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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시사 스크랩 근대식 건물이 있는 덕수궁 -2
심메마니 추천 0 조회 125 08.09.26 12: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덕수궁 - 2편 ]

 

 

 

내려다보이는 함녕전과 덕홍전 뒤뜰의 아름다운 정경을 감상하기엔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 정관헌 뒤편에는 아관(러시아 공사관)으로 통했던 좁고 긴 비밀지하통로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음침한 이 지하통로는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당한 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서 아관으로 피신해 오면서 마련한 것이란다.

 

 

 

 ⓒ 2008 삼공&샘데디

▲ 정관헌앞 소나무

 

 

 

 ⓒ 2008 삼공&샘데디

▲ 정관헌

 

 

 

중국풍이 느껴지기도 하는 서양식 건물로 설계는 러시아인이 공사는 중국인이 했다. 여기서 고종은 연회를 열기도 하고 가배다(嘉排茶,커피)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 2008 삼공&샘데디

▲ 정관헌앞에서 차마시는 행사도 한다.

 

 

 ⓒ 2008 삼공&샘데디

▲ 그릇들도 예쁘다.

 

 

 

 

                                  ⓒ 2008 삼공&샘데디

 

궁내의 최초로 등장한 양관(洋館)이 어느 것이냐에 대한

논의가 있지만 정관헌을 초기 작품으로 지목하는 의견이

다수이다.

 

정광헌은 광무 4년(190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따라서 궁궐안의 서양식 건물로는 처음 세워진 것

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고종황제가 가배차(嘉排茶,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하는 등 여가를 즐기던 곳이다.

 

내려다보이는 함녕전과 덕홍전 뒤뜰의 아름다운 정경을

감상하기엔 가장 좋은 위치에 있다.

 

정관헌 뒤편에는 아관(러시아 공사관)으로 통했던 좁고 긴

비밀지하통로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음침한 이 지하통로는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당한 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서 아관으로 피신해 오면서 마련한 것이란다.

 

건물 남쪽에는 철제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이 철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박쥐, 당초 등의 문양으로 장식하여 한국적인

느낌을 주지만 철제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과 내부의 벽돌 벽 등은 이질적인 서양풍이다.


 

 

 

 

 

 

 ⓒ 2008 삼공&샘데디

▲ 정관헌 측면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 뒤편 동산에 위치하여 내전 후원의 정자 기능을 대신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딘가 모르게 우리나라 건물이 아닌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난간과 지붕 아래쪽을 장식한 문양(박쥐, 소나무, 사슴등)이나 기둥(천원지방)을 보면 기본적인 개념은 우리의 것임을 알 수 있다.

 

 

 ⓒ 2008 삼공&샘데디

▲ 정관헌 내부

 

 

 

기둥과 기둥 사이를 보면 아직도 문을 냈던 자국과 주방으로 연결되는 작은 창을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서 한때 커피숍으로 이용되었던 정관헌의 모습도 그릴 수 있다.

 

 

 ⓒ 2008 삼공&샘데디

▲ 정관헌에서 바라본 함녕전, 덕홍전

 

 

 

 

 ⓒ 2008 삼공&샘데디

▲ 즉조당과 준명당

 

 

중화전이 공식행사를 하던 곳이라면 준명당은 고종이 실질적인 업 무를 보거나 신하들과 회의를 하던 편전(便殿)이었다. 이곳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광무 원년(1897년)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엔 이곳을 준명전이라 불렀다가 언제부터인가 준명당으로 바뀌었다.

전각이름에 붙게 되는 전(殿)은 당(堂)보다 격이 한 단계 높은 것으로서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인물인 왕비 혹은 대비 등과 관련된 건물에만 붙게 된다. 고종 나이 예순에 양귀인 과의 사이에서 얻은 고명딸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해 1916년 이곳에 유치원을 만들기도 하였다. 즉조당과는 월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즉조당의 의미는 왕이 즉위를 한 곳이라는 의미인데 실제로 여기에서 조선조 제15대 광해군과 제16대 인조가 즉위하셨다. 현재의 중화전이 지어지기 전에 이곳이 임시 정전(正殿)으로 사용되면서 광무 원년(1897년)엔 태극전 이라 하였다가 이듬해에 중화전으로 고쳐 부르게 된다.
1902년 지금의 중화전이 지어지면서 다시 원래의 이름인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은 고종의 후비인 엄비가 돌아 가실때까지 거처했던 곳이기도 하다. 즉조당 현판을 보게 되면 어필(御 筆)이라는 한자와 광무구년을사칠월(光武九年乙巳七月)이라는 한자가 쓰여있다.

어필은 왕이 쓰셨다는 뜻이므로 고종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광무는 대한제국의 연호이니 1904년 화재로 즉조당이 불에 타 버려 1905년에 중건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 2008 삼공&샘데디

 

▲ 굴뚝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에는 그 규모나 격식에 걸맞는 굴뚝을 만든다. 궁도 마찬가지다. 굴뚝이 있는 것은 온돌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굴뚝위에는 작은집 연가가 있는데 이 연가는 연기속의 재를 걸러주는 기능을 한다고 한다.

 

 ⓒ 2008 삼공&샘데디 

▲ 석조전 (흑백)

 

 

석조전은 1900년 착공하여 1910년 완공된 지상 3층 연건평 1,247평 의 석조 건물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고문 이었던 영국인 브라운의 발의에 의하여 영국인 기사 하아딩에게 의뢰하여 설계되었다.

1904년 11월 브라운은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다(目賀田)와 교체되며 자연스레 건축 주도권도 넘어가서 결국 그에 의해 완공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2층에 접견실, 3층에 황제의 침실, 1층(반지하)에 시종들의 대기장소를 두었다. 

 

 

 ⓒ 2008 삼공&샘데디

▲ 석조전

 

 

건축양식은 희랍 로마양식의 복고로 구미(歐美)에 유행하였던 콜로니얼(Colonial) 양식의 일종으로  신고전주의를 따른 것이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1946년 1월 16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의 장래를 논의하기 위해 이곳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로 이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신탁통치와 임시정부수립 등을 논의하기 위한 것으로 그 첫 예비회담이 열렸다.

 

 

 ⓒ 2008 삼공&샘데디

▲ 미술관

 

1933년 덕수궁이 일반에 공개되면서 궁내 여러 건물을 수리하고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진열된 미술품들은 일본의 작품뿐이었다. 창경궁의 장서각이란 건물을 지은 후 그 곳에서 전시를 하였지만 그 곳에 전부 진열치 못하고 궁궐의 다른 건물에도 미술품이 산재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덕수궁 미술관(석조전) 옆에 한 동을 더 지어 창경원 박물관의 고미술품을 옮겨 오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오늘날의 미술관 서관이 건축된 것이다.

  

 

중화전 옆쪽으로 가면 덕수궁과 부조화를 이루는 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있다. 석조전은 정부의 재정고문이던 영국인 브라운이 고종에게 건의하여 일본인들의 기를 죽일 양관을 번듯하게 짓기로 하였다. 영국인 기사인 하딩이 설계하고 내부소속의 건축 기사 심의석(沈宜錫)이 감독하였다. 1901년 기초공사 완료. 1902년에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이듬해 일본 오구라구미(大倉組)에 도급을 주어 공사를 속행시켰다. 감독은 1904년 이후로 영국인 데이비슨이 맡아 하였다. 1906년 준공되었는데 소요된 공사비가 1백29만圓(원)이었다. 대한 제국은 경복궁 중건이래 국고가 탕진하여 많은 고초를 겪는 중에도 이렇게 호대한 공사를 진행하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공사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6백년의 대미를 장식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조 궁내의 보물을 주축으로 해서 수집한 역대미술품이 보관, 전시되다가 6. 25 이후로 국립박물관이 통합되고 이 건물은 여러 사람들이 이리저리 사용하는 조락의 길을 걸었다. 1992년 12월 23일부터 현재는 궁중유물전시관이 사용되어지고 있다.

 

『덕수궁미술관』
1933년 덕수궁이 일반에 공개되면서 궁내 여러 건물을 수리하고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진열된 미술품들은 일본의 작품뿐이었다. 창경궁의 장서각이란 건물을 지은 후 그 곳에서 전시를 하였지만 그 곳에 전부 진열치 못하고 궁궐의 다른 건물에도 미술품이 산재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덕수궁 미술관(석조전) 옆에 한 동을 더 지어 창경원 박물관의 고미술품을 옮겨 오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오늘날의 미술관 서관이 건축된 것이다. 당시 이 신관(서관)과 석조전을 합쳐 이왕가(李王家)미술관이라고 칭하였다. 서관이 착공되기는 1936년 8월 21일, 준공은 1938년 3월 31일이었다. 평면적인 배치는 석조전과 직각으로 동쪽을 면하고, 두 건물의 연결을 위하여 중간에 보일러실을 두고 그 위에 건널복도를 만들었다. 중앙 정면은 돌계단으로 홀에 이르고, 지층(地層)은 사무실, 창고 등을 두고 2층 홀 정면은 귀빈실로 충당하고, 그밖에는 3개 층 모두 진열실과 일반 휴식실로 하였다. 외장은 정면 계단, 대석(臺石), 허리와 처마돌림띠 등은 화강석으로 하고 일반 벽체는 캐스트스톤으로 하였다. 3층 건물과 면적은 건널복도를 합하여 1,130여 평이다. 양식은 기왕 있었던 석조전과 조화되게 하기 위하여 고전주의를 택하고 있다. 6·25전쟁 후 일시 박물관으로 사용되었고, 지금 현재는 과천현대 미술관에 별관으로 덕수궁 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분수대
석조전 앞에 보면 멋있는 정원과 함께 그 중앙에 분수가 하나 서 있다. 이 분수는 유럽식으로 제작되었으며 분수주변에는 넓은 풀밭으로 제작되어 있어 휴식하기에 매우 편리하다. 결혼 사진을 찍기 위한 사람들이 많이 사진을 촬영하는 장소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이제 이 분수는 덕수궁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없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만큼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다가온 것 중 하나라 하겠다.

 

▲ 석조전과 미술관을 이어준다.

 

 

 

서관이 착공되기는 1936년 8월 21일, 준공은 1938년 3월 31일이었다. 평면적인 배치는 석조전과 직각으로 동쪽을 면하고, 두 건물의 연결을 위하여 중간에 보일러실을 두고 그 위에 건널복도를 만들었다. 중앙 정면은 돌계단으로 홀에 이르고, 지층(地層)은 사무실, 창고 등을 두고 2층 홀 정면은 귀빈실로 충당하고, 그밖에는 3개 층 모두 진열실과 일반 휴식실로 하였다. 외장은 정면 계단, 대석(臺石), 허리와 처마돌림띠 등은 화강석으로 하고 일반 벽체는 캐스트스톤으로 하였다. 3층 건물과 면적은 건널복도를 합하여 1,130여 평이다. 양식은 기왕 있었던 석조전과 조화되게 하기 위하여 고전주의를 택하고 있다. 6·25전쟁 후 일시 박물관으로 사용되었고, 지금 현재는 과천현대 미술관에 별관으로 덕수궁 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 2008 삼공&샘데디

▲ 보루각 자격루

 

 

 

자격루는 조선 중종때 만든 물시계이다.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등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자동시보장치를 물시계에 연결 표준시계로 썼다. 세종 때 발명된 자격루는 단종 때 자동시보장치의 고장으로 사용이 중지되고 말았다. 자격루가 다시 움직이게된 것은 예종 때였고, 연산군 시절에는 자격루가 창덕궁으로 이전되어 새로 지은 보루각에 설치되었다. 그런데 시간 이 잘 맞지 않아서 중종 때에 새로운 자격루를 만들었다. 이 유물은 광복전 경성박물관 에 전시되어 있을때만 해도 파수호와 수수통을 잇는 대롱이 있었고, 대석(臺石)도 있었 는데, 지금은 용이 새겨진 누기(淚器)만이 남아있다.

 

 

광명문 (光明門)
중화문 옆에 자리잡은 광명문은 원래 함녕전 남행각의 정문이었다. 그러나 1938년 석조전을 개관하면서 흥천사의 범종과 보루각의 자격루(물시계. 국보 제229호)를 진열 하기 위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면서 문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말았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장소인 중화문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 다.

 

 ⓒ 2008 삼공&샘데디

▲ 흥천사 종

 

 

 

세조 8년(1462)에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를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종으로, 신 덕왕 후의 무덤인 정릉 근처 흥천사에 있었던 종이다. 중종 5년(1510) 흥천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영조 23년(1747)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으로 옮겼다가, 창경궁을 거쳐 이 곳에 걸려있다. 이 종은 명문에 의하면 효녕대군과 임영대군, 영응대군 등이 만들었으며, 문장은 한계희, 글씨는 정난종이 썼다. 규모가 큰 이 범종은 전형적인 조선 전기의 양식이다.

 

 

 ⓒ 2008 삼공&샘데디

▲ 신기전

 

 

 

신기전은 고려말엽 최무선이 만드 주화(달리는 불)를 1448년(세종30년)에 개량한 것으로 대나무 화살의 앞부분에 쇠촉을 달고, 그 뒤쪽에 원통형의 종이약통을 부착하여 불을 붙이면 발사되는 병기이다. 신기전의 종류로는 대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 산화신기전 등이 있는데, 중신기전과 소신기전은 주로 신기전 기화차에서 발사되었다. 신기전기는 지름 4.6센티미터의 둥근 구멍에 중신기전과 소신기전을 꽂아 사용하였다. 발사 할 때에는 신기전기가 실려있는 화차의 발사각도를 조절한 뒤, 신기전 약통에 붙 여진 점화선을 한데 모아 불을 붙이면 발사되었다. 신기전의 사정거리는 중신기전이 50미터, 소신기전이 100미터 가량이며, 또한 제작 당시의 설계도가 남아있는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요즘 '신기전'이라는 영화도 이것에서 비롯되었으리라...)

 

 

 ⓒ 2008 삼공&샘데디

▲ 연못

 

 

 

대한문에서 들어가서 표를 끊고 오른쪽을 쳐다보면 기와장을 얹은 건물 한채가 있는데 이것이 덕수궁에 있는 두개의 매점 가운데 하나이다. 매점 앞에는 여러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간이용 의자와 식탁이 나열되어 있고 주변은 음식을 먹고 남은 쓰레기봉지와 기타 등등 여러 쓰레기들 때문에 매우 지저분하다. 꼭 이런 매점이 궁궐 안에 들어있을 필요가 있을까? 궁궐의 청결에는 지장을 주기 때문에 궁 안에 있는 매점들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 없다. 매점 뒤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진 촬영하기 좋은 장소이다.

  

 ⓒ 2008 삼공&샘데디

▲ 덕수궁 돌담길...

 

 

 

 ⓒ 2008 삼공&샘데디

▲ 덕수궁에서 경희궁 가는길..

 

 

 

 

 ⓒ 2008 삼공&샘데디

▲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해주는 이끼와 풀들...

 

 

 

 

 

▲ 덕수궁과..경희궁의 위치

 

 

 

>  덕수궁 1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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