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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6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마태오 20,17-28
부모는 자녀를 경쟁시키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모든 복음은 예수님께서 왜 죽으셔야 했는지가 그 핵심주제입니다. 여기서는 ‘섬기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실 때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열두 사도 중 더 높은 위치에 앉으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는 어머니가 대신 청합니다.
자기 아들 둘을 마지막 때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이에 나머지 열 제자가 화를 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이 아버지 앞에서 더 높아지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제를 섬기기 위함임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 20,28)
유튜브에 오빠와 여동생이 좀 위험한 곳을 건너가는데 여동생이 너무 작아 건너지 못하자
오빠가 인간 다리가 되어 주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보지도 않는데 이렇게 오빠가 동생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 오빠는 부모에게 사랑을 충분히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이미 충분한 사랑을 받은 오빠는 굳이 동생과 경쟁하여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부모는 형제끼리 서로 섬기기를 바랍니다.
물론 일부러 그러지는 않겠지만, 만약 부모가 형제를 차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녀들은 경쟁하게 됩니다.
가족 공동체라기보다는 회사처럼 경쟁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이 지옥이 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첫째 13살부터 막내 2살까지 7남매를 키우는 한 부부의 일상이 공개되었습니다.
아이 일곱을 키우는데도 부모는 정말 열심히 일해서 가정도 가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줄 여유가 없습니다. 아빠는 밤 아주 늦게 들어오거나
아예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엄마는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아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밤 10에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들을 씻기고 재웁니다.
여기에서 외톨이가 되기 시작한 아이는 13살 사춘기가 된 아들입니다.
첫째는 이제 동생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고 오히려 동생들을 괴롭힙니다.
일곱 형제 중 유일하게 스스로 왕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보니 엄마가 너무 많은 아이를 키우니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군대식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과 둘째 딸을 데리고 장난감 가게에 가서 장난감을 골라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첫째와 둘째를 경쟁시킵니다.
먼저 동생들과 놀 수 있는 적당한 장난감을 골라오는 사람에게 자신이 원하는 장난감을 하나 더 사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첫째가 조금 성숙했으니까 판매원에게 물어서 엄마가 원하는 장난감을 먼저 가져갑니다.
둘째는 경쟁이 되지 않은 이 상황에서 삐져서 말도 안 합니다.
오은영 박사는 이것을 지적합니다.
형제간에 ‘경쟁’이 있어서는 안 되고 경쟁은 자기 자신과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장이 매우 빠른 연령대에서 오빠에게 경쟁이 안 되고 오빠는 경쟁에 이기더라도 본전입니다.
지면 동생들 앞에서 말이 아닙니다.
동생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예 동생들과 함께 안 지내는 것이 자신에게 더 편안합니다.
전쟁에서는 승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피해자입니다.
자녀를 경쟁시키면 자녀들도 그렇게 됩니다.
경쟁하게 되면 자녀는 두 가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경쟁이 두려워 아예 회피하던가 아니면 끝까지 경쟁에서 이기려 기를 씁니다.
경쟁을 회피하는 것도 경쟁하는 것입니다.
달리기에서 멈추어 섰어도 여전히 운동장에 있는 것입니다.
경쟁하건, 경쟁을 포기하건 경쟁 안에서는 쉴 수 없습니다.
커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에 삽니다.
이무석 교수의 책에서 ‘작은 눈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던 한 여자의 사연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첫째 딸로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다가 동생이 태어나자 부모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 줄어듦을 느꼈습니다.
동생은 눈에 쌍꺼풀이 있고 자신이 없었기에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작은 눈 때문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돈도 많이 버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사랑은 동생이었습니다.
결혼해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경쟁을 독촉하는 이 자매를 어떤 남편이 참아줄 수 있을까요?
남편은 술집 여자와 바람이 났고 이것을 안 자매는 자기처럼 능력 있고 예쁜 여자를 두고 그런 남편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아내가 되어야 하기에 겉으로는 남편을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론 용서가 안 됩니다.
직장에서 퇴근한 남편에게 집을 나설 때부터 집에 돌아올 때까지를 한 시간 단위로 끊어서 무엇을 했는지를 보고하게 합니다.
그리고 속이는 것일 수 있으니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똑같이 반복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꿈에 남편과 바람피운 여자가 꿈에 나타났는데 눈이 상당히 컸습니다.
그녀는 눈 작은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동생은 눈이 커서 아빠에게 사랑받고 자신은 눈에 쌍꺼풀이 없어서 사랑 못 받는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도 이 이유로 눈이 큰 여자를 좋아했을 것이라는 무의식이 자신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에게 사랑받아서 굳이 경쟁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살아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자녀를 경쟁시킨다면 참 부모라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이들을 이용하는 회사 상사나 군대 상관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곳이 지옥처럼 고통스러운 곳이 되는 것입니다.
또 ‘이무석’ 교수의 『30년 만의 휴식』이란 책에서는 가명 ‘휴’라는 유능한 인재의 사례가 나옵니다.
휴는 어느 날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라는 말을 듣고 정신적 스트레스로 설사가 멈추지 않아 이무석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등을 놓쳐 본 적 없는 엘리트였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자신 팀장이 회사를 차려 나갈 때 스카웃 되어 함께 회사를 일군 사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가라는 말에 황당하기 그지없고 분노가 치미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경쟁심이 너무 강해서 더 유능한 인재까지 못 살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왜 쉼 없이 달려왔을까요? 그것은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임신했을 때 유산시킬 것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할머니 집에 피신하면서까지 낳은 아이입니다.
아버지는 형만 사랑하고 휴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여행도 형하고만 갔습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모든 것에서 일등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쫓겨나게 생긴 것입니다.
휴는 아버지에게 있었던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드러냈습니다.
자신과의 상담 약속을 어긴 것에 화가 난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이 교수도 배를 타고 휴가를 떠났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여행 중에 이 교수의 배가 뒤집히는 꿈까지 꾸게 됩니다.
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이무석 교수에게 표출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만났을 때 뾰로통하여 한마디 말도 안 했습니다.
사실 그때 이 교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쓰려져 응급실로 가게 되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설사가 멈추었고, 가족들과 또 직장인들과도 온전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휴는 비로소 휴식을 찾았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가 신자들을 경쟁시키면 안 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자들을 이용하는 것이고, 그러면 그 밑에서 경쟁하는 봉사자들은 지옥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자신의 자녀들을 경쟁시키지 않습니다.
충분한 사랑을 주고 믿게 해서 그 자녀들이 서로를 섬기게 만듭니다.
지옥을 선물하려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죽이셔서 우리에게 주셨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게 해야합니다.
모든 노력은 다 인정받으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미 인정을 받았다면 에덴동산에서처럼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 곧 섬기는 일만 남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6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마태오 20,17-28
교회는 누군가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켜주는 장소가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도 ‘서열’은 꽤 중요했던가 봅니다.
당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 하늘같은 존재였습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했습니다.
장남과 차남 사이의 격차 역시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어느 자리에 앉느냐 하는 문제는 그들에게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그런 가식적인 행동들이 참으로 한심스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더욱 실망하신 것은 그토록 오랜 기간 계속 반복해서 특별 교육까지 시킨 제자들마저도
아직 자리다툼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측근 제자들끼리, 그것도 길을 걸어가는 도중에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싸웠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한때 야망과 출세욕으로 가득했던 야고보와 요한 사도,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의 미성숙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에브라임에서 예리코로 내려가고 있는 중에 갑자기 그들의 어머니가 나타났습니다.
두 아들을 옆에 세워둔 채 그녀는 예수님께 절을 하면서 일종의 인사청탁을 하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20장 21절)
인사청탁을 하러 온 어머니가 설마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한 손에는 품질 좋은 토종꿀 한 병을, 다른 손에는 잘 키운 씨암탉 한 마리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오셨을 것입니다.
사실 그녀가 보인 행동은 꽤나 민망한 모습이었지만, 용서해줄 만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이 잘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로서, 예수님께 좋은 자리를 청탁하는 것은
야망이라기보다 강한 모성애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지닌 사람들은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건설하실 새로운 왕국에 대한 헛된 기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상적 통치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고, 그 나라가 서게 되면 물좋은 자리, 총리 자리와 당대표 자리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도가 보여준 모습 중에 꽤나 치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24시간 동고동락하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한가한 시간에 스승님께 면담을 신청하고 자신들의 속마음을 직접, 솔직히 표현하고 청했으면 차라리 나았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비겁하게도 어머니를 앞세워 간접적인 인사청탁을 시도한 것입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미성숙한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자괴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시 예수님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 사명의 핵심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오 복음 20장 26~28절)
우리 교회는 지상적인 영예와 세속적인 자리를 탐내고 추구하는 출세 제일주의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단체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키고자 애를 쓰다면,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존재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월16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20,17-28 :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계속 들어 왔지만, 주님의 기적을 보고도,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것을 듣는 것 자체가 괴로운 말씀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분이 행하신 무수한 기적들을 보았는데, 이런 분이 고난을 당하신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제배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나아가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1절) 이 자리는 분명히 두 아들들이 원하는 것인데 그들은 어머니를 내세워 대신 청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계시며,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인데, 이 순간에 아직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볼 때, 더욱 서운하셨을 것이다. 자리다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 복음에서는 잔과 세례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잔과 세례는 같은 것이 아니다. 잔은 수난을 의미하지만, 세례는 죽음 그 자체를 말한다. 예수님께 잔은 수난이었고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에는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모든 고통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고난은 당했어도 죽임을 당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 이들이 고백자이다. 실로 주님의 잔을 마시기는 했어도,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받지 않았다.
“할 수 있습니다.”(22절) 그들은 시련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전쟁을 모르는 사람은 전쟁놀이가 재미있다. 그 잔의 의미를 모르니까 그렇게 대답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길 앞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하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그 잔이 어떤 것인 줄 알았다면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수난의 괴로움은 참으로 크다. 그러나 죽음은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10,39-40) 이 말씀은 거절하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나머지 제자들이 불쾌했다고 한다. 모든 사도들이 세속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 사이에 형제애가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모두가 희망을 가지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의 예를 드시면서 그들과 같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6절)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과 같이 하느님 안에 능력 있고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보다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28절)고 하셨다. 그분을 본받도록 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