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창 12: 10-20)
(요약)
아브람이 흉년으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큰 시험을 당한 이 이야기는 성도가 만나는 죄악의 시험을 잘 비유해 준다. 죄악 시험의 원인은 하나님께 제단 쌓는 일에 멀어질 때 오게 된다. 죄악의 시험은 양심의 변질을 가져와 그럴듯한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그 양심을 무마하려 한다. 양심이 무디어진 사람은 죄악이 고통스럽지 않고 거기서 일락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내면의 심령에는 성령의 탄식함이 있다. 그리고 회개치 않을 때는 징계가 주어지는데 이것이 안팎의 신앙의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강해)
이 시간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라는 제목입니다. 지난번에는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온 말씀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가지고 사람이 어떻게 죄악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있는지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은 가나안에 온 아브람이 그 땅에 흉년이 들어 가나안을 떠났다가 시험 드는 장면입니다. 아브람은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아내를 빼앗기려는 큰 위기를 당합니다.
여기 '내려가다'(야라드)가 기본적으로는 낮은 지대로 옮기는 것을 가리키지만, 상징적으로 쓰일 때는 지위가 낮아지거나(시56:7), 도덕성이 내려감(삿14:1)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거하다'라는 용어 역시 본래는 길 옆으로 '벗어나다'는 뜻을 지녔습니다. 또한 '염려하다, 두려워하다'라는 의미도 지녔습니다. 성경 기자는 의도적으로 이런 용어를 씀으로 아브람이 하나님과 멀어지는 사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게 될 때 모든 것에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아브람을 통해 본 죄악 시험론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죄악의 시험은 어디서 옵니까?
8-9절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하나님께 제단 쌓는 일에 멀어질 때 죄악의 시험이 옵니다. 여기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다는 것은 유목민으로서의 풀을 찾아 이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벧엘을 떠나 남방으로 나갈 때 발생하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제단과 거리가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여기 “점점”이란 처음에는 하나님의 제단과 가까웠지만 더 멀어지고 더 멀어지는 그래서 점점 더 가기 어렵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용어에는 벧엘을 떠나서는 안 되는데 점점 떠나갔다는 뜻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짐승을 길러보면 처음에는 그 주변에서 맴돌고 집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풀어주면 점차 활동범위가 점점 넓어져서 나중에는 동네 짐승이 되고 맙니다. 우리 신앙도 행동반경이 하나님과 멀어지면 안 됩니다. 그 결과 아브람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횟수도 정성도 줄어들고 그래서 하나님과 자꾸만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귀한 교훈을 주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제단을 멀리함이 죄악 시험 즉 넘어짐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왜 제단을 멀리하게 되었습니까? 그 원인으로는 아브람의 믿음이 부족해서이지만 보이는 원인으로는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주한 자가 큰 기근이 만났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럴지라도 아브람은 그 곳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큰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으로 아브람은 그 곳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중단이 바로 시험의 원인입니다. 룻기를 보면 엘리멜렉가의 사람들이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갔다가 다 죽고 시어미인 나오미와 며느리 모압 여인 룻만 겨우 살아 돌아오지 않습니까? 아브람도 바로 이런 맥락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어도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신앙생활해도 그 결과가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은혜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은사를 받았다. 기도 응답을 받았다, 변화를 받았다, 축복을 받았다 하는데 나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막막하고 심령만 갈합니다. 그 때 신앙생활의 재미를 잃기 쉬운데 그러나 그 때 조심해야 합니다. 한 번만 부르짖어도 하나님을 만나면 누가 예수 안 믿겠습니까? 그러나 응답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내 신앙을 테스트하신다고 믿고 끝까지 그것이 몇 년이든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와 섬김의 제단 쌓기를 계속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실망하고 낙심하여 주저앉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섬김에 멀어질 때 가차 없이 찾아오는 것은 죄악의 시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2. 죄악의 시험이 찾아오면 어떤 마음의 변질이 찾아옵니까?
11-13절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이 말씀대로 아브람의 애굽 피신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아브람은 아내의 미모로 인해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 것 같았습니다. 당시 애굽의 사료를 보면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남의 목숨 정도는 예사로이 저질렀다고 합니다. 당시 새래는 70대 중반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젊음을 보장해 주셨고 또 애굽인들의 얼굴은 검었으나 사래의 얼굴은 희었기에 더욱 아름답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꾸민 계획이 아내를 누이로 위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생활에 게으를 때 자연히 세상 죄악을 향해 나가게 되고 우리의 심령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위기를 만납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사랑하는 아내 때문에 죽음의 위기를 만나듯 아이러니칼하게도 우리 심령을 죽이는데 일조하는 것이 그 동안 말씀과 성령 안에서 새로워진 우리 양심입니다. 이 성도의 양심은 세상 윤리나 체면으로 형성된 세상 사람들의 양심과는 달리 하나님을 의식하는 새로워진 양심입니다. 세상 사람들 양심이란 아무리 좋아봐야 애굽 사람들처럼 새카맣게 죄로 그을린 양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들은 사래의 미모처럼 윤리의 수준을 넘어 하나님을 인식하는 높은 수준의 양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의 양심은 세상 사랑들과는 달리 죄책이 있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심령은 그 양심 때문에 죽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죽지 않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게 됩니다. 그러나 창20:12을 보면 실재로 사래가 이복누이였지만 그러나 아내라는 신분을 속였으니 이는 위험을 피해 보려는 상황윤리이지 정직한 말이 아닙니다. 이처럼 주님을 멀리한 심령들은 자기 양심을 무마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그럴듯한 상황윤리의 핑계를 내놓습니다. “주일 날 일해서 헌금 더 많이 하면 되잖아” “죄를 짓더라도 밥은 먹고 살아야 하나님 영광 가리지 않을 것 아니냐?” “사람이 큰일을 하려면 이런 죄 저런 죄도 다 지어봐야 해” 특히 우리 성도들이 잘 쓰는 말이 있더군요. “나 어려운지 하나님은 모르신다냐?”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범합니다. 이런 상황윤리로 단장이 잘된 사람일수록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죄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는 누이를 소개한 아브람을 후대하여 많은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아브람에게 줍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람이 아내 팔아먹고 많은 선물을 얻음 같이 우리가 상황윤리로 단장하면 그 심령은 세상 죄악에서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림을 시사합니다. 하나님 멀리하면 이 정도까지도 타락합니다. 이런 즐거움을 히브리서 기자는 죄악의 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죄를 죄로조차 인식치 못하는 그 정도가지는 타락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양심에서 하나님의 법을 치워 버리기가 쉽지는 않지만 이런 저런 핑계로 양심을 무감각하게 만들면 일시적으로는 양심의 가책이 적으니 세상의 일락이 제 맛이 납니다. 그래서 바로의 대신들도 사래를 칭찬하듯 세상도 그 사람을 향해 거부감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면서도 죄인 줄 모르거나 알면서도 행하는 사람 있으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가장 굵직한 죄부터 회개하려면 십계명으로 회개하세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숭배 말라.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지켜라.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말라.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들으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참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대로 놔두시지 않습니다.
3. 죄악 시험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17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징계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내 사래를 빼앗기고 근심하는 아브람을 긍휼히 보셨습니다. 성도의 심령 구조가 그렇습니다. 우리 육신의 마음으로는 세상 일락이 즐겁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성령의 탄식으로 인해 괴롭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처럼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어떻게 도우십니까? 애굽 왕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 재앙이 돌림병인지 아니면 전쟁인지 무슨 손실인지는 모르지만 성경에서 큰 재앙이라 했으니 아마 애굽 궁중사에도 기록될 만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바로는 이 사건 앞에 놀랐는데 다행한 것은 그 재앙이 자기가 아브람의 아내를 취한 것 떼문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악 시험에 빠져가는 우리 성도들을 위한 두 가지의 하나님의 안전장치가 있습니다. 하나는 심령 속에서 성령의 탄식이요, 다른 하나는 징계입니다. 우리 속에 성령의 탄식이 계시기에 모질지 못하고 곧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나 끝지 회개하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바로 왕을 치시듯 성도들의 세상에 속한 귀한 것들을 치십니다. 이 징계는 회개하기 전에는 아무도 돌려놓을 수 없는 강한 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도 너무 자고하지 않도록 사단의 사자라는 찌르는 가시의 안전장치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신앙생활에 방심하면 무슨 일이 생기든지 마음과 육체를 아프게 콕콕 찔러댑니다. 하나님 백성이 더 타락하면 어떻게 하신 줄 알아요? 그 때는 생명을 부르십니다. 이것이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는 최후의 방법이예요. 어떤 일이 있어도 거기까지는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로 왕은 아브람을 불러 그의 거짓됨을 꾸짖고 사람들에게 명하여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13장을 보면 아브람은 다시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이 있는 벧엘로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징계는 처음에는 슬퍼 보이지만 연달한 자에게는 이것이 아주 귀한 양약이 도어 신앙생활에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세상 죄악에 범죄하고 늘 넘어집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죄를 지면서도 양심이 무감각하여 세상 뜻대로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 오기 전에 어서 속히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의 제단을 열심히 쌓으시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