送金孝伯[奉祖]赴任丹城
雲溪 全以性
十年蹤跡困塵泥。
却記前遊夢亦疑。
曾戴豸冠持憲重。
新分虎竹荷恩私。
一邦化雨随車至。
百里仁風逐扇吹。
儒術傳家餘事業。
儀刑遺澤在民肥。
단성(산청)으로 부임하는 김봉조를 보내며
운계 전이성
십 년의 자취가 진흙탕처럼 곤궁하였고
전에 꿈속에서도 역시 의심되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일찍이 치관(법관)을 쓰고 사헌부의 중임을 주관했으니
호죽부를 새로 나누어 사적인 은혜를 입게 되었다.
온 나라에 덕화의 비가 내려 지방관의 수레에까지 이르렀으니
백리 인풍이 부니 바람을 따라가리다.
유가의 학술을 전하는 것이 여생의 사업이고
의례와 형벌의 혜택을 남겼기에 넉넉한 백성들이 많았다.
[국역] 전과웅
[출처] 운계선생문집
● 김봉조 [ 金奉祖 ]
정의
1572(선조 5)∼1630(인조 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백(孝伯). 호는 학호(鶴湖).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추증된 김대현(金大賢)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충의위(忠義衛) 이찬금(李纘金)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도시직장(司䆃寺直長)에 임명되었으며,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단성현감(丹城縣監)으로 재임 중에는 선정을 베풀어 그 고을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경상도도사·익산군수·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성균관직강이 되었으며,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승진되었다. 특히, 문예에 조예가 깊어 동생 김영조(金榮祖)와 함께 영남에서 문명을 떨쳤다. 저서로는 『학호집(鶴湖集)』 4권이 있다. 영천(榮川)의 구호서원(鷗湖書阮)에 제향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김봉조 [金奉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단성丹城
경상남도 산청 지역의 옛 지명.
● 치관(豸冠)은 시비를 가리는 법관이 쓰는 관으로 해태가 부정한 사람을 죽이는 고사에서 비롯하였다.
● 치관豸冠
시비를 가리는 법관(法官)이 쓰는 관.
● 호죽(虎竹)’으로, 한(漢)나라 때 지방관이 차던 신부(信符)인 동호부(銅虎符)와 죽사부(竹使符)인데, 일종의 신표이다. 한(漢)나라 때 생긴 제도로, 한쪽은 수도에 두고 한쪽은 지방에 주었다가 인력을 징발할 때 사용하였다. 《후한서》 〈두시열전(杜詩列傳)〉에 “옛날에는 군대를 동원할 때 모두 호부(虎符)를 사용하였고 기타 인력을 징발할 때는 죽사만 사용하였다.”라고 하였다.
● 화우(化雨) :
사람 교화하는 것을 때에 맞추어 내리는 비에 비유한 말이다. 《맹자》 진심장에 군자의 가르침 다섯 가지 중 첫째로 “때맞은 비에 화함 같다.[如時雨化之]” 하였다.
● 후한(後漢)의 정홍(鄭弘)이 회음 태수(淮陰太守)로 나갔을 때 그의 수레가 이르는 곳마다 단비가 내려 가뭄을 해소해 주었다는 ‘수거감우(隨車甘雨)’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3 鄭弘列傳》
● 遺澤 유택
1. 후세(後世)까지 남아 있는 은혜(恩惠).
2. 남아 있는 은덕(恩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