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내일 저녁에 우리 가게로 와." 읍내에서 고기집을 하는 친구가 다짜고짜 이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알고 보니 일 년에 한 번 직접 잡은 쏘가리회를 내는 자리였다. 식당 가격표에 '시가' 라고 쓰인, 그 귀한 자연산 쏘가리다. 하나둘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입맛을 다시면서 기다리는데 불쑥 다른 친구들이 들어온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귀한 쏘가리에 친구를 모두 부를 수 없는 노릇이었고, 하필이면 초대받지 못한 친구들이 저녁을 먹으러 들른 것이다.
싱글벙글 회를 떠서 주방을 나서던 친구의 얼굴은 순간 사색이 되었고,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사정을 눈치챈 친구들은 합석하자고 붙들어도 굳이 칸막이를 사이에 둔 바로 옆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중 한 친구가 보란 듯이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고, 잠시 후 어디선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또 다른 쏘가리가 공수되어 양쪽에서 쏘가리 파티가 시작되었다. 가장 난처한 건 애초에 자리를 만든 고기집 주인이었다. 양쪽에 회를 내주고 어느 방에도 들어가지 못한채 연방 담배를 피우며 한숨만 푹푹 쉬는 얼굴을 보자니 자꾸 웃음이 나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대처로 떠난 후 고향 화천을 까맣게 잊고 다시 돌아오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인생이 재밌어서 수십 년 만에 시골 우체국장이 되어 돌아와 낯선 고향에서 다시 살아가자니 가장 먼저 친구들이 생각났다. 신기하게도 여전히 고향에서 살아가는 친구가 많았다. 늘 코를 흘리던 찔찔이도, 주근깨투성이 깨순이도 아들딸 낳고 어엿한 아빠엄마가 되었다. 친구들은 연락 한 번 없던 나를 기꺼이 받아 주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름 대신 직함을 부르고, 서로 존대하는 서먹함이 일상이지만 친구만은 예외였다.
처음에는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들으란 듯이 어느 쪽이 진짜 쏘가리냐 떠들어 댔지만 어느새 칸막이가 치워지고 왁자지껄 합석했다. 생전 처음 먹는 쏘가리는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발끝에서부터 스르르 간지러운 모래가 차오르는 것처럼 따뜻해진다. 이곳은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몸을 틀어 살기 시작한 내 고향이다. 까마득한 시절부터 함께 자란 친구들과 있으니 자꾸만 달콤한 졸음 속으로 까무룩 빠져든다.
- 조 희붕 님 / 강원도 화천 상서우체국장 -
다정한 벗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천 리 길도 마다하지 않으리.
(톨스토이)
(강헌 선집 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