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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12.12.02)] / 하나님의 처소(이장우 목사) from 우림과둠밈 on Vimeo.
[주일설교(12.12.02)]
/ 하나님의 처소(이장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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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사사기 2장
[주일오후설교] / 사사기 2장 from 우림과둠밈 on Vimeo.
에베소서 2:19~22 하나님의 처소 2012. 12. 2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닦은 터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터의 모퉁잇돌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지난주에 찾아서 확인하였습니다. 오늘은 이 터와 모퉁잇돌에 성도가 성령으로 연결되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을 보려고 합니다. 이 처소의 머리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1~22절을 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간다고 합니다. 여기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이 된다고 한 것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건물이라는 것이 한 성전을 말하며 그 성전의 재료들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에 이방인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갑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가 다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퉁잇돌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돌에 붙는 자들도 버림을 받은 자들이 이 돌에 붙게 됩니다.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경험과 흔적들이 있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집니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실패하여 세상에 대하여 복수를 꿈꾸며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22:1~2절입니다.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남으로 악신이 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이 머리 둘 곳이 없이 정처 없이 피하여 다닙니다. 이런 다윗에게 누가 옵니까? 사울의 체제하에 견딜 수 없는 자들이 옵니다. 이들이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입니다.
누가복음 9:57~62절입니다.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세상을 죽은 세상으로 보셨기에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머리두실 곳이 어디입니까?
요한복음 19: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김성수 목사님 설교 중에 이 본문을 듣고서 헬라어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머리를 숙였습니다. 머리를 숙였다는 말이 머리를 두었다는 말로도 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머리를 숙였다는 동일한 단어가 누가복음 9:58절과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8:20절의 머리 둘 곳 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심은 이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없으신 예수님이 교회에 머리를 두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입니다.
에베소서 1:22절입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에베소서 5:23절입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골로새서 1:18절입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세상에 거처할 집을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이 자라나신 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배와 그물을 가진 어부라면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이 없으셨다는 말은 이 땅에 하나님의 성전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건물로 된 성전은 이미 도적의 소굴이 되어있었기에 성전의 주인이 머리를 두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떠나셨다는 말씀의 떠나셨다는 말도 어디에 넘겨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영혼을 어디에 넘겨두시는 것입니까? 영혼이라는 헬라어의 ‘프뉴마’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여러 가지 번역이 있습니다. 성령, 심령, 귀신, 마음, 영혼, 중심, 하나님의 말씀, 영, 바람, 생기 등으로 번역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혼 즉 예수님의 영도 어디에 넘겨두신 것입니다. 그 넘겨두신 곳이 어디입니까? 역시 교회입니다.
요한복음 14:1~3절입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거처를 만들기 위하여 가셨다고 합니다. 이 거처가 무엇입니까? 황금보석으로 꾸민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가신 것이 아닙니다. 이 거처란 성령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4:16~20절입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서 하늘로 가신 것은 영원히 가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심으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아들이 성령을 부어주는 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는 예수님께 성령이 한량이 부어짐으로(요3:34)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였습니다(요10:30).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통하여 이제 성령을 부어주시면 예수님과 성령 받은 자가 하나가 됩니다. 이 하나는 또한 아버지와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보내셔서 아버지께서 거하실 처소를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17~18절입니다.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신 이유는 하나님의 처소를 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구약에서 여러 가지 모형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성막에 여호와의 영광이 임한 것(출40:34~35)과 솔로몬의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임한 것입니다(역대하7:1~3). 이러한 성전의 완성을 에스겔서에서 보여줍니다. 이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지난 수요일저녁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성전을 완성하시고 새로운 땅을 정비하신 이유는 여호와가 거기 계시기 위한 것입니다. 에스겔 마지막 절이 이러합니다.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구약전체를 관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에베소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사람의 숫자와 힘과 건물의 규모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시고 또한 성령을 보내심으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성도가 성전입니다(고전3:16,6:19). 이런 성전이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어떤 과정이 있는지 보아야 합니다.
열왕기상 6:7절입니다. “이 성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그 뜨는 곳에서 다듬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성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다듬어 가지고 왔기에 성전 안에서는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돌을 뜬다는 것은 거대한 바위에서 정으로 깨어내어서 다듬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바위에 들어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깨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듬어야합니다.
이사야 51:1절입니다.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우리가 어느 정도로 단단히 이 세상에 들어붙어 있었는지 너희를 떠낸 반석의 우묵한 구덩이를 보라고합니다. 이런 돌들을 떠내어 다듬어서 성전의 돌들로 삼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붙어지는 것은 세상에서 떠냄을 받아야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들어붙고 싶은데 어느 날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듯이 세상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많이는 만나보지 못하였지만 복음에 관심을 가지고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이라는 곳에서 환난을 당한 자들입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세상에서 여러 가지 낭패와 실망을 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버려진 모퉁잇돌에 관심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크게 깨어지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이제부터 다듬어져야 하는데 어느 정도로 다듬어져야 하는가 하면 에베소서 5:27절에서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운다고 합니다.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란 어떤 것입니까?
솔로몬 성전의 돌이 뜨인 곳에서 다듬어져서 성전 안에서는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금요일 성경 공부한 내용과 연결하여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자신을 티끌과 재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추격할 때에 자신은 죽은 개와 같고 벼룩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티끌과 재가 되고 죽은 개와 같이 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과 원망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땅의 티끌을 끌어다가 영광스러운 교회의 재료로 사용하신다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돌로 건축을 하고 담을 쌓을 때는 여러 모양의 돌들이 다 필요합니다. 건축자가 담을 쌓아가면서 돌의 모양을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를 합니다. 어떤 돌은 귀퉁이를 자르기도 하고, 어떤 돌은 가운데를 파내기도 합니다. 어떤 돌은 받침돌로 씁니다. 어떤 돌은 아예 부수어서 여러 구석에 끼워 넣기도 합니다. 먼저 놓아진 돌을 깨기도 하고 나중에 놓아질 돌을 깨기도 합니다. 이 돌들이 다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세상에서 크게 깨어져서 교회로 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하여 성령 안에서 우리를 다듬어 가십니다. 이것은 성화가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못난 자였는지를 확인하여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한 순간도 살수 없는 자임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난 사람들끼리 이렇게 붙여놓은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거의 다 만들어져 갑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기신 자들은 성령을 보내셔서 땅 끝까지 다 찾아내시면 하나님의 처소가 완성되기에 예수님께서 재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완성되었기에 에스겔 47장에 본 대로 생명수가 흐르고 에스겔 48장의 말씀대로 여호와 삼마입니다.
요한계시록 21:1~4절입니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2:1~5절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처소가 완성된 모습입니다. 이 하늘에서는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날이 임하기를 소망하면서 하나님의 처소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잘 깨어지시기 바랍니다.
[주일오후설교]
/ 사사기 2장
사사기 2장 2012. 12. 2
사사기 1장과 2장은 서론입니다. 1장은 여호수아 사후에 사사시대가 시작되는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줍니다. 그 내용은 가나안 원주민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고, 함께 섞여 살았고, 나중에는 그들에게 쫓겨나기 까지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것이며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도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와의 사자가 책망을 하는 것이 2장입니다.
1~2. 여호와의 사자(使者)가 길갈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서 말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모세와 여호수아에게도 나타났으며 사사시대에는 기드온과 삼손의 부모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자신을 바로 여호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1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여호와의 사자란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로 봅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언약하신 내용입니다. 그 언약을 여호와는 영원히 어기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배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올 때는 모세를 언약의 중재자로, 들어와서는 여호수아를 언약의 중재자로 언약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셔서 돌보아 주신다는 것이며 그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배반하지 않겠다는 언약은 가나안의 백성들과 어떤 언약도 맺지 않고 그들을 진멸하고 쫓아내며 그들이 섬기는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도 섬기지도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냐고 합니다.
3~5. 언약을 배반하였기에 언약의 저주대로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옆구리의 가시기 될 것이며, 그들의 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올무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백성들이 소리를 높여 웁니다. 그래서 그곳을 우는 자들이라는 뜻의 ‘보김’이라고 명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울기는 왜 우는 것입니까? 이것이 회개의 눈물이었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들었다면 다시 언약대로 남겨진 그들을 다 쫓아내겠다고 해야 하는데 그냥 울기만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혼을 내면 잘못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냅다 울기만 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어릴 때 그러하였습니다. 울 것이 아니라 버릴 것을 버리고 쫓아낼 것을 쫓아내어야 하는데 버려야 할 것을 두 손에 움켜지고 울기만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버리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런 울음이 우리의 기도는 아닙니까?
말라기 2:10~14절입니다. “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11 유다는 거짓을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12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에서 끊어 버리시리라 13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언약을 어긴 것이 이방신의 딸과 결혼 한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하는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야곱의 장막에서 끊어버리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끊어버리신다고 합니다. 이런 악만이 아니라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도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어려서 취한 아내를 버리는 것을 책망하시는 말씀이지만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결혼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마지막 말라기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신의 딸들과 결혼한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배반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6~10. 여호수아가 각 지파에게 그들이 분배받은 땅을 차지하도록 보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살아있는 동안과 여호수아 사후에 여호와의 큰일을 본 장로들이 살아있는 동안 여호와를 섬겼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들의 사후에 여호와를 배반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들 후에 일어난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망하는 이유입니다.
호세아 4:6절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지금 이 땅의 현실도 이와 같다고 봅니다. 고생을 모르는 세대, 자기만 최고로 아는 세대의 자녀들이 어떻게 될지 보이지 않습니까? 먼저 믿는다는 우리가 예수님을 제일로 삼지 않고 살아가고 있으면서 자녀들이 신앙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23:28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시면서 울라고 하셨습니다. 보김의 울음이 아닌 울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울음은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십니다.
스가랴 12:10절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23. 사사시대 전체의 내용을 요약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패턴은 배교, 징계, 간구, 구원, 안식의 순서입니다. 이런 패턴이 계속 반복되면서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패역하여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모습을 사사기 전체를 통하여 자세하게 나옵니다. 이들이 여호와를 거역한 주된 이유는 바알과 아스다롯이 매력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알은 남신이며 아스다롯은 여신입니다. 이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그들의 육적인 만족과 쾌락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편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들을 다 쫓아내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남겨주신 것입니다. 시험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징계하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도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버릴 것을 버리라고 하시는데 버리지 않고 손에 꼭 쥐고는 울고만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워서 구원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역으로 신음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출애굽 시키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고역만 없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 살만한 곳이라고 여겼습니다. 자기 고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탄식과 울음이 아닌 다른 탄식이 나오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애굽의 탄식이 아닙니다. 사사시대의 탄식이 아닙니다. 어떤 탄식입니까?
로마서 8:18~23절입니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에게도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의 탄식이 나오기를 소원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늘 은혜로 충만케 해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