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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학산 법광사
법광사는 포항시 북구 신광면 비학산 아래 있다. 비학산(飛鶴山)은 학이 알을 품고 있다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 정상 동편 중턱에 작은 산 모양의 불룩한 봉우리가 있는데 이곳을 등잔혈이라고 하는데, 이 혈에 묘를 쓰고 가까이 있으면 망하고 멀리 떠나야 잘 된다는 전설과 비학산에 묘를 쓰면 가문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여름철에 한발이 극심할 때면 주민이 뜻을 모아 기우제를 지내거나 인근 주민들이 묘를 파헤치기도 하여 종종 송사가 있기도 한다. 지금은 법광사에서 비학산 정상까지 우거진 수목과 아름다운 경관, 맑은 물의 정취에 매혹되어 많은 등산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법광사(法廣寺)는 신라 26대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왕명을 받고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 이름을 법광사라고 한 것은 신라 불교를 중흥시킨 법흥왕의 법자를 따서 불법을 널리 편다는 뜻이라고 한다. 진평왕은 여러 번 법광사 대웅전에 와서 직접 불공을 올렸으며, 대웅전에 걸었던 법광사라는 현판도 진평왕의 글씨였다고 전한다.
「법광사 석가불사리탑중수비(法廣寺 釋迦佛舍利塔重修碑)」가 전하는데 비문에 의하면 신라 24대 진흥왕 10년에 양나라 무제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처의 사리를 보내오자, 진흥왕이 궁으로 맞아 들였다. 그 뒤 진흥왕의 손자 진평왕이 원효에게 명하여 법광사를 짓게 했다고 한다.
또 비문에 보면, 비문을 작성하던 당시(1750년, 영조 26)에만 해도 2층의 대웅전, 금당, 향화전 등 525칸의 건물이 있던 대찰이었으나 1863년 방화로 불 타버렸다. 현재의 법광사는 1952년에 옛 법광사지 위에 세워진 것으로 옛 절터는 경북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유물로는 석가 불사리탑인 삼층석탑과 불상연화대좌, 쌍귀부 등이 있다.
석가 불사리탑은 신라 제42대 흥덕왕 3년(828년) 김균정이 창건한 왕실사원으로 제46대 문성왕대에 번창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 등의 조선시대 문헌에도 사찰의 이름과 위치 등이 정확히 기재되어 있다. 금당지는 외진주와 내진주 그리고 고막이돌을 갖춘 이중구조의 폐쇄적 건물로 감은사 금당지 및 불국사 대웅전과 같이 사방으로 출입문과 계단을 갖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8~9세기) 건물구조를 보이고 있다. 또한 조선후기에 세운 '석가불사리탑' 비문에는 5칸 중층 건물로 기록돼 있다.연화석불좌대는 소실된 대웅전 석가불의 좌대로 추측되는데, 높이 1.1m, 직경 1.1m, 직경 2.2m, 둘레 7.3m이며 귀부는 창건 당시 사적비의 좌대라고 하며 높이 1.4m, 직경 1.8m, 원경 0.5m이다. 석가불사리탑은 인도 석가모니 진산사리(眞身舍利) 22립(粒)을 보관하고 왕족의 혈통을 계승하여 삼국통일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 탑을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탑의 높이는 4.2m이다. 법광사 북쪽방향 150m 지점에는 신라 26대 진평왕의 위패를 모신 '숭안전'이 있다 846년(문성왕 8) 지금의 위치로 이건되었는데, 「법광사 석가불사리탑중수비(法廣寺 釋迦佛舍利塔重修碑)」에 보면 조선시대에 중수하면서 한 차례 사리장엄이 열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그 날 밤 사리를 열자 서광이 하늘까지 이어져 비쳤으며, 닷새 동안 둘레를 온통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이 고을을 신광현(神光縣)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가람배치
한적한 작은 마을을 지나 법광사 가는 길은 고향 뒷산을 오르는 양 편안하다. 감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공터에 차를 세우고 또작은 계곡을 건너면 바로 법광사가 나온다. 한때 525칸의 건물이 있던 대찰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시골의 호젓한 절집이다.
법광사의 주전각은 원통전이다. 높은 석축 위에 원통전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로 산령각이 있으며 마당엔 근래에 세운 삼층석탑이 있다. 좁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원통전 좌우로 요사와 종무소가 있다.
법광사 뒤편으로 돌아가면 옛 절터가 나온다. 옛 절터는 모두 밭으로 변해버렸고 석가불사리탑인 삼층석탑이 홀로 푸른 하늘을 이고 서 있다. 밭 사이에 불상연화대좌, 쌍귀부 등이 남아 있고 밭 중간 중간에 건물의 주춧돌이 보인다.법광사 담장을 따라 사리탑 가는 길은 어릴 적 학교에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처럼 정겹다. 굽이돌아 있는 담장을 따라 비학산의 아름다운 줄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시리도록 맑다. 곱게 물들어 내리는 감잎 위로 떨어진 연시를 어린 날을 생각하며 주워 먹으면 그야말로 꿀맛이다. 또한 사리탑 가는 길에는 노랗게 익은 탱자나무 울타리가 눈길을 끈다.
설화-법광사(法廣寺)와 천곡사(泉谷寺)의 폐사(廢寺)
신광면 법광리에 있는 법광사(法廣寺, 法光寺 라고도 적음)는 신라 진평왕 때 왕명으로 창건된 고찰이자 525칸의 건물을 가진거찰로서 현 보경사, 천곡사, 광흥사 등이 그 말사 또는 분원이었다 한다. 조선 철종 때 한 초부(樵夫)의 방황에 의해 소실됨으로써 폐사되었다고 하는데, 천곡사의 폐사와도 관련 있는 이에 얽힌 설화는 다음과 같다.
조선 철종 말년(1863)의 일이다. 법광사가 소실되기 약 3개월 전, 비학산 자락에 있는 신광면 죽성리(대골)에 열일곱 살 된 박기래(朴耆來)라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밥에 소년이 자다가 일어나 소변을 보는데, 현 법광사에서 화광등(火光燈) 같은 큰 불덩이가 하늘 높이 치솟아 비학산 정상부까지 이르러서는 남으로 날아가는데, 법광사 일대가 대낮같이 밝았다. 박 소년이 다음날 서모 노인(80여 세, 驛吏이자 풍수)라는 노인에게 이야기하였더니 서 노인은 탄식하며,“이제 법광사의 기운과 산천정기도 다 떠나는구나 법광사는 가까운 장래에 폐사가 될 것이고, 양산 통도사(通度寺)가 이제 융성함이 극에 달할 것이다.” 하였다. 박 소년이 그 이유를 물으니 “비학산을 중심으로 한 신광 지역은 예로부터 학이 포란안호지형국(抱卵 案湖之形局: 호수에서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데, 호리동 계곡을 뚫고 메워 호수가 없어진 지 천년이 지났다. 학은 호숫가에 서식하는 동물이므로 호수가 없어진 이 땅에 비학산의 기운이 오래도록 머물러 있을 리 만무한데, 어젯밤 보았다는 불덩이는 이땅의 정기라, 한강수약(山江水弱), 즉 산은 강하고 물은 약하니 어찌 오래도록 머물러 있겠는가. 그 정기가 남쪽으로 날아갔다 하니 반드시‘산이 강하고 물이 많은(山江水多)’통도사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머지 않아 법광사는 폐사될 것임, 비학산 남쪽 30리 도음산 아래의 천곡사도 폐사가 될 것이다.”하였다.법광사는 폐사된다 하더라도 천곡사는 무슨 이유가 있어 폐사되느냐고 물으니 “비학산 지맥이므로 비학산 정기가 떠나면 천곡사도 폐사가 된다. 법광사는 연내에 폐사가 되고, 천곡사는 상당한 세상의 변화가 있은 후에 폐사가 될 것이다. 성지(性智)의 『요남비결(遼南秘訣)』이라는 예언서에
島胡來侵 鐵馬橫行 섬오랑캐가 침략하여 철마가 횡행하고
胡人模倣 人飛千里 오랑캐(서양인)를 모방하여 천리를 날아가며
毛人飛來 以光殺人 털 많은 사람들이 날아와서 빛으로 사람을 죽이고
萬里遠程 不面交話 멀리 떨어진곳에서도 얼굴을 대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며
三韓分土 鼎立相爭 삼한땅이 나누어져 서로 싸우고
百里遠距 人因絶無 백 리나 떨어진 곳에 사람이 형적이 없고
飛鶴山下 砲聲振動 비학산 아래 포성이 진동하면
千年古家 一朝火塵 천년 고가가 하루아침에 티끌이 된다.
이라 하였는데, 비학산 아래의 천년 고가는 법광사와 천곡사뿐이니 50년 후가 되느냐 100년 후가 되느냐는 속단하기 어려우나, 천곡사도 결국은 폐사가 될 것이다.” 서노인은 계속하여 “鐵馬橫行이라든가 人飛千里이라든가 不面交話라든가 三韓分土 라든가 하는 것은 기계문명이 발달할 때 천곡사도 폐사가 된다는 의미인데, 지금의 발달 속도로 볼 때 앞으로 50년 이내가 될 것이다.”
박 소년은 서 노인의 말이 도무지 뭐가 뭔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 2개월 후에 법광사가 소실로 폐사되자 신기하게 여겼다 한다. 이 예언에서‘섬오랑캐’라 함은 일본을 말하며,‘철마’는 기차를,‘서양인을 모방하여 천리를 날아간다’는 것은 비행기의 이용을,‘털 많은 사람’이란 서양인을,‘빛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원자폭탄 투하를,‘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전화사용을, ‘삼한이 나누어져 서로 싸운다’는 것은 남북분단과 6.25 전쟁을,‘백 리나 떨어진 곳에 사람이 형적이 없다’는 것은 6.25 전쟁의 침상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여간 이 예언은 8. 15 광복과 찾아온 남북 분단, 그리고 6.25 전쟁, 그로 인한 천곡사의 폐사로 현실화됨으로써 신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월정지, 189쪽)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절터로 올라가는 막바지 왼편 논 가운데 있다. 아랫부분은 땅에 묻혀있고 윗부분만 160cm쯤 드러나 있다. 지주의 머리는 2단으로 호를 이루었으며 그 안쪽에 네모난 간구를 마련하였다. 바깥면은 위로부터 90cm 지점에서부터 안쪽을 살짝 깎아 잘록하게 만들었다. 안쪽 면을 제외한 3면에는 세로 줄무늬로 장식하였다. 지주 가장자리를 따라 6cm 너비로 도드라지게 모를 접어 띠처럼 둘렀다. 바깥면에는 중심선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솟아오른 줄무늬 하나를 길게 새겼다.
금당터는 넓은 밭 한가운데 있다. 한변의 길이가 약 20m, 높이 1m쯤 되는 네모난 흙단으로 되어있다.「석가불사리탑비」에 따르면 18C 중반까지 대웅전 말고 따로 2층 금당이 있었다고 한다. 주춧돌은 사방을 돌아가며 안쪽과 바깥쪽으로 두 줄, 불상대좌 주위로 4개가 남아있다. 안두리는 주춧돌의 배열로 보아 정면, 측면 3칸이었을 것이다. 주춧돌, 고막이돌, 신방석이 모두 남아있다. 앞면과 뒷면의 가운데 신방석이 있어 이곳에 문 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주춧돌과 주춧돌을 연결하는 고막이돌이 4면에 둘러져 있어 안두리에도 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깥두리는 정면, 측면 5칸으로 주춧돌과 고막이돌이 북쪽과 남쪽에 대부분 남아있다. 남북 가운데 칸에 신방석이 남아있어 이곳에 출입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뒤 양면에도 문이 있었겠지만 신방석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바깥두리 사방 벽에는 벽체가 있었을 것이다.금당은 사방으로 계단이 있는 높직한 기단 위에 4면에 출입문이 있는 정면, 측면 5칸의 2층 건물이었을 것이다. 계단 문을 들어가면 바깥벽과 안벽 사이 통로, 곧 회랑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는 녹색 유약이 발린 네모난 綠油塼이 깔려있었다. 이 점은 금당터 주변에 흩어져 있는 전돌로 알 수 있다. 그 통로를 따라 탑돌이 하듯 세 바퀴 돈 다음 다시 문을 열고 높은 돌 대좌에 앉은 붓다를 참배할 수 있었다. 2층까지 트인 이 공간에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 녹유전들이 반사되어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연화 석불좌대 및 탑비 좌대(蓮花石佛座臺 塔碑座臺)
경내에 있는 이 좌대는 소실된 대웅전 석가불의 좌대로 추측되는데, 높이 110㎝, 지름 220㎝, 둘레 730㎝이다. 귀부(龜趺)는 창건 당시 사적비의 좌대라고 하며, 높이 140㎝, 지름 180㎝이다.
석가불사리탑 (釋迦佛 舍利塔)
이 석탑은 현재 사찰 중심부에서 서남쪽 언덕 위에 있는데 현재는 탑 주위에 담장이 둘러져 있고, 옆에는 1750년(영조 26)에 세운 비석이 있다. 옆에 있는 비문에 의해 828년(흥덕왕 3)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1968년에 도굴되어 내부에 봉안된 사리장엄이 도난 되었다가 곧 회수되었다. 사리장엄의 하나로 발견된 탑지석의 내용에 의하면 828년(흥덕왕 3) 탑을 세우고 846년(문성왕 8) 지금의 위치로 이건되었는데, 당시 왕실의 지원이 있었음이 암시되어 있다. 탑의 높이는 420㎝이다.
석가불사리탑 사리장엄 (釋迦佛舍利塔 舍利莊嚴)
1968년 석탑이 도굴되어 사리장엄이 불법 반출되었다가 나중에 회수되었다. 이 때 되찾은 사리장엄으로는 청동제 및 납석제(蠟石製) 사리호 각 1개씩과 탑지석 2매 등이 있다. 특히 납석제 사리호 안에는 사리 8립(粒)이 들어 있었다.
청동제 및 납석제 호는 둘 다 형태가 둥그스름하여 인도 초기 사리장엄구로 유행하였던 원구형(圓球形) 사리기의 영향을 느낀다. 납석제 사리호는 높이 4.3㎝이며 겉면에 먹으로 쓴 크기 약 1㎝의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 글씨가 4행으로 적혀 있는데, 서체가 온후하며 묵흔(墨痕)도 비교적 선명하다. 전체적 양식으로 보아 신라 하대에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라 하대와 조선조 후기에 각각 만들어진 2개의 탑지석 각 면에는 이탑(移塔)의 연월이나 그 때의 관계기록뿐 아니라, 그보다 앞서는 건 탑 및 후대 중수의 연월과 인명이 새겨져 있다. 그리하여 신라 법광사 석탑에 관한 확실한 관계지견을 얻을 수 있으며, 법광사 삼층석탑이 828년에 조성되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어 신라 하대 석탑의 표준 작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같은 의미에서 법광사의 사리장엄을 비롯하여 탑지석, 중수비 등은 우리의 금속공예사 및 탑파사에 있어 매우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탑지석이란 탑을 세운 인연과 발원자 등을 적은 글로 중국에서 흔히 보이는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사리장엄에 포함되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다. 이 탑지석에는 건탑(建塔)과 이건(移建) 및 2회에 걸친 중수 사실이 각각 그 연대를 달리하면서 각 면에 새겨져 있었다. 또한 훗날 희강왕(僖康王)에 오르는 김균정(金均貞, ?~836)이 사단월(寺檀越)이었다는 내용이 보여 대구 팔공산 동화사와 비교해서 무척 흥미롭다. 왜냐하면 동화사는 왕위를 놓고 김균정과 적대하였던 민애왕(敏哀王, ?~839)의 원찰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였는데, 그들의 원당과 원탑이 이같이 따로 건립되었던 것이다. 사리장엄구 일괄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보봉당대선사 부도및 비
쌍귀부
진평왕은 선덕여왕의 아버지로 화랑세기 기록으롱 미실이란 여인의 세력때문에 더욱 법력의 기운을 얻고자 불사에 힘을 기울인다. 쌍귀부의 발가락 표현에서 느끼는 것은 사실적인 표현 기법을 엿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조각 솜씨를 엿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비록 깨져 그 형체를 알아 보기가 쉽지 않지만 통일신라 시대에 유행하던 두 마리의 거북이가 한 몸이 되어 있는 것은 확인 할 수 있다. 이곳 법광사는 신라 왕실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며 법광사의 주요 위상을 쌍귀부를 통해서도 익히 알리고 있다.
崇安殿은 절터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간 비켜선 뒤쪽에 있다. 진평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 신라 제26대 진평왕(579~632 재위)은 이름은 白淨(석가의 아버지 이름)이다. 진평은 시호이다. 이 무렵 신라 왕가의 족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제24대 진흥왕(540~576 재위)의 아버지는 입종갈문왕, 어머니는 只召부인이다. 입종갈문왕은 천전리 각석 명문에도 나타나는 사람이다. 지소부인은 제23대 법흥왕(514~540 재위)과 보도부인 박씨의 따님이다.
② 진흥왕은 사도부인 박씨와 銅輪을, 지도부인 사이에서 舍輪(또는 金輪)을 낳는다.
③ 舍輪(또는 金輪)은 제25대 眞智王(576~579)이 된다. 진지왕은「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도화녀와 비형랑」조에 따르면, “나라를 다스린 지 4년에 주색에 빠지고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럽자 나랏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이 기록처럼 그렇게 나쁜 왕은 아닐지도 모른다. 무슨 개혁을 하려하자 화백들과 갈등으로 쫓겨났을 것이다.
④ 그래서 왕통은 동륜 쪽으로 넘어간다. 동륜과 입종갈문왕의 따님 萬戶夫人 사이에서 白淨, 진정갈문왕 白飯, 진안갈문왕 國飯(또는 國分)이 태어난다. 진평왕의 동생 白飯과 國飯이란 이름은 석가모니의 아버지인 정반왕의 동생 白飯과 斛飯(Droṇodanarāja)에서 각각 따왔을 것이다.
⑤ 백정이 제26대 진평왕(579~632)이 된다. 아버지는 제24대 진흥왕(540~576)의 태자인 銅輪, 어머니는 萬戶부인으로 立宗葛文王의 딸이다.
⑥ 진평왕의 첫째 비는 麻倻夫人(석가의 어머니), 둘째 비는 勝鬘부인(석가 당시 사위국 파사익왕의 딸로「승만경」을 설한 승만부인)이다. 진평왕은 마야부인과 德曼과 天明夫人을 낳는다. 덕만이 제27대 善德女王(632~647)이 된다.
⑦ 동륜의 아들이며, 진평왕의 동생인 진안갈문왕 국반은 월명부인 박씨와 勝曼을 낳는다. 승만은 제28대 眞德女王(647~654)이다. 그러니까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사촌간이다.
⑧ 진지왕 舍輪은 기오공의 따님 知道夫人과 龍春(文興大王)을 낳는다. 용춘은 진평왕 따님 천명부인과 春秋를 낳는데, 그가 제29대 太宗武烈王(654~661)이다. 그러니까 선덕왕과 김춘추는 외가로는 이모, 친가로는 6촌 남매 사이이다.
⑨ 태종무열왕은 舒炫(김유신의 아버지)의 따님 文明王后 문희와 法敏을 낳는데 이이가 제30대 文武王(661~681)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처남 매부 사이이고, 문무왕은 김유신의 생질이다. 문무왕은 자의왕후와 제31대 神文王(681~692) 政明을 낳는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따님 김씨부인과 제32대 孝昭王(692~702)을 낳고, 효소왕의 동생이 제33대 聖德王(702~737)이 된다. 가야의 마지막 왕 金仇亥 곧 仇衡王의 아드님은 武力이고 또 그 아드님이 舒玄이다. 서현은 진흥왕의 형제인 熟訖宗의 따님인 萬明夫人과 결혼하여 김유신, 문명왕후, 보희를 낳는다.
진영각은 조사각이라고도 하며 고승대덕의 영정을 봉안하는 곳이다. 조사라고 하는 말은 어느 학파를 창건하거나 또는 크게 중흥시킨 선덕으로서 후학들에게 존경을 받는 큰스님을 일컫는 말로 특히 선가에서 즐겨쓰는 말이다.
원통전 (圓通殿)
원통전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과 측면 2칸으로 되어있다. 안에는 지장보살존상, 관음보살, 석가여래 존상, 아미타존상, 석조 보살존상, 후불탱, 좌우부처로는 문수보살, 약사여래탱, 신중탱이 있다.
白衣觀音無說說 백의관음은 말없이 설법하시네.
南巡童子不聞聞 남순동자는 들은바 없이 듣노라.
甁上錄楊三際夏 꽃병 위 푸른 버들 삼제의 여름이요
巖前翠竹十方春 바위 앞 푸른 대나무 시방세계 봄이로다.
배례석은 현재의 법광사의 마당, 새로 만든 탑 앞에 있다. 지대석과 대석이 각각 다른 돌이다. 지대석은 가로 174cm, 세로 93cm이다. 앞면에 1개 뒷면에 2개 모두 3개의 돌로 짜맞추고 윗면 가장자리에 차츰 줄여가며 3단의 굄대를 만들었다. 대석은 통돌로 다듬었는데, 가로 152cm, 세로 75cm, 높이 25cm이다. 앞면과 뒷면에 똑같이 3개씩, 양쪽 옆면에 2개씩 안상을 새겼다. 윗면에는 지름 37cm의 연꽃을 돋을새김하였다. 연꽃무늬는 가운데 있지 않고 앞쪽으로 많이 당겨져 있는데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연꽃무늬는 신라 와당에서 보는 연꽃과 흡사하다.
원통전의 두분의 석가모니불,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원통전의 지장보살상,법륜을 들고 있다.
산령각 (山靈閣)
산령각은 맞배지붕에 정면 측면 각 1칸으로 되어 있으며 안에는 산신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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