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연기법을 "인식의 연기"로 이해해야 되는 이유
부처님은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출가를 했고, 연기의 이치를 깨달아 괴로움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러면 연기가 무엇이길래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인가?
이미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서 어떻게 벗어난 것인가? 깨달은 부처님도 늙었고, 병들어 고생하셨고, 결국은 돌아가시지 않았던가?
여기서 우리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이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연히 알 수 있다. (물론 부처님을 신격화하여 신화적 존재로 만들어 버린 기복신앙의 불교는 여기서 논외로 한다)
부처님은 ‘나’라고 할만한 실체가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이로서 생로병사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한 것이다.
즉 ‘나’라고 하는 것은 연기하여 生한 인식현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중생들에게는 ‘자아’라는 인식의 “발생구조”를 근경식의 삼사화합의 이치로 풀어 오온, 십이입처, 십팔계로 해체하여 설하고, ‘자아’라는 인식의 “성립과정”을 십이연기법로 풀어서 설하신 것이다.
그러나 십이연기를 이러한 인식(탐진치)의 연기, 즉 인식의 증장으로 인한 ‘나’라는 허망식의 형성과 괴로움의 윤회로 이해하지 않고, 연기법에서 처음에 언급한 “사실의 연기”의 접근방식으로,
즉 나라는 존재(또는 식)가 몸을 받아 태어나서 업을 짓고 죽고 다시 태어나고 하는 윤회의 과정(삼세양중인과설)로 풀게 되면 불법의 어그러짐이 일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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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올린 것처럼 만 알아도 정말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만큼 공부한 분이 있으니 여기서도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비유하자면 신수의 게송과 같습니다.
혜능의 게송은 신수의 게송이 없으면 뜻이 제대로 전해질 수 없어요.
신수를 통해야 혜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신수의 게송과 같은 역활을 하는 위 내용을 보면서 조금 더 생각해 보려 합니다..^^()..
1. 이미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서 어떻게 벗어난 것인가? 깨달은 부처님도 늙었고, 병들어 고생하셨고, 결국은 돌아가시지 않았던가?
여기서 우리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이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연히 알 수 있다. (물론 부처님을 신격화하여 신화적 존재로 만들어 버린 기복신앙의 불교는 여기서 논외로 한다)
라고 하고 있는데..
일반적인 싯점에서 보면 위 내용은 틀린 곳이 없지요.
그런데 무아라 하는 부처님 싯점에서 보면 저와 같은 표현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무엇이 잘못일까요?..
그보다 먼저 일반적인 눈높이와 부처님 눈높이는 무엇이 다른가요?..
전자는 존재가 출발점이라는 겁니다.
위에서 보듯.. 태어났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라고 하려면.. 존재가 있기에 그렇게 보이고 말할 수 잇는 거지요.
만일 어떤 존재가 없다면 그것의 생노병사를 말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이렇게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을 일반적인 싯점이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부처님 싯점은?.. 이것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설명도 어려워 오해하기 십상이지요.
아무튼 존재를 전재하지 않아요. 존재를 전재하지 않는다 했으니 생을, 멸을 말할 수도 없지요.
이만큼 하고 본문의..
깨달은 부처님도 늙었고, 병들어 고생하셨고, 결국은 돌아가시지 않았던가?
를 보면.. 무엇이 보이나요?.. 존재를 전재하고 서술하고 있는 거지요.
곧 부처님 싯점이 아닌 일반적인 싯점으로 기술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인..
여기서 우리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이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연히 알 수 있다.
(물론 부처님을 신격화하여 신화적 존재로 만들어 버린 기복신앙의 불교는 여기서 논외로 한다)
를 보면 철저하게 중생 싯점에서 기술하고 있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무아의 싯점이란 늙는다 할 수 없고, 병든다 할 수 없고, 죽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생로병사를 해결한는 것입니다.
그러니 위 내용은 더 볼 필요도 없이..
저와 같은 자세로는 결코 궁극적인 깨침을 얻을 수 없다고 하게 되는 겁니다.
2. 저 역시 전에는 실체, 실상이란 말로 존재를 구별하려고 노력했는데.. 이제보니 부처님은 존재라는 말을 세분화 해서 사용하지 않으셨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각기 사물에 항상하는 실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부처님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일체 무상]이란 말은 존재하는 일체가 생노병사 또는 생주이멸한다는 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식과 명색이 조건(연)에 의해 생기고(기)..
그렇게 식이나 명색이 생겨 존재가 되면 생주이멸의 길을 걷는다는 거지요.
3. 이렇게 알면 본문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존재인 6근6경을 전재로 하고, 그로 인해 6내외입처와 인식이 생기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착각의 원인이 있지만.. 그 원인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까다롭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말하는 12처, 18계, 5온은 6근6경에서 생기는 게 아닌 6내외입처에 생긴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중생싯점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3사화합을 6근경식으로 이해하는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4. 즉 ‘나’라고 하는 것은 연기하여 生한 인식현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중생들에게는 ‘자아’라는 인식의 “발생구조”를 근경식의 삼사화합의 이치로 풀어 오온, 십이입처, 십팔계로 해체하여 설하고, ‘자아’라는 인식의 “성립과정”을 십이연기법로 풀어서 설하신 것이다.
라고 했는데..
세간의 눈으로 보먼 탁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정말 멋진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 불교] 입장에서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나오지요.
<잡, 8-214경>을 보면 2법인 12처에 의해 6식이 생겨..
12처와 6식이 접촉이 가능한 18계가 되며,
그 18계의 촉(=3사화합)에 의해 5온이 생기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3사화합을 근경식의 작용으로 이해하면 그대로 삼천포가 됩니다..^^
12연기법은 인식의 성립과정이 아닌 3사화합에 의해 생긴 식과 명색에 의해 고가 증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지요.
그러니까 3사화합촉에 의해 [나]라는 몸과 의식이 생기며, 그렇게 생긴 [나]의 의식이 12연기법 과정을 통해
증장하며, 고가 덩달아 증장함을 보여 주는 겁니다.
그것을 남방불교에서는 3세양중인과설로 확장 해석하지만.. 3세설이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단 환멸문을 알고 있다면 3세설은 불완전한 12연기법 해석이 되지요.
첫댓글 좋은글 고맙습니다. 존재를 인정하면 유무견을 일으키고 결국 유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고의 멸은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논두렁님과 그의 동반자들은 존재를 인정하면서 존재로부터 자유롭다 하는데 그들 말이 옳습니다.
존재를 인정하면서 존재로부터 자유로울수 있는견해는 바로 바로 바로 단견입니다. ^^ 그래서 부처님도 단견론자였다고 주장하는것이고요. 그들이 단견을 주장함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정견은 아니며 죽으면 끝이다는 염세 비관론자들과 다르지 않은견해입니다. 아 부처님이 염세 비관론자 였다니...
그들은 또 이럴것입니다. 염세 비관이 아니다 사실을 사실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나머지 삶을 평안하게 살기 위함이다고 인정할거 인정하고 편하게 살다 죽자 죽은후에도 영혼이 상주할것이라는 헛된 믿음 갖지말고 종교장사하는 기독교나 일부 불교에 돈갖다 바치지 말고 편하게 살다 죽자 이런 견해지요. 이런 주장할바에야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좋을텐데 쩝 안타깝습니다. 실참 실참 하는데 이런 결론이 실참의 결과라니 참 어이가 도망가네요.
"네 자신을 알라"고 가르친 소크라테스 선생은.. 남이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무엇을 압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대답했다고 하지요.
결국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는 게 문제입니다.
죽으면 무엇이 있다든지.. 죽으면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려면..
죽어봐야만 알 것입니다. 즉 죽었던 사람이 돌아와 있다 또는 없다고 말하면 믿거나 말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믿습니다.
거의 죽을 뻔했다가 돌아온 사람은 있어도 진짜(?^^) 죽었던 사람이 돌아왔다는 것은 모두 뻥. 이라고 합니다.
맛이 간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윤회를 설하셨습니다.
윤회란 죽었던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아도.. 다음 생에 태어나는 [나]는 있다는 겁니다.
하여 무아 윤회다 8식이 윤회한다는 등의 의견이 분분하며,
심지어 단멸론이 바로 불법이다라고 까지 합니다.
이론적으로도 무아인데. .무엇이 있어 윤회를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에게..
한마디로 그들은 12연기법의 유전문과 환멸문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렇게 믿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흥미있는 사실은..
그들에게 12연기법은 이런 것이기에 단멸이 아니고 영원(=常)이 아니다 라고 설명해 주어도..
전혀 듣지를 읺는다는 점입니다..^^
1410. 단멸론자의 주장은..
이미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서 어떻게 벗어난 것인가? 깨달은 부처님도 늙었고, 병들어 고생하셨고, 결국은 돌아가시지 않았던가?
에서 보듯 초파일에 태어나 80세에 돌아가셨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누가 봐도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냐는 겁니다.
1411.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부처님은 80세에 돌아가신 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부처님은 80세에 돌아가신 게 아니다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불법을 진실로 이해하지 못한 게 됩니다.
그렇게 80세에 돌아가신걸로 인정하면서..
불법을 이해하면 그것은 세간의 불법 이해 밖에 되지 않습니다.
윤회를 인정하는 힌두교와 대립할 뿐, 실은 그 밥에 그 반찬이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 대단한 것처럼 윤회를 인정하는 부파 불교와 힌두교를 공격합니다..^^
1412. 안타깝게도 불법을 이곳 [열토방]처럼 해석하는 곳이 거의 없는 까닭에..
이곳만 나가면 상견(=윤회론)이나 단견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일체 무상]을 해석할 때도..
일체가 이미 있어 그것은 관찰을 통해 무상하다고 관찰되는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그게 아니지요.
일체는 6내외입처의 촉으로 생겨나는 겁니다.
6내외입처의 촉이 있기 전에 일체는 없습니다.
더우기 6내입처는 같지가 않아요. 6내입처는 같은 게 아니니 그로인해 생기는 일체는 다르겠지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풍신수길에 대한 인상을 묻자.
두 사신은 전혀 다른 느낌을 전했다고 하는데..
1413. 그건 어느 한 쪽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현실에서 얼마든지 그렇게 보인다는 거지요.
지금 한국에서는 상대를 좌 또는 우라고 하면서 사사건건 부딪히고 있는 데..
5.18 민주 항쟁도 이북군의 행패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기를 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는 정말 그렇게 보인다는 겁니다.
그들의 6내입처가 6외입처를 그렇게 보도록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여지는 일체는 고정되어 잇는 게 아니라..
6입처가 어떤 의지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거예요.
그럼 보여지는 일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을까요?..
1414. 무지와 탐욕이 없으면 있는 그대로.. 곧 무상하고 무아인 대로 본다고 합니다.
여기에 이르면 왜 책상은 고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책상은 스스로 책상이라 하지 않아요.
누군가가 '책상'이라 하는 거지요.
그럼 책상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책상은 스스로 책상 인 줄도 모르고 있으니..
그것을 '책상'이라고 인식하는 자 일체 안에 있는 게 됩니다.
그렇지요?..^^
1415. 이렇게 우리는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여 이름을 붙이고 차이를 알면서 일체를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스트레스지요.
그러나 그렇게 구별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바보 멍청이가 아니라면 그렇게 구별해야만 살 수 있는 게 인간 사회입니다.
그게 뭡니까?..
스트레스요, 苦지요.
1416. '책상이 고'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책상이라고 인식하는 자체가 고라는 겁니다.
그럼 무상과 무아를 깨치고 있는 이는 어떻게 말할까요?..
'책상'이라고 말을 하더라도.. '책상'이라는 것에 전혀 집착이 없다는 거지요.
책상이라고 말하면서도 책상이란 대상과 자신(=나)을 둘로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무아)..^^
부처님께서 80세에 돌아가셨다는 것은 초심이 들어 그렇게 알고 있는 것으로..
초심의 일체가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신이 80세에 죽는다는 것에 전혀 집착이 없습니다.
만일 눈꼽만큼 아니 1/0000000 나노만큼이라도 [나]라는 집착이나 의식이 있다면..
부처님이라 불릴 수 없지요..^^()..
1502. 아직도.. 책상을 책상이라고 아는 게 어찌 고인가?.. 하는 분에게..
[그것]에 밥을 놓고 먹으면 [밥상]이요, 책을 놓고 먹으면 [책상]이요, 칼이 날라오는 것을 막으면 [방패]라 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그것]의 이름이나 용도는 [그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책상이라 이름 한 것은 [그것]을 책상으로 사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을 때 붙인 이름 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책상이 아니라, 책상으로 사용하려는 자에게 책상일 뿐입니다.
그러니 [책상]이란 어디에 있는 겁니까?..
[그것]을 책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의도 하는 자 안(=일체)에 있습니다.
1503. 일체란 무엇일까요?..
외부에 놓여 있는 것 모두라 하고 싶지만..
깊이 잘 생각해 보면..
이름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일체라 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름은 어디에 있습니까?.. 외부에 있나요?.
아니! 지요.
의식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일체는 3사화합촉에 의해 생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