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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희 수녀(고로나, 성바오로딸수도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해마다 성탄절의 구유 꾸미기는 수녀원의 큰 행사가 되고 있다. 보통 수련자들이 중심이 되어 거대한 작품이 하나씩 탄생하곤 하는데 이번 구유는 특이하게도 무수한 작은 밀알들이 모여서 크고 둥근 성체를 이룬 ‘성체구유’를 꾸몄다.
그리고 선택한 성경말씀도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이다. 성탄에 천사들이 노래한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사랑 받는 이에게 평화’ 라는 글귀가 없는 것이 서운하기도 했는데 성체구유를 만든 이의 작품해설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영원한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구유에 누우실 수 있을 만큼 작은 아기가 되시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람들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넘치는 당신 사랑을 영원히, 더욱 더 풍성하게 사람들에게 베푸시기 위해 매일 성체 안에서 우리에게 태어나기로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오늘날에도 불의와 폭력과 이기심이 있는 곳에 아기 예수님을 모셔 가면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구원의 손길이 가닿아야 할 곳을 위해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탄 다음 날은 성 스테파노 순교자 축일. 부제님의 강론도 “성탄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오늘 순교자 미사를 바칩니다. 사실 아기로 세상에 오신 성자의 성부에 대한 순명, 이것이 이미 순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과 순교가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12월 27일 요한사도 축일의 복음도 예수의 무덤을 찾아간 사도들 이야기였고 12월 28일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미사였다.
성탄 대축일의 큰 기쁨에 이어지는 순교와 죽음과 희생이라는 주제가 결정적으로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은 성탄휴가 때 파비올라를 읽으면서였다.
로마 대 박해상황에서 아름답고 우아한 이교도 귀부인 파비올라가 그리스도교 진리에 매료되어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지는 가운데 성녀 아녜스와 성 세바스티아노가 순교하는 장면이 감동적으로 묘사된다.
순결하고 천사 같은 성품의 아녜스와 시라와 방그라시오 등,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참된 왕이신 하느님만을 섬기려 했기에 기꺼이, 즐거이 순교를 기대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은 어둠이 빛을 죽이고 미움이 사랑을 죽이는 어지러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감명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말씀하셔도 헛일입니다. 저는 이 나라의 신들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오직 한분 유일하게 참된 신에게만 저의 생명을 드리고 예배드립니다.” 순교하기 직전에 성녀 아녜스가 한 말과 기도는 오늘 내가 받들어 섬기는 첫째 왕은 과연 누구일까를 생각하게 해준다.
스테판 N.P.와이즈먼 지음 | 이석현 옮김| 13,000원| 바오로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