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그 좋은 것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거나 흘러가 버린 듯한 씁쓸함을 이 화창한 날씨에 떨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저 스스로도 궁금합니다. 사람 마음이란 본디 아름다운 시기나 좋았던 때가 지나갈 때 감사하기보다는 잡아 두지 못한 안타까움이 앞서는 법인가요? 아니면 이 좋은 때에 저만 행복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숨어 있기라도 한 것일까요? 왜 사람들은 행복한 시간에 굳이 상실의 그림자를 보는 것일까요? 행복한 순간이 흘러가야 또 다른 행복한 순간이 오는 것이 이치일 텐데, 그걸 믿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이러한 생각에 잠시 머물다가 구약 성경 「코헬렛」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행복한 날에는 행복하게 지내라"(7,14). 현자가 이렇게 권고하는 것을 보니 좋은 것을 그늘진 마음 없이 즐기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좋은 것을 누리면서도 기뻐할 줄 몰라서, 행복한 순간에도 그것을 잃을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앞서는 사람들에게 오늘 복음은 더없는 치유제가 될 것입니다. 저도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가는 이 장면을 떠올리며 봄날의 난데없는 서글픈 감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을 보고 있습니다. 아니, 그 만남에 초대되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유다 시골의 소박한 두 여인이 얼마나 기쁨과 감사에 넘쳐 있는지, 그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헤아려 보십시오. 이제, 두 사람의 만남의 순간에 깊이 들어가 봅니다. 화창한 봄날에 느끼는 기분 같은 기쁨이 어떻게 두 사람의 마음에 영원히 간직되는지를 잠시나마 묵상해 보십시오. 좋았던 순간에 매달린 채 사라지는 것을 미리 두려워하는 것과는 다른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길이 어떤 것인지는 한번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자신의 마음을 그 길에 비추어 보십시오.
이 오월의 마지막 날, 아름다운 꽃을 가만히 바라보며 산책하는 우리의 발걸음이 엘리사벳에게 다가가시는 성모님의 발걸음과 닮기를 바랄 뿐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어떤 할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할아버지께서는 젊었을 때 아들딸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하셨다고 해요.
“나는 늙어서 절대로 자식 의지하지 않겠다. 우리들은 우리끼리 잘 살 테니까 너희들도 굳이 연락하려고 들지 말고 스스로 알아서 잘 살아라.”
그래서 자녀들과 함께 살지 않고 부부만 서로 의지하면서 살고 있었지요. 처음에는 좋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외로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찾아오고 전화도 자주 해줬으면 좋겠는데 명절 때 외에는 좀처럼 연락 한 번 하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번은 가족 모임에서 아들이 친척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더래요.
“우리 부모님께서는 우리들 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 자식들에게 절대 의지 않겠다고 또 연락도 하지 말라고 일찌감치 선포하셨다니까요. 뭐 저희야 편하죠.”
이제 와서 “내가 그때는 잘 몰라서 그랬어. 이제는 자주 찾아오고 전화도 자주해라.”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면서,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큰 소리를 치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큰 소리대로 되던가요?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지만, 이 말이 공허한 말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기억하면서, 내가 뱉어내는 말과 하고 있는 행동들 모두에 있어서 겸손함을 잃어서는 안 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겸손함을 마치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겸손하다는 것을 알리려고 하는지 무엇인가를 충분히 할 수 있어도, “저는 못해요.”라고 부정부터 하지요. 그러나 겸손은 무조건적인 부정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겸손은 용기와 짝을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용기를 표현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이런 측면에서 진정으로 겸손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했다는 사실에 교만할 수도 있었지만 엘리사벳을 직접 찾아가는 겸손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자신의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믿는다는 겸손을 표현하시지요.
성모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지위가 높아졌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십니다. 또한 비천한 신분과 위치를 보면서 ‘못 한다’고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있어서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용기를 표현하시기에 진정으로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이 겸손을 우리 역시 배워야 할 것입니다. 괜히 허세만 부리는 모습을 버리고 또 무조건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 역시 버리고, 내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용기를 갖춘 겸손한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