 인사와 함께 가벼운 덕담을 나누고 곧 나온 한정식 메뉴에 정신이 빠질 지경이었다인당 25,000원이라는데 고급에다가 귀한 요리가 25가지쯤 되었다. 어떻게 그 가격으로 이렇게 다양하게 나올까하고 항상 궁금했다.그런면에서 광주사람들은 참 복받았다고 생각했다.서울에서는 5-6가지 정도일텐데...우리들은 오랜만에 보는 이 요리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고향의 정취와 벗들과의 만남에 흠뻑 빠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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