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의 철학
몸과 떨어진 영혼 없듯 생후 15개월 아기도 어른들 몸짓 따라하며 친숙해져
우정의 표현으로 악수하지만 여전히 대체물일 뿐… 몸은 타자와의 관계 자체이자 간격
수학 문제 풀이에 몰입하거나, 깊이 내면으로 침잠해 나 자신에 대해 골똘히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체가 논리적인 이성이거나 영혼이거나 어떤 정신적인 것 또는 마음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서재를 나와 욕실에 가서 불을 켜면, 거울 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영혼이 아니라 몸(신체)밖에 없다. 너무 말라서 또는 체중 관리 좀 해야 할 듯해서 걱정거리를 주거나, 주름과 흰머리가 이렇게 늘었네 하며 세월을 한탄하게 하는 몸 말이다.
몸과 별도로 떠돌 수 있는 영혼을 본 적은 없지만, 우리가 몸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은 매 순간 생생하게 확인하며 살고 있다. 거울 속에서 내 몸을 볼 때뿐 아니라, 몸이 아프거나 피로하거나 할 때 꼼짝없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몸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오래도록 인간은 자신의 몸을 정신에 대해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해 왔다. 소크라테스는 죽기 직전에, 그러니까 육신을 버리기 직전에 이렇게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플라톤의 ‘파이돈’이 전하고 있다. “철학에 의해서 충분히 정화된 사람들은 앞으로 올 모든 시간 동안 몸 없이 살게” 된다.(전헌상 역) 놀랍게도 이렇게 철학은 몸을 노골적으로 싫어한다. 소크라테스의 저 말은 인간의 본 모습은 이성이고, 이성을 연마하는 최선의 길은 철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철학을 통해 이성이 이상적으로 정화되면 ‘몸 없이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 삶은 몸의 여러 가지 정욕이 다시는 이성을 방해하지 못하는 삶이다.
몸에 대한 이런 폄하는 철학의 오랜 전통이 됐다. 후에 데카르트는 인간을 ‘생각하는 실체’로 이해했는데, 물론 몸은 이 생각하는 실체에 대해 부수적인 것이다. 몸은 정욕 같은 것을 일으켜 우리에게 혼란을 끼치는 것으로서, 이성이 통제해야 하는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몸은 정말 소위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는 영혼, 이성, 사유 등등에 대해 부차적일까?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어 몸가짐을 챙기는 단순한 일상부터 시작해 화장, 미용, 트레이닝, 성형, 육체적 사랑, 식사와 음주에 이르기까지, 이성의 가르침과 별도로 몸을 가꾸고 즐기는 행위 자체는 우리 영혼의 정체성, 그리고 자부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우리에게 몸이 ‘근본적인 것’이라면 어떤 의미에서일까? 몸에 대해 숙고해온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말한다. “우리는 세계를 그리는 데 있어 우리 자신인 그러한 빈틈, 세계가 어떤 사람에 대하여 존재하게 되는 그러한 빈틈을 지울 수 없다.”(류의근 역) 여기서 ‘우리 자신인 빈틈’이란 바로 몸을 가리킨다. 몸은 나의 이성과 그 이성이 파악하는 세계 사이에 있는, 제거할 수 있는 방해물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세계 사이의 없앨 수 없는 빈틈이며, 바로 몸이라는 그 빈틈이 있고 나서야 우리는 세계에 받아들여지고 세계를 인식하는 일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몸의 더 놀라운 점은, 바로 우리가 타인과 더불어 있는 자일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점이다. 우리는 보통 우리 자신을 독립된 개별적 실체로 생각한다. 완전히 독립된 내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 또 다른 독립된 실체인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는 애초부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한 답을 제공해 주는 흥미로운 예를 메를로퐁티는 기록하고 있다. “생후 15개월 된 영아는 내가 놀이 삼아 손가락을 하나 입에 넣어 무는 시늉을 하면 입을 열어 보인다. 그러나 영아는 결코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본 적이 없고, 영아의 치아는 나의 것과 유사하지 않다. 영아가 내부에서 느끼는 대로 그 자신의 입과 치아는 즉시 그에게는 무는 장치이고, 영아가 외부에서 보는 대로 나의 턱은 즉시 그에게는 동일한 의도들을 능히 실행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무는 것’은 즉시 그에게는 상호주관적 의미를 가진다. 그는 자신의 의도들을 자신의 몸에서 지각하고, 자신의 신체로 나의 신체를 지각하며, 이로써 나의 의도를 그의 신체에서 지각한다.”
위의 예는, 신체라는 것은 ‘나의 몸’이나 ‘너의 몸’으로, 즉 개별적인 것들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공통의 것, ‘나와 너 사이의 관계 자체’가 바로 몸이다. 영아는 얼굴이나 입에 대한 개념이 없다. 남의 행위를 의식적으로 모방한다는 개념도 없다. 심지어 자아와 타자라는 개념조차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내가 아기 앞에서 내 손가락을 내 입에 넣고 무는 시늉을 하면, 아기는 그 행위를 따라 한다. 아기는 나의 신체적 행위를 자신의 신체 속에서 직접 그대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하나의 공통적 신체가 아기와 나의 바탕에 있기에 그럴 수 있다. 결국 몸이란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것, 너와 나의 ‘관계 자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공통의 신체가 아기와 타자인 나 사이에 있기에, 아기는 자신의 입과 타자의 입이,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과 타자의 손가락이 서로 유사하다는 ‘유사성’의 개념을 이성으로 파악하기도 전에, 타자의 신체적 행위를 자신의 신체 속에서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몸은 나와 너가 모두 그 안에 들어서 있는 ‘공통 환경’이다.
몸이 이렇게 자아와 타자 사이의 관계 자체이기에 우리는 타자에 대해 ‘윤리적’일 수 있다. ‘성서’에는 형제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다가 재상이 되는 요셉의 이야기가 나온다. 토마스 만은 이 이야기로부터 인간사의 모든 국면을 끌어낸 소설 ‘요셉과 그 형제들’을 썼는데, 여기에는 몸이 어떻게 윤리적인 마음을 준비할 수 있는지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셉을 때리고 구덩이에 가둬 버린 형제들은 이런 상념에 빠진다. “더 의미심장해 보인 그것은 다른 게 아니고, 요셉을 매장할 때 사용한 손과 팔에 남아 있는 요셉의 맨살에 대한 기억이었다. 역설 같지만 참으로 부드럽지 못한 접촉(요셉을 때린 일)이 남긴 그 부드러움은 각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물론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도, 또 그 이야기를 꺼낸 사람도 없었다.”(장지연 역) 요셉에 대한 의식적인 증오심과는 반대되는 일이 형제들의 몸에선 생겨나고 있다. 요셉의 맨살에 닿은 형제들의 주먹은 그 몸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가슴은 뭉클한 감정 속에 빠져든다. 여기서 몸은 형제들을 연약하고 부드러운 살을 지닌 인간 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인도한다.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로서 몸이 있기에 우리의 윤리적인 행위가 가능하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존재와 다르게’에서 주체란 다름 아닌 몸이라고 말한다. “주체는 살과 피로 이뤄져 있으며, 배고프면 먹는 인간, 피부밑에 내장을 가진 인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입속의 빵을 타자에게 ‘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주체란 바로 타인과의 관계로서의 몸이기에 타자에 대한 선행 역시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 자신이 배고플 때 먹을거리를 찾는 인간 또는 내장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면, 어떻게 타자의 입에 빵을 넣어줄 수 있겠는가? 내 신체의 허기를 만족시켜줄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 체험했기에, 타자의 신체가 필요로 하는 것 역시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타자와의 관계로서 몸’에는 묘한 ‘역설’이 있다. 우리가 보았듯 몸이 있기에 나는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 몸은 내가 타자에게로 나가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기도 하다. 이 가로막힘은 외로움, 오해 등 인간 삶의 다채로운 모습을 빚어낸다.
예컨대 친구에게 우정을 표현하기 위한 신체적 행위로서 ‘악수’를 생각해보자. 이런 신체적 행위는 타자에 대한 완벽한 접근을 실현해 줄까? 레비나스는 말한다. “친구와 악수하는 것, 그것은 그 친구에게 자신의 우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친구에게 우정을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더 나가 성취될 수 없는 어떤 것으로서, 영속적인 욕망으로서 우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타자에게 우정을 직접 표현하지 못하고, 신체적 행위인 악수로 대신한다. 악수가 우정 자체의 필연적 대체물 또는 가장 이상적인 대체물일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대체물일 뿐이다. 악수라는 신체적 행위 안에서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우정이라는 친구와의 관계는 잡을 수 없는 무지개처럼 신체적 행위 저편으로 물러나 버린다.
사랑하는 이의 살갗을 애무할 때도 그렇다. 몸의 애무를 통해 우리는 사랑의 합일을 이루는가? 오히려 애무하는 살갗의 뒤로 수수께끼처럼 숨어버리는 애인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방황이 일어나지는 않는가? 함께 있어도 외롭다거나, 그렇게 오래 사귀었어도 나는 네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거나, 진짜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인 줄 모르겠다거나 등등 이 모든 상처 입은 사랑의 표현은 내가 애무하고 있는 몸 뒤로 숨어버리는 타인을 증거한다. 그래서 레비나스가 말하듯 “애무는 도망치는 어떤 것과 하는 놀이”이다. 애무에서의 신체, 즉 “피부의 부드러움은 접근하는 것(자아)과 접근되는 것(타자) 사이의 간격 그 자체이다.”
이렇게 몸은 타자와의 관계 자체이며 동시에 타자와의 간격 자체이다. 사실 이 간격이라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를 이룬다. 때로 타자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가장 사랑하는 이를 수수께끼처럼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저 간격이 있기에, 우리는 풀어야 할 과제를 만난 듯 ‘타자에게 몰두할 수 있는 자’가 된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현대철학과 몸
‘몸’은 현대 철학의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다. 예를 들면, ‘지각의 현상학’의 저자 메를로퐁티는 우리 생각을 가능하게 해 주는 근본 바탕으로서 몸을 발견했다. 레비나스는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몸의 문제에 접근했다. 들뢰즈는 ‘기관 없는 신체’라는 개념을 내세우며, 고정된 유기체를 넘어서서 무한히 다채롭게 전개될 수 있는 몸의 힘을 시험했다. 이 모든 다양한 시도는, 우리가 가진,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 너머에 있는 미지의 능력에 대한 탐색이다.
첫댓글 몸과 정신이 일체가 되어야 확실한 자아가 성립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