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성 충절을 기억하라! 초하(初夏)의 남강이 짙푸르구나
2024년 6월 고을학교는 <진주고을>
싱그러운 6월, 초여름의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 제110강은 서부 경남의 중심인 <진주고을>입니다. 진주고을은 삼국시대 백제의 땅으로 신라와 접경한 최전선에 위치하여 두 나라 간에 전략적인 요충지로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던 곳이며, 고려 시대에는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섬멸하기 위한 기지로서 역할도 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진주는 경상도와 호남을 연결하는 요충지로서 그 중요성이 높았기에 도호부가 설치되었고 경상우병영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현재 진주시는 동쪽으로는 창원시, 함안군, 서쪽으로는 하동군, 남쪽으로는 사천시와 고성군, 북쪽으로는 산청군과 의령군이 접해 있는 서부 경남지역의 중심 도시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고을의 성지이다. 본래 토성이던 것을 고려 우왕5년 (1379)에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성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서장대, 호국사,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진주시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10강은 2024년 6월 23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10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부사정-담산고택(단지종택)-진주향교-중앙시장(점심식사겸뒤풀이)-진주성(공북문주차장-공북문/중영/영남포정사문루/경절사/북장대/청계서원/산청범학리삼층석탑/포루/창열사/호국사/서장대/진주성우물/쌍충사사적비/의기사/촉석루/의암사적비/의암/촉석문/임진대첩계사순의단/김시민장군전공비-공북문주차장)-서울의 순입니다.
▲<진주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와 독감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10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진주는 고령가야의 옛 고을로부터 역사가 시작됩니다.
진주는 가야 시대에 고령가야의 고도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거열성으로, 통일신라 시대에는 거열주, 청주, 강주로 개칭되었고, 940년(태조 23)에 처음으로 진주로 개칭되었으며 983년(성종 2)에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습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진주는 경상남도에 속해지고 도청소재지가 되어 관찰사가 진주에 상주하였으며, 경남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925년 4월 1일 경상남도의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진주부는 진주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 1월 1일 도농 복합형태의 시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진주시와 진양군을 각각 폐지하고 통합 진주시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진주는 과거 466년 동안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지금에 말하는 경남의 도청소재지였습니다. 그것은 통일신라 시대인 685년(신문왕 5)에 청주총관을 둔 이래, 995년(성종 14)의 산남도를 거쳐 경상진주도로 통합된 1106년(예종 1)까지 421년간, 진합주도를 둔 1171년(명종 1)에서 경상 주도로 통합된 1186년(명종 16)까지 15년간, 그리고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한 1895년(고종 32)에서, 또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시행한 1896년(건양 원년)을 거쳐 경상남도의 도청이 부산부로 옮겨진 1925년까지의 30년간 등 총 466년입니다.
▲진주성 야경. 진주성은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며, 왜군과의 2차 전쟁인 1593년 6월, 7만 여명의 민ㆍ관ㆍ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국하였고,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껴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 곳이다.Ⓒ진주시
진주민란은 익산민란까지 이어지고 마침내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진주농민봉기[晋州民亂]는 1862년 5월 23일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으려는 진주 백성들이 봉기한 사건으로, 그 파급 영향은 12월 7일 황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어 민란이 연달아 일어난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세금, 병역, 부역, 환곡 등의 명목을 더해 받아들인 세금 종류만도 백 가지에 가까웠으니 진주농민봉기는 익산민란까지 이어지고 끝내는 동학 농민전쟁의 불씨가 된 조선 말의 대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민중 투쟁은 삶의 확보와 반외세, 반봉건 투쟁이었습니다. 일제의 상품 시장으로 변한 조선 경제는 비틀거렸고, 관리들의 탐획과 지주들의 봉건적 수탈로 농민들의 삶은 말이 아닌 데다 갑오년엔 극심한 가뭄으로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육십령과 섬진강 너머로부터 불어닥친 갑오농민봉기는 농민들을 ‘보국안민’, ‘척왜양창의’를 부르짖게 했으며, 을미왜변과 단발령 소식에 분연히 일어나서 마침내 의병투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펑등 사회를 갈망하는 형평사 운동이 일어난 곳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수긍하는 보편적인 원리인데 조선 시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분에 따라 귀천이 나뉘고 다시 신분은 직업을 결정하고, 배우자를 선택하고, 일상생활에서 사람 관계를 맺어주는 조건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신분 위계에서 가장 천한 신분 집단이 백정이었습니다. 한없이 차별받으며 억압받던 그들은 그야말로 천민 가운데 천민이어서 남들처럼 똑같이 대우 받으며 사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소망을 모아서 만든 단체가 형평사(衡平社)입니다.
형평사는 말 그대로 ‘저울처럼 공평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단체’입니다. 형평사는 1923년 봄 경남 진주에서 만들어졌는데 기본적으로 백정 차별의 관습을 없애고 평등사회를 만든다는 목적을 갖고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사회운동의 성격이 뚜렷한 형평사의 활동을 형평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형평 운동의 첫째 목적은 백정들에 대한 차별 대우를 없애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서 평등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형평 운동은 신분제의 찌꺼기를 없앤다는 과거 유산의 극복 측면에서, 또 평등사회를 향해 나간다는 미래 지향적 측면에서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에 우리 글 신문들은 흔히 농민, 형평, 청년, 여성 순으로 적으면서 형평 운동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이렇게 1923년 결성된 뒤 1935년에 이름을 ‘대동사’로 바꿀 때까지 뜻깊은 활동을 벌인 형평사는 일제 강점기 동안 단일 조직으로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사회운동 단체로 기록됩니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인간 평등을 주장하며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관습을 없애려고 활동한 인권단체로도 평가됩니다.
▲진주향교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각종 문헌자료를 종합하면 고려 초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진주시
진주향교는 고려 초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진주향교(晋州鄕校)는 창건 연대가 확실치 않으나 799년(신라 소성왕 원년)에 지금의 진주인 청주의 노거현을 국학의 학생 녹읍으로 했다고 한 것과, 조선 세종조의 영의정 하연의 <사교당기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때 인물인 은열공 강민첨 장군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주향교는 고려 초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각종 문헌자료를 종합하면, 987년(고려 성종 6)에 향학당으로 창건되어 국학감으로부터 경학 및 의학박사를 파견 수강토록 하였으며 현재의 의곡사 계곡에 위치하였습니다.
1011년(고려 현종 2)에 중수 및 서재를 중건하고 수학원, 학사, 서재, 사교학당 등으로 개칭되었으며, 1398년(조선 태조 7)에 문묘를 창건하고 향교로서 면모를 갖추었으며, 훈도, 교관, 교수 등이 성균관으로부터 파견되었습니다. 1558년(명종 13)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목사 김홍이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603년(선조 36)에 병사 이수일이 문묘를 중건하여 4년 후인 정미년에 병사 김태허가 명륜당, 동, 서재를 중건하였습니다. 사교당은 1986년에 중건되었습니다. 현재 대성전, 동무, 서무, 내삼문, 명륜당, 동재, 서재, 사교당, 풍화루 등이 남아 있습니다.
단지종택은 단지 하엽이 지은 진양하씨 종택입니다.
단지종택(丹池宗宅)은 단지 하협이 분가할 때 터를 정해 지은 집으로, 당시 집터를 조성하고 땅을 고를 때 나무 위에 앉아 있던 학 두 마리가 앞산으로 날아갔다고 해서 이곳을 ’해기터[鶴基]‘라 하였다고 합니다. 경상남도에서는 단지종택을 창주의 후손인 담산 하우식의 호를 따서 담산고택으로 명명하였습니다.
건물 형태는 가운데 솟을대문이 있는 중심채 영역과 좌우에 담장으로 구획된 아래채 영역, 윗채 영역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안채는 1864년, 사랑채는 1871년에 건립되었는데, 두 건물은 단파 하계룡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그의 아들 담산 하우식에 의하여 1923년 중수되었고 별채는 1916년에 건립되었습니다. 그 외에 광채, 행랑채, 부속사, 정암정, 문간채 등이 있고 마당에는 효자목이라는 감나무가 있습니다.
광채는 내부는 고쳤으나 외형은 남아 있어 지방 사족의 가옥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1800년대 중엽부터 1900년대 중엽까지 차례대로 건물이 지어져서 가옥의 형태 변화를 살필 수 있어 고건축 연구에도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종손 순봉이 본채인 단지세장(丹池世庄)의 양쪽에 집을 지었는데 동쪽은 조부 묵재공을 위해 묵재 재실이라 이름 짓고, 서쪽은 목림 서실이라 이름 짓고 자신의 서재로 삼았습니다.
현재 고택 내에는 행정 하진태의 효행 관련 문헌을 포함한 고문서 약 5000점, 고서 약 3000책 등 고문헌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이를 모아 <고문서집성> 45권으로 발간하였습니다. 진양하씨 가문은 대부분 남명 조식의 문인이거나 그 학파에 속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진양하씨 단지종택에 남아 있는 고문헌들에도 이들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양하씨 후손들은 대부분 남명 조식의 문인입니다.
진양하씨(晉陽河氏)는 고려 시대 이후부터 진주에 세거하면서 다수의 과거급제자와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여 명문 가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특히 하륜의 조선 건국 과정에서의 활약과 진주정씨와의 혼인을 통해 진주 지역에서 강력한 기반을 구축하였습니다.
하순경과 그 아들 하기룡 대에 비봉산 아래를 떠나 거주지를 변경하였는데 하순경은 진주부 남쪽으로, 하기룡은 진주부 북쪽의 단목리로 이주하였습니다. 하기룡의 후손들은 단목리를 중심으로 활발한 학문 활동을 통해 사회적 기반을 유지, 강화해 갔습니다. 특히 하숙의 아들 하위보, 하진보, 하국보에 이르러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마련합니다.
하위보와 하국보는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하진보는 1554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들 3형제는 모두 남명 조식의 문인입니다. 하진보는 신산서원을 건립하여 남명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하위보도 후학 양성에 힘쓰며 남명의 학문 전파에 기여한 바가 큽니다. 하위보와 하진보의 남명 학파 내에서의 위치와 그들의 활동에 힘입어 하위보의 아들 단지 하협과 그 후손들 또한 남명 학파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활약하게 되었기에 17세기 이후 단목리는 진양하씨의 세거지인 동시에 남명 학파의 본거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부사정(浮奢亭)은 1600년(선조 33) 조선 중기 문신인 부사 성여신의 제자가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로, 유학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1785년(정조 9)에 반구정 외 17동이 불에 타 없어져 지금은 부사정 외 1동이 남아 있습니다.
진주성 충절을 기억하라! 초하(初夏)의 남강이 짙푸르구나
2024년 6월 고을학교는 <진주고을>
싱그러운 6월, 초여름의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 제110강은 서부 경남의 중심인 <진주고을>입니다. 진주고을은 삼국시대 백제의 땅으로 신라와 접경한 최전선에 위치하여 두 나라 간에 전략적인 요충지로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던 곳이며, 고려 시대에는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섬멸하기 위한 기지로서 역할도 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진주는 경상도와 호남을 연결하는 요충지로서 그 중요성이 높았기에 도호부가 설치되었고 경상우병영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현재 진주시는 동쪽으로는 창원시, 함안군, 서쪽으로는 하동군, 남쪽으로는 사천시와 고성군, 북쪽으로는 산청군과 의령군이 접해 있는 서부 경남지역의 중심 도시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고을의 성지이다. 본래 토성이던 것을 고려 우왕5년 (1379)에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성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서장대, 호국사,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진주시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10강은 2024년 6월 23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10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부사정-담산고택(단지종택)-진주향교-중앙시장(점심식사겸뒤풀이)-진주성(공북문주차장-공북문/중영/영남포정사문루/경절사/북장대/청계서원/산청범학리삼층석탑/포루/창열사/호국사/서장대/진주성우물/쌍충사사적비/의기사/촉석루/의암사적비/의암/촉석문/임진대첩계사순의단/김시민장군전공비-공북문주차장)-서울의 순입니다.
▲<진주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와 독감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10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진주는 고령가야의 옛 고을로부터 역사가 시작됩니다.
진주는 가야 시대에 고령가야의 고도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거열성으로, 통일신라 시대에는 거열주, 청주, 강주로 개칭되었고, 940년(태조 23)에 처음으로 진주로 개칭되었으며 983년(성종 2)에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습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진주는 경상남도에 속해지고 도청소재지가 되어 관찰사가 진주에 상주하였으며, 경남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925년 4월 1일 경상남도의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진주부는 진주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 1월 1일 도농 복합형태의 시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진주시와 진양군을 각각 폐지하고 통합 진주시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진주는 과거 466년 동안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지금에 말하는 경남의 도청소재지였습니다. 그것은 통일신라 시대인 685년(신문왕 5)에 청주총관을 둔 이래, 995년(성종 14)의 산남도를 거쳐 경상진주도로 통합된 1106년(예종 1)까지 421년간, 진합주도를 둔 1171년(명종 1)에서 경상 주도로 통합된 1186년(명종 16)까지 15년간, 그리고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한 1895년(고종 32)에서, 또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시행한 1896년(건양 원년)을 거쳐 경상남도의 도청이 부산부로 옮겨진 1925년까지의 30년간 등 총 466년입니다.
▲진주성 야경. 진주성은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며, 왜군과의 2차 전쟁인 1593년 6월, 7만 여명의 민ㆍ관ㆍ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국하였고,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껴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 곳이다.Ⓒ진주시
진주민란은 익산민란까지 이어지고 마침내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진주농민봉기[晋州民亂]는 1862년 5월 23일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으려는 진주 백성들이 봉기한 사건으로, 그 파급 영향은 12월 7일 황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어 민란이 연달아 일어난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세금, 병역, 부역, 환곡 등의 명목을 더해 받아들인 세금 종류만도 백 가지에 가까웠으니 진주농민봉기는 익산민란까지 이어지고 끝내는 동학 농민전쟁의 불씨가 된 조선 말의 대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민중 투쟁은 삶의 확보와 반외세, 반봉건 투쟁이었습니다. 일제의 상품 시장으로 변한 조선 경제는 비틀거렸고, 관리들의 탐획과 지주들의 봉건적 수탈로 농민들의 삶은 말이 아닌 데다 갑오년엔 극심한 가뭄으로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육십령과 섬진강 너머로부터 불어닥친 갑오농민봉기는 농민들을 ‘보국안민’, ‘척왜양창의’를 부르짖게 했으며, 을미왜변과 단발령 소식에 분연히 일어나서 마침내 의병투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펑등 사회를 갈망하는 형평사 운동이 일어난 곳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수긍하는 보편적인 원리인데 조선 시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분에 따라 귀천이 나뉘고 다시 신분은 직업을 결정하고, 배우자를 선택하고, 일상생활에서 사람 관계를 맺어주는 조건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신분 위계에서 가장 천한 신분 집단이 백정이었습니다. 한없이 차별받으며 억압받던 그들은 그야말로 천민 가운데 천민이어서 남들처럼 똑같이 대우 받으며 사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소망을 모아서 만든 단체가 형평사(衡平社)입니다.
형평사는 말 그대로 ‘저울처럼 공평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단체’입니다. 형평사는 1923년 봄 경남 진주에서 만들어졌는데 기본적으로 백정 차별의 관습을 없애고 평등사회를 만든다는 목적을 갖고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사회운동의 성격이 뚜렷한 형평사의 활동을 형평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형평 운동의 첫째 목적은 백정들에 대한 차별 대우를 없애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서 평등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형평 운동은 신분제의 찌꺼기를 없앤다는 과거 유산의 극복 측면에서, 또 평등사회를 향해 나간다는 미래 지향적 측면에서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에 우리 글 신문들은 흔히 농민, 형평, 청년, 여성 순으로 적으면서 형평 운동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이렇게 1923년 결성된 뒤 1935년에 이름을 ‘대동사’로 바꿀 때까지 뜻깊은 활동을 벌인 형평사는 일제 강점기 동안 단일 조직으로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사회운동 단체로 기록됩니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인간 평등을 주장하며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관습을 없애려고 활동한 인권단체로도 평가됩니다.
▲진주향교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각종 문헌자료를 종합하면 고려 초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진주시
진주향교는 고려 초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진주향교(晋州鄕校)는 창건 연대가 확실치 않으나 799년(신라 소성왕 원년)에 지금의 진주인 청주의 노거현을 국학의 학생 녹읍으로 했다고 한 것과, 조선 세종조의 영의정 하연의 <사교당기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때 인물인 은열공 강민첨 장군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주향교는 고려 초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각종 문헌자료를 종합하면, 987년(고려 성종 6)에 향학당으로 창건되어 국학감으로부터 경학 및 의학박사를 파견 수강토록 하였으며 현재의 의곡사 계곡에 위치하였습니다.
1011년(고려 현종 2)에 중수 및 서재를 중건하고 수학원, 학사, 서재, 사교학당 등으로 개칭되었으며, 1398년(조선 태조 7)에 문묘를 창건하고 향교로서 면모를 갖추었으며, 훈도, 교관, 교수 등이 성균관으로부터 파견되었습니다. 1558년(명종 13)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목사 김홍이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603년(선조 36)에 병사 이수일이 문묘를 중건하여 4년 후인 정미년에 병사 김태허가 명륜당, 동, 서재를 중건하였습니다. 사교당은 1986년에 중건되었습니다. 현재 대성전, 동무, 서무, 내삼문, 명륜당, 동재, 서재, 사교당, 풍화루 등이 남아 있습니다.
단지종택은 단지 하엽이 지은 진양하씨 종택입니다.
단지종택(丹池宗宅)은 단지 하협이 분가할 때 터를 정해 지은 집으로, 당시 집터를 조성하고 땅을 고를 때 나무 위에 앉아 있던 학 두 마리가 앞산으로 날아갔다고 해서 이곳을 ’해기터[鶴基]‘라 하였다고 합니다. 경상남도에서는 단지종택을 창주의 후손인 담산 하우식의 호를 따서 담산고택으로 명명하였습니다.
건물 형태는 가운데 솟을대문이 있는 중심채 영역과 좌우에 담장으로 구획된 아래채 영역, 윗채 영역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안채는 1864년, 사랑채는 1871년에 건립되었는데, 두 건물은 단파 하계룡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그의 아들 담산 하우식에 의하여 1923년 중수되었고 별채는 1916년에 건립되었습니다. 그 외에 광채, 행랑채, 부속사, 정암정, 문간채 등이 있고 마당에는 효자목이라는 감나무가 있습니다.
광채는 내부는 고쳤으나 외형은 남아 있어 지방 사족의 가옥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1800년대 중엽부터 1900년대 중엽까지 차례대로 건물이 지어져서 가옥의 형태 변화를 살필 수 있어 고건축 연구에도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종손 순봉이 본채인 단지세장(丹池世庄)의 양쪽에 집을 지었는데 동쪽은 조부 묵재공을 위해 묵재 재실이라 이름 짓고, 서쪽은 목림 서실이라 이름 짓고 자신의 서재로 삼았습니다.
현재 고택 내에는 행정 하진태의 효행 관련 문헌을 포함한 고문서 약 5000점, 고서 약 3000책 등 고문헌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이를 모아 <고문서집성> 45권으로 발간하였습니다. 진양하씨 가문은 대부분 남명 조식의 문인이거나 그 학파에 속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진양하씨 단지종택에 남아 있는 고문헌들에도 이들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양하씨 후손들은 대부분 남명 조식의 문인입니다.
진양하씨(晉陽河氏)는 고려 시대 이후부터 진주에 세거하면서 다수의 과거급제자와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여 명문 가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특히 하륜의 조선 건국 과정에서의 활약과 진주정씨와의 혼인을 통해 진주 지역에서 강력한 기반을 구축하였습니다.
하순경과 그 아들 하기룡 대에 비봉산 아래를 떠나 거주지를 변경하였는데 하순경은 진주부 남쪽으로, 하기룡은 진주부 북쪽의 단목리로 이주하였습니다. 하기룡의 후손들은 단목리를 중심으로 활발한 학문 활동을 통해 사회적 기반을 유지, 강화해 갔습니다. 특히 하숙의 아들 하위보, 하진보, 하국보에 이르러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마련합니다.
하위보와 하국보는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하진보는 1554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들 3형제는 모두 남명 조식의 문인입니다. 하진보는 신산서원을 건립하여 남명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하위보도 후학 양성에 힘쓰며 남명의 학문 전파에 기여한 바가 큽니다. 하위보와 하진보의 남명 학파 내에서의 위치와 그들의 활동에 힘입어 하위보의 아들 단지 하협과 그 후손들 또한 남명 학파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활약하게 되었기에 17세기 이후 단목리는 진양하씨의 세거지인 동시에 남명 학파의 본거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부사정(浮奢亭)은 1600년(선조 33) 조선 중기 문신인 부사 성여신의 제자가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로, 유학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1785년(정조 9)에 반구정 외 17동이 불에 타 없어져 지금은 부사정 외 1동이 남아 있습니다.
진주성 충절을 기억하라! 초하(初夏)의 남강이 짙푸르구나
2024년 6월 고을학교는 <진주고을>
싱그러운 6월, 초여름의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 제110강은 서부 경남의 중심인 <진주고을>입니다. 진주고을은 삼국시대 백제의 땅으로 신라와 접경한 최전선에 위치하여 두 나라 간에 전략적인 요충지로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던 곳이며, 고려 시대에는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섬멸하기 위한 기지로서 역할도 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진주는 경상도와 호남을 연결하는 요충지로서 그 중요성이 높았기에 도호부가 설치되었고 경상우병영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현재 진주시는 동쪽으로는 창원시, 함안군, 서쪽으로는 하동군, 남쪽으로는 사천시와 고성군, 북쪽으로는 산청군과 의령군이 접해 있는 서부 경남지역의 중심 도시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고을의 성지이다. 본래 토성이던 것을 고려 우왕5년 (1379)에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성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서장대, 호국사,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진주시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10강은 2024년 6월 23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10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부사정-담산고택(단지종택)-진주향교-중앙시장(점심식사겸뒤풀이)-진주성(공북문주차장-공북문/중영/영남포정사문루/경절사/북장대/청계서원/산청범학리삼층석탑/포루/창열사/호국사/서장대/진주성우물/쌍충사사적비/의기사/촉석루/의암사적비/의암/촉석문/임진대첩계사순의단/김시민장군전공비-공북문주차장)-서울의 순입니다.
▲<진주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와 독감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10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진주는 고령가야의 옛 고을로부터 역사가 시작됩니다.
진주는 가야 시대에 고령가야의 고도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거열성으로, 통일신라 시대에는 거열주, 청주, 강주로 개칭되었고, 940년(태조 23)에 처음으로 진주로 개칭되었으며 983년(성종 2)에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습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진주는 경상남도에 속해지고 도청소재지가 되어 관찰사가 진주에 상주하였으며, 경남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925년 4월 1일 경상남도의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진주부는 진주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 1월 1일 도농 복합형태의 시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진주시와 진양군을 각각 폐지하고 통합 진주시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진주는 과거 466년 동안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지금에 말하는 경남의 도청소재지였습니다. 그것은 통일신라 시대인 685년(신문왕 5)에 청주총관을 둔 이래, 995년(성종 14)의 산남도를 거쳐 경상진주도로 통합된 1106년(예종 1)까지 421년간, 진합주도를 둔 1171년(명종 1)에서 경상 주도로 통합된 1186년(명종 16)까지 15년간, 그리고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한 1895년(고종 32)에서, 또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시행한 1896년(건양 원년)을 거쳐 경상남도의 도청이 부산부로 옮겨진 1925년까지의 30년간 등 총 466년입니다.
▲진주성 야경. 진주성은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며, 왜군과의 2차 전쟁인 1593년 6월, 7만 여명의 민ㆍ관ㆍ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국하였고,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껴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 곳이다.Ⓒ진주시
진주민란은 익산민란까지 이어지고 마침내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진주농민봉기[晋州民亂]는 1862년 5월 23일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으려는 진주 백성들이 봉기한 사건으로, 그 파급 영향은 12월 7일 황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어 민란이 연달아 일어난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세금, 병역, 부역, 환곡 등의 명목을 더해 받아들인 세금 종류만도 백 가지에 가까웠으니 진주농민봉기는 익산민란까지 이어지고 끝내는 동학 농민전쟁의 불씨가 된 조선 말의 대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민중 투쟁은 삶의 확보와 반외세, 반봉건 투쟁이었습니다. 일제의 상품 시장으로 변한 조선 경제는 비틀거렸고, 관리들의 탐획과 지주들의 봉건적 수탈로 농민들의 삶은 말이 아닌 데다 갑오년엔 극심한 가뭄으로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육십령과 섬진강 너머로부터 불어닥친 갑오농민봉기는 농민들을 ‘보국안민’, ‘척왜양창의’를 부르짖게 했으며, 을미왜변과 단발령 소식에 분연히 일어나서 마침내 의병투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펑등 사회를 갈망하는 형평사 운동이 일어난 곳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수긍하는 보편적인 원리인데 조선 시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분에 따라 귀천이 나뉘고 다시 신분은 직업을 결정하고, 배우자를 선택하고, 일상생활에서 사람 관계를 맺어주는 조건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신분 위계에서 가장 천한 신분 집단이 백정이었습니다. 한없이 차별받으며 억압받던 그들은 그야말로 천민 가운데 천민이어서 남들처럼 똑같이 대우 받으며 사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소망을 모아서 만든 단체가 형평사(衡平社)입니다.
형평사는 말 그대로 ‘저울처럼 공평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단체’입니다. 형평사는 1923년 봄 경남 진주에서 만들어졌는데 기본적으로 백정 차별의 관습을 없애고 평등사회를 만든다는 목적을 갖고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사회운동의 성격이 뚜렷한 형평사의 활동을 형평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형평 운동의 첫째 목적은 백정들에 대한 차별 대우를 없애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서 평등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형평 운동은 신분제의 찌꺼기를 없앤다는 과거 유산의 극복 측면에서, 또 평등사회를 향해 나간다는 미래 지향적 측면에서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에 우리 글 신문들은 흔히 농민, 형평, 청년, 여성 순으로 적으면서 형평 운동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이렇게 1923년 결성된 뒤 1935년에 이름을 ‘대동사’로 바꿀 때까지 뜻깊은 활동을 벌인 형평사는 일제 강점기 동안 단일 조직으로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사회운동 단체로 기록됩니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인간 평등을 주장하며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관습을 없애려고 활동한 인권단체로도 평가됩니다.
▲진주향교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각종 문헌자료를 종합하면 고려 초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진주시
진주향교는 고려 초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진주향교(晋州鄕校)는 창건 연대가 확실치 않으나 799년(신라 소성왕 원년)에 지금의 진주인 청주의 노거현을 국학의 학생 녹읍으로 했다고 한 것과, 조선 세종조의 영의정 하연의 <사교당기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때 인물인 은열공 강민첨 장군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주향교는 고려 초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각종 문헌자료를 종합하면, 987년(고려 성종 6)에 향학당으로 창건되어 국학감으로부터 경학 및 의학박사를 파견 수강토록 하였으며 현재의 의곡사 계곡에 위치하였습니다.
1011년(고려 현종 2)에 중수 및 서재를 중건하고 수학원, 학사, 서재, 사교학당 등으로 개칭되었으며, 1398년(조선 태조 7)에 문묘를 창건하고 향교로서 면모를 갖추었으며, 훈도, 교관, 교수 등이 성균관으로부터 파견되었습니다. 1558년(명종 13)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목사 김홍이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603년(선조 36)에 병사 이수일이 문묘를 중건하여 4년 후인 정미년에 병사 김태허가 명륜당, 동, 서재를 중건하였습니다. 사교당은 1986년에 중건되었습니다. 현재 대성전, 동무, 서무, 내삼문, 명륜당, 동재, 서재, 사교당, 풍화루 등이 남아 있습니다.
단지종택은 단지 하엽이 지은 진양하씨 종택입니다.
단지종택(丹池宗宅)은 단지 하협이 분가할 때 터를 정해 지은 집으로, 당시 집터를 조성하고 땅을 고를 때 나무 위에 앉아 있던 학 두 마리가 앞산으로 날아갔다고 해서 이곳을 ’해기터[鶴基]‘라 하였다고 합니다. 경상남도에서는 단지종택을 창주의 후손인 담산 하우식의 호를 따서 담산고택으로 명명하였습니다.
건물 형태는 가운데 솟을대문이 있는 중심채 영역과 좌우에 담장으로 구획된 아래채 영역, 윗채 영역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안채는 1864년, 사랑채는 1871년에 건립되었는데, 두 건물은 단파 하계룡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그의 아들 담산 하우식에 의하여 1923년 중수되었고 별채는 1916년에 건립되었습니다. 그 외에 광채, 행랑채, 부속사, 정암정, 문간채 등이 있고 마당에는 효자목이라는 감나무가 있습니다.
광채는 내부는 고쳤으나 외형은 남아 있어 지방 사족의 가옥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1800년대 중엽부터 1900년대 중엽까지 차례대로 건물이 지어져서 가옥의 형태 변화를 살필 수 있어 고건축 연구에도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종손 순봉이 본채인 단지세장(丹池世庄)의 양쪽에 집을 지었는데 동쪽은 조부 묵재공을 위해 묵재 재실이라 이름 짓고, 서쪽은 목림 서실이라 이름 짓고 자신의 서재로 삼았습니다.
현재 고택 내에는 행정 하진태의 효행 관련 문헌을 포함한 고문서 약 5000점, 고서 약 3000책 등 고문헌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이를 모아 <고문서집성> 45권으로 발간하였습니다. 진양하씨 가문은 대부분 남명 조식의 문인이거나 그 학파에 속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진양하씨 단지종택에 남아 있는 고문헌들에도 이들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양하씨 후손들은 대부분 남명 조식의 문인입니다.
진양하씨(晉陽河氏)는 고려 시대 이후부터 진주에 세거하면서 다수의 과거급제자와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여 명문 가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특히 하륜의 조선 건국 과정에서의 활약과 진주정씨와의 혼인을 통해 진주 지역에서 강력한 기반을 구축하였습니다.
하순경과 그 아들 하기룡 대에 비봉산 아래를 떠나 거주지를 변경하였는데 하순경은 진주부 남쪽으로, 하기룡은 진주부 북쪽의 단목리로 이주하였습니다. 하기룡의 후손들은 단목리를 중심으로 활발한 학문 활동을 통해 사회적 기반을 유지, 강화해 갔습니다. 특히 하숙의 아들 하위보, 하진보, 하국보에 이르러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마련합니다.
하위보와 하국보는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하진보는 1554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들 3형제는 모두 남명 조식의 문인입니다. 하진보는 신산서원을 건립하여 남명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하위보도 후학 양성에 힘쓰며 남명의 학문 전파에 기여한 바가 큽니다. 하위보와 하진보의 남명 학파 내에서의 위치와 그들의 활동에 힘입어 하위보의 아들 단지 하협과 그 후손들 또한 남명 학파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활약하게 되었기에 17세기 이후 단목리는 진양하씨의 세거지인 동시에 남명 학파의 본거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부사정(浮奢亭)은 1600년(선조 33) 조선 중기 문신인 부사 성여신의 제자가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로, 유학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1785년(정조 9)에 반구정 외 17동이 불에 타 없어져 지금은 부사정 외 1동이 남아 있습니다.
진주성 충절을 기억하라! 초하(初夏)의 남강이 짙푸르구나
2024년 6월 고을학교는 <진주고을>
싱그러운 6월, 초여름의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 제110강은 서부 경남의 중심인 <진주고을>입니다. 진주고을은 삼국시대 백제의 땅으로 신라와 접경한 최전선에 위치하여 두 나라 간에 전략적인 요충지로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났던 곳이며, 고려 시대에는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섬멸하기 위한 기지로서 역할도 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진주는 경상도와 호남을 연결하는 요충지로서 그 중요성이 높았기에 도호부가 설치되었고 경상우병영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현재 진주시는 동쪽으로는 창원시, 함안군, 서쪽으로는 하동군, 남쪽으로는 사천시와 고성군, 북쪽으로는 산청군과 의령군이 접해 있는 서부 경남지역의 중심 도시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고을의 성지이다. 본래 토성이던 것을 고려 우왕5년 (1379)에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성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서장대, 호국사,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진주시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10강은 2024년 6월 23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10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부사정-담산고택(단지종택)-진주향교-중앙시장(점심식사겸뒤풀이)-진주성(공북문주차장-공북문/중영/영남포정사문루/경절사/북장대/청계서원/산청범학리삼층석탑/포루/창열사/호국사/서장대/진주성우물/쌍충사사적비/의기사/촉석루/의암사적비/의암/촉석문/임진대첩계사순의단/김시민장군전공비-공북문주차장)-서울의 순입니다.
▲<진주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와 독감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10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진주는 고령가야의 옛 고을로부터 역사가 시작됩니다.
진주는 가야 시대에 고령가야의 고도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거열성으로, 통일신라 시대에는 거열주, 청주, 강주로 개칭되었고, 940년(태조 23)에 처음으로 진주로 개칭되었으며 983년(성종 2)에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습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진주는 경상남도에 속해지고 도청소재지가 되어 관찰사가 진주에 상주하였으며, 경남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925년 4월 1일 경상남도의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진주부는 진주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 1월 1일 도농 복합형태의 시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진주시와 진양군을 각각 폐지하고 통합 진주시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진주는 과거 466년 동안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 지금에 말하는 경남의 도청소재지였습니다. 그것은 통일신라 시대인 685년(신문왕 5)에 청주총관을 둔 이래, 995년(성종 14)의 산남도를 거쳐 경상진주도로 통합된 1106년(예종 1)까지 421년간, 진합주도를 둔 1171년(명종 1)에서 경상 주도로 통합된 1186년(명종 16)까지 15년간, 그리고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한 1895년(고종 32)에서, 또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시행한 1896년(건양 원년)을 거쳐 경상남도의 도청이 부산부로 옮겨진 1925년까지의 30년간 등 총 466년입니다.
▲진주성 야경. 진주성은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며, 왜군과의 2차 전쟁인 1593년 6월, 7만 여명의 민ㆍ관ㆍ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국하였고,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껴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 곳이다.Ⓒ진주시
진주민란은 익산민란까지 이어지고 마침내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진주농민봉기[晋州民亂]는 1862년 5월 23일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으려는 진주 백성들이 봉기한 사건으로, 그 파급 영향은 12월 7일 황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어 민란이 연달아 일어난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세금, 병역, 부역, 환곡 등의 명목을 더해 받아들인 세금 종류만도 백 가지에 가까웠으니 진주농민봉기는 익산민란까지 이어지고 끝내는 동학 농민전쟁의 불씨가 된 조선 말의 대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민중 투쟁은 삶의 확보와 반외세, 반봉건 투쟁이었습니다. 일제의 상품 시장으로 변한 조선 경제는 비틀거렸고, 관리들의 탐획과 지주들의 봉건적 수탈로 농민들의 삶은 말이 아닌 데다 갑오년엔 극심한 가뭄으로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육십령과 섬진강 너머로부터 불어닥친 갑오농민봉기는 농민들을 ‘보국안민’, ‘척왜양창의’를 부르짖게 했으며, 을미왜변과 단발령 소식에 분연히 일어나서 마침내 의병투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펑등 사회를 갈망하는 형평사 운동이 일어난 곳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수긍하는 보편적인 원리인데 조선 시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분에 따라 귀천이 나뉘고 다시 신분은 직업을 결정하고, 배우자를 선택하고, 일상생활에서 사람 관계를 맺어주는 조건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신분 위계에서 가장 천한 신분 집단이 백정이었습니다. 한없이 차별받으며 억압받던 그들은 그야말로 천민 가운데 천민이어서 남들처럼 똑같이 대우 받으며 사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소망을 모아서 만든 단체가 형평사(衡平社)입니다.
형평사는 말 그대로 ‘저울처럼 공평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단체’입니다. 형평사는 1923년 봄 경남 진주에서 만들어졌는데 기본적으로 백정 차별의 관습을 없애고 평등사회를 만든다는 목적을 갖고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사회운동의 성격이 뚜렷한 형평사의 활동을 형평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형평 운동의 첫째 목적은 백정들에 대한 차별 대우를 없애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서 평등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형평 운동은 신분제의 찌꺼기를 없앤다는 과거 유산의 극복 측면에서, 또 평등사회를 향해 나간다는 미래 지향적 측면에서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에 우리 글 신문들은 흔히 농민, 형평, 청년, 여성 순으로 적으면서 형평 운동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이렇게 1923년 결성된 뒤 1935년에 이름을 ‘대동사’로 바꿀 때까지 뜻깊은 활동을 벌인 형평사는 일제 강점기 동안 단일 조직으로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사회운동 단체로 기록됩니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인간 평등을 주장하며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관습을 없애려고 활동한 인권단체로도 평가됩니다.
▲진주향교의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각종 문헌자료를 종합하면 고려 초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진주시
진주향교는 고려 초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진주향교(晋州鄕校)는 창건 연대가 확실치 않으나 799년(신라 소성왕 원년)에 지금의 진주인 청주의 노거현을 국학의 학생 녹읍으로 했다고 한 것과, 조선 세종조의 영의정 하연의 <사교당기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때 인물인 은열공 강민첨 장군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주향교는 고려 초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각종 문헌자료를 종합하면, 987년(고려 성종 6)에 향학당으로 창건되어 국학감으로부터 경학 및 의학박사를 파견 수강토록 하였으며 현재의 의곡사 계곡에 위치하였습니다.
1011년(고려 현종 2)에 중수 및 서재를 중건하고 수학원, 학사, 서재, 사교학당 등으로 개칭되었으며, 1398년(조선 태조 7)에 문묘를 창건하고 향교로서 면모를 갖추었으며, 훈도, 교관, 교수 등이 성균관으로부터 파견되었습니다. 1558년(명종 13)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목사 김홍이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603년(선조 36)에 병사 이수일이 문묘를 중건하여 4년 후인 정미년에 병사 김태허가 명륜당, 동, 서재를 중건하였습니다. 사교당은 1986년에 중건되었습니다. 현재 대성전, 동무, 서무, 내삼문, 명륜당, 동재, 서재, 사교당, 풍화루 등이 남아 있습니다.
단지종택은 단지 하엽이 지은 진양하씨 종택입니다.
단지종택(丹池宗宅)은 단지 하협이 분가할 때 터를 정해 지은 집으로, 당시 집터를 조성하고 땅을 고를 때 나무 위에 앉아 있던 학 두 마리가 앞산으로 날아갔다고 해서 이곳을 ’해기터[鶴基]‘라 하였다고 합니다. 경상남도에서는 단지종택을 창주의 후손인 담산 하우식의 호를 따서 담산고택으로 명명하였습니다.
건물 형태는 가운데 솟을대문이 있는 중심채 영역과 좌우에 담장으로 구획된 아래채 영역, 윗채 영역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안채는 1864년, 사랑채는 1871년에 건립되었는데, 두 건물은 단파 하계룡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그의 아들 담산 하우식에 의하여 1923년 중수되었고 별채는 1916년에 건립되었습니다. 그 외에 광채, 행랑채, 부속사, 정암정, 문간채 등이 있고 마당에는 효자목이라는 감나무가 있습니다.
광채는 내부는 고쳤으나 외형은 남아 있어 지방 사족의 가옥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1800년대 중엽부터 1900년대 중엽까지 차례대로 건물이 지어져서 가옥의 형태 변화를 살필 수 있어 고건축 연구에도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종손 순봉이 본채인 단지세장(丹池世庄)의 양쪽에 집을 지었는데 동쪽은 조부 묵재공을 위해 묵재 재실이라 이름 짓고, 서쪽은 목림 서실이라 이름 짓고 자신의 서재로 삼았습니다.
현재 고택 내에는 행정 하진태의 효행 관련 문헌을 포함한 고문서 약 5000점, 고서 약 3000책 등 고문헌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이를 모아 <고문서집성> 45권으로 발간하였습니다. 진양하씨 가문은 대부분 남명 조식의 문인이거나 그 학파에 속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진양하씨 단지종택에 남아 있는 고문헌들에도 이들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양하씨 후손들은 대부분 남명 조식의 문인입니다.
진양하씨(晉陽河氏)는 고려 시대 이후부터 진주에 세거하면서 다수의 과거급제자와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여 명문 가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특히 하륜의 조선 건국 과정에서의 활약과 진주정씨와의 혼인을 통해 진주 지역에서 강력한 기반을 구축하였습니다.
하순경과 그 아들 하기룡 대에 비봉산 아래를 떠나 거주지를 변경하였는데 하순경은 진주부 남쪽으로, 하기룡은 진주부 북쪽의 단목리로 이주하였습니다. 하기룡의 후손들은 단목리를 중심으로 활발한 학문 활동을 통해 사회적 기반을 유지, 강화해 갔습니다. 특히 하숙의 아들 하위보, 하진보, 하국보에 이르러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마련합니다.
하위보와 하국보는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하진보는 1554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들 3형제는 모두 남명 조식의 문인입니다. 하진보는 신산서원을 건립하여 남명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하위보도 후학 양성에 힘쓰며 남명의 학문 전파에 기여한 바가 큽니다. 하위보와 하진보의 남명 학파 내에서의 위치와 그들의 활동에 힘입어 하위보의 아들 단지 하협과 그 후손들 또한 남명 학파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활약하게 되었기에 17세기 이후 단목리는 진양하씨의 세거지인 동시에 남명 학파의 본거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부사정(浮奢亭)은 1600년(선조 33) 조선 중기 문신인 부사 성여신의 제자가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로, 유학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1785년(정조 9)에 반구정 외 17동이 불에 타 없어져 지금은 부사정 외 1동이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