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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묵상글 ( 연중 제3주일. - 만족을 찾는 사람과 구원을 찾는 사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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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26 02:56
- 만족을 찾는 사람과 구원을 찾는 사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는 조건을 생각해봤습니다.
첫째, 선포하는 사람 측면에서 생각해봤는데
선포하는 사람이 어떻게 선포해야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까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선포자가 자기 말을 하면
성경 말씀은 애초에 이루어지지 않겠지요.
그런데 성경 말씀을 봉독하는데 어떻게 자기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말을 한다는 것은 선포되는 말은 성경이지만
선포하려고 하는 것과 선포하는 것은 자기 말인 경우입니다.
의도와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의도가 순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한 예입니다.
예를 들어 논쟁할 때 권위자도 자기와 같은 말을 했다는 식으로,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고 하며
자기 말이 성경 말씀이고 성경 말씀이 자기 말이라는 식 말입니다.
또 자기 말을 하려고 함은 아니지만
자기를 돋보이게 하거나 들어내려는 의도가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멋진 강론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칭찬받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나는 없고,
내가 주님이 되어서 또는 내가 주님인 듯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처럼 성령을 받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라는 이사야서 부분을 읽으시는데
이것을 볼 때 성경 말씀은 주님의 영에 의한 선포일 때 이루어지는 것이겠습니다.
둘째,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듣는 사람도 성경 말씀을 듣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아니라 다른 말을 듣는 사람이거나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도
다른 말로 알아듣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 안에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성경 말씀을 듣고 싶어 하고,
들은 다음엔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알아듣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인용한 이사야서를 보면 가난한 사람,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이 그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그렇겠지요.
이들이야말로 하느님 말씀이 간절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만족을 찾는 이들이 아니고 구원을 찾는 이들이고,
구원을 찾는 이라야 하느님 말씀이 간절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만족을 찾는 이들은 굳이 하느님 말씀을 찾지 않을 겁니다.
삼손은 들릴라의 달콤한 말로도 충분히 만족하기에
하느님 말씀을 찾지 않다가 비 구원의 상태에 처했을 때야 찾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만족은 인간에게서도 얻을 수 있고
인간의 만족이 더 달콤하고 자극적입니다.
그래서 오늘 묻습니다.
나는 가난한가? 부유한가?
나는 만족을 찾는 사람인가? 구원을 찾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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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초등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칠 즈음 담임선생님께서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수업을 일찍 마치고 선생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인사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씩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제게는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명연이는 조용하고 집중을 잘하니까 커서 훌륭한 과학자가 될 거야.”
선생님의 이 예언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저는 과학과 전혀 거리가 먼 가톨릭 신부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말씀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마지막이라며 눈물 쏟으며 인사하면서 들었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금도 기억하는 말씀이었지만,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과학보다 신학이 더 좋았고, 세상일보다는 주님 곁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판단한다는 이유로 바뀐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의 판단일 뿐이기에 그렇게 살면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그 사람 삶이 아닌 나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판단에 흔들리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세상의 판단보다 주님의 판단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주님의 판단보다는 세상의 판단을 따르려고 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판단에 흔들리면서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했습니다. 당시 부모의 일을 물려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즉, 예수님도 목수로 사는 것이 당시 세상의 판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시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1,18.19)
그리고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루카 1,21).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오늘, 곧 지금 여기에 하느님께서 주님을 통하여 현존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직접 보고 체험하는 은총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이제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순간, 기뻐하셨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죄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당신의 수난과 죽음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힘차게 선포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하느님 뜻에 따라서 이 세상에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하지만 너무 어렵고 힘들다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또 못 본 척합니다. 그럴수록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 역시 주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세상을 쫓는 길이 아닌, 하느님을 쫓는 길. 이 길을 통해서만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려 있으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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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더 많이 사랑하는 것 외엔 다른 사랑의 치료 약은 없다(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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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6백년 전경에 이스라엘은 암흑기였습니다. 네브가드네사르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백성들은 바빌론으로 유배되어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들의 유배는 단지 나라와 땅만 잃은 것이 아니라 그들 삶의 지주가 되었던 율법과 성전과 사제를 모두 잃어버린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던 중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왕 키루스의 칙령에 의해 유다인들은 이스라엘로 귀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율법에 충실했던 사제 에즈라와 왕의 술 시종관이었던 느헤미아에 의해 성전재건과 종교개혁이 단행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들에 의해 성전이 재건되고, 사제 에즈라에 의해 모세의 율법서가 읽혀지고, 그들이 율법을 통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감격스런 장면입니다. 이처럼, 모세의 율법이 구약시대의 민족공동체의 구심점이었다면, 신약시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백성의 구심점이 됩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1코린 12,12)
우리가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 어떤 차별이 없는 한 형제임을 말합니다. 곧 성령께서는 각자가 고유한 가치를 가지면서도 하나를 이루어 일치를 이루는 풍요로움을 주셨습니다. 곧 서로의 다름은 잘못되었거나 틀렸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차이를 드러낼 뿐이며, 오히려 상호보완과 풍요로움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마치 눈과 손이 서로 필요 없다고 할 수 없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의 지체들을 각각의 용도에 맞게 한 몸 안에 만들어 놓으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걸맞은 품성을 유지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말씀’의 선포를, <제2독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복음>은 말씀의 성취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인 <느헤미아서>에서는 말한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느헤 8,3)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잘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 말씀’으로부터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27)
이처럼,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포하신 “이 성경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메시아에 대한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렸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는 오실 메시아, 곧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될 메시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하자,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거부하고 맞서 돌아섰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왜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다음 주일에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오늘”은 <루카복음> 전체를 통해 일관된 구원의 “오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자렛 성전에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 20)고 선언하시지만, 사실, 그보다 앞서 주님의 천사는 목동들에게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11)“고 선언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 하시고, 십자가에서 도둑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라고 선언하십니다. 곧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에게도 바로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이 시간을 하느님 면전에서 대면해야 할 일입니다. 구원의 때로 말입니다. 베트남의 반 투안 추기경은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손에 쥔 유일한 시간은 지금뿐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의 존재 여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의 재산은 현재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산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규칙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첫 순간이고 마지막 수간이며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은 하느님의 전령입니다.”(171항)
그러니 오늘 우리는 시편작가의 말을 되새겨 봅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시편 95,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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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 때문에 당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당신의 충만한 은총 속에 살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말씀으로 저희를 새롭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영지와 난이 자라는 곳에 절로 길이 생긴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참된 권위와 말씀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권위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위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는지요?
복음은 갈릴래아 나자렛의 회당에 가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읽으셨는데 그 내용은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게 되리라고 선포했던 해방과 구원을 약속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읽으신 후 한마디 덧붙이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결국, 이 약속이 예수님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영과 육으로 가난하고, 묶이고, 눈멀고, 억눌린 사람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은총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억압받는 이들의 구원자이시고, 예언자들이 예고한 바를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하여 성경의 말씀을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히브4,12)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성경 말씀을 통하여 물리치셨고, 말씀 한마디로 악령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라! 해서 그대로 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지혜서에는 “그들을 낫게 해 준 것은 약초나 연고가 아닙니다. 주님, 그것은 모든 사람을 고쳐 주는 당신의 말씀입니다. 당신은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 저승 문으로 내려보내기도 하시고 끌어 올리기도 하십니다” (지혜16,12-13).하고 말씀의 능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맛 들여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가방에 성경을 가지고 다녀라! 틈나는 대로 읽고 말씀에서 힘을 얻으라고 권고하십니다. “성령으로 쓰여진 성경을 성령의 빛 안에서 읽을 때 항상 새로워집니다. 매일 하느님의 말씀으로 길러진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만나는 사람들과 동시대인이 됩니다. 과거에 대한 황량한 향수에 빠지거나 미래에 대한 실체 없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유혹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항상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 안에서 살도록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을 떠오르게 합니다.” “아침에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집을 나선다면 그분은 반드시 그 말씀으로 물든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자주 성경을 읽고,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제가 어느 날 강론을 통해 성경 읽기를 권고하면서 ‘눈이 안 좋아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이 있는 사람도 눈이 더 나빠져서 못 보게 되기 전에 한자라도 더 읽겠다고 마음을 먹고 읽으시라’ 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성 안나 할머니께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할머니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잘 안 보이던 눈이 밝아졌습니다. 또한 마음속으로 미워하던 이들을 용서하게 되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고 회개의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할머니는 말씀과 더불어 살게 되었고 육체적인 눈뿐 아니라 영적인 눈이 뜨여 그 기쁨은 날로 더 커갔습니다.
만약 할머니께서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성경 읽기를 아예 시작하지 않으셨다면 육체적인 눈도 영적인 눈도 뜨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씀은 믿음을 기르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새기고, 지금 행하는 데서 증거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게 되길 바랍니다. 그 순간이 구원의 때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고 하였는데 “은혜로운 해”는 이스라엘 백성이 50년마다 경축한 희년을 말합니다. 그 희년의 목적은 어떤 이유로든 빚을 지게 되어 가족의 소유와 자유까지도 상실한 모든 사람에게 떳떳한 생활을 다시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노예들을 풀어주고 잃어버린 권리를 무상으로 되찾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희년은 기쁨의 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25년을 “희망의 순례자” 라는 주제로 희년을 선포하셨는데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의 억눌린 어둠의 상태를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밝혀 주시고, 죄의 용서와 한없는 사랑을 통해서 자유를 주시고 기쁨을 주십니다. 새 삶과 해방의 기쁨으로 초대하십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면 은총 안에 머물게 됩니다. 믿음은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 입니다. 희년의 은총을 함께 기뻐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성경을 보면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권고를 듣지 않아서 소금기둥이 되었고,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이 모세가 세워놓은 구리 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습니다. 그러나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결국 향기가 있고 꿀이 있어도 내가 취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 태어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고 맙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가르침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행함으로써 ‘주님의 은혜로움’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알베리오네 신부님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슬플 때면 성경을 펴십시오. 그대를 위로할 구절이 나와 있을 것입니다. 의혹과 두려움이 있을 때에도 그렇게 하십시오. 성인들은 불확실하거나 걱정이 있을 때마다 이 은총의 샘을 찾았고 시원한 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야고1,21). 그리고 성체를 자주 모시길 바랍니다. 성체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매일을 은총의 순간으로 엮어 가시고 그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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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2년 사목국에서 일할 때입니다. 사목국에는 여러 부서가 있었습니다. ‘선교 전례, 교육, 가정, 복음화, 직장, 레지오, 기획 행정’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교구의 사목국에서 일하였지만, 정확하게 우리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지 성찰하지 못했습니다. 사목국장 신부님과 2박 3일 연수를 가면서 우리는 부서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각 부서를 사람의 몸과 비교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기획 행정은 머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교구의 사목이 어떤 방향이었는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연구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교육 담당이었습니다. 저는 교육은 심장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장이 신선한 ‘피’를 끊임없이 공급해 주어야 사람은 살 수 있습니다.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해서 공급할 때, 교구와 본당이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과 레지오는 발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선교 전례는 뼈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뼈가 있어서 균형을 잡을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가정과 선교 전례는 교회를 지탱하는 뼈와 같기 때문입니다. 복음화는 눈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음화를 통해서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2박 3일 동안 연수를 통해서 각 부서의 역할과 기능을 고민했고, 우리는 교구 사목국이라는 몸의 지체로 기쁘게 일하였습니다.
2025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을 ‘자동차’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사제는 ‘핸들’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교구장으로부터 권한과 책무를 받은 사제는 교회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는 먼지와 빗물을 닦아내는 ‘와이퍼’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자는 가난, 정결, 순종의 와이퍼로 교회의 유리에 붙어있는 권위, 욕망, 시기의 먼지를 닦아내기 때문입니다. 사목회는 ‘엔진’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목회에서 행사를 기획하고, 집행하기 때문입니다. 재정평의회는 ‘기름’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자동차가 움직이려면 기름이 있어야 하듯이, 재정평의회에서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실은 ‘의자’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새로 온 신자들에게 구역과 반을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신심 단체는 ‘바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신심 단체의 카리스마와 영성으로 복음을 실천하고, 전하기 때문입니다. 쉬는 분들과 아픈 분들은 트렁크 아래 있는 ‘스페어타이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본당에서 잘 볼 수는 없지만 그분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이 전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퀴에 문제가 생기면 스페어타이어로 교체하듯이, 쉬는 분들과 아픈 분들이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공동체에서 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른다면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당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신앙을 ‘몸과 지체’로 설명하곤 합니다. 우리의 몸은 인격과 정신이 있습니다. 또 우리의 몸은 많은 지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지체들이 원활한 활동을 하도록 산소, 영양분, 물을 공급해 줍니다. 우리 몸의 지체들은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느끼고, 만지고, 걸을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통합된 판단과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우리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눈, 예수님의 발, 예수님의 손, 예수님의 입, 예수님의 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받아야 할 영양분은 예수님의 말씀, 삶, 표징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다운 통찰입니다. 중국의 한 대나무는 심으면 7년 동안은 거의 자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8년째 되면 크게 자란다고 합니다. 7년의 세월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7년의 세월은 성장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준비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준비는 소홀하게 됩니다. ‘건강, 가족들의 사랑, 친절, 자선’과 같은 것들의 성과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정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균형 잡힌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바오로 사도는 말해주고 있고, 그런 균형 잡힌 삶은 말씀에 충실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에 앞서서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읽으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해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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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는 세례를 통해 주님과 하나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늘 복음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알려 주십니다.
주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다시 해방해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머리이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입니다. 주님의 손이 되는 사람도 있고 발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귀가 되는 사람도 있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듯 주님의 입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나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주님의 사명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발이 가는데 손은 안 갈 수 있습니까? 손이 모자라는데 발이 안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사명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복음 마지막에 주님은 우리를 둘러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신기해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 스스로가 주님이라고 우리에게 들려주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은 우리 가운데에 실제로 살아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성당에 가야 볼 수 있는 주님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니!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몸과 마음을 통해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은 세상을 우리가 변함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 가운데에 이루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하나 되어 계시는 주님의 사명을 따라 세상에서도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희망합니다.
⭐복음의 기쁨
교회는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아버지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누구에게 먼저 다가가야 합니까?
친구와 부유한 이웃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멸시당하고 무시당하는 이들,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 분명한 메시지를 약화시키는 어떠한 의심이나 변명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복음의 기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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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키엣 대주교님.
내가 가야할 길은 성경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충만한 기쁨을 얻었고, 언제나 성령의 뜻대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회당에서 생활하셨습니다. 오늘도 성경을 읽으시고 그 의미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을 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경건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 분께 건네졌다. 그 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참으로 장엄하고 엄숙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성경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과 삶의 지표를 찾으려 노력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실천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십시오.
둘째, 하느님의 뜻을 이해했다면 즉각 실천하십시오.
주님의 뜻이, 그 소명이 고난과 역경의 길일지라도 그 뜻을 지향하며 일생 동안 실천하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바로 하느님의 뜻이며 그 뜻을 실현하기로 결심한 예수님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은총이며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어쩌다 한번 읽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항상,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는다면, 주님께서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면 성경에 몰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빛이 없다면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서로 연결된 톱니바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총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성경에 매료되고 성경의 말씀에 빠져들면 들수록 삶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더 많이 받을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로 살아가는 삶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과 이웃에게도 주님의 뜻을 널리 알리는 향기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할 궁극적인 목표일 것입니다. 아멘.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항상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무엇을 찾았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찾으려고 합니까?
2. 성경에서 얻은 것은 지식입니까? 아니면 내 인생의 지표로 삼아야 할 주님의 뜻입니까?
3. 성경 속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4. 성경에서 주시는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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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은 교회 공동체
“전례공동체, 한몸공동체, 해방공동체”
“새로운 노래를 주께 불러 드려라.
온 누리여, 주님께 노래 불러라.”(시편96.1)
너나할 것 없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작금의 험하고 힘든 세상입니다. 다음 두 성구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2027년 서울세계청년대회 모토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6.30)
지난 1월8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복음중 한구절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함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자 해외 원조 주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 주일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19년 8월30일 성 예로니모 축일에 선언하셨습니다. 성 예로니모의 두 말씀도 생각납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성경을 자주 읽으십시오. 그대의 손에서 거룩한 책을 절대 내려놓지 마십시오.”
오늘 방금 흥겹게 부른 시편 19장 화답송과 이어지는 시편 말씀도 흡사 말씀 예찬처럼 하느님의 말씀 주일에 잘 어울립니다.
“주여 당신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오이다.”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을 참되어 어리석음 일깨우네.”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말씀의 빛입니다. 참된 삶은 물론 공동체 형성에 말씀 공부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옛 현자 다산 정약용의 지혜도 우리의 말씀공부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파의 껍질을 벗겨야 속살이 드러나듯이, 공부의 핵심을 찾지 못하면 쓸모없는 지식만 머리에 쌓인다. 의리의 정밀함과 미묘함은 마치 파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다.”
새삼 한결같은 말씀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삶의 진수를 깨닫고 참 좋은 공동체 형성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말씀의 은총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참 좋은 교회공동체를 발견했습니다. 사람은 공동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누구나에게 공동체 소속 욕구는 본능적입니다.
첫째, 전례공동체입니다.
전례와 삶은 함께 갑니다. 전례가 삶의 꼴을, 공동체의 꼴을 만들어 줍니다. 가톨릭교회의 영성은 전례영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 느헤미아서와 복음도 공동체 전례를 배경으로 합니다. 제1독서에서 율법학자이자 사제인 에즈라의 지도하에 온 백성이 몰문 앞 광장에서 공동전례에 참석합니다. 흡사 미사공동전례에 참석한 우리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에즈라는 성경을 읽고 백성은 모두 귀를 기울입니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화답합니다. 그런다음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합니다. 말그대도 경청공동체, 찬양공동체, 경배공동체입니다. 느헤미와 총독과 사제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은 감격에 벅차 우는 백성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니 그 내용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술을 마시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들 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조용히 하고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바로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인 “오늘” 미사공동전례를 통해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께서 공동체에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우리의 진짜 힘입니다.
둘째, 한몸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익집단도, 이념집단도 아닌, 하느님 중심의 살아 있는 유기적 한몸 공동체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요 우리는 하나하나 그 지체가 됩니다. 모두의 얼굴을 한데 모으면 그리스도의 얼굴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수족에 속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바로 주님안에서 일치의 한몸 공동체의 진리를 설파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습니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몸의 지체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도록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어느 하나 반박할 수 없습니다. 고립단절의 혼자라는 환상이 지옥입니다. 우열의 비교가 아닌 상호보완의 한몸공동체요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형제의 장점을 질투할 것이 아니라 자랑하고 고마워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붕괴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이런 한몸공동체의 모델입니다. 한몸공동체를 육성하는데 공동전례의 영향은 절대적입니다. 그러니 전례공동체와 한몸공동체는 하나입니다.
셋째, 해방공동체입니다.
참으로 모두를 자유롭게, 행복하게 하는 해방공동체입니다. 바로 희년의 영성입니다. 희년은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나자렛에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면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도 2025년을 정기 희년(2024.12.24.-2026.1.6.)으로 선포하시며 칙서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희망의 순례자’가 되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희년선포의 내용이 장엄합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말그대로 자유와 해방의 선언입니다. 말그대로 구원의 기쁜소식이요 모든 질곡으로부터 해방과 자유의 선언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희년의 영성이요 치유와 해방공동체의 실현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Today is the day). 언젠가 그날이 아닌 오늘 살아야 하는 희년의 영성, 해방공동체임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는 ‘오늘!’ 마침내 희년의 기쁨과 자유, 해방이 복음이 실현되었다는 복음입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매년, 매일이 희년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 좋은 공동체인 전례공동체, 한몸공동체, 해방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해 주십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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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 이루어지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0)
사랑이 오시니
사랑으로
오늘을 살아
끝없이 서로 죽이는
게걸스러운 분노를 녹여
오늘 사랑이다
늘 사랑이다
해방이 오시니
해방으로
오늘을 살아
무릎을 꿇리려 날뛰는
겁에 질린 광란의 총칼에 맞서
오늘 해방이다
늘 해방이다
기쁨이 오시니
기쁨으로
오늘을 살아
살맛을 삼켜버리는
잿빛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오늘 기쁨이다
늘 기쁨이다
희망이 오시니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
희뿌연 어둠 속
강요당한 무기력을 떨치고
오늘 희망이다
늘 희망이다
살림이 오시니
살림으로
오늘을 살아
죽임이 살길이라
유혹하는 검은손을 뿌리치고
오늘 살림이다
늘 살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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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은혜로운 해인 희년을 회당에서 선포하십니다. 바로 그 중심은 가난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희년을 회당에서 선포하는 의미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회당제도는 페르시아 시대 혹은 바빌론 유배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대 사회에서는 성전과 더불어 종교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회당은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한다기보다,제사장 또는 레위인이 아닌 식자층 서기관에 의해 주도된 곳으로 기도와 율법을 주로 가르치는 곳이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었고 잘못을 한 유대인들에게는 형벌도 내릴 수 있는 사법적 기능도 소유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회당에서는 회당장이 저명한 사람을 초청하여 말할 수 있게 하면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기회를 통해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서 회당에서의 가르침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바오로 역시 전도여행 시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었습니다. 이처럼 회당은 그리스도 역사 초기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 중요한 장소에서 주님의 은혜로운 해인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이 희년은 안식년 주기에서 50년이 되는 해를 말합니다 희년이 되면 제사장들은 그 땅 전역에 수양뿔의 나팔을 불어 희년이 시작되었음을 알렸습니다. 희년이 되면 가난으로 팔린 땅이 원 주인에게 돌아가고 종들이 해방되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희년’은 종말론적으로 메시야시대의 도래를 예표하며 희년의 선포는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킬 복옴의 전파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유대인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쁜소식을 읽으신 다음, 두루 마리를 덮고는 “오늘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분의 가르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그들을 가장 먼저 축복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그분은 오랜 세월 악령에 사로 잡혀 마귀의 노예로 묶여 있던 이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으라고 만민을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 ,28).
육신의 눈이 망가진 이에게는 볼 수 있는 힘을 주심으로써 눈 먼 이에게 빛을 주시고, 먼 옛날부터 마음으로 진리에 눈 먼 자들에게는 참 종교의 빛으로 진리를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들은 예언은,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창시자요, 인도자가 되실 분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올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희년을 선포하셨는데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희년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이시대에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받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들에게 큰 위안과 희망과 기쁨이 되는 해가 되어 오늘 주님께서 복음에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가운데 이루어 지도록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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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성도(聖徒) 이야기
이로써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보았던 것을 간단히 요약했다. 나는 또한 여러분에게 믿음이 두터운 사람들로부터 들은 것도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니클라우스 형제가 딱 한 번 콘스탄쪼의 주교가 성당을 축성하여 봉헌할 때, 그의 권고에 따라 세 조각의 빵과 성찬 포도주를 취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않은 지 이제 14년 된다고 한다. 그들은 또한 니클라우스가 등을 기댄 채 반은 서서 잠을 잔다고도 합니다. 그가 은둔생활을 시작할 초기에는 나쁜 원수들이 그를 구타하면서 몹시 괴롭혔기 때문에 종종 사람들이 반은 죽어 있는 그를 발견하곤 했다고 한다. 그는 매일, 특히 여름날에는 매일 약 세 시간동안 기도하기 위하여 멀리 어떤 동굴로 간다고 한다. 그는 순종과 평화를 높이 평가했으며 동시대인들 및 그를 찾아온 모든 사람에게 어떤 평화를 지녀야 할지를 설교했다. 몇몇 사람들은 그가 앞일을 예언한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로부터도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듣지 못했다. 그는 덕이 많고 명상에 잠기는 생활을 영위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매우 신뢰하며 또한 그에게서 좋은 인상만을 간직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에 의해 미혹당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도대체 무엇을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더 깊이 음미하면 할수록 더 많은 의미를 깨닫는다’ 라는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껏 내가 설명한 이 은수자의 삶과 태도에 대해서 아주 많은 것들을 들었을 줄 안다. 여러분은 나에게서 어떤 새로운 것 혹은 전에는 결코 들어보지 못한 것을 들은 것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에게 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이 일을 너무 어렵게 믿지는 말 것을 확실히 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주님은 당신의 성도 안에서 거룩하도다’ 라고 씌어져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 모두가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건강을 지켜 주시기를 기원합니다.(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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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예수님 말씀에서 하느님 나라의 참 기쁨을 /
박윤식 [big-llight] 2025-01-25 ㅣNo.179574
독일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바덴은 매사에 긍정적이고 주님께 감사하면서 산 이로 널리 알려진 이다. 그가 이러한 삶의 계기의 일화가 된 내용이다. 어려운 젊은 시절에 지방을 여행 중 돈이 없어 허름한 여관에 여장을 풀었단다. 그런데 거기에서 구두를 도난 맞았다나. 그는 자기 같은 가난뱅이의 구두를 누가 훔쳐 간 것에 너무 화가 나, 하느님을 크게 원망하였다. 마침 그날은 주일이었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 여관주인이, 헌 신발을 꺼내 주며 함께 교회에 갔다.
그는 마지못해 교회에 갔지만 분심이 너무도 심하게 들어서 차분히 기도를 할 수가 없었다나. 그러다 문득 자신의 옆의 다리가 없는 한 장애인이 하느님께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걸 보고 깨달았단다. ‘그렇다. 저 이는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닌, 두 다리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신발도 신을 수 없는 처지가 아닌가? 그런데도 저렇게 쏟아지는 눈물로 감사를 드리는데 도대체 나는? 그까짓 신발이야 다시 사면 그만인데, 하느님을 원망하며 이렇게 화를 내어서야!’ 그 후 그는 어떤 일에도 결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조그만 일에도 늘 감사하며 살았단다. 우리도 늘 곁에 현존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며 감사하게 살고 있는지를 되돌아보자.
미래는 불안하고 초조하기에 서둘러 준비가 요구된다. 모자라서 채우지만 늘 얼마가 부족하다. 눈높이를 낮춘다 해도 그게 그거다. 매번 두려움으로 남는다. 이 해소책은 기도와 은총 속에 이루어지며, 주님 도우심이 절대적이다. 그렇지만 믿는다는 우리는 두려움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삶을 누릴까? 그러려면 지금껏 가진 물질관에서 다소는 자유로워져야 할 게다. 재물이 제아무리 넉넉해도 가난에 찌든 이가 참 많다. 진정한 부자는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얼마만큼 물질에서 자유로운가에 있다. 질병과 재난으로 고통 겪는 이들을 위해 가진 것을 나누자.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여느 사람처럼 평범하게 사시다가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복음을 선포하셨다. 당신께서 하시는 일들이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출사표로 밝힌 것이다. 이는 성령의 세례를 통한 기름부음 받은 후로 가난한 이, 잡혀간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들에게 해방과 은혜를 안겨다 주시고자 출정의 뜻을 드러내신 거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예언된 구세주이심을 들어내시고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선언하시면서 하느님 백성이 성경을 더욱더 경건하고 친숙하게 대하고, 하느님 말씀의 거행과 성찰과 전파를 위하여 이날을 교회는 봉헌하며 장엄하게 지내기를 권고하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그분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을 마치셨다.‘ 그분께서는 정녕 두려움 없는 하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신다.
오늘은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며 보내는 주일이다. 많은 걱정거리가 엄습해도, 오늘만큼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한껏 즐기면서, 그분 안에서 충분한 휴식으로 은총의 시간을 갖자. 그리고 바로 이 기쁨을 이웃 모두에게 전하자. 이게 그분 지상 순례의 긴 여정의 목표이다.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모두에게 분명하게 이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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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루카 복음서 서문에 나오는 ‘테오필로스’라는 이름은 상징적인 이름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모든 시대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적고 있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이 모두 진실임을 선포하고자 한 것이지요.
사실 복음서가 기록되기까지 여러 단계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실재가 있었지요.
다음으로는 사도들의 증언을 통한 복음 선포가 이어집니다.
그러다 점차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여러 단편적인 구두 전승을 모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만나고 체험한 예수님을 길이 전하기 위해서지요.
그 덕분에 우리는 오늘 복음서를 읽고 묵상함으로써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이 선언은 바로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예언된 메시아시요 구세주이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표현입니다.
당신으로 말미암아 가난한 이들과 눈먼 이들, 무엇인가에 붙잡혀 묶이고 억압받던 이들이 구원과 해방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그래서 많은 이가 주님의 은혜로움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1독서를 보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레위인들에게서 하느님의 율법을 듣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며 그 율법이 참되다고 고백합니다.
모진 고생을 통하여 마음의 눈과 귀가 열려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는 오직 구약과 신약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오늘도 겸손과 신뢰의 마음으로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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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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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그분께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건네집니다.
예수님께서 읽으신 이사야서의 구절은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알리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봉독을 마치시고 자리에 앉으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목합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소문만큼 예수님을 놀랍게 바라봅니다.
이것은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라
자신들이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닐까하는 기대감도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사람들의 기대가 헛되지 않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잡혀간 이들이 풀려나며
눈먼 이들이 다시 보게 되고
억압받는 이들이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려온 사람들에게
자유와 기쁨을 원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희망이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천년 전에 나자렛의 회당에서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있는 이 곳에서
똑같은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도 다가오셨습니다.
우리도 희망을 꿈꿀 수 있습니다.
자유를 향해서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희망의 가능성보다는
그렇지 못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각자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며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어려움도 해결해 주시려
우리에게도 다가오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려움에 함께하시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희망을 품고
오늘 하루도 힘을 내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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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1, 21)
우리의
현실 안에
살아 숨쉬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으로
살아가는
오늘이 있기에
우리의 내일이
있습니다.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의미 있는
말씀으로
오늘
이 아침이
열립니다.
하느님의
말씀 없는
오늘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을 안고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워질
오늘입니다.
말씀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서
떨어지고
멀어진
거리가
바로 사랑의
거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멀어진 거리를
이어주십니다.
오늘을
되살리시는
말씀이 되십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은
말씀이 이루어지는
말씀의 살아 있는
여정이었습니다.
말씀의 가득찬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어제와 내일
그리고 오늘도
이루어져야 할
말씀의 삶입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깊이
새기는
하느님의
말씀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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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짧고 간략하게 강론하시는 예수님!
사제가 된 후 부모님이 살고 계시던 본당에 가서 처음으로 강론할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참으로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렵고 떨렸습니다.
나름 감동적인 강론을 한번 해보려고 얼마나 준비에 준비를 거듭했는지 모릅니다.
A4지 한 장 정도의 짧은 강론을 며칠에 걸쳐 준비했고, 그걸 또 거울을 보고 수십 번도 더
예행연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첫 강론을 하시는데, 아마 예수님께서도 마음이 비슷하셨을 것입니다.
요즘 미사 때마다 강론 전에는 성경 말씀이 먼저 선포되듯이, 예수님께서도 강론을 하시기 전에
한 성경 구절을 찾으셔서 읽으셨는데, 정말이지 기가 막힌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은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 1-2)
한 문장 한 문장, 글자 한자 한자가 다 예수님 당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을 봉독하심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공생활 기간 동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명확히 밝혀주신 것입니다.
회당 안에 있던 청중들은 이제 성경 말씀이 선포되었으니, 길고도 장황한 강론이 이어지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강론은 딱 한 마디였습니다. 3초밖에 안 걸렸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아마 예수님께서 지금 이 순간 공생활을 하신다 해도, 절대로 강론 길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핵심 중의 핵심만, 촌철살인의 한 말씀만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예언이 당신을 통해, 당신 안에서 성취됨을 장엄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언의 성취는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안에 하느님의 영이 머물고 계심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종말론적인 예언자요 하느님으로부터 도유된 분 곧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래로 인해 이제 구원의 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분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은 이제부터 하느님 마음에 드는 해, 그분에게 흡족한 해, 주님의 은혜로운 해, 희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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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4; 4,14-21: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오늘의 주제는 하느님 말씀을 규범으로 받아들이고 삶 속에 실천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구원적 삶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항상 나에게 있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느헤미야서는 에즈라가 바빌론 귀양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하느님의 말씀, 법은 공적으로 백성들 앞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일어서고, 손을 쳐들고,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아멘!, 아멘! 하며 응답하는 백성들의 참여로써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주일 강론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성들은 에즈라로부터 하느님의 법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느헤미야 8,9). 즉, 하느님의 법을 듣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회개를 일으켜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후회와 괴로움을 느끼게 하고,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게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들음으로써 공동체가 변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확실한 신앙으로 전달되지 못했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오늘 복음은 복음의 서문(1,1-4)과 예수께서 공생활 초기에 나자렛 회당에서 있었던 일(4,14-21)로 되어있다. 그러나 복음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신앙심을 생기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예를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은총의 말씀”(4,22절)에 놀라면서도 그분 앞에서 취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외적인 것, 예를 들면, “요셉의 아들”(4,22절)보다 그분 안에 있는 그 이상의 어떤 사실을 알아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복음사가가 원하는 것은 어떤 사실을 전하고 해석하면서 독자들을 신앙의 더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가고자 한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을 요셉의 아들 혹은 그 어머니를 아는 것으로 그분을 안다고 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신앙이다. 이것을 복음사가는 의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의 한 대목을 읽으신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 우리 하느님의 응보의 날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이사 61,1-2). 이 내용은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게 되리라는 해방과 하느님 구원의 약속을 전한 내용으로 아무 이상이 없었다. 문제는 성서를 읽으시고 자리에 앉으시어 그 내용을 설명하시는 말씀에서 제기된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절). 이 말씀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한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터무니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우선은 그 예언의 말씀이 마리아의 아들이며 목수인 요셉의 아들인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고, 예언자의 메시아 활동이 바로 그 순간 즉, 오늘 이루어진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여간 예수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써 가르치시고 구원업적을 이루신다. 예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해방이다. 그 해방은 모든 악으로부터의 해방, 육체적, 영적 시력상실로부터의 해방, 가난으로부터의 해방, 노예 생활에서의 해방, 죄악으로부터의 해방 등이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가져오신 분이다. 그분은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구원자로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신앙으로서만 가능하다. 나자렛의 한 목수라는 것 때문에 그것을 거부했던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옛날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말씀이 규범, 법이 된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 그 오늘은 매일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성경 말씀을 당신의 가르치심과 행동으로 이루셨다. 그럼으로써 이사야를 만나신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그분의 뜻을 실천하고 이룸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삶도 예수님처럼 “이 성경 말씀을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었다.”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씀을 실천하고 이룸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거니는, 여정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인체를 들어 설명하면서 각자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지체는 서로가 조화를 이루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몸은 올바로 성장할 수 없고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몸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각 지체로서 제 일에 충실하며 지체 간에 진정한 일치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우리 사이에 서로 불화를 야기하고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아집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옛날의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과 같은 모습이다. 공동체 안에서 형제를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그 형제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주님을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규범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항상 하느님의 말씀 앞에 그 말씀이 오늘, 여기서 나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는 말씀이 되게 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삶은 올바른 성사 생활, 또 전례 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도록 해야 하는 삶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규범인 삶은 진정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어 한 몸 그리스도로서 하느님의 생명으로 나아갈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신앙생활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성찰해 보면서 주님께 은총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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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말씀의 본질: 유산 상속자를 가려내는 조건
왜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오늘 당신의 복음 선포가 예언된 이사야서를 찾아 읽으시고는 그 말씀이 지금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실 때도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온 삶은 아버지로부터 예언된 예언을 성취하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경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라이언 벨 목사는 ‘말씀만으로’라는 개신교의 가르침대로 말씀과 기도를 삶으로 사는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아도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하느님이 자신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지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년 동안 하느님 없이 살아보기로 결심합니다.
1년 동안 성경도 읽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다고 선언합니다.
성경 말씀을 매일 읽고 그 말씀으로 설교도 하던 사람이 왜 말씀 안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까요? 말씀을 잘못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실현하려 하지 않고 해석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해석하는 게 아닙니다. 해석은 자녀의 말을 부모가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아기가 울면 아기의 울음을 부모는 해석합니다. 배고파서 우는지, 싸서 우는지, 아파서 우는지.
그러나 아기는 부모의 말을 해석하면 안 됩니다. 부모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학교 가라고 하면 그 말을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냥 가면 됩니다. 그래야 자녀입니다.
영화 ‘프루프’는 아버지에 대한 두 딸의 시선이 그려집니다.
동생 캐서린은 비록 정신질환인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를 믿고 사랑했습니다.
5년 동안 수학에만 미쳐있는 아버지를 돌봤습니다.
반면 언니 클레어는 아버지를 잘 몰랐습니다. 어려서부터 도시에서 돈을 버는 데 바빴기 때문입니다.
캐서린은 아버지가 훌륭한 수학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수학을 배우지 않는 이상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캐서린은 아버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그동안 풀지 못한 어려운 문제를 풀어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단지 미친 사람이 아닌 위대한 수학자였음을 드러냅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이 실현되지 않았을 때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아버지 입에서 나온 말이 자신을 통해 실현하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어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모든 재산을 팔아
쓸모없어 보이는 땅을 유산으로 남깁니다.
그리고 그 땅에 보물이 있다고 말해줍니다.
그러나 한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해석해버리고 맙니다.
아버지가 미쳐서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결론 내립니다.
쓸모없는 땅을 팔아서 술을 마십니다.
반면 다른 아들은 그럴 수 없다고 믿고 끝까지 파헤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이 건강해집니다.
혹시 이것이 유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땅을 파다 보니 땅이 기름지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씨를 뿌렸더니 다른 밭들보다 훨씬 많은 수확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부자가 되어 아버지의 예언이 옳았음을 증명합니다.
이것이 유산을 받을 자격을 말씀을 성취하며 증명하는 자녀의 자세입니다.
저는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하나를 읽어도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십일조가 아닐까?’라는 생각하고는 가톨릭에서는 이미 말하고 있지 않은 십일조를 혼자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신학생 때부터 돈이 부족한 적이 없습니다.
신학생 때 유학 가면 1년에 책 사라고 용돈을 3,000달러를 받는데, 저는 1,000달러가 없어져도 없어진 줄 몰랐습니다.
돈이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아버지로 체험하고 또 하느님 자녀의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증거가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 ‘최고의 선물’(2006)에서는 엄청난 부자인 할아버지가 망나니 손자에게 유산을 남기기 위해
12가지 임무를 부여합니다.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보라는 것, 진정한 친구를 사귀라는 것 등입니다.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보니 돈의 소중함을 알겠고, 친구를 사귀어보니 돈이 친구를 위해 쓰일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의 모든 유산을 몸이 아픈 친구를 위해 씁니다.
할아버지의 유산은 사실 더 있었습니다.
손자가 그 유산을 사람의 유익을 위해 쓸 때
더 주도록 해 놓았던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도 우리에게 이와 같은 예언입니다.
성취하여 상속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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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회개 없이는 해방도 없고, 자유도 없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7-21)”
1)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선포입니다(마르 1,15).
그 선포는 곧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선포입니다.
‘구원’은 온갖 억압에서 해방됨으로써 영원하고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는 행복입니다.
사람을 억압하는 것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은
‘죄와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 즉 ‘용서’와 ‘영원한 생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여기서 ‘알다.’ 라는 말은 ‘완전한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2) ‘자유’는 해방의 결과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덕분에, 또 예수님에 의해서 해방된 사람이기 때문에, ‘신앙인은 자유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산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착각일 뿐이고, ‘잃은 양’의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는 것이고, 정처 없는 유랑이고, 방황입니다.
그러니 목자에게서 떨어져 나간 ‘잃은 양’에게는
‘참 자유’가 없습니다.
요한 사도가 서간문에서 강조한 ‘사랑의 완성’을,
‘자유의 완성’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6-18).”
참되고 완전한 자유는, 완성된 사랑과 하나입니다.
사랑 실천을 완성해서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된 상태가 곧 완전하고 참된 자유를 누리는 상태입니다.
3) 메시아 예수님께서 주시는 해방과 자유를 얻으려면, 우리 쪽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나는 이미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라고 큰소리친다면, 그러면서 자기 인생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 텐데, 그러다가 결국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 부자는 이쪽 세상에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기 마음껏 하면서 살았지만, 저쪽 세상에서는 한 방울의 물도 자기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처지로 떨어집니다(루카 16,24).
절망과 후회만 남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자기들은 자유인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요한 8,3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36).”
아버지의 집은, 즉 하느님 나라는 들어가기를 원하고,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노력이 바로 ‘회개’입니다.
자기는 이미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수 없고, 참되고 영원한 자유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 없이는 자유도 없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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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1-4; 4,14-21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지탱하는 중요한 두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뜻과 가르침이 담긴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김으로써 무엇이 주님 뜻에 맞는 것인지를 올바르게 식별하고, 식별한 뜻을 실천함으로써 그분과 참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심으로써 남겨주신 그분의 몸을 받아모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자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그 믿음 안에서 같은 신앙을 지닌 형제 자매들과 한 몸을 이루지요. 그런 점들이 오늘의 전례 독서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제1독서인 느헤미야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서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으로써 그분과 하나되는 기쁨을 누립니다. 한편, 제2독서에서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 된 교회 구성원들 각자가 고유한 소명을 수행함으로써 ‘다양성 안의 일치’를 이루어야 함이 강조되지요. 마지막으로 복음에서는 우리가 듣고 받아들인 주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성취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머나 먼 타국에서 유배중이던 유다인들은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왕 키루스의 칙령에 의해 고향 땅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율법에 충실했던 사제 에즈라와 왕의 시종관이었던 느헤미야가 주축이 되어 성전을 재건하고, 백성들의 의식과 생활 깊숙이 물들어있던 우상숭배의 흔적들을 지우는 종교개혁이 단행되었지요. 오늘 제1독서는 종교개혁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다음 에즈라 사제가 백성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율법서를 읽어주는 장면입니다. 유배 전에는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희생제사가 그들 공동체의 구심점이었지만 더 이상 희생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기에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줄 또 다른 구심점이 필요했고, 율법을 그 구심점으로 삼은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백성들이 능동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로 앞 구절에 그 내용이 담겨있지요. “그때에 온 백성이 일제히 ‘물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서를 가져오도록 청하였다”(느헤 8,1) 누가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백성들 스스로가 원해서 주님의 말씀이 담긴 율법서를 읽어주기를 청했다는 것이, 또한 그 말씀을 듣는 것을 다른 그 무엇보다 ‘먼저’ 하려고 했다는 것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황폐해진 조국의 상태를 보고도 슬퍼서 울부짖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는 비참한 상태에서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자했다니, 그 간절함이 주님의 마음에 가 닿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율법의 중심이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에서 외적인 ‘형식’으로 옮겨간 겁니다. 자기들의 삶을 지탱해 줄 근간이라고는 율법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 율법을 어기지 않고 잘 지키고자 하는 열망으로 수많은 보호규정들을 만들었는데, 그 개수가 너무 많아지다보니 율법의 내용을 글자 그대로 지키기에도 버거워 그 안에 담긴 근본정신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진 것이지요. 또한 종교 지도자들도 율법에 담긴 근본정신이 제대로 실현되도록 노력하기보다, 율법을 무기처럼 휘두르며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 기득권을 강화하려고만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이 잘 지키도록 계몽할 생각은 않고, 그들을 ‘죄인’ 취급하며 비난하고 단죄하기 바빴던 겁니다. 그렇게 하여 자기들의 상대적인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지요. 그런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해 말씀이신 주님께서 직접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심점이 되십니다. 당신이 하시는 말씀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는 한편, 여러 기적과 표징들을 보여주심으로써 유다인들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좋은 분이신지를 느끼고 깨닫게 하려고 하셨지요. 그렇게 하느님이, 그분 말씀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그분 뜻에 합당하게 살 수 있고, 그분과 참된 일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의도가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뜻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말씀으로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밝히시고 행동과 삶으로 그 뜻을 실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시는 장면에서,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 된 것이다”라는 복음사가들의 증언에서 그런 점을 확인할 수 있지요. 그런데 주님의 입에서 선포되는 구원의 말씀 안에 담긴 의도와 뜻이 온전히 성취되려면 그것을 듣는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 구원받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지녀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이라야 밥 한 끼에 감사할 줄 알며 그 밥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열망이 있어야 그것을 자기 마음 안에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인 그 말씀을 실천해야 비로소 그 안에 담긴 주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이지요. 밤 새 그물을 쳤으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던 제자들이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라는 주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자 수많은 고기가 잡혔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여기서 ‘듣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원문의 뜻은 영어로는 ‘hear’에 가깝습니다. ‘hear’는 특별한 의지나 목적을 갖지 않고 어떤 소리가 ‘귀에 들리는 그대로 듣는 것’을 가리키지요. 즉 내 뜻과 기준으로 하느님 말씀을 판단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 내 마음 안에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 그대로 삶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서 그 말씀 안에 담아주신 뜻과 의미가 나를 통해 성취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노력은 일회성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매일 꾸준히 실천해야 합니다. 그 점을 드러내시기 위해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오늘’을 강조하신 겁니다. 즉 우리는 매일 매일,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내 마음에 들려오는 주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들은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실천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뜻이 조금씩 완성되어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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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주님 소명의 길”
지금 우리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 소명에 대해서 이사야 예언서 61,1-2과 레위기 25,8-13을 인용하시며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 삶의 목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
주님 소명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시는 것과 소외된 이들을 해방시키시며, 희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은 주님의 소명을 선언하시기 위해 유혹을 받으신 대목(4,1-12)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헛된 욕심과 명예심에서 자유로우실 수 있을 실 때 비로소 당신 소명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삶의 밑바탁의 욕구와 유혹을 이기시고 바로 당신 소명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에두아르도 가르시아著 장선영譯 “어느 주교님의 휴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 대주교님이 자신의 체험담을 소설가 에두아르도 가르시아에게 들려주어 작품으로 만든 책이라고 합니다.
고급화되고 상류층 위주의 교회에 대한 쇄신을 외치며 진지하게 자기비판을 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어 맨 대주교님은 오랜 병상생활을 하던 중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만남을 체험하고 그의 휴가를 계획하기에 이릅니다.
주교님은 여름휴가를 내며 아무도 모르게 주교관을 떠나 인조석 공장을 찾아가 신분을 감추고 말단 노동자로 취직하여 인간의 맨 밑바닥 생활을 체험합니다. 그곳에서 주교님은 가난한 이들의 생활을 체험하며 교회의 성직자의 삶을 반성하며 교회의 미래를 제시합니다.
그 주교님의 이런 삶의 철학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는 신학생 때 농부의 아들임을 잊지 않고 신학교 방학 때마다 아버지와 나란히 농사일을 합니다. 그 때에 아버지는 사제가 가야 할 길은 바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가르쳐주교 그 아들은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책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은 교회의 현실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스스로 파헤쳤던 것입니다. 누구의 고발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자성하는 아름다움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난을 살고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증인이 되어야 할 성직자들이 자칫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반대되는 부유와 안일, 권위와 위선에 침체되기 쉬운 현실을 일깨우는 메시지가 담긴 소설이라 하겠습니다. 제가 마치 이 소설 외판원 같습니다.
우리 본당을 방문한 박요한 신부님은 그동안 본당 사도회, 단체장, 구역장등의 피정, 교우들을 위한 특강, 그리고 오늘 전체 교우들 피정 등을 해 주고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우리는 함께 공부했지만 늘 우리는 사제 생활에서 ‘가난한 이들의 사제’를 꿈꾸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았느냐?하면 부끄럽지만 변함 없는 것은 ‘가난한 사제’,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사제’가 되도록 노력한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신부님 주위에는 맨 가난한 사람들 뿐이다.’ 그 말이 제게는 제일 칭찬과 격려의 말로 들립니다. ‘어렵고 힘든 이들,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바로 주님과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이 바로 오늘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대로 소외된 이들의 벗이었습니다.
가나한 이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갚을 힘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외면하기 쉬운 이들입니다.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수고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계층입니다.
이 사랑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그들을 지치지 않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로 오늘 당신 소명의 출사표를 던지시며 주님의 종의 노래를 인용하신 것입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지친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고 성전재건의 힘을 얻에 해 주는 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 ‘하느님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 만이 그들을 폐허의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그리스도의 지체에서 여러 가지 은사를 실감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바로 유기적인 그리스도 인들의 활동과 소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다양해도 복음을 실천하고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이 가난하고 다양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하나로 만들며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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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말씀의 힘을 믿고 다시 시작하는 삶♣
율법학자인 에즈라는 유배에서 돌아와 성전 재건을 마친 이스라엘 회중들에게 율법서의 말씀을 읽어 줍니다. 말씀은 들은 온 백성이 눈물을 쏟자 그는 다음과 같이 위로합니다. “오늘은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느헤 8,9.10)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영과 함께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며, 이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루카 4,18-19.21).
하느님의 말씀은 이렇게 힘이 되고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갈망하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씀을 멀리하고 제멋대로 살아가곤 합니다. 건강하고 재력이 생기고, 학식을 쌓고 주변 사람들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 쉽게 주님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또 참으로 소중한 '우리'임을 망각한 채 자기앞만 보며 살기도 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때로는 원치 않는 고통과 시련을 겪거나 병을 앓을 때, 대인관계가 뒤틀리고 오해를 받을 때, 사업 실패나 가정 문제로 위기를 겪을 때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의탁하기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그렇게 절망과 자만 사이에서 헤매곤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일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과 치유와 해방을 주기 위해 오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나아가 예수님처럼 가난한 이, 잡힌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와 함께하며 기쁨과 해방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똑같은 지체들이기에 가장 연약한 지체마저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1코린 12,23).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향한 폭력, 차별,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극복해야 합니다.
또한 제1독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씀의 힘을 믿고 공경해야 합니다(느헤 8,5). 그들은 에즈라가 말씀을 선포하며 찬양하자 ‘귀를 기울였으며’(8,3),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8,6), 그런 다음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합니다(8,6). 결국 그들은 감격하며 참회의 눈물을 쏟습니다.
그렇습니다! 살다보면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고 고통을 겪거나 예기치 않은 위기 상황과 소외 상태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의 힘을 믿고 경청하며, ‘다시 시작하며 응답하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의 힘을 믿고 나의 가난한 처지를 겸손하게 인정하며, 기쁨이 되어주시고 해방과 치유를 선사하시는 주님께 나아가고, 다른 이들과 '함께하며' 생명이신 말씀을 증거하는 희망의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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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라반의 말씀사랑
오늘 복음 내용은, 루카복음의 첫 도입부(1,1-4)와, 예수님께서 말씀 안에서 당신의 사명을 찾아 선포하신 4장의 유명한 부분(4,14-21)을 이어서 편집해 놓았습니다. 앞 부분 없이 4장의 이야기만으로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독립된 이야기인데 굳이 앞 부분을 결합시킨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전 사실 미사의 독서와 복음을 너무 인위적으로 발췌, 생략하는 편집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편집 의도를 참작해 나름 타당성을 찾아보게 됩니다.
루카 복음 도입부에 그냥 스쳐 지나가기 쉬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유난히 그 말씀이 눈에 들어오면서, "아! 바로 이것이구나. 이것 때문이구나!" 깨닫게 된 말씀입니다.
"말씀의 종이 된 이들"(루카 1,2).
루카는 자신의 복음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종은 "자유와 주체성을 빼앗긴 채 주인에게 종속되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부려지는 비천하고 비참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 종이 '주님의 종', '말씀의 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러한 종의 특징은 "스스로 사랑 때문에 종임을 자처하는 자발성"이 아닐까 합니다. 이미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러했고 지금도 많은 이들을 매혹시켜 스스로를 종의 굴레에 묶게 만드는 신비라 할까요.
바로 이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4장과 결합된 결정적인 이유일 겁니다. 누가 짜집기 한 것인지는 몰라도 참 기가 막힙니다.
4장의 본론으로 들어가서,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의 행동을 주목해보면, "가시어... 늘 하시던대로... 일어서시자 ...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 펴시고 ... 찾으셨다."(4,16-17)고 전하는데, 오늘 예수님의 행동은 전혀 어색하지 않고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주체적이고 의지적으로 일어서시고, 건네진 예언서 두루마리를 받아 당신께 다가오신 말씀 내용을 손수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신 분'이 당신의 사명을 '말씀'에서 찾으시고, '말씀의 종'이 되어 이를 선포하십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리고나서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 하게 하셨다."(루카 4,18-19)고 전합니다.
말씀을 찾아 봉독하기까지는 예수님께서 주도하셨는데, 이제 봉독된 내용 안에서는 주체가 바뀌어 이사야 예언자가 "주님"이라 부른 하느님, 곧 예수님을 파견하신 성부께서 주체가 되십니다. 이는 사명을 받고 선포하는 데 있어서 예수님은 주체적이고 의지적인 당신 힘을 다 빼시고, 온전히 보내어진 이, 파견받은 이로서의 당신 존재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힘의 전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다음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발설되신 말씀'께서 '말씀으로 오신 분'을 받아 선포하는 그 자리에서 말씀의 내용이 완성됩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언제일런지, 어떤 식으로일지 보이지 않지만, 어쩌면 '완성'이란 모든 것이 완결되어 마지막 방점을 찍는 한 순간이나 찰나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부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사명을 찾아 선포하신 이 순간, 이 자리에서부터 완성의 영역은 무한대로 열려 펼쳐질 것이니까요.
"말씀의 종!"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성체와 말씀의 두 축으로 지탱되어 이곳 아름다운 하느님 정원에서 사는 우리에게, "말씀의 종"이란 표현은 참으로 신선하면서도 그만큼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주님의 종, 말씀의 종은 자신의 의지가 꺾이거나 억압당하지 않고 기꺼이 말씀께 길을 묻고 사랑으로 순명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길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찾고 듣고 사랑하고 품고 머물고 따라 살 때,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우리의 힘"(느헤 8,10)이라는 걸 절절히 체험하게 됩니다.
또한 말씀의 종으로 사는 이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위협받고 고난받다가 죽음까지 당했던 수많은 의인이나 예언자, 그리고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세속적 견지에서는 말씀 때문에 약하나, 신앙의 영역에서는 말씀 때문에 강한 이들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많은 지체들 중에서, 드러나거나 주목받거나 힘을 행사하는 은사가 아니어도,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하고, 덜 소중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싸지는"(1코린 12,22-23) 그런 지체들이 바로 이들일 겁니다. 어쩌면 '말씀의 종'인 이들이 교회와 세상을 등짐 지고 떠받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말씀의 종들인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늘 에즈라의 율법 낭독과 그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말씀의 종이 된 온 이스라엘은 회한과 감사에 벅찬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느헤미아와 에즈라와 레위인들이 이렇게 축복합니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느헤 8,9-10)
이 축복의 말씀이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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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6. 연중 제3주일.
성숙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는 삶
<2025.1.26> 아침을 여는 묵상 (수 17:7~18절)
❝성숙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는 삶❞
❚ 다른 지체들을 수용하고 배려하며 말씀으로 격려하는 성숙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 성숙한 공동체를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합니까?
➲ 서로가 배려하고 양보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7~13절).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서편에서 분배받은 기업의 경계는 북쪽 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남쪽을 거쳐 서쪽의 바다 순서로 소개되고 있습니다(7~9절). 므낫세 반 지파의 남쪽에는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이 있었고, 북쪽에는 아셀 지파의 기업이 있었고, 동쪽에는 잇사갈 지파의 기업이 있었습니다(10절). 잇사갈 지파와 아셀 지파의 땅에도 므낫세 지파의 소유가 있었습니다. 벧 스안과 그 마을들, 이블르암과 그 마을들, 돌, 엔돌, 다아낙, 므깃도의 주민들과 그 마을들이 므낫세의 소유였습니다. 그런데 므낫세 자손이 이 성읍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해 가나안 사람들은 그 땅에 거주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12절).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해지고 나서야 가나안 족속이 노역을 감당했는데(13절), 이는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난 처사였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공동체의 특징은 누가 더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하는가, 누가 더 이익을 보고 더 손해를 보는가, 이러한 것들을 따지면서 서로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공동체입니다. 자기 몫에 만족하고 서로 배려하는 관계가 존귀하고 아름다운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른 지체들을 보살피고 서로 양보하며 섬기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모습일 것입니다. 인간적인 동기가 아닌 신앙적인 동기로 서로를 아끼고 인정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바라는 죄악의 뿌리를 온전히 제거해 내야 합니다. 서로가 배려하고 양보가 있는 성숙한 공동체를 이루도록 노력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서로를 존중하고 격려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14~15절).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불평스럽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자신들에게 복을 주셔서 자신들이 큰 민족이 되었는데 왜 한 제비, 한 분깃만이 기업으로 주어졌는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그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대답하였습니다. 즉 요셉 지파가 큰 민족이 되어서 에브라임 산지가 좁다고 느낀다면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인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들은 두 지파인데 땅은 한 지파의 몫만 받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비를 뽑았고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각각 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받은 복에 비해 우리 자신이 받은 복은 별로 만족스럽지 않다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집착해 불평을 늘어 놓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곧, 영적으로 거듭나긴 했지만, 하나님을 삶의 중심으로 인정하지 못한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안에서 더 큰 축복을 받고 싶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분량을 갖추어 갈렙처럼 스스로 도전하여, 그 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욕심은 있지만 용기는 없고, 불평은 있지만 감사가 없는 그런 믿음 없는 자의 삶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격려가 있는 성숙한 공동체를 이루도록 노력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서로를 말씀으로 설득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16~18절).
요셉 자손은 그 땅을 스스로 개척하라는 여호수아의 권면에 핑계를 댑니다. 대적이 살고 있는 산지는 자기 지파에게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사람들은 철병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정복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16절). 이에 여호수아는 다시 그들이 큰 민족으로서 큰 권능도 아울러 가지고 있으니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17절) 자신이 바로 직전에 말한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삼림 지대를 개척해서 그 산지를 기업으로 삼으로 명령합니다. 덧붙여서 여호수아는 비록 가나안 족속이 강하고 철 병거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요셉 지파가 능히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18절).
요셉 자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장애가 된 것은 대적의 철 병거가 아니라 본인들의 이기심과 불신앙이었습니다. 대적을 무찌르고 소망하는 것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비뚤어진 마음 자세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있을 때, 설령 우리가 부족해도 능히 어려운 일들을 헤쳐 가며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대적이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가졌더라도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울러 공동체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지체들을 향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거나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강압적인 태도로 그들의 주장을 묵살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숙한 모습으로 신앙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온유한 태도로 무엇보다 말씀으로 불평분만을 내세우는 지체들을 설득하여 화평한 공동체를 이루도록 노력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믿음 안에서 다른 성도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며,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는 성숙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서로의 불평과 변명을 들어주고 말씀으로 설득시키는 모습을 통해 성숙한 공동체를 위해 힘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17:7~1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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