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한과 대한 사이, 한겨울이라지만 올해는 영월 지역에 아직 이렇다 할 큰 눈이 오지 않아 지난해에 비해 나들이하기가 한결 수월합니다. 겨울마다 이맘때면 눈이 녹지 않아 툭하면 체인을 치고 오르내리며 애를 먹던 된고바위길도 지난 가을에 산림청 사방공사를 하면서 길 정비가 많이 된 탓에 눈이 덜한 지금까지는 별 무리 없이 다니고 있으니 송이골 길도 예전에 비해 참 많이 양반이 된 셈이지요.
다니기에는 불편하겠지만 겨울은 겨울답게 올 눈은 올만큼 오고 날씨도 추울 만큼 추워야 만물의 생장에 맞는 자연스러운 일일텐데, 아무래도 지구온난화의 탓인지 해가 갈수록 큰 강이 꽁꽁 얼던 어릴 적 맹추위는 이제 옛일이 되어버린 것 같군요. 사과 재배 산지도 대구나 충주 등의 중부 이남 지역에서 점차 올라 와 제가 사는 영월 지역도 이삼년 전부터 사과 재배 면적이 크게 늘고 있지요.
극지대의 빙하도 심각할 정도로 빠르게 녹고 있다니 각종 기상 이변이며 물 부족 현상이나 생태계 파괴 등 지구 환경문제야말로 지구촌 전체가 힘 모아야 할 시급한 과제인데, 돌이켜보면 자연과 역행하는 인간 위주, 물질 위주의 인류중심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 것에 다름 아니지요. 세상 모든 생명체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인데 어느 힘센 집단의 일방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이 지속된다면 부조화의 에너지는 전 생명체에 영향을 미쳐 어떤 식으로든지 균열, 폭발할 수밖에 없겠지요.
산골의 겨울 풍경 중에서 제가 특히 좋아하는 것을 몇 개 꼽으라면 별빛 흐르는 밤하늘과 더불어 두꺼운 얼음 밑으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 딱따구리 소리를 들 수 있을 것 같네요. 골바람 삭풍 속에서도 무심히 너울거리며 아래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와, 목탁소리처럼 때그르르 산중 고요를 깨는 언덕 위 딱따구리 소리는 자못 철학적인 데가 있습니다.
산골에서 보는 겨울 하늘의 별은 유난히 밝아서 사방 고요한 한밤중에 찬란하게 빛나는 별세계를 보노라면 투명한 바다와 같이 느껴지기도 해 제가 즐겨하는 밤중에 시간 보내기 놀이 중의 하나지요. 세상 만사가 그렇듯 자꾸만 관심을 갖고 마음을 주다 보면 정이 붙기 마련이어서, 늘 보는 언덕이요 길이고 개울이며 밤하늘이지만 사철 다른 그 모습에 은근히 정이 붙고 내 몸처럼 느껴져서 마음 속으로 말을 걸어볼 때가 많습니다.
골짜기 양지바른 곳은 눈이 거의 녹았지만 그늘진 곳은 아직 그대로네요. 나무에 가려 볕이 안 드는 음지쪽 개울물은 진작에 꽁꽁 얼어서 빙판으로 변해있고요. 그늘진 곳이 춥고 불편하기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양지만 있어서도 안 될 것 같군요. 나무만 하더라도 소나무처럼 양지쪽에서 잘 자라는 양수가 있고 단풍나무나 서어나무처럼 그늘을 좋아하는 음수가 있으니 해가 있으면 달이 있고 가을 있어야 봄이 있듯 세상은 두루 섞여 고루고루 살아야 하는가 봅니다.
그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옛 영화 '그늘과 양지'라는 영화가 생각나네요. 붉은 머리에 도도한 눈매, 볼륨 있는 몸매의 '수잔 헤이워드'가 여주인공을 맡은 영화였지요. '킬리만자로의 눈'이나 '나는 살고 싶다' 같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라면 나이 드신 분들은 기억이 날까요? 학창시절 제가 제일 좋아했던 외국 여배우로 '제니퍼 존스'라는 배우가 있었습니다. 윌리엄 홀덴과 같이 출연했던 영화 '모정'의 여주인공이라면 대개 아실텐데요.
'무기여 잘 있거라', '종착역' 같은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여주인공 제니퍼 존스를 기억하실텐데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로 '제니의 초상(Portrait of Jennie)'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조셉 코튼과 같이 공연한 작품인데 대강의 줄거리를 보자면 가난과 실의에 빠진 무명화가(조셉 코튼)에게 어느 겨울 날 제니(제니퍼 존스)라는 이름의 고아 소녀가 나타나서 알게 되는데, 어쩌다 한번씩 나타나는 제니는 볼 때마다 훌쩍훌쩍 커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숙녀가 되어버린 제니와 화가는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어느날 제니는 어디를 다녀와야 한다며 떠나고 소식이 없다. 제니를 찾아나선 화가는 제니가 다녔다는 학교에도 가보는데 제니라는 학생은 20년 전에 다녔던 기록이 있는 것이 아닌가? 폭풍우 치는 날 화가는 제니가 다녀오겠다던 섬으로 배를 타고 찾아가다 난파하고 해변에서 제니가 쓰던 스카프만 찾는다.
인간의 원초적 외로움에서 비롯된 사랑과 인간애에 대한 애절한 동경과 그리움을 그린 초자연적인 영화라고 할까요? 제니퍼 존스의 청초하고 신비한 이미지와 너무도 맞아 떨어지는 시공을 넘나드는 환상적인 영화여서 학창시절 여러날 잠 못들게 하던 꿈같은 영화였지요. 세월이 흘러 인간 제니퍼 존스는 이미 노령이 되어 아마도 저 세상 사람이 되었겠지만 추억 속의 제니퍼 존스는 영원히 불멸의 청초한 모습으로 제 마음 속에 남아있습니다.
영화 얘기를 하다 보니 글이 길어졌네요. 추억 속의 그리운 외국영화 몇 편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면서 오늘은 글을 줄일까요? 초원의 빛, 애수, 닥터 지바고, 젊은이의 양지, 마음의 행로, 페드라, 태양은 외로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돌아오지 않는 강, 스팅, 하이눈, 역마차, 제3의 사나이, 가스등, 철도원, 자전거 도둑, 형사, 쉘브르의 우산, 시민 케인, 카사블랑카, 금지된 장난, 부베의 연인....
-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데
마음 속 봄가을은 변함이 없구나
영월 송이골에서 보리피리 올림
출처: 블로그 송이골 편지(blog.daum.net/intonature/7860867) 글,사진: 보리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