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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진(朴洸眞)
영문명칭 : Park kwang-jin
출생일 : 1935년 4월4일
출생지 서울
국적 대한민국
분야 서양화가
목차
1. 정의
2. 내용
3. 작품세계
4. 주요작품
5. 민족기록화
6. 학력
7. 경력
8. 전시
9. 수상
정의
대한민국의 서양화가이다.
내용
1935년 서울에서 출생한 박광진은 홍익대학교 재학 시절인 1957년 6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대학생으로는 최초로 특선하였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앵포르멜(Informel)운동이나 이후의 기하학적 추상, 그리고 모노크롬(단색조) 회화에 가담하지 않고 계절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포착한 풍경화를 그린 고전주의적 사실주의 화풍의 화가이다. 국전과 목우회를 비롯한 구상화가 그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서울교육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작품세계
그는 초기 작품부터 사실적인 기법으로 자연을 포함한 존재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그리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명확한 관찰을 토대로 기하학적으로 분할하여 적절한 비례와 구도에 맞추어 화폭에 배치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아울러 사실적이고 적확한 묘사를 위해 필력을 연마하였다. 이 과정을 통하여 그는 이상적으로 구축된 구조 위에 숙련된 색채와 형태로 대상의 리얼리티를 재현해냈다.
그가 추구한 리얼리티란 구축적으로 파악한 자연에 대한 사실적 재현이었다. 이는 단순히 대상을 포착해 그대로 묘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의 대상을 화폭이라는 조형적 공간에 어우러지도록 종합하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감성과 직관에 따른 자연의 실체를 포착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의 화면에는 빛과 공기에 의해 변화하는 사물들의 형태와 움직임이 작가의 내면과 감성을 여과하여 표현되고 있다.
주요작품
국보, 1957, 캔버스에 유채, 130.3x162.2cm, 제주현대미술관 소장
닭장, 1960, 캔버스에 유채, 112.9x145.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월출산, 1978, 캔버스에 유채, 50x12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공작, 1992, 캔버스에 유채, 50x150cm, 제주현대미술관 소장
민족기록화
박광진-소양강댐, 1973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화 (국가기록원 기록에 따르면 이 작품은 1979년 총무처에 대여되었다.)
박광진-승군을 지휘하는 휴정(서산대사), 1976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화, 소장처 전쟁기념관
박광진-아산방조제, 1975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화, 소장처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
박광진-장보고의 해상 활동, 1975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화 (국가기록원 기록에 따르면 이 작품은 1991년 11월 30일부터 1992년 11월 29일까지 육군 제2218부대에 대여되었다.)
학력
1958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경력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서울교육대학 교수
전시
1965-82 목우회 회원전
1967-80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전, 국립현대미술관
1992 서울시 초대작가전
1994 서울국제현대미술제, 국립 현대 미술관
1995 한국현대미술전, 프랑스 파리 Couvent des Cordeliers
1999 그랑 에 존느, 파리 에펠-브랑리
2004 한일현대미술전
2006 그랑빨레 꽁빠레종 살롱전, 파리 그랑팔레
2007 스페인 마드리드 파즈휠릴스갤러리 초대전
2008 파리갤러리 마크핫샘 초대전
2011 파리갤러리 다니엘베세쉬 초대전
수상
1997 서울시문화상, 국무총리표창, 예총 문화대상
1998 보관문화훈장
2000 5.16민족상, 홍조근정훈장
2004 오지호 미술상
2008 은관문화훈장
한국 사실회화의 새로운 지평 - 박광진화백의 최근 작품과 작가 활동
김달진(가나아트센터 자료실장)
출처 : 서울아트가이드
2001년 11월 서울에서 대형 개인전을 준비 중인 박광진화백을 인터뷰하였다. 국내에서는 1976년 미술회관 개인전, 1977년 변화랑 초대전 이후로, 1980년 스웨덴 스톡홀룸 한국문화센터, 83년 LA 삼일당화랑, 85년 뉴욕 한국문화원, 96년 LA 아름화랑, 2000년 11월 파리 유네스코본부 미로홀에서 전시회를 가진 후에 이번에 24년만에 서울전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해외전은 작가로서의 꾸준한 활동과 파리에서 먼저 전시회를 열어 반응을 타진을 해보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우리의 자연을 충실히 재현한 작품
박화백은 홍익대 재학 중인 1957년 6회 국전에서 박물관 진열장을 그린 <국보>로 특선을 시작으로 1963년 추천작가에 오른 순수 국전파이다. 그후 우리나라 명산, 농촌의 초가집, 제주도 풍경 등을 즐겨 화폭에 담아 왔다. 시간과 계절 그리고 풍토와 빛의 분위기를 가지고 한국의 산야를 표현해서, 즉 전체의 분위기 속에서 빛으로 둘러싸인 시각적인 환경을 묘사하는 인상파를 반영하는 작가이었다. 박화백의 작품세계는 초기에 소재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실에 충실했지만 마티엘 등 재질의 연구와 나이프를 사용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했다. 판자집과 닭장, 토끼장 등을 소재로 비교적 모노톤한 색조와 면의 확대 등으로 단순 구성을 이루었다. 갈색과 연두빛 등 비교적 안정감이 있는 단색의 절제된 작품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까지 자연을 흠모하는 사실주의에 충실했다. 우리의 자연을 빛에 의한 발랄하고 화사한 색채로 조화시켜 새로운 감각의 자연을 재창조에 몰두한 것이다. 자연의 진실을 정직하게 묘사해내고 그 진수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그림에서 곱게 밝아지는 양식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1980년대 이후 특히 제주도의 한라산, 토담벽, 돌각담, 초가집, 유채꽃, 갈대 등 그곳에 정착하고 싶을 만큼 제주의 풍물을 좋아한 것이다. 그후 자연의 사실을 재해석 기간을 걸쳤다. 장황한 설명이나 광범위한 소재에 시계(視界)를 축소시켜 바위, 계곡, 갈대숲, 잔디밭 등 자연의 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특징적으로 구사했다. 이런 작품세계를 미술평론가 이경성씨는 “박광진의 작품을 가장 예술적으로 성공시키고 있는 것은 그의 작품 구석구석에까지 침투되고 있는 광선에 대한 배려이다”로 평한 바 있다.
미술계에서의 활동
박화백은 미술활동을 해오면서 목우회 창립에서 활동, 한국일요화가회 창립, 미술대전에서 구상 비구상 분리 개최 등으로 구상미술 중흥과 미술의 대중화에 기여해 왔었다. 자연주의적 사실을 지향하는 그룹 목우회는 1957년 6월 덕수궁 나무 밑에서 창립되어 이종우, 도상봉, 김인승, 박득순, 박상옥, 손응성 씨 등 17명이 동인이었고, 그 당시 대학 재학생으로 대선배들과 참여하여 10여년간 총무를 맡아 일을 했다. 목우회는 1958년 10월 창립전 이후 한국의 아카데미즘을 이끄는 가장 규모가 큰 사실화가들의 단체로 국전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1963년부터 공모전을 개최해오고 있다.
지금은 신문사 백화점 문화센터, 각 대학 미술교육원 등 그림을 배울 수 있는 환경과 기회가 조성되었지만 당시는 그림을 접하기도 쉽지 않았다. 당시 목우회 총무로 있던 박화백이 주축이 되어 순수미술 동호인 그룹의 필요성을 역설해 1965년 한국일요화가회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 그룹은 서울 종로1가 종로화방 빌딩 3층에 종로미술연구소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생긴 아마추어 미술인 단체였다. 그렇지만 정치인, 경제인, 언론계, 문화계 인사들을 미술이란 동아리로 묶은 것으로 힘이 실려졌다. 정기적인 스케치대회, 회원전 등으로 미술의 대중화에 관심을 모았다. 미술이 일반 대중에게 가까워지는 지름길은 직접 체험하는 것을 실행시킨 것이다.
박화백이 현대미술을 비구상으로 만 생각하여 위축받던 구상미술 중흥의 기틀을 위해 가을에 개최해오던 대한민국미술대전을 1993년부터 다시 비구상-봄, 구상-가을로 분리 운영을 결정하여 지금 껏 이어지고 있다. 이 일은 당시 시대에 역행한 국전 망령이 되살아난다는 비판까지 받았다. 그러나 미술대학 교육이 비구상 일변도로 나가고 공모전에서 구상미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또한 구상으로 단단한 기초를 다져야 하는데 비구상에 매달려 기초교육을 소홀히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소신이었다.
한국화단의 외교관
박화백은 한국미협 이사장, 유네스코 산하 IAA(국제조형예술협회) 수석 부회장, 1995년 미술의 해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고, 예술의 전당 이사,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 문화관광부 문화비전 2000위원, 국무총리 정책자문위원 등 미술행정에도 많은 관여를 하였다. 미협 이사장 재임시 문화예술진흥법 중 미술관련 조항인 건축물에 미술작품을 건축비의 1% 설치하는 권장사항을 의무사항으로 개정된 것은 박화백의 공로였다. 이 법은 실제로 미술 창작인에게 창작의욕을 북돋아 주었고 예술 환경 조성에 공헌한 바가 크지만 소수에 의한 독점과 수준 낮은 작품 등으로 비판도 받고 존폐가 위협받기도 했다.
박화백은 한국미협 이사장 재임기간 동안에 누구보다 많은 일을 추진했고 업적이 남았다. 우리나라 미술계에 외교관이라고 알려졌다. 1992년 국제조형예술협회(IAA) 제13차 정기총회를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30여년만에 유치하여 잘 치루어 냈다. 그리고 1994년 개최한 서울정도 600주년기념 서울국제현대미술제는 한국미협이 주최가 되어 언론사와 공동주최로 대림그룹과 관의 후원을 받아 치러낸 대규모 국제적 행사였다. 이 때 박화백이 운영위원장, 프랑스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가 총 커미셔너를 맡고 40여개국 79여점, 국내작가 407여점이 초대된 대형 전시회였다. 이어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개관에도 일익을 담당했고, 프랑스 유네스코 초대로 열린 한국현대미술 50인전도 주관하여 기록될 만한 행사였다.
새롭게 달라진 최근 작품
지난 5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제7회 마니프-서울국제아트페어에 가서 최근작을 보았는데 새롭게 바뀐 작품 앞에서 한참을 살폈다. 예전의 사실적인 그림에서 상당부문 추상으로 변화해서 달라진 화면 구성이 눈길을 끌었다. 사실은 나이나 화단에서 위치를 보아 우리 풍토에서는 쉽지 않은 변신이었다. 새로운 작품은 1992년 이후 자주 프랑스 쪽을 왕래하며 자연스럽게 시야가 넓어졌다. 구상회화도 시대에 따라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지역성을 탈피해 국제적 흐름을 간파한 셈이다. 인간의 추상 본능에도 귀를 기울여야 된다고 느꼈고 현대성이 강한 구상작품을 생각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작가는 사실적인 작품을 지속하며 너무 안일한 작품세계에 함몰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다.
작가는 스스로 변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자연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박화백은 광활한 들판에 서있는 억새풀에서 오묘한 생명력을 찾았다. 그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것으로 그간 즐겨 다루어온 억새에서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억새풀 속에 숨겨진 생명력, 자연 속에 묻힌 비장의 혼을 캐내어 하나의 물상으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술의 기능적 측면보다 형이상학적인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이었다. 새로운 작품들은 구상과 비구상의 공존, 수평과 특히 수직에 의한 엄격한 화면 구조를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수직의 그래픽적 요소가 많아졌다. 박화백이 즐겨 쓰고 있는 붉은 갈색과 녹색 색조는 우리 농경문화, 향토색, 억새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해 미술평론가 유준상씨는 “박광진의 공간은 자연과 조형의 종합으로 발전된 기본적인 패러다임을 보여주고 있다. 지표(地表)와 수직으로 짜여지는 공간위상이다. 수직은 지표의 형상이며, 지표는 수직의 소지(素地)이다. 이러한 어우러짐이 게슈탈트의 정태(靜態)가 아닌 자연의 진폭(振幅)을 연상시켜 줌은 발생적인 공간과 조형적인 공간의 어우러짐 때문이라고 하겠다. 강가 혹은 해변의 능선에 자생하는 갈대들의 싱그러움은, 밑에서 위로 자라 수직은 발아(發芽)의 현상이며, 수액(樹液)의 변용으로 자라나는 자연의 섭리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이 자연의 자족적인 공간구성이며 그래서 자연이다. 그리고 이것이 박광진의 자연이기도 하다” 라고 설명했다.
현재 하루 작업이 6 - 8시간 정도지만 앞으로 한계를 10년으로 볼 때에 마무리 단계이다. 이번 개인전에 연연하지 않고, 한국 구상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겠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다. 성공을 보장받기 보다는 최선을 다한 결과가 작품으로 남아 평가를 받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 보여주는 삼차원 공간을 평면화하는 최근 작품들은 시각실험이나 새로운 시도로 끝나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섭리, 그리고 위상을 표현코자 한 것이다. 무한히 펼쳐지는 직선의 배열 속에 우리가 미쳐 알지못한 아우성, 생명력, 소망이 담겨져 있다. 지금 박화백은 예술의 정점을 위해 올라선 것이다. 지금껏 추구해온 사실회화에서 오랜 산고 끝에 새롭게 펼치는 변모된 작품은 시대성을 담고 신선하게 다가오고 있다. 박화백은 진부하고 획일적인 양식이 만연된 우리 사실회화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 놓은 발전에 기대가 크다.
<예술혼 산책> 달필의 화가 박광진(朴洸眞)
굿뉴스피플 기사 입력시간 : 2005. 11.25. 12:52
고운석 주필
후천적 노력에서 탄생한
색채-형태의 탁월한 조화
낡은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다시 극복하는 화가 박광진(朴洸眞)이 있다. 그는 1933년 서울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57년 홍익대학 서양학과를 졸업하면서 목우회 창립 회원, 1965년 한국일요화가회 창설, 1967년 민족기록화 6.25동란편(1,000호) 제작, 1967∼78년 개인전 5회 개최 등의 이력을 보여준다. 박 화백의 회화를 평면 예술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그의 예술이 이차원적인 평면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 미술이라는 통념 속에는 두 가지의 커다란 뜻이 있는데. 하나는 회화를 비롯한 판화, 드로잉, 사진 등 평면예술이고, 또 하나는 그 예술의 성립이 삼차원적인 입체 위에서 이루어지는 입체예술, 즉 전통적인 의미의 조각이나 현대적 의미의 입체작품을 말한다. 평면예술이건 입체작품이건 간에 조각예술이 바라고 있는 것은 일정한 공간성을 지니고 있는 매개를 통해서 시각에 대항하는 실체를 창조하고, 그렇게 창조된 물체를 통해서 그 존재의의(存在意義)나 물체의 조형적 밀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데 있다. 이때 작용하는 것이 조각의 논리로서, 그것은 선천적으로 일정한 규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인간의 생활을 통해서 얻어진 경험 속에서 세워진 하나의 약속인 것이다.
박 화백의 작품 중 ‘노틀담 사원(寺院)’을 보자. 이 그림은 유럽 여행 중에 파리에 들러서 노틀담 성당을 여첩(旅帖)에다 담고 그것을 작품으로 남기고 있다. 센강을 가로지르고 있는 아름다운 아치 너머로 멀리 파리의 역사가 아물거리고 앙상히 드러난 노틀담의 고딕미가 역사까지 자랑하고 있다.
회화는 직설적으로 인간의 시각에 호소하고 그렇게 빚어진 영상을 통해서 종교의 힘이나 기타 의도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이바지했던 것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사실적인 수법과 추상적인 수법을 아울러 썼다. 오랜 회화의 역사에 있어서 사실의 세계가 사람들에게 친근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박 화백이 학창시절부터 줄곧 추구해온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의 수법을 통해 존재의 아름다움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그의 조형은 우선 화폭이라는 평면 위에다 면을 설정하고 그렇게 설정된 면을 기하학적인 원리에 따라서 분할하고 그렇게 분할된 위에다 자연에서 얻은 이미지를 배치하는 것이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서 우선 무엇보다도 재현의 능력을 쌓아야만 했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속도 있는 필치는 곧 그가 이룩한 후천적인 노력의 결실이다. 보통 달필이라고 불리는 이 능력은 그의 작품의 리얼리티를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운 감정은 그와 같이 구축된 구조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실현되는 색과 형태의 조화이다. 특히, 화면의 색채는 그의 정확한 관찰을 토대로 나온 것인데 모든 색채학의 효율적인 발동이, 지식보다는 육체적 훈련을 통해서 조달되고 있다. 또 형태감각은 정확한 데생으로써 이룩되고 있는데, 그것 역시 끊임없는 연구의 결실이다. 그런 박 화백의 작품을 가장 예술적으로 성공시키고 있는 것은 그의 작품 구석구석에까지 침투되고 있는 광선이다.
박 화백은 이런 화가이기에 1972년 자유월남종군화가단으로 참여하고, 1973년에는 일본항공 초청으로 동남아 미술계를 시찰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박 화백은 1974년 오스트레일리아 유네스코 초청 미술문화세미나에 한국 대표로 참석, 서일본문화협회 초청 구주 문화 시찰, 1976년 문화예술진흥원 운영위원, 1978년 청와대 대접견실 벽화 제작, 1980년 청와대 영빈관 벽화 제작, 개인전(스웨덴 스톡홀름), 1981년 국방부 호국기록화 제작, 아프리카 여행, 국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서울교육대학 교수, 예총 이사 등을 역임했다.
옛 제주가 오롯이 ... '원풍경 : 사라져가는 것들'은 무엇일까?
양은희 기자 jnuri@jnuri.net
제이누리 기사 등록 2024.07.09. 11:11:26
내년 3월2일까지 제주현대미술관 상설전 ... 박광진 화백의 1960~90년대 제주 원풍경 회화
점차 사라져가는 옛 제주 풍경과 그 고유의 분위기를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들을 만나본다.
제주현대미술관은 9일부터 박광진(89) 화백의 상설전 '원풍경 :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를 연다.
이번 전시에서는 박광진 화백이 기증한 149점의 작품 중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제주 원풍경을 담아낸 21점의 회화 작품을 선보인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박 화백은 사실적 구상회화의 대가로 한국 화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50년대 이후 서구미술의 영향으로 많은 작가들이 앵포르멜, 모노크롬 계열의 추상회화에 몰두할 때에도, 그는 자연의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작품세계를 꾸준히 구축해왔다.
박 화백은 1964년부터 한라산, 돌담, 초가마을, 유채꽃, 억새밭 등 제주의 자연 생태와 풍광을 오랜 시간에 걸려 재해석하고 변주했다.
제주현대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제주 원풍경에 대한 애틋한 회고와 함께 급격한 변화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예술의 힘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원풍경 :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전시는 7~9월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10월 이후에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전시 기간은 내년 3월 2일까지다.
국보,
1957, 캔버스에 유채, 130.3x162.2cm,
제주현대미술관 소장
닭장,
1960, 캔버스에 유채, 112.9x145.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월출산,
1978, 캔버스에 유채, 50x12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공작,
1992, 캔버스에 유채, 50x150cm,
제주현대미술관 소장
제주마을,
박광진, 1966, 캔버스에 유채
한라산,
박광진, 1990, 캔버스에 유채
제주마을,
박광진, 1975, 캔버스에 유채
제주돌담,
박광진, 1987, 캔버스에 유채
한라의 가을,
박광진, 1973, 캔버스에 유채
억새물결,
박광진, 1986, 캔버스에 유채
서귀포,
박광진, 1980, 캔버스에 유채
한라의 가을
제주설경,
박광진, 1993, 캔버스에 유채
Survie de la nature,
박광진, 1998, 90.9 X 60.6cm
Survie de la nature,
박광진, 1998, 90.9 X 60.6cm
소양강댐,
1973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화
승군을 지휘하는 휴정(서산대사),
1976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화,
소장처 전쟁기념관
아산방조제,
1975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화,
소장처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
장보고의 해상 활동,
1975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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