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간 수요일 / 마태 11,28-30
제1독서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0,25-31
25 “너희는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느냐?”
거룩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고 보아라. 누가 저 별들을 창조하였느냐?
그 군대를 수대로 다 불러내시고
그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능력이 크시고 권능이 막강하시어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27 야곱아,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나의 길은 주님께 숨겨져 있고
나의 권리는 나의 하느님께서 못 보신 채 없어져 버린다.”
28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29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30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31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고생하는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온유와 겸손으로 지는 사랑의 멍에♣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40,28)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40,31)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11,28-29)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의미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11,30)고 하셨을까요?
‘멍에’는 종교적 가르침을 상징하는 말로 쓰이곤 하는데,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법’(예레 2,20; 호세 10,11)과 오경의 계명들(사도 15,10)이나 거룩한 삶을 위한 하느님의 권고(집회51,26)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613가지로 세분하고 그것을 어김없이 정확히 지키도록 가르쳤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주목하신 멍에는 바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율법해석과 그것을 실천하는 태도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지나치게 율법을 세분함으로써 그 본질이요 혼인 사랑을 망각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태도에서도 엄격하게 정확하게 지키도록 요구함으로써 자유로운 사랑의 삶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랑의 혼이 실종된 제도나 법과 권력은 큰 짐이 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주어진 율법(에제20,13)이 오히려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지요. 그 뿌리에는 탐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 명예욕의 그 끈질긴 뿌리는 사랑과 무관한 삶을 살도록 충동질 합니다.
사랑이 메말라버린 우리네 삶의 현장은 인간은 쓰다만 연장처럼 버려지고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의 경쟁과 지배와 폭력과 차별만이 남게 되지요.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하느님께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간다워지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 위에 권력과 법과 제도를 두는 태도야말로 우상숭배이며 패망으로 치닫는 지름길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기꺼이 예수님 앞으로 지고가야 할 멍에는 하느님의 법을 사는 태도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해석하여 세분화한 율법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어김없이 정확하게’ 지키도록 가르쳤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사랑이신 주님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고유한 자신의 인격과 처지 안에서 하느님을 닮고 예수님을 추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니 온유함과 겸손으로 영적 여유를 되찾아 규범과 문자에 얽매여 지나치게 세심해지거나 완벽주의에 빠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을 배워(11,29) 우리 삶에 필요한 법과 제도에 사랑의 혼을 불어넣고, 주님 사랑의 법을 형식과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편안하고 자유로운 가운데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실천하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