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여 년 만에 찾은 심곡사>/구연식
공직에서 퇴직 전에는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가장 여유 있는 시간은 방학 때였으니 마음 놓고 여행 한번 못했다. 퇴직 후에는 여유 있는 시간이 많아서 가끔은 초등학교 시절 소풍 행선지를 찾아보곤 한다. 초등학교 소풍 행선지가 아내는 군산지역이고 나는 익산지역이어서 내 중심으로 갈 때마다 친정과 시댁의 선입감인지 아내의 싫은 눈치가 보인다. 그때마다 헛웃음을 치면서 분위기는 아내 중심으로 목적지는 내 중심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그래서 점심 외식과 모든 것은 아내 중심으로 양보하고 주말이면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한나절을 드라이브 코스로 보내고 있다. 점심은 아내가 좋아하는 쌈밥정식을 먹을 때는 미륵산 주위에서 시간을 보낸다.
오늘은 임인년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코로나 19 때문에 해넘이 해돋이 행사를 금지하니 어느 때보다 드라이브 족이 많아졌다. 단골 식당은 사장이 쌈 채소를 직접 농장에서 재배 운영하는 식당으로 각종 채소류를 식탁에 탑처럼 싸놓은 풍성한 쌈 채소에 이끌려 또 오게 되는 단골인지도 모른다. 식당에 들어서니 벌써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있다. 눈을 휘둥그레지는 모습으로 입을 크게 벌려 주위 사람들은 의식하지 않고 쌈밥을 몰아넣기에 모두 다 바쁘다. 점심을 마치고 심곡사로 향했다.
심곡사는 익산시 금마면이 아닌 낭산면에 있기에 60여 년 전에는 도로 사정도, 대중교통 수단도 미미하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금마초등학교에서는 꽤 먼 거리였다. 소풍은 가을로 기억된다. 금마초등학교에서 금마 저수지를 돌아서 미륵산과 용화산의 경계인 골짜기에 겨우 숲이 누워있는 정도의 길이였다. 다람쥐 길 같은 소로小路를 지금 생각하면 밀림 탐험의 기분으로 걸었는가 싶다. 길섶에 풀씨는 탱글탱글 영글어 살짝만 스쳐도 톡 터져 나와 얼굴의 땀에 달라붙거나 바짓가랑이에 붙어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내가 사는 마을은 야산 들녘에 자리 잡은 농촌 마을이어서 나무나 큰 바위 그리고 숲들이 생소하기만 했다.
때가 가을이고 골짜기 물웅덩이를 건널 때도 있어 한가히 놀던 송사리 떼는 놀라서 큰 눈을 부릅뜨고 돌 틈으로 숨고, 느림보 가제는 엉금엄금 기어서 물가 숲으로 머리를 감춘다. 징그럽게 지나가는 뱀 모습이나, 숲속에서 단잠을 깬 토끼가 놀라서 후다닥 뛰쳐나갈 때는 모두 다 아~악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앞 친구의 옷자락을 움켜 줬던 소풍 길이었다. 그렇게 가슴 콩닥거리면서 3시간 정도 걸어서 심곡사에 도착했었다.
돌아갈 시간이 급해서인지 점심만 간단히 먹고 조금 휴식 후에 바로 학교로 돌아간다고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우리 반 동료 중에는 우리 마을 친구가 아홉 명으로 기억된다. 그중에는 동갑인 사촌 누나도 있었고,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사촌 동생도 그리고 나보다 한 살 위인 육촌 형도 같은 반으로 다녔다. 점심시간에는 그중 제일 잘살던 큰집 누나가 쌀밥 누룽지를 나에게 주어서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보다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대충 점심을 때우고 절 주변을 돌아보는데 처음 보는 큰 호두나무가 있었다. 나무 아래 노란 잔디 숲에 열매가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데 껍질은 단단하며 울퉁불퉁하고 작은 골이 파여 있었다. 신기하고 처음 본 열매라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어 잽싸게 주워서 아랫바지 호주머니가 볼록 튀어나오게 몰아넣었다. 소풍을 마치고 집에 오니 어두컴컴한 초가을 저녁인데도 부모님은 논밭에서 일하시고 아직 집에는 안 오셔서 그냥 아랫목 벽을 기대고 앉아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던 멀고 피곤했던 소풍 길이었다. 오늘은 자가용으로 심곡사 입구 장암마을 주차장까지 금마에서 10여 분 만에 도착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장암마을 주차장에서 심곡사 주차장까지는 자동차로 5분 정도이지만 도보로 오를 때는 20여 분 걸린다. 아내와 심곡사를 향해 걸었다. 간밤에 내린 잔설이 길 위에 그대로 얼어붙어서 밟을 때마다 눈 깨지는 소리가 바스락바스락하면서 이야기를 걸어오는 것 같이 정답게 들렸다. 장암마을은 큰 산 아래에서 터를 잡은 옛날 마을이어서 집은 현대식 건축으로 바뀌어 있으나, 담은 옛날 그대로여서 제주도의 돌담과 흡사하다. 돌담을 에워싸고 기어오른 담쟁이덩굴은 큰 구렁이 몸처럼 요리조리 돌 틈을 비비고 기어올라서 섬뜩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물망처럼 얽혀 있어 태풍이 불어도 끄떡없는 안정감과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준다.
새해 첫날부터 불자佛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으러 올라갔는지, 눈 위에는 여러 대의 자동차 바퀴 흔적이 부처님이 계시는 곳을 안내하듯 실타래처럼 이어져 올라갔다. 나는 아내와 미끄럼 길에 혹시라도 낙상을 예상하여 두 손을 외투밖에 내밀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면서 조심조심 걸어 올라갔다. 60여 년 전 초등학교 시절에는 호기심과 신비의 기분으로 이 길을 걸어 올라서 호두알 속에 영롱한 신비를 가득 채워 갔는데, 오늘은 그간 삶 속에서 온갖 홍진紅塵으로 버무린 구슬을 안고 왔는지 발끝은 미끄럽고 가슴은 무거워서 한발 옮길 때마다 숨이 가쁘고 힘들어서 속세의 중생衆生이 틀림없다.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홍진을 내려놓으니 어느 사이 심신이 가뿐하다. 드디어 대웅전 경내에 도착했다. 그때 담임선생님의 호루라기와 목소리가 들리고 친구들의 왁자지껄 소리도 들린다. 그런데 그 호두나무는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초등학교 시절 보았을 때도 아름드리나무였으니 100년이 넘었을 것이고 지금까지 살았다면 거의 150년이 넘어서 나를 기다리다가 고사枯死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썩은 밑동을 찾아봐도 허탕이다.
가장 언짢은 것은 나무는 한 조각도 들어가지 않은 철근 시멘트로 대웅전보다 몇 배나 크게 신축해 놓은 매머드급 야외 산사 공연장이다. 일 년에 한두 번 사용하자고 설치했나? 더구나 2년 연속 코로나 19 위기로 방치하여 모서리의 철근은 붉은 녹물로 상처를 드러나 있고 거미줄과 산 벌레들의 거처로 변해버려 을씨년스럽게 하고 있다. 하기야 어느 종교시설도 이제는 종교 이념과 신자 중심보다 고객 중심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세계적 추세이니 초개草芥 같은 내가 어찌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부처님의 아량을 헤아릴까? 속 좁은 생각일 수 있다. 그렇다! 세상을 바꿀만한 사상가도 아닌 내가 부처님의 섭리에 뛰어든 느낌이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차장에 도착했다.
60여 년 전의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모든 호주머니 욕심을 털어버리고 나의 애마愛馬에 타고 룸 밀러를 보니 얼굴의 주름 골짜기에는 아직도 못 버린 세파의 땟국물이 그대로 고여 있다. 그런 것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애마는 뽀얀 먼지를 내뿜으며 서동과 선화공주의 영혼이 깃든 미륵산 골짜기를 미끄러져 나가고 있다. (202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