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성경(성서)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기독교 근본주의의 특징이다. 근대 미국 기독교계에서는 유럽에서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에서 벗어난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오자, 축자영감설에 근거한 성서무오설과 예수의 신성을 주장하는 원리주의 신학이 등장한다. 이들은 1910년에서 1915년사이에 자신들의 교리를 담은 10여 권의 작은 책 《근본》(the Fundamentals)을 무료로 배포했기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라고 불리게 된다. 미국 남부의 이른바 성서 지대에서 특히 세력이 강한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짓는 이원론에 근거하여 정치에 무관심하던 모습에서 탈피, 신복음주의, 오순절교회 등과 더불어 국수주의, 반공주의 등이 특징인 기독교 우파라는 이름으로 정치세력화되고 있다. 또한 근본주의자들은 진화론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어서 1925년 테네시 주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쳤다면서 스콥스라는 생물교사에게 벌금 100달러를 물린 원숭이 재판이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한국에서도 창조과학으로 불리면서 기독교계 과학자들이 창조론을 과학적 사실로 입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모습들은 근본주의자들의 성서관인 축자영감설의 특징중 하나가 성서는 글자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이므로, 성서의 기록은 역사적이나 과학적인 사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1] 하지만 모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진화론에 대해 반대한 것은 아니어서, 성서무오설을 확신한 벤저민 워필드의 경우 '진화론이 비성서적이라는 근거를 성서에서 찾을 수 없다'는 주장을 했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주요교리
예수의 신성-예수는 참된 하나님이다.
예수의 대인속죄[3]
예수의 육체적 부활
예수의 동정녀 탄생
축자영감설에 기반한 성서무오설
전천년주의[4]
한국 기독교 근본주의 초기 개신교 선교 한국 개신교는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 이유는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출신지인 미국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소수에 불과했다. 실례로 미국 성공회, 장로교, 감리교는 대부분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었고, 근본주의 신학은 침례교 등의 일부 교파에서만 대다수 존재했다.[5]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학교 설립(연세대학교, 숭실대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성서, 천로역정을 비롯한 기독교 문서 번역, 의료 활동 등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지만, 한국인의 독립운동, 신학 공부, 개방적이거나 진보적인 신학 태도를 정죄하거나 은근히 탄압하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6]
미군정 시대 일본인들의 퇴각으로 통치행정에 심각한 공백이 생기자, 개신교가 대부분인 미군정은 행정상의 공백을 메꾸면서 친미적 인사를 등용했다. 당시 미군정에 한국인을 고용하도록 권하는 임무는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의 아들인 윌리엄스(G. Z. Williams) 해군 대령이 맡았는데 그는 주로 개신교 신자들을 천거하였다.
이승만 초대대통령 시대 그 결과 제1공화국의 주요 국가기관과 고위직에는 개신교 인사들이 광범위하게 진출했다.[7] 이승만 초대대통령은 감리교 장로였으며, 이기붕부통령은 감리교회의 집사였다.
이승만 정권의 개신교 편향정책 해방 직후 당시 개신교계의 지도급 인사이자 장로교 성직자들이었던 김재준과 한경직 목사는 미군정의 도움으로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위해 세운 천리교 재단을 접수하였다. 천리교 본부가 있던 동자동에는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의 전신)와 성남교회가 창설되었고, 가장 큰 천리교 종교행사장소가 있던 저동에는 영락교회(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그리고 두 번째로 큰 천리교 종교행사장소가 있던 동사헌정에는 경동교회(한국 기독교 장로회)가 창설되었다. 이 시기의 개신교는 선교활동 및 교세확장에 유리한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 되었다. 미군정하에서 크리스마스가 국가의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며, 당시 국영방송의 성격을 지니고 있던 서울방송을 통하여 기독교 교리가 일요일마다 전파되었다. 1951년에는 대통령령으로 군종제도가 시행되면서 개신교가 최초로 참여하였고, 이후 1957년에 이르러 불교와 천주교도 군종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현재는 원불교도 군종제도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전쟁 시대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발생한 한국전쟁당시 개신교는 천주교, 정교회, 성공회와 더불어 인민군들과 공산당원에 의해 성직자들과 교인들이 살해당하거나 납북당한 수난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일부 극우파 목사들이 매카시즘을 주장할정도로 유신론을 부정하는 유물론적 공산주의에 대하여 뿌리깊은 반공주의를 갖고 있다.
군사 정권 한국 개신교는 교회의 보호와 교세 확장을 위해 1962년부터 1987년까지 군인들이 정치를 한 군사정권 시기에 당시 경제논리와 성장주의 모델을 그대로 받아들였다.[8]이 시기에 한국 개신교회는 Explo '74와 같은 대형 집회와 한민족의 개신교 신자화를 위한 대대적인 전도 운동을 벌였고 복음화에 공헌한 바 있으며, 군사정권에 대해서 한국 개신교회는 반공주의 정권이라는 이유로 종교적으로 미화하며 지지를 보내는 면도 있었다.[9][10] 이에 대해 한국 기독교 장로회 창시자이자 신학자인 장공 김재준 목사는 “한국 교회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내세워서 무조건 국가권력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다”라고 비평하고 있다.[11]
반공주의 한국 개신교회의 반공주의는 한국전쟁이전부터 존재한, 뿌리깊은 이념이기도 하다.
반 기독교 운동 1920-30년대 유물론적 사회주의자들은 유신론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기독교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는 소위 반(反)기독교운동을 벌이는데, 당시 한국교회는 이들의 주장을 배척하면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계와 기독교의 화해는 사회주의자들이 유물론을 포기하고 유신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의 문제를 현실에 대한 순응,미신,폭력등을 거론했으며(→박헌영 문서 참조),기독교계에서는 이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배척하였다.
광복이후 광복이후 한국교회는 교회와 공산주의간의 이념대립, 한국전쟁당시 공산주의에 의한 수난을 통해 공산주의를 더욱 더 부정하게 되면서 한국교회는 군사정권당시 한국교회 일부의 민주화운동과 사회선교를 종교를 빙자한 공산주의 운동으로,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신학으로 매도하였다. 즉, 한국교회에서는 민주화운동, 사회선교, 민중신학, 해방신학을 종교를 빙자하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여전히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로 매도하는 입장에서 기독교 신앙의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진보적 신학에 대한 편견을 보이고 있다. 민주화운동과 남북대화시도라는 사회의 변화에 힘입어 1988년 한국교회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당시 한국교회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 신념으로 우상화 하면서 동포를 미워하는 죄(요한 복음서 13:14-15ㅡ4:20-21)를 저질렀다면서 반공주의성향에 대한 반성이 논의되기도 했으나, 지금도 소위 보수성향의 개신교 목사들이 친미·반공집회를 주도하거나 주일 예배시 매카시즘성향의 정치설교를 한다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