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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13 7/15 12면 8항 "보십시오.나는 여러분과 항상 함께 있습니다."***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이사 7명 중 4명이 러더퍼드 형제에게 인도하는 역할을 맡기기로 한 결정에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형제들 가운데 분열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1917년 8월에 베델을 떠났습니다.
7/15호 파수대에서는 러셀 사후 있었던 성경 연구생들과의 결별에 대해 간략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76 제78-82면에서 이 사건을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 연76 제78-82면 미합중국 (제1부) ***
‘러더포오드’ 형제가 ‘왙취 타워’ 협회장이 된지 얼마 안되어 곧 실질적인 음모가 나타났다. 아래의 설명과 같이 반역의 씨앗이 심어지고 그후에 고난이 더해지게 되었다.
‘시이. 티이. 러셀’은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에 있는 ‘성경 연구생’을 강화시키기 위해 본부에서 누군가를 파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받기 전에 유대교를 버리고 ‘루터’교 교역자가 되었던 유대인 ‘폴 에스. 엘. 존슨’을 파견하고자 했다. ‘존슨’은 협회의 여행하는 연사로 일하였고 그의 재능으로도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러더포오드’가 회장으로 선출되기 전에 짧은 기간 동안 일한 바 있는 집행 위원회는 ‘러셀’의 의견을 존중해서 ‘존슨’을 영국에 파견하였으며 그 나라에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확실한 신분증명서를 해 주었다. 영국에서 사업에 관해 모든 사실을 알아보고 협회에 온전한 보고를 하는 것이 그의 임무이고 영국 본부의 인사 문제에는 변경을 가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16년 11월 중 영국에서 받은 환영으로 인하여 결국 그의 판단과 그의 생각이 비뚤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에이. 에이치. 맥밀란’이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자기가 예수의 ‘므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청지기’라는 우스꽝스러운 결론에 도달할 지경이 되었다. 후에는 자기가 세상의 대제사장이라고 생각하였다.” 영국 전역에서 ‘성경 연구생’들에게 행한 연설 가운데 ‘존슨’은 자기를 ‘러셀’의 후계자로 자처하였다. ‘엘리야’의 외투(“정복”)가 ‘엘리사’에게 주어졌던 것처럼 ‘패스터 러셀’의 외투가 자기에게 주어졌노라고 주장하였다.—열왕 하 2:11-14.
‘존슨’의 야망은 그 전에 이미 생겨났었음이 분명하다. ‘에디스 케슬러’는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1915년 나는 ‘벧엘’을 떠나 ‘애리조나’로 출발하기 전에 오랫 동안 사귀어온 정다운 한 부부를 방문하였다. 내가 거기 있을 때 그들은 순례자인 ‘피이. 에스. 엘. 존슨’을 개인적으로 대접하고 있었다. ‘사단’은 이미 어떤 방법으로든지 주도권을 쟁취코자 추하고도 음흉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존슨’은 “여러분과 같이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거실로 가실까요?”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을 시작하였다. “자매님, ‘러셀’ 형제가 언젠가는 사망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 때 벗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읍니다. 제가 그 대신 나서서 사업을 결코 중단하지 않고 곧 바로 떠 맡을 수 있읍니다.”
영국에 있는 동안 ‘존슨’은 영국이라는 활동무대를 완전히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런던’ 본부의 어떤 성원들을 쫓아내려는 권한 밖의 일을 하려고 하였다. 너무나 큰 혼란이 생겨났으므로 지부 감독자는 ‘러더포오드’ 형제에게 불만을 호소하였다. 이번에는 ‘러더포오드’가 본부 성원이 아닌 ‘런던’에 있는 몇 형제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그들은 만나서 청취하였으며 사실을 잘 살피고 ‘존슨’의 소환을 추천하였다. ‘러더포오드’는 ‘존슨’에게 돌아올 것을 지시하였다. ‘존슨’은 그에 응하는 대신 위원회가 편파적이라고 비난하고 또한 자기 행로를 정당화하는 편지와 해외 전보들을 보냈다. 그는 영국에서 자기 위치를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굳히기 위해 협회가 자기에게 공급해 준 서류를 부당하게 사용하여 협회 자금을 ‘런던’ 은행에 억류시켰다. 후에 그 돈을 찾기 위해서 법정 소송을 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존슨’은 ‘뉴우요오크’로 돌아 왔는데 그곳에서도 그는 자기를 영국으로 도로 보내 달라고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를 계속 설득하려고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존슨’은 ‘러더포오드’가 그 직책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협회장이 되어야만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이사회에 영향을 주려고 하였다. ‘러더포오드’ 형제가 회장으로 부적합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존슨’은 7명의 이사들 중 4명을 설득하여 자기를 편들게 하였다. 그 의견을 달리하는 네 명의 이사들은 협회장, 부협회장, 총무겸 재무에 대항하였고 회장에게서 집행권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제이. 에프. 러더포오드’는 반대자들과 회합하여 그들에게 이치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에이. 에이치. 맥밀란’은 ‘러더포오드’가 “우리들 몇 사람에게 와서 ‘내가 회장직을 사임하고 반대자들이 책임을 맡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묻기까지 하였다”고 알려 준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모두는 ‘형님, 형님을 현 위치에 두신 분은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사임하거나 물러나는 것은 주께 대한 불충성이 될 것입니다.’고 대답하였다. 더 나아가 사무 요원들은 그 반대자들이 관리하게 된다면 자기들은 물러나겠다고 하였다.”
1917년 장시간에 걸친 협회의 정기총회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4명의 이사는 협회의 내부 규정을 수정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하려 하였다. 그것은 집행권을 이사회의 권한에 두려는 속셈이었다. 그것은 ‘러셀’ 형제가 회장이었을 당시 행해진 조직적인 마련 및 회원들이 원하는 것과는 상치되는 것이었으므로 ‘러더포오드’는 그 동의안을 파기하였고 그러한 계략은 좌절되었다. 그후 반대가 더 심해졌으나 반대자들이 예기치 못한 몇 가지 사태 발전이 있었다.
물론 연감에 나오는 묘사는 지극히 일방적이고 왜곡된 묘사입니다.
다음은 위키백과에 나오는 폴 사무엘 레오 존슨에 관한 내용입니다.
http://en.wikipedia.org/wiki/Paul_S._L._Johnson
폴 사무엘 레오 존슨 (Paul Samuel Leo Johnson) (1873 ~ 1950) [1] = 통칭 "PSL 존슨"은 " 레만 가정 선교 운동 "(Laymen 's Home Missionary Movement) [2] 의 창시자이며, 미국의 성경 연구원 및 목사 였다. 그는 "성경 통찰력 연구"(Epiphany Studies in the Scriptures)이라는 17 권의 신앙 서적을 저작했다. 그리고 대략 1918 년에서 1950 년 그가 사망 할 때까지의 사이에 2 권의 잡지를 간행했다. 이 선교 운동은 펜실베니아 주 체스터 스프링에서 운영하면서 그의 선교의 사명과 저작권의 출판을 거의 달성까지 창작을 계속했습니다.
또한 "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 "(Watchtower Bible and Tract Society)의 설립자 찰스 러셀 (Paster. Charles Taze Russell)과 친교가 있던 인물로 알려진 러셀 사후의 차기 회장으로까지 주목 받고 했다. 하지만 그 조직의 내분과 권력 투쟁에 휘말려 2 기의 회장이었던 조셉 러더 포드 (Joseph Franklin Rutherford)에 의해 일체의 직권을 박탈당한 끝에 1917 년에 조직에서 추방되었다. [3] [4] 다음 러더 포드 그룹 (현재의 '여호와의 증인')는 소매를 나누어 러셀을 옹호하는 '러셀 파'로 세계 각지에서 활약했다.
폴 SL 존슨 은 1873 년 10 월에 펜실베니아 의 티타스비루 (Titusville)라는 마을에서 폴란드 에서 조금 전에 이민 온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히브리어 학자이며, 마침내 티타스비루의 회당 의 회장까지 취임 한 인물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12 살 때 돌아가 또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재혼했다. 이 두 사건이 자신의 고뇌의 원인이되었다. 그는 여러 번 가출을 반복했다.
결국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감리 교회에 가입 하였다.
1890 년, 그는 오하이오 의 콜럼버스 수도 대학 (Capital University of Columbus)에 입학하여 1895 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전 대학 도서관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폴 레비 스키 (Paul Levitsky)라는 이름으로 학적 등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루터교 오하이오 · 시노도 신학교 (Theological Seminary of the Ohio Synod of the Lutheran Church)에 진학 해 1898 년 졸업했다. 단시간이지만 펜실베니아 화성의 루터 교회 에서 목회했다. 그리고, 오하이오 콜럼버스로 돌아가 사리반토 거리 (Sullivant Ave)에있는 세인트 매튜 루터 교회에서 목회했다. 하지만 결국은 고속도로 정비 사업에 의한 도로 건설을 위해 그 회당은 철거되었다. 그는 짧은 기간에 새로운 교회당을 거기에 가까운 장소에 세워,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침례 (세례)를 베풀 게, 루터 교회 시노도 다른 목사들과 비교해 더 소정의 기부금으로 조달하고 있었던 것이 [캐피 톨 대학 시노도 기록에〕 적어졌다. [5]
1903 년 5 월에는 존슨은 자신의 신앙의 변천의 귀결로서 루터 교회를 떠났다. 그리고 " 워치 타워 협회 "(Watchtower Society)의 콜럼버스 회중과 친교를 시작했다. 인가 루터 교회는 나중에 "그 자신의 이설은 워치 타워 협회는 존슨과 단절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진실은 · · · 존슨은 그의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해 워치 타워 협회를 이미 떠나 있었다. 일년 후 어느 날에 찰스 러셀 목사는 국제 성경 연구원의 "순례자"로 존슨을 임명했다. 그는 곧 러셀 목사의 개인 비서를 지냈다. 그 후 그는 러셀의 믿을 수있는 친구와 어드바이저가되었다. 그는 파수대 회장의 교리에 도전 한 데 따른 조직 내부의 저항 운동의 검열의 결과로 1910 년 신경 쇠약에 의해 질병을 입었다.
존슨은 1905 년 1 월 3 일에 엠마 McLeod-(Emma McCloud)와 결혼했지만, 그 아이는 축복 않았다.
존슨은 러셀이 사망 한 후, [6] 조셉 러더 포드 가 조직의 지휘권을 계승 한 때 워치 타워 협회를 떠났다. 그리고 그는 " 레만 가정 선교 운동 "을 1919 년에 창립하고 1920 년부터 그의 사망 1950 년까지이 선교 운동 협의회 지도자를 맡았다. {출처} [7]
사실상 러셀이 임명한 이사들 4명은 폴 사무엘 레오 존슨을 2대 협회장으로 임명하였으나 러더포드는 법적 지위를 이용해 그들을 제명하고 자신이 협회장에 오른 것입니다.
폴 사무엘 레오 존슨은 유대계 학자 출신으로써 성경 연구생의 친유대적 시오니즘에 영향을 준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러셀과 공동으로 저술한 "성막의 실체(Tabernacle Shadows of The Better Sacrifices)" 는 몇년전에 한국어로 번역하였습니다.
만약 이사회의 결정대로 폴 사무엘 레오 존슨이 2대 협회장이 되었다면 현재 여호와의 증인의 모습은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적어도 수혈거부나 병역거부들의 반사회적 교리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폴 사무엘 레오 존슨이 이끌었던 가정 성서 연구 운동은 현재 "베뢰아 성경 연구회"(http://mercyofzion.com/)"등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http://www.bbschurch.org/)
첫댓글 2대 협회장을 러더퍼드가 강제 해임하고 집권했죠~사진은 처음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