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인의 얼굴이다.
쿠차의 키질 석굴
인도의 불교가 실크로드르 따라서 중국으로 들어오면서 천산남로는 호탄-미란으로 들어왔고, 천산북로는 쿠차(키질석굴)-투르판(배제리크 석굴)의 경로를 밟는다.
그리고 돈황에서 만난다.(돈황 석굴)
이곳에 남아 있는 벽화를 보면 인물상의 얼굴이 중국인이 아니다. 서역인이다. 이란계와 튀르키에 인의 얼굴이다. (이곳에 터잡고 있던 이란계가 흉노에 밀려 아프카니스탄-> 인도로 들어가서 쿠샨 왕조가 된다.)
383년에 전진(351-394)의 부견이 여광 장군을 파견하여 쿠차를 점령한다. 이로서 쿠차가 중국의 땅으로 편입된다. 중국문화가 실크로드를 통하여 서쪽으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된다. 그 과정에 동, 서 문화가 충돌한다. 특히 불교미술이 충돌을 거쳐서 점차 중국화되어 간다.
(이것을 문화 충돌이라고 한다.)
쿠차의 키질 석굴의 인물상에(그림에) 부조(浮彫) 형식으로 나타나고, 얼굴 표현에 축소와 확대로 표현함으로 원근법을 구사하였다. 즉 키질 석굴의 인물상은 얼굴을 돌리고 있어, 뒤편은 작게. 앞부분은 크게 그렸다.
인도의 고대신앙인 탄트라리즘은 빛은 우주를 강조하고, 빛은 장엄함의 상징으로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