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92
9월26일[연중 2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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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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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XW4Uk4qjR8
[서울대교구 이희천 프란치스코(중계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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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대상!>
오늘 첫 번째 독서 코헬렛 말씀은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은 매일 백번 천번 곱씹고 되뇌어야 할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입으로는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없다, 이미 다 버렸다, 다 내려놓았다고 외치지만, 끝까지 내려놓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물러서지 않는 오늘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은?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허무한 대상이 있고, 절대 그렇지 않은 대상이 있습니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저녁 연기나 아침 이슬 같은 대상들, 허무한 대상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할 대상이 있으니, 보다 영속적인 대상, 보다 고귀하고 품위 있는 대상,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대상이신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분을 사랑하고 추종하는 영적 생활입니다.
나이 들어갈수록 우리가 무엇에 목숨을 걸고 있는지, 어떤 대상에 최상위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 수시로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닌 대상, 뜬 구름 같은 대상에 절대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단 한 걸음만 물러서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는데, 그 순간을 못 참아서 몇 날 몇 일을 두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 건너지 말아야 할 강도 건너고 맙니다.
사실 마음 크게 먹으면 모든 것 다 포용이 됩니다. 단 하루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머리 맞대고 으르렁대면서 싸울 일 하나도 없습니다.
목숨처럼 중요시여기는 TV채널, 크게 마음먹고 양보하면 아주 마음이 편해집니다. 안 보면 큰일날 것 같은 주말 드라마, 안 봐도 아무 일 생기지 않더군요.
심각해 보이는 형제의 결점, 눈 한번 찔끔 감아보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용서 못 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이의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용서될 뿐 아니라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연들, 그토록 우리가 자부심을 가졌던 학벌, 직책, 성과, 업적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 특히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은 결국 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더군요.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는 오늘 화답송에서도 잘 나와 있습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당신이 그들을 쓸어 내시니, 그들은 아침에 든 선잠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사옵이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암울한 시대 상황을 자신의 글에 반영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의 톤은 무척이나 비관적입니다. 우울합니다.
“세상 만사 허무로다! 인생은 덧없구나. 모든 것이 허무로다!”
그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보았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도 마음껏 누려봤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시절이 가고 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도 갔을 것입니다.
잘 나가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 행복했던 시절, 괴로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저자는 결론으로 모든 것이 덧없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것이 지나가고 최종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재가 되고,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려도, 자취가 없이 사라져도 우리에게 영원히 남을 소중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몸부림쳐왔던 우리의 신앙 여정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우리 앞에 남을 오직 한 가지는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영혼이며,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모아둔 영적 보화들입니다.
꽃을 시들고 잎은 떨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가치들과 사고방식들도 아침이슬처럼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 앞에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는데,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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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8OEEcwThk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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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도가 정말 기도인지 알아보는 확실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모든 소식을 전해 듣고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소식을 듣는다는 게 헤로데에게는 자신이 죽인 요한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기도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입니다.
기도는 어둠에 있던 나를 점점 빛이신 주님께 들어 올리는 일입니다. 마치 어둡던 방 안에 햇빛이 들기 시작하면 떠다니는 먼지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처럼 주님께 다가갈수록 먼저 나의 죄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어쩌면 진정한 기도가 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영화 ‘미션’The Mission(1986)에서 로드리고 멘도사라는 인물은 예수회 선교사인 가브리엘 신부를 만난 후 엄청난 변화를 겪습니다. 멘도사는 처음에 과라니 원주민을 붙잡아 노예로 파는 무자비하고 완고한 용병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폭력, 탐욕, 권력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멘도사의 도덕적 타락은 분노에 차서 두 사람이 사랑했던 여자를 두고 결투를 벌여 자신의 동생까지 죽입니다.
멘도사는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연민과 겸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구현하는 예수회 가브리엘 신부를 만나게 됩니다. 이전까지 동생과 애인을 증오하기만 했던 그가 사제를 만나니 지금까지의 자기 죄악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노예로 팔아먹는 사냥꾼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멘도사를 정죄하는 대신 가브리엘 신부는 그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는 멘도자를 초대하여 자신이 노예로 삼은 바로 그 사람들을 돕는 임무에 자신과 다른 예수회 회원들과 동행하도록 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갑옷과 무기 등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넘어 과라니 종족이 사는 곳에 도달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떠납니다. 그들에게 다가갈수록 자신이 끌고 오는 짐의 무게는 그를 더 짓누릅니다.
과라니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원주민들은 그를 예전의 납치범으로 인식하고 복수를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대신 그들은 칼로 그의 짐을 끊어 떨어뜨려 버리고 그를 용서함으로써 그에게 자비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용서의 행위는 멘도사에게 해방을 안겨주고 그들을 위해 죽기까지 봉사할 결심을 하게 합니다. 그는 원주민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식민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예수회와 함께 싸우면서 사명의 수호자가 됩니다.
햇빛 속의 먼지처럼 멘도사의 죄는 가브리엘 신부와 높은 곳에 사는 과라니 종족에 가까워질수록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이처럼 기도의 과정에서 하느님 사랑의 빛 안에서의 진정한 자기 성찰은 필수적입니다. 내가 성찰한다기보다는 저절로 나의 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용서를 깨닫고 주님께 충실할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기도로 자신의 영혼을 하늘과 빛으로 들어 올리는 모든 이가 겪는 과정입니다.
하느님께 갈수록 나의 죄가 크게 보여서 “내 탓이오!”가 저절로 나오고 다른 사람들이 판단되지 않으며 그 큰 죄를 용서해 주신 분께 찬미와 영광이 나오고 그분의 뜻을 위해 목숨을 내어줄 마음이 생기면 기도한 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건 기도한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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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내우외환(內憂外患)’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나고 나면 내우외환은 대나무의 마디처럼 더 높이 자랄 수 있는 디딤돌이 되지만, 시련과 아픔의 순간은 힘들기 마련입니다.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 잘 날이 없다.’라고 합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는 없었던 일들이 본당에서는 파도처럼 밀려오곤 합니다. 오랜 동안 투석하는 어르신이 있습니다. 힘든 중에도 성체를 모시면서 기뻐하였습니다.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들이 병원에 있는 자매님이 있습니다. 남편은 재활운동하면 된다고 하고, 아들은 자가 호흡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며 미소 짓는 자매님을 보았습니다. 욥에게 시련과 고통이 스나미처럼 밀려왔듯이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이 있습니다. 잘 되는 사업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변호사가 일을 처리하지만 비용은 지불해야 합니다. 건강하던 아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다행히 아들은 건강을 회복해서 퇴원했습니다. 노상강도에게 가방을 빼앗겼습니다. 불편함이 있지만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합니다.
알렉산드르 푸쉬킨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저는 이 시(詩)를 깊이 묵상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삶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난과 절망이 파도처럼 밀려온 적도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제 삶에도 굴곡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제게 감당할 만큼의 용기와 위안을 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푸쉬킨의 글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요?
오늘 제1독서는 인생이 헛되다고 합니다. 모닥불이 아름답지만 재가 되듯이 건강했던 사람도, 지혜롭던 사람도, 권력을 지녔던 사람도, 부유했던 사람도 언젠가는 모두 한 줌의 흙이 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는 노랫말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 주는, 어둠을 밝게 비춰주는, 빛으로 하나가 되도록 이끌어주는 모닥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닥불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은 늙고 병들어 흙이 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깨달음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고, 천국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문화와 문명이 되었고, 역사와 신앙이 되었습니다. 마더데레사, 이태석 신부님은 기꺼이 모닥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이야기가 되었고 우리 삶의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면 결코 우리의 인생이 헛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부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의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권력, 명예, 재물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은 이미 넘치도록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 재가 되어 흙으로 돌아갈 것 같은 인생의 이야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밀알 하나가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만났지만 어떤 사람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에 집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끝나지 않는 모닥불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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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7-9: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 묻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간단히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한 선교의 효과는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헤로데 왕의 동요가 그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 세례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기도 했으며, 예언자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혹은 신명 18,15에서 말하듯이 다른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자 헤로데 왕은 가뜩이나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에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9절) 물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고 싶어 했다. 예수께 대한 소문은 꽤 영향이 컸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일을 제자들의 복음선포 활동에 연결 지어 볼 때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어떠한 자세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먼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사심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때 많은 사람이 우리의 삶을 보고 진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것이며,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 참된 삶을 통하여 복음의 향기가 이웃으로 퍼져나가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참 행복이 있을 것이다. 복음을 통하여 진정으로 내가 먼저 행복하여야 한다. 내가 신앙을 가지고 행복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그 신앙을 가지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내가 먼저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이때, 우리는 기쁘고도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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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허무로다, 허무!”(코헬 1,2)로 시작되는 코헬렛은 때로 독자를 당황하게 합니다. 유다교 안에서도 이 책을 경전에 포함시킬지를 두고 마지막 순간까지 주저하였습니다. 성경의 다른 책들과는 색깔이 다르고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코헬렛은 인간 지혜의 한계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보았던 것처럼 잠언에서는 인과응보, 그것도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인과응보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현실의 삶은 꼭 그렇게 질서가 있지만은 않습니다. 노고에 반드시 보람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코헬렛은 그런 세상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그러지 못합니다. 그가 이르게 되는 결론은 세상에 대한 밝은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지혜가 가지는 한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코헬렛 1장에서는 아직 거기까지 말하여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허무에는 분명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인간이 알 수 있다고, 또는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코헬렛은 인생의 신비를 다 파악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 머문다면, 화답송 시편이 이러한 인간에게 주는 대답이 되겠습니다. “저희 날수를” 헤아린다는 것도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인간, 덧없이 사라지는 인간에게 안식처는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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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헤 로 데>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7-9)
이 이야기는 23장에 있는 다음 이야기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루카 23,6-12)
앞의 9장 7절에 있는,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라는 말만 보면,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 때문에 헤로데가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23장 8절에 있는,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라는 말을 보면, 그에게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느낀 두려움은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미신적인 불안감’ 같은 것, 즉 세례자 요한의 귀신이 나타나서 해코지하지나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불안감이었을 것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 것은 ‘불순한 호기심’ 때문입니다. 23장 8절에 있는,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라는 말은, 헤로데는 그저 어떤 신기한 기적 같은 것을 보고 싶어 했을 뿐이고, 종교적인 이유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앞의 9장 9절에 있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헤로데의 말은, 자기가 세례자 요한을 죽였음을 확인하는 말이기도 하고,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루카복음과는 달리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헤로데가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14,2; 마르 6,16) 그러나 세 복음서를 전부 합해서 생각하면,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헤로데의 말은 ‘세례자 요한이 부활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죽은 요한이 예수라는 사람으로 환생했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한 말로 해석됩니다. (부활과 환생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환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요한이 예수라는 사람으로 환생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헤로데가 생각했더라도, 그는 그런 생각 때문에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고, ‘미신적인 불안감’을 느끼는 것으로 그친 것 같습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의 여론만 두려워했던 사람입니다.(마태 14,5) (아마도 그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도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 문제를 비판한 것 때문에,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백성에 대한 요한의 영향력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서 죽였을 것입니다. 뒤의 13장을 보면, 헤로데는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1-33)
번역문만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헤로데의 계획을 미리 알려 준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아니고, 실제로는 헤로데가 바리사이들을 보내서, “어서 이곳을 떠나라. 떠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라고 협박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헤로데가 그 바리사이들을 보냈음을 나타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도 죽이려고 한 것은, 예수님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가 나중에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예수님이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했습니다.(루카 23,11) 도대체 권력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이 그것을 차지하려고 그토록 애를 쓰고, 차지하면 잃을까 봐 두려워서 전전긍긍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비참하게 밀려나고.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린 다른 권력가의 말로를 보면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 채로 허무하고 비참하게 끝나는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가고... (신약성경에 세 명의 헤로데가 등장하는데, 세 명 다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야고 4,1-4)
인류 역사에서, 하느님을 등지고 살면서 세속의 권력과 재물만 욕심내다가 허무하고 비참하게 끝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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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되살아 나는 길!'>
헤로데, 곧 헤로데 대왕의 아들인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말씀과 치유기적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해 합니다. 헤로데에게 전해진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요한'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엘리야', 셋째는 '옛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헤로데는 이 세 가지 소문 중에서도 자기가 죽인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라는 소문을 듣고 더 당황해 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해 합니다. 그래서 큰 잘못이나 죄를 진 사람은 이 불편과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스스로 경찰서를 찾기도 합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은 고해소를 찾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니 헤로데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면서 그분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이들은 '죄에서 해방되려고 하는 사람들' 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 짓고도 사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회개의 길'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주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를, 회개하여 다시 되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돌아오는 이들의 죄를 결코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기뻐하시면서 잔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2-24)
다시 돌아갑시다! 그래서 함께 즐거운 잔치에 참여합시다! 그래서 불편과 불안으로부터 해방됩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렛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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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이셨나 봅니다.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꽤나 유명하셨나 봅니다.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 소문에 예수님께서는 …….
이천 년 동안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무성하였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삶의 처지에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때로는 거부하며 내친 결과가 예수님에 관한 무성한 소문으로 전해지고 또 전해졌겠지요. 소문을 다 믿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소문의 가치를 애써 무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찌 되었거나 소문을 통하여 교회는 지금까지 제 모습을 유지하고 다듬어져 왔으니까요.
문제는 다양한 소문을 듣고 불안해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어 한 것은 다른 뜻, 다른 권력, 다른 유명세를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죽인 헤로데가, 새로운 가르침을 얻어 새롭게 거듭나고자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헤로데의 호기심은 권력에 대한 애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소문에 헤로데는 당황하였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잘못이었음이, 그 잘못이 드러날까 불안했을 터이지요. 헤로데의 모습이 저의 일상 모습인 것 같아 헤로데의 마음에 한참이나 머물며 이 묵상 글을 적고 있습니다.
무성한 소문과 그에 따른 다양한 해석들에도 교회는 지금껏 여유로운 의젓함으로 살아왔습니다. 잘못과 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잘못과 흠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오로지 예수님의 자비만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소문이 어떻든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예수님 앞에 솔직히 서 있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요. 오늘도 여전히 끝기도 때 저는 하루 동안 저지른 잘못으로 아파하고 용서를 빌겠지요. 다만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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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갈릴래아와 페레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기원후 39년 통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들에 관한 소식을 듣고 몹시 당황합니다. ‘당황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디아포레오’는 신약 성경 전체에서 세 번 더 발견되는데(사도행전 2,12 ; 5,24 ; 10,17 참조), 그때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매우 특별하고 기묘한 행적을 목격한 놀라움과 당혹감을 표현합니다.
사실 헤로데를 그토록 당혹스럽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인지 엘리야인지 옛 예언자 가운데 하나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죽었던 이가 되살아났다는 바로 그 소문이었습니다. 죽은 이의 부활은 사실 내세의 존재와 의로운 생애에 대한 죽음 뒤의 보상(상선벌악)을 뜻하기에, 헤로데처럼 세상의 재물과 쾌락만을 탐닉하며 오늘만 사는 이는 커다란 두려움과 당혹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코헬렛의 저자는 노년에 이르러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인간의 유한한 본성과 반복되는 세상사는 그저 인생의 권태로움과 무상함을 일깨워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냉정한 성찰을 기반으로, 오직 하느님께서 모든 것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신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지혜를 찾으며 그분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삶을 이어 가는 가운데, 비로소 인생의 성공과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인생은 길어야 8, 90년이며, 세월이 지나고 돌아보면 찰나와도 같겠지요. 감정과 소유의 노예가 되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헤로데 같은 모습이 아니라, 일상의 권태와 무상함, 모순과 한계에도 흔들림 없이 하느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생명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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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9,7)
저는 아직도 호기심이 참 많습니다. 『호기심과 기쁨에는 공통된 속성이 있다. 긍정적인 경험에는 대부분 호기심과 기쁨이 어느 정도 깃들어 있다. 음악, 춤, 요가, 운동, 독서, 영화, 하이킹, 여행, 속 깊은 대화, 어린 시절의 놀이 등이 긍정적인 경험에 포함된다. 호기심의 감정적 패턴은 우리 뇌의 신경회로에서 나타난다. 우리 뇌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흥겨운 경험으로 인해 마약 성분이 섞인 도파민이 분출되는 현상을 확인할 것이다.』(토드 카시단의 「행복은 호기심을 타고 온다.」 중에서)
호기심은 누군가가 나에게 안겨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네요. 모든 것이 호기심의 대상이고 기쁨의 재료들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소임이 적어지고, 활동할 기회가 적어지다 보니 의욕이 떨어질 때 그 무엇인가에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저 역시도 시간적인 여유와 함께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니 밀려 두었던 호기심이 발동했었죠. 그래서 저는 새삼스럽게 ‘책 읽기’와 ‘여행과 걷기’ 등에 부쩍 많은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즐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결과 허리와 다리가 아픈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이런 호기심은 익숙하고 친숙한 것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고 새롭게 보는 것이 필요하고, 이런 삶의 호기심이 삶의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삶의 기쁨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헤로데는 사람들로부터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9,7)하고 전합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당황한 까닭이란 그 자신이 과거 행하였던 일 곧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었던 일’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9,7)라는 소문은 바로 그의 내면에 침잠해 있던 세례자 요한의 일에 대한 후회와 두려움의 느낌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물론 세례자 요한은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은 헤로데에게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9,9)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런 연유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은 사실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 깊은 곳, 잠재된 속 깊은 느낌은 바로 불안이며 두려움에서 기인하였다고 느껴집니다. 사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은 예수님을 더 잘 알고 더 많이 알고 싶어서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더더욱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회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천박한 호기심과 자신의 불안 요인을 자기 눈으로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흔히 큰 죄를 짓고는 불안하여 살기 힘들다, 고 합니다. 그래서 자수해서 광명 찾자, 는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어리석게 목을 벤 이후 끊임없이 자책하고 후회했지만, 그를 주검에 이르게 한 일로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과 불안에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일 뿐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그 내면 깊이에는 영혼의 질병과도 같은 불안과 두려움이 내재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살았으면서도 죽은 것과 같은 삶이기에 그 삶은 평안하고 평온할 수 없습니다. 우리 또한 헤로데처럼 우리 내면에 깊이 잠재되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참으로 상처 입은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만나 어제와 다른 참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호기심에서가 아닌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평화가 너와 함께!”(마르 6,50; 요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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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의 퓨 연구소(Pew Research Center)에서 과거보다 훨씬 오래 사는 데 대한 미국인의 태도를 조사했습니다. 응답자들은 암을 완치하고 인공 팔다리를 자유롭게 장치할 시대가 오리라는 데 대해 낙관했으며, 수명을 연장하는 의학의 발전들은 전체적으로 좋아지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절반 이상이 노화 과정을 늦추는 것은 이 사회에 오히려 나쁘다고 답변했습니다. 고령화로 경제적 부담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고, 세대 간의 협력이 줄어들어 가족 구조의 변화가 올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 밖에도 많은 문제로 이 사회에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렇다면 더 오래 살 수 있는 치료가 나온다면 받겠느냐는 질문에 어떻게 답변했을까요? 사회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에, 대부분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응답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전체 인구의 3분의 2 정도의 사람들은 치료를 적극적으로 받을 것이라 예상한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그렇지 않지만, 남은 그럴 것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는 남과 다를까요?
아무튼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기대수명은 점점 늘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일 것입니다. 남과 다른 나는 특별하니 더 오래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죽음보다 먼저 어떻게 지금을 사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삶은 죽음을 뛰어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어떻게 지금을 사느냐라는 사실을 잊어 버립니다.
오늘 복음에는 헤로데 영주가 나옵니다. 헤로데 영주는 헤로디아의 간계로 귀찮은 방해꾼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나도는 것입니다.
죽었던 요한이 부활하여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있다, 엘리야가 다시 살아났다,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등의 소문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예수님의 기적 활동을 보고 유다인들이 품었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헤로데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했던 일이 잘못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과거의 자기 잘못으로 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으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곧바로 뉘우침의 행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자기가 받을 벌,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벌을 떠올리며 두려워할 뿐입니다.
우리 역시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지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단순히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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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자비에 기뻐하라>
가끔 꿈 얘기를 듣습니다. 좋은 꿈을 꾸어서 복권을 샀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고 그 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험해도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긍정적으로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며 또 예언의 성격을 지녔다면 철저히 준비하면 됩니다. 꿈에 끌려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꿈대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좋지 않은 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꿈에 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꿈을 통해 더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시길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죄를 짓고 그 죄책감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행하여서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몸을 괴롭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저지른 과오나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해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도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죄의 종으로 익숙해져서 그냥 그대로 편안함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에 관한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 헤로데가 불안해하고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죗값을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예수님이 무서워진 것입니다. 사랑을 전하러 오신 분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심판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렇습니다." 내면에 굳은 심지가 있는 사람은 결코, 당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9)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에제 33,11) 혹시라도 마음의 불안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주님의 품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용서하시는데 더디지 않습니다. 우리가 머뭇거릴 뿐입니다. 혹 두렵습니까?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용서하시는 주님과 깊은 만남을 통해 자유를 기뻐하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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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만남>
루카 9,7-9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만남>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주님의 사람만이
오롯이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착한 사람만이
착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올곧은 사람만이
올곧으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부드러운 사람만이
부드러우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너그러운 사람만이
너그러우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깨끗한 사람만이
깨끗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주님의 사람만이
참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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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앞 장면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분의 제자들마저 그 권능을 행하는 것을 전해들은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당황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로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이 혼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따르면,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과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과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이 사람은 누구인가?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다.”(루카 9,9)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혹, 혹은 소문을 확인하거나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왜곡된 마음으로 업신여기고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를 루카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루카 23,11-12)
사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행한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면, 우리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몹시 불안할 때, 얼른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온갖 혼란과 의혹, 조바심과 노파심,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는 유혹의 순간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더 간곡히 부르시고 계실 때임을 알아차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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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9)
주님!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니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믿으시니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주시는 분.
그토록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니 당신은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분.
그토록 저를 사랑하시니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아시는 분.
그토록 훤히 저를 아시니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소중히 여기시니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존재,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사랑, 그 놀라움, 사랑이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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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허무의 병, 무지의 병>
-약(藥)은 사랑의 하느님뿐이다!-
사랑과 겸손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선물처럼 우리를 찾아오시듯 시(詩)도 그렇게 선물처럼 찾아옵니다.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참 맘에 드는 시가 찾아왔을 때 기쁨은 참으로 오래갑니다. 얼마전 “꽃”이라는 시가 찾아 왔고 그때도 나눴지만 곱게 피어난 맨드라미꽃이 너무 아름다워 지인에게 재차 시화(詩畫)를 부탁하여 어제 저녁 무렵, 세상사에 지쳐있는 많은 분들에게 선물했습니다. 사랑의 나눔도 중요하기에 저녁 묵상시간, 휴식시간에 나눴습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새삼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지요. 하루하루 꽃같은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꽃같이 기쁘게 살자는 것입니다. 8월 중순에 찾아온 시인데 지금도 기쁨과 향기로 남아있는 시입니다. 더불어 꽃과 관련된 잊지 못하는, 몇 번이나 인용한 시도 있습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가난한 자매가 꽃같은 미소로 꽃 한송이를 들고 왔기에 즉시 써드린 답시에 만족했고 행복했습니다. 정말 꽃같은 예쁜 영혼을 만나면 “꽃보다 예쁘다!” 감탄하곤 합니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아름다운 영혼, 꽃같은 영혼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매3주간 저녁성무일도 첫째 시편 후렴입니다.
“이스라엘의 집안들아 주님을 찬양하라,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시편135,3)
꽃다우신 이름을,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맛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을 능가하는 것은 지상에 없습니다. 바로 영혼의 병에,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치명적 영혼의 병, 무지의 병, 허무의 병에 약(藥)은 단하나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뿐임을 고백하는 위의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무의미한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꽃다운 섭리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무려 25년전 저를 찾아와 큰 위로를 줬던 “민들레꽃” 시도 생각납니다. 순간 창밖 샛노랗게 피어난 민들레꽃들이 하늘의 별처럼 보였습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다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바로 지금까지 내용들이 오늘 제1독서 코헬렛과 짧은 루카복음에 대한 답을 줍니다. 코헬렛을 성경에 넣느냐 역사상 큰 논난이 있었으나 성경에 속함으로 얼마나 영적사고가 풍부해졌는지 감사하게 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일부 생략했지만 단숨에 읽혀지는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체험적 진리의 말씀들입니다. 작자의 허무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이 갑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인 중세기의 대영성가 토마스 아 캠피스의 “코헬렛의 삶에 대한 대부분의 부정적 묘사는 최고의 지혜이니, 모든 것이 헛되고 덧없는 세상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우선적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라는 언급에 공감합니다.
생명과 하느님을 찾아 만나야 비로소 치유될 허무의 병, 무지의 병이요,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허무의 병, 무지의 병에 시달려 고생하기 전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을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친교의 사랑과 신뢰를 날로 두터이 하자는 것입니다. 삶은, 행복은, 천국은 선택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선택을 못해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상실로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지요!
오늘 제1독서의 주인공 헤로데 영주가 삶의 중심과 의미 상실의 전형적 본보기입니다. 요한 세례자를 죽임으로 대죄를 지은 헤로데는 예수님의 등장에 전전긍긍 당황해 하고 불안해 합니다. 애당초 하느님 중심의 삶도 없었던 우유부단한 헤로데에겐 답이, 약이 없습니다. 세상에 하느님 중심을 대체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 중심 자리에 우상들을 두고 방향과 중심, 의미를 잃고 지리멸렬한 혼돈과 방황의 삶을 살아가는지요. 헤로데는 오늘날도 무수합니다. 고맙게도 오늘 화답송 시편 90장이 허무의 병, 무지의 병에 대한 참 좋은 치유제가 됩니다. 시편 저자처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주님,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닐에 힘을 실어 주소서.”
얼마나 좋습니까.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고는 무지와 허무의 블랙홀, 심연에서, 늪에서 벗어날자 아무도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찬미의 사람들은 무지와 허무의 심연은 역설적으로 하느님 사랑의 충만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무지와 허무의 병에 대한 최고의 처방약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로 응답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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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9,9)
<약속된 것을 갈망하자!>
오늘 복음(루카9,7-9)은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라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더러는 '(세례자)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죄짓고는 못 산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를 두고 하는 속담처럼 들려옵니다.
오늘 독서(코헬1,2-11)에서 코헬렛 저자는 '태양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허무'라고 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코헬1,2-3)
코헬렛은 '인간의 한계', '인간이 지닌 지혜의 한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는 인간이 지닌 절대적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실체'가 절대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본질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허무이니 비관적으로 슬픔에 잠겨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 허무, 이 한계를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탐욕과 쾌락에 빠져 있었던 헤로데 앞에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권고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큰 것을 약속했고 우리에게는 더 큰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고 약속된 것을 갈망합시다.
쾌락은 일시적이고 형벌은 끝이 없습니다. 고통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2첼라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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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루카 9, 9)
정작 궁금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목을 베어 죽인
호기심어린
요한 세례자입니다.
소문으로는
그 사람의
실체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만남으로 시작하여
만남으로 끝나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소문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참된 만남을
먹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그 만남이 우리를
살게하는 힘입니다.
이와같이
참된 만남이
필요한 요즈음의
시간입니다.
소문에 우왕좌왕
하지 않는 신앙인이길
기도드립니다.
소문 속에는
또 다른 소문만이
나올 뿐입니다.
감싸주고
사랑해야 할
기도의 만남을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십니다.
서로의 삶에서
우리의 만남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기도드리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내가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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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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