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오카 여행2 - 덴덴무시를 타고 오래된 견고한 고성인 모리오카 성에 오르다!
7월 9일 아오모리에서 하치노헤 를 구경하고는... 신간선으로 이와테 (岩手) 현의 모리오카
盛岡(성강) 에 도착해 "무사도" 의 저자인 니토베 이나조의 동상 을 만나는데, 그는
버클리 대학교,스탠포드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및 제네바 대학교 교수를 역임 했습니다!
러일전쟁 시 일본은 만주 까지 보급선이 길어질 것을 염려한 이토 히로부미 는 러일전쟁 전에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 가네코 겐타로 를 미국에 보내 하버드 대학교 동문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니토베 이나조 의 "무사도" 책을 선물하니, 책을 읽고 일본 무사도 정신에 빠집니다.
일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종전 중재 를 요청하니..... 루스벨트는 러시아와 일본대표를 미국
동부 포츠머스 에 불러 러시아를 윽박질러 "종전협정을 강요" 했던 것이고...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이 공으로 노벨 평화상 을 탔는데, 트럼프도 전쟁을 중재해 노벨상을 노리나 봅니다.
이런 인연으로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지낸 조슈번 출신 가쓰라 다로 총리는
미국 육군 장관 태프트 와 "필리핀은 미국이, 조선은 일본" 이 갈라먹기로 협정하니,
이른바 태프트~가쓰라 밀약 으로 이를 바탕으로 을사보호조약(늑약) 을 체결했던 것이라?
워싱턴시 의 최대 축제는 포토맥 강변 인공 호수를 따라 수천 그루의 벚꽃이 피는 벚꽃축제 인데,
1905년 7월 '가쓰라 - 태프트밀약' 이 맺어졌으니...... 이후 저 윌리엄 태프트가 미국
대통령이 되자 1912년에 일본은 3020 그루의 벚나무 를 워싱턴 포토맥강변에 심었던 것입니다?
동아일보 기사에 보면.... "워싱턴시 당국은 해마다 3월 말에서 4월 초까지 '벚꽃 축제'
를 열어서 관광객을 끌어들인다. 미국은 물론 일본등 전 세계에서 수십만명의
관광객이 몰려들고 워싱턴 관광 수입의 3분의 1 가량을 이 기간에 벌어들인다고 한다."
"포토맥강변 호수를 따라 수천그루 벚꽃이 개화 하면 화려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벚꽃이 피면 미·일 관계의 끈끈함을 과시하는 세미나 가 줄을 잇고 축제를 후원하는 일본
기업의 간판이 곳곳에 들어선다. 벚꽃만큼 화려한 일본의 '소프트 외교' 가 이때 빛을 발한다."
"러일전쟁의 전운(戰雲) 이 짙어져 가던 1904년초 고종은 엄정 중립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선언은 제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자기 고백' 에 불과했다. 러시아의 남하 를
극도로 경계한 영국과 미국은 일본군의 한반도 진입을 용인 했고 결국 러일전쟁 이 발발했다"
" 고종은 이승만 을 미국에 보내 도움을 호소했지만, 미국은 일본과 뒷거래 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았고 1905년 7월 그 유명한 '가쓰라- 태프트밀약' 이 맺어졌다.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용인' 하고, 일본은 필리핀을 미국에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1912년에 일본은 벚나무를 미국 워싱턴 포토맥강변에 옮겨심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이
도쿄에서 밀약을 맺었던 그 '윌리엄 태프트' 였으니 의미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세기가 지나.... 이 벚나무들은 굳건한 미·일 동맹을 상징하는 거목(巨木) 으로 성장했다"
이런 저런 옛날일을 회상하다가 다시 모리오카 도시 순환 버스인 덴덴무시 でんでんむし
를 타고는 本町通1丁目(본정통1정목) 에 내려 거대한 바위 를 신체로
모시는 三石神社 (삼석신사) 라고도 불리는 鬼の手形(귀노수형) 신사 를 찾아 구경합니다.
옛날 미츠이시 신사에서 "악행귀신을 퇴치" 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로 피리와 북소리 장단에
맞추어 미스 산사의 화려한 북 퍼레이드 150여팀 이 행진한 후 와오도리 원무 를 춥니다.
그외에도 모리오카는 가을에는 엔넨노마이 라고 해서 사원을 칭송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춤이 히라이츠미초 동네에서 벌어진다고 합니다.
절을 지나 옆으로 돌아가니 3개의 거대한 바위 를 신체로 모시는 미츠이시
三石神社 라고도 불리는...... 鬼の手形 (귀노수형) 신사 를 발견합니다.
영어로는 Demon's Hand Prints in the Rock 라고 되어 있으니
뜻을 풀이 하자면..... “바위에 난 악마의 손자국” 쯤 될러나?
이와테현 모리오카시의 산사오도리 さんさ踊り 마쓰리는 여기 “미쓰이시 바위 전설” 에서
유래됐으니...... 옛날 모리오카 성 근처에 “라세쓰” 라고 불리는 귀신 이 나타났습니다.
귀신 이 나쁜짓을 하고 다니면서 백성들을 괴롭히자 백성들은.....
미쓰이시 바위 신 에게 귀신을 쫓아 달라고 기원했다고 합니다.
미쓰이시 바위신 은 라세쓰를 잡아서 두번 다시 나쁜 짓을 못하도록 하고 증표로 큰 바위에
손바닥 을 찍게 했고..... 사람들이 이것을 축하하며 바위 주변에서 춤 을 추었다고 합니다.
그때 "귀신이 손바닥 자국" 을 남기며 도망간 것을 사람들이 “산사 산사” 라고
소리치며 축하한데서 유래한다는데... 여기가 바로 그 전설의 현장인가
본데... 바위에 무슨 자국 이 있는 것은 틀림없겠다만 쉽게 찾아지지는 않습니다.
그러고는 신사를 나와 길을 따라 내려와서는 本町通1丁目(본정통일정목) 정류소
에서 기다려서는 다시 시내 순환 버스 인 덴덴무시 でんでんむし 를 탑니다.
덴덴무시 でんでんむし 버스를 타고는 7정거장째인 모리오카성터 공원 에 내리니
해자와 오래된 수목 너머로 거대한 성벽 이 보이는데.... 모리오카번
초대 번주인 난부 도시나오가 1615년에 쌓았다는 동북 일본의 거성 모리오카성 입니다.
모리오카성 으로 들어가니 일본의 여느 성에는 반드시 있는 오래된 신사 를
구경하고는 다시 구부러진 언덕길을 올라 모리오카 성 내부로 들어섭니다.
모리오카한 盛岡藩(성강번) 은 이와테 현 중북부에서 아오모리 현 동부에 걸친 지역에
위치해 있던 에도시대의 번으로 보통은 영주 성을 따서 난부(南部) 번 으로 불립니다.
가이국(야마나시현) 난부향 에 있던 가이 겐지 (甲斐源氏) 가문의 계보를 잇는
난부 가문의 난부 미쓰유키 는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오슈 후지와라씨
정벌 때 세운 공으로 하치노헤 에 상륙하여 난부정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1590년 임진왜란 2년 전에 황윤길등 조선 사신 이 교토에 왔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읍 오오사카성을 비우고 동쪽 호죠씨의 오다와라성 을 공략하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사실상 일본 전국을 제패했는데도 관동 지방에 100여년을 웅거해온 호죠씨 라!
난부 가문 26대 당주인 난부 노부나오 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오다와라 전쟁 에 참전해서
10개 군을 차지한후, 27대 당주 난부 도시나오 南部利直 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
동군으로 참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게 영지를 인정받아 모리오카번 초대 번주 가 됩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 무진전쟁 이 일어나니 일왕(천황) 을 등에 업은 조슈(야마구치현)번
과 사쓰마번(가고시마현) 등 신정부군 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부터 260년을
일본을 통치해온 에도 도쿠가와 막부군 을 공격하는 무진전쟁 내란 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때 일본 동북 지방의 여러 번들은 도쿠가와 가문의 은혜 를 입었던 지라.... 난부번 은
막부 오우에쓰 열번동맹 에 가입하여 메이지 신정부에 저항 하였고, 이 때문에
기존 영지를 몰수 당하고 대신 시로이시성 일대의 13만석 영지로 감축되어 이봉 됩니다.
여기 모리오카성 은 규모가 엄청나게 큰 것이 성 내에도 다시 큰 바위로
내성 을 쌓았는데..... 얼마나 견고한지 혀를 내두를 정도 이네요?
하지만 옛 건물들이야 다 무느졌다고 치더래도 혼마루와 천수각
마저 무느져서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은 아쉽습니다.
일본이 200여개 나라로 난립해 전쟁 으로 날을 지새우던 16세기 센고쿠(전국) 시대
에는 일본에 는 큰 성만해도 1천개 가 있었다지만 전쟁중에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지방의 반란을 예방 하기 위해서 1개 번에
번주가 거처하는 성 하나 를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허물었는데...
메이지유신 후에는 그마저 무느뜨리니 이처럼 흔적만 남은 것이네요?
이후 몇 안남은 성들도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 폭격기 에 의해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간신히 살아남은 몇몇 성들도 현대화 도시 계획 으로 대부분 철거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전쟁과 정책적인 파괴에 화재와 지진을 이겨내고 2차 세계대전에서도
살아남은 천수각을 갖춘 성 은 일본 전체에서 겨우 12개 정도 라고 합니다.
그중에 자태가 아름다우며 보존 상태가 양호한 역사적 가치가 높은 5개 성이 일본 국보
로 지정되었으니.... 마쓰모토성, 히메지성, 히코네성, 이누야마성, 마쓰에성 입니다.
*** 고베 서쪽 히메지성 ***
*** 비와 호수 히코네성 ***
*** 나고야 북쪽 이누야마성 ***
*** 나가노의 마쓰모토성 ***
*** 시마네현의 마쓰에성 ***
도쿄 에도성과 오사카성 이며 나고야성에다가 구마모토성 들이 그 규모는 저 5개 성들
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지만.... 미군 폭격등으로 부서진후 시멘 콘크리트로
재건 되었으니... 옛날 건물 그대로 원형이 아닌지라 이제는 국보가 될수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일본의 기준으로 본다면..... 화재 후에 재건 되었으니 옛 건물은 아니고 게다가 박락현상등
부실공사 논란을 빚고 있는 숭례문(남대문) 의 국보로서의 가치와 지위는 어찌되는 것일러나?
국보 1호를 바꾸자는 논란에 다급해진 탓인지 국보1호, 2호 번호를 없애고 국보로만 부르기로 합니다.
방어를 위해 압구를 갈지자 형 으로 만든데다가 가파른 언덕을 올라 혼마루터
에 이르니....... 정자 가 있기로 올라가 성과 모리오카 시내를 조망합니다.
여기 남부 이상 중위의 동상 이 있는데 동상은 사라지고 좌대 만 남았지만
저 동상의 크기나 예술적 가치로 볼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세히 읽어 보니....... 번주 였던 난부 가문의 42대 당주 인 南部利祥(남부이상) 은 1904년
러일전쟁에 참전해 황족인 竹田宮桓久王(죽전궁환구왕) 을 지키다가 전사 했다고 합니다.
그 공적을 기려서는 1908년에 동상을 세웠는데 1944년 태평양전쟁 당시 구리로
만든 동상은 군에 헌납 했다니..... 총알이나 대포알 만드는데 사용되었을라나?
우리 어머니 말씀 중에 왜정 당시 가정집에 놋쇠로 만든 밥그릇이나 숟가락 도 걷어가고
쌀이나 목화 공출 독촉이 얼마나 심하던지 사람들은 독에 넣어 땅에 파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 순사 를 따라 다니는 조선인 밀정 이 마을마다 다니며 이를 염탐해 땅을
파고는 쌀독 을 찾아내고, 또 밤에 불도 켜지않고 몰래 목화 씨앗 을 빼낼라치면...
.
저 조선인 밀정 들이 마을에 들이닥쳐서 몰래 목화씨를 발라내던 조선 여인 들의
손톱 까지 뽑아버리는 등 악질적인 짓도 서슴치 않았다고 합니다.
국내에 독립운동 지사 들을 잡아들여 잔인하게 고문하고 짓밟은건 부지기수 지요?
1945년 8.15 해방이 되니 저 친일파 밀정 들은 지은죄가 있으니 살기위해 도망 쳤는데...
조선에 진주한 미군 은 사전 준비가 전혀 안된 태평양 주둔군 부대라!!!
중국 주둔 미군이 들어왔으면 협력해 왔던 김구의 광복군 이 국내 치안을 맡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