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각한 기근의 때
겔 4:9-17
9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너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네가 옆으로 눕는 날수 곧 삼백구십 일 동안 먹되
10 너는 음식물을 달아서 하루 이십 세겔씩 때를 따라 먹고
11 물도 육분의 일 힌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
12 너는 그것을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지니라
13 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여러 나라들로 쫓아내어 흩어 버릴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이같이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 하시기로
14 내가 말하되 아하 주 여호와여 나는 영혼을 더럽힌 일이 없었나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지 아니하였고 가증한 고기를 입에 넣지 아니하였나이다
1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기를 허락하노니 너는 그것으로 떡을 구울지니라
16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근심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두려워 떨며 물을 되어 마시다가
17 떡과 물이 부족하여 피차에 두려워하여 떨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
겔 4:9-17 / 너는 밀과 보리와 제비콩과 잠두와 조와 쌀보리를 준비하여 한데 섞어 빻아서 떡을 구워라! 이것은 네가 옆으로 누워 있는 390일 동안 먹을 양식이다. 10-11) 네가 하루에 먹을 양은 떡 ㅁ) 228그램과 물 ㅂ) .6리터이다. 너는 그것을 정확하게 달고 되어서 항상 똑같은 시간에 먹고 마셔라' (ㅁ. 히) 20세겔. ㅂ. 히) 1/6힌) 12) 그런 다음에 주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그 혼합된 곡식 가루를 매일 정확하게 달아서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되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인분으로 불을 피워 그것을 구워서 먹어라. 13)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세계 만민 속으로 내쫓아 흩어 놓으면, 내가 이제까지 부정한 음식으로 금지시켜 놓았던 음식을 그들이 먹게 될 것이다.' 14) 그때 내가 말하였다. `오! 주 하나님, 저는 이제까지 부정 탈 일을 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병으로 죽었거나 맹수에게 찢겨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어 본 적도 없고, 썩은 고기를 만져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제가 인분으로 불을 피워 부정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15) 그러자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좋다. 너는 인분 대신에 쇠똥을 사용하여라.' 16) 그런 다음에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내가 예루살렘에 떡이 모자라게 하여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게 만들겠다. 사람마다 떡을 달아가며 공포에 휩싸인 채 먹을 것이며 물도 되어서 벌벌 떨리는 몸짓으로 마실 것이다. 17) 그리고 마침내는 떡과 물이 모두 떨어져 서로 겁에 질린 얼굴로 바라보다가 자기들이 지은 죄값을 받고 빼빼 말라 죽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이용하여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때에 바벨론의 포위 공격으로 예루살렘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기근이 있을 것을 예언합니다.
네가 옆으로 눕는 날수 곧 삼백구십 일 동안 먹되(9-12) 이들 곡식들은 밀 외에는 질이 낮은 식물들입니다. 밀은 비교적 상류층에서 즐겨 먹는 곡식이었지만 나머지 콩, 조, 귀리 등은 하층민들이 먹는 보통의 사람들은 기피하는 식물들입니다. 더군다나 이 곡식들을 썩어서 빵으로 만들어 먹는 것은 식량이 극히 부족할 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특히 율법은 여러 곡물을 섞어서 먹는 것을 금하고 있음을 말합니다(레 19: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박한 기근이 찾아와 부정한 음식, 영양이 없는 음식, 질 낮은 음식이라 따질 형편이 못되는 것입니다. 또한 양도 성인 하루 먹는 식량의 절반도 미치지 못하는 정도일 것이며, 물도 하루 육분의 일인 즉 1리터도 안되는 0.61리터 정도의 물로 연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떡을 구워먹을 때도 숯불이 아닌 쇠똥도 아닌 인분으로 구워먹으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위공격에 의해서 이러한 기근이 오게 될 것을 말하지만 본질적 문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보다도 강대국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말로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게 되고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고난의 날수를 채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13-17)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백성 즉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한 자’의 말로는 죄악 중에서 쇠패합니다(3:3). 바벨론에 의해서 기근이 온 심판받는 예루살렘에서 살아남으려면 부정한 음식이라도 먹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엄격한 제사장 가문 출신인 에스겔은 의식상 부정한 음식을 먹지 못하겠다 말합니다(14). 그러자 하나님께서 떡을 굽되 인분으로 하지 말고 쇠똥으로 구우라하며 에스겔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십니다. 선지자인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고 한 것은 부정한 음식을 먹음으로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의 부정함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서 양식을 끊게 할 것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의 의지와 상관없이 먹게 될 것이고 결국 부정한 음식이든 영양이 없는 음식이든 상관없이 양식이 끊어져서 쇠패 즉, 멸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왜 바벨론을 이용해서 이스라엘에게 기근을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그 굶주림으로 왜 밀어넣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주관하는 것이 마치 힘이 센 강대국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 같지만 또한 우리의 힘과 결정으로 무엇인가 되어지는 것 같지만 철저히 모든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으로 되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용: 당신은 하나님을 이세상의 주관자라고 믿고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실상 현실의 문제에 부딪히면 현상적으로 보여지는 어떠한 강력한 대상을 의지하고 의존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먼저 주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인간의 여러 조건들을 활용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생활 방법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런 순서를 알고 인생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세 가지 상징
에스겔 4장 1-17절 / 곽노아 목사
여러분들이 그 동안 세상을 살아보면서 어떤 큰 재난을 당하기 전에 꿈으로나 어떤 사람의 말로 경고를 받아본 적이 있으신지요?
하나님은 개인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어떤 재앙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어떤 상징이나 징조를 통해서 먼저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꿈이나 사람의 말을 너무 미신적으로 믿거나 주술적으로 믿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재앙이 전혀 근거도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음을 가진 자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암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하나님은 바벨론으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에스겔에게 상징적인 행위 예언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에스겔에게 이렇게 행위 예언을 하도록 하게 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이 절대로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에 빠져서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에스겔이 바벨론 땅에서 선지자 활동을 시작한 때는 남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른지 5년째 되던 해 B.C 593년이었으므로 예루살렘이 멸망받기 약 8년 전이었습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예레미야가 바벨론에게 멸망받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지 아니하고 곧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의 소리를 믿고 있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땅에서도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무지한 자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에스겔에게 3가지 행위적인 상징을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영적 무지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대입니다. 세상 끝 날에 있을 징조를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분명하게 말씀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두드러지게 징조가 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시대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을 통해 보여주신 이 징조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경고의 메시지임을 깊이 깨닫고 마지막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 포위된 예루살렘 모형을 그려라(겔4:1-3)
하나님은 거룩한 예루살렘을 이미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결코 예루살렘은 멸망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의 생각이었지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믿지 아니했습니다.
이미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진 더러운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바벨론 땅에서 70년 동안 포로로 살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들은 곧 자신들이 해방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토판을 가져와 예루살렘 성읍을 그리고 적군이 예루살렘 성이 포위하고, 사다리와 공성퇴를 세우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토판은 진흙을 이겨서 만든 일종의 납작한 벽돌입니다. 그 납작한 벽돌 위에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철판을 가져다가 그 토판을 에워싸도록 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지만 이 때는 지금 에스겔이 말을 못하고 있는 벙어리가 되어있는 때였습니다. 백성들은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말을 안하고 있던 에스겔이 갑자기 그림을 그렸을 때 사람들은 관심을 보였을 것입니다.
에스겔이 그리는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예루살렘 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제사장 가문에서 제사장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25년 동안 살아온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을 그리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무지하고 미련한 백성들일지라도 에스겔이 그린 그림을 보고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특히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오기 전에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수 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에스겔 선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백성들은 엄연한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아니했습니다. 자신들이 피부적으로 환경적으로 뚜렷하게 겪고 있으면서도 인정하려고 하지 아니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에게 가장 악한 것이 있다면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 죄 값으로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 값으로 인한 멸망이 눈 앞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끓는 가룟 유다 같은 자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의 멸망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는 것처럼 오늘날 이 세상의 멸망도 성경에 자세히 그려놓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저 영적으로 무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처럼 “어떻게 이 세상이 멸망한단 말이냐?, 어떻게 이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질 수 있단 말이냐?” 떠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징조들이 이렇게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특히 지진이 매일같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징조 중에 징조입니다.
하나님이 상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살아온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징조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고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한다고 해서 예루살렘의 멸망 계획이 취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또한 회개한다고 해서 마지막 때 심판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일점일획의 변함이 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위해 대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무지한 자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노후 대책은 잘 세우며 살고 있습니다. 나의 노후 대책은 세울지 알면서 영적인 마지막 때의 날을 위해 대책을 세우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면 참으로 어리석고 무지한 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후 대책은 잘 세우고 영적인 대책은 세울지 모르는 사람들은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농부의 모습을 보고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눅12:19-20)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날을 위해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끝 날도 종말이지만 나의 인생의 끝 날도 종말입니다. 노후 대책 세우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더욱 깊은 관심은 나의 마지막을 위해서, 세상 끝 날에 대한 대책을 세우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에스겔을 통해 너무나도 자세히 상징적으로 깨닫게 해주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도 성경의 기록을 통해 너무나도 자세히 그 날을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잘 깨달아서 준비하고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왼쪽으로 390일, 오른쪽으로 40일을 누워라(겔4:4-8)
390일과 40일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죄악을 의미하는데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했다는 것입니다. 390년과 40년은 대략적인 숫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북이스라엘이 남유다에 비해 몇 배에 달하는 심각한 죄악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두 나라 역사 속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북이스라엘에서는 단 한 명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남유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왕들이 5명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에 대한 390일 즉 390년의 죄악은 북이스라엘 초대 왕 여로보암부터 시작해서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될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B.C 930년부터 B.C 538년 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의 죄악은 나라가 세워질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 버림을 당한 죄악의 길을 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유다 대한 죄악은 40일 즉 40년이라고 하였는데 예루살렘 함락에서부터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될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B.C 586년부터 B.C 538년 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남유다에 대한 죄악이 북이스라엘에 비해 짧은 것은 선한 왕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남유다의 죄악이 예루살렘 함락되기 직전에 강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에스겔의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죄악을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에스겔이 그의 머리를 예루살렘을 향해 왼쪽으로 누우면 북쪽 이스라엘을 바라볼 수 있었고, 에스겔이 그의 머리를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고 오른쪽으로 누우면 남쪽 예루살렘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겔의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했어야 했고 남유다의 백성들도 오른쪽으로 누운 에스겔의 모습을 보고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자신들이 왜 지금 먼 이방의 땅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왔는지 깨닫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 무지하고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들은 회개보다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고난 속에 있으십니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과 좌절 속에 있으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지금도 보고 계시면서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예스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은 오늘날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사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죄를 회개하면 용서함 받지만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 죄 값을 반드시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 받으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7절을 주목해 보시길 바랍니다. “팔을 걷어 올리고 예언하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그 죄 값을 갚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8절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확고한 뜻을 나타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죄악의 정도를 형벌에 반영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죄악이 형벌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큰 죄악은 큰 형벌로, 작은 죄악은 작은 형벌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심으로 나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는다면 그 죄 값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회개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깊이 깨닫고 날마다 회개하는 신앙을 가지며 믿음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 회개할 수 있는 것이 큰 복인지 아십니까? 회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자들이 회개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지 아십니까? 아직도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떠나지 아니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죄에 대한 회개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떠났다는 증거입니다.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들이 무서운 재앙을 당하면서도 회개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계9:20-21) "(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계16:9-11)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10)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11)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가 나오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금식하며 하나님께 울부짖어야 할 것입니다.
(욜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진실로 회개하는 신앙을 가지고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 번째. 기근 시대(겔4:9-17)
하나님이 3번째로 에스겔에게 하라고 하신 행위 예언은 기근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행위 예언은 장차 예루살렘의 마지막 날에 대한 예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근에 대한 예언은 예레미야 선지자도 강하게 선포한 적이 있었습니다.
(렘19:9) “그들이 그들의 원수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경에 빠질 때에 내가 그들이 그들의 아들의 살, 딸의 살을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살을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
바벨론 포로들에게 예루살렘의 마지막 날에 기근으로 고통 당할 것을 에스겔에게 예언케 하신 것은 그들이 아직도 예루살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곧 회복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9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6가지를 섞어서 떡을 만들어 390일 동안 먹되 음식물을 저울에 달아서 하루 20세겔 만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20세겔이면 230g 정도이므로 극히 적은 양입니다. 콩하고 팥의 무게까지 더한다면 한 주먹정도 되는 양식을 하루 양식으로 먹고 산다는 것은 무서운 기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먹는 물도 6분의 1힌 정도를 먹을 것이라고 했는데 0.6L 정도의 적은 물로 하루를 견딘다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또한 적은 양식을 먹기 위해서 땔감을 사용해야 하는데 땔감이 없어서 인분을 사용해야 할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분으로 밥을 해서 먹을 것이라는 말씀에 에스겔이 벙어리된 입을 열어 탄식하였습니다.
14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말하되 아하 주 여호와여 나는 영혼을 더럽힌 일이 없었나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지 아니하였고 가증한 고기를 입에 넣지 아니하였나이다”
에스겔은 지금까지 제사장이 되기 위해 엄격한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종교적인 규례에 대해 철저한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음식에 대한 규례는 병으로 죽은 짐승이나 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이나 가증한 고기는 절대로 먹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결 규례에 어굿난 “떡을 만들어 인분으로 불을 피어 구워 먹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 명령에 에스겔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의미로 질문을 하였습니다.
15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놀라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인분대신 쇠똥으로 떡을 구워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인분에서 쇠똥으로 바꾸었지만 종교적인 정결한 규례로 볼 때 쇠똥에 구워먹는다는 것도 부정한 행위였습니다.
정결한 종교 규례를 지키어야 하고 가르쳐야 할 제사장이 율법을 어기고 쇠똥으로 떡을 구워먹는다는 것은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에스겔의 행동을 보고 “바벨론에서 고생하더니 미쳤다” 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네가 무슨 제사장이냐? 네가 무슨 선지자냐?” 라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에스겔 집안에서는 제사장 집안 가문을 망신시킨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지하고 미련한 백성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초월해서 깨닫게 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율법이 존재하는 목적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으로 의를 이루고 구원받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듣고 배우면서도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도 못했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습니다.
(롬3:20)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갈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의 최종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을 받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그 의를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온 몸의 물과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러므로 율법이 존재하는 목적은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지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키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지지 않고 있다면 그 자는 율법을 형식적이고 외식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한다 할지라도 진실로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은 율법을 지킨 바리새인과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세리 중에서 세리를 의로운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주의자가 되지 마시고 오직 예수 신앙 주의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율법보다 더 위대한 신앙은 오직 예수 신앙입니다.
16-17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에스겔에게 정결한 율법의 규례를 어기면서까지 행동하라는 것은 곧 하나님 말씀의 성취가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기근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한바가 있었습니다. 그 예루살렘의 멸망이 이제 심히 가까워진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에스겔을 통해서 깨닫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3번째 공격하였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왕하25:1-3) “시드기야 제구 년 열째 달 십일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2) 그 성이 시드기야 왕 제십 일 년까지 포위 되었더라 (3) 그 해 넷째 달 구일에 성 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떨어졌더라”
바벨론은 B.C 588년 예루살렘을 공격해서 3년 동안 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기근이 심하여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일들까지 얼어났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러한 비통한 일들을 목격하면서 애가를 기록하였습니다.
(애2: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때에도 기근으로 인한 이러한 비참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계6:5-6)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셋째 인이 떼어질 때는 전 3년 반입니다. 그러므로 기근에 대한 재앙은 전 3년 반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전 3년 반에 식량을 저울에 달아서 배급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곡식을 사는데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를 살 수밖에 없고,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되 뿐이 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밀 한 되는 하루 한사람의 식량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로마 화폐 단위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즉 하루 벌어서 밀 한 되나 보리 석 되 뿐이 살 수 없다면 가족이 많은 집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곧 극심한 기근을 의미합니다.
세계 기근 사태는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되고 있습니다. 마치 환난 때에 있을 기근을 준비라도 하듯 세계 식량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농작물 재배도 수확도 줄어줄고 있습니다.
세계 농업기구(FAO)는 매년 곡물 생산량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세계 곡물 비축량이 사상 최저치인 48일 수준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2015년에는 전 세계 인구 중 8억 명이 기아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1800만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미국도 9명당 1명이 굶고 있습니다. 전 세계 8억 2천 6백만 명이 만성 영양실조입니다. 해마다 1400만 명의 어린이들이 먹지 못해 7초에 한 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엘니뇨 같은 기상이변으로 지구촌이 몸살을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전쟁까지 터진다면 세계 기근 사태는 불을 보듯 뻔 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세계 인구는 급증하고 있습니다.
곡물이 생산되는 땅은 줄어들고 있는데 곡물을 소비할 인구는 급증하고 있다면 이것 또한 기근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입니다.
세계 인구 증가는 점점 빨라지는 추세다. 1800년 10억명이었던 세계 인구는 1930년 20억 명으로 두 배가 되기까지 130년이 걸렸습니다. 40억 명이 되는 데는 44년이 걸렸습니다. 1987년 7월11일 ‘50억 인구의 날’을 맞은 뒤 12년 만인 1999년 60억 명을 돌파했고, 다시 12년 만에 2011년 10월 31일 날 70억 명을 넘게 됐습니다.
미국 코넬 대학은 2050년 도에는 현재의 두 배인 140억 명이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전에 7년 대환난이 일어날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지구의 기근 현상은 너무나도 불보듯 뚜렷한 징조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깊이 깨닫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살지 아니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근이 닥치자 어떻게 했습니까?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추악한 짓들을 범했지 않습니까? 어떻게 자기 자식을 잡아먹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보다 더 무서운 저주와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시록 6:6절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고 하였습니다. 감람유와 포도주를 인격화 시켰습니다. 즉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감람유는 성령을 뜻하는데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의미하는데 예수의 피로 죄 사함 받은 자들은 예수님이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은 날마다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며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상징적 행위 예언을 보고도 회개치 아니한 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한 모습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심히 불쌍하고 안타깝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들이 우리들입니다.
성경에 예언한 수많은 징조들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들의 죄를 회개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악행을 자행하고 있고, 더 나아가서는 다시 오실 예수에 대한 관심도 없는 이 시대를 어떻게 패역한 시대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징조는 영어 성경에 Sign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수 없이 이 땅에 택한 자들을 위해 싸인을 보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징조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육적인 생활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에스겔을 선지자를 통해 보여주신 행위 예언을 무시한 자들의 마지막이 비참했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하나님의 징조를 무시하고 살아가는 자들의 마지막이 비참한 최후로 인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보내주신 싸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날마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오지 아니할 것이라고 백성들을 미혹하였듯이 오늘날도 거짓 종들은 세상 종말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단들이 잘못된 종말론으로 택한 자들을 미혹하고 있음에도 주의 종들이, 교회가 조용히 하고 있다면 이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분명코 파수꾼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분명코 그 피 값을 파수꾼의 머리에서 찾겠다는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로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깨어서 성령으로 기름으로 준비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깊이 알아가야 할 때입니다.
제발 젖 같은 말씀에 만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까지 젖만 먹고 있으려고 합니까? 젖도 오래된 젖을 먹으면 아이들이 설사를 하고 아이에게 영양이 되지 못하듯이 영적인 세계도 똑같습니다.
진실로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의 영혼들이 원수 마귀의 손에 노략질 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으면서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설 교 >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
겔 4:9-17
유다의 예루살렘이 이렇게 계속 바벨론의 공격을 당하고 에워싸여 함락되고 생지옥이 된 원인은 두 가지였습니다(5:5, 11).
첫째는 유다 백성이 이방인들보다 더 큰 악을 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신자가 불신자들보다 더 악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춰야 할 택하신 백성들이 더 어두워졌고, 공평을 원했더니 더 포악해졌고, 공의를 바랐더니 더 불의하더라는 겁니다.
두 번째는 성전 안에서 행해진 우상숭배였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에 대해<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일로 내 성소를 더렵혔다>(5:11)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만든 성소에서 우상을 숭배했으니 어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었겠습니까?
잡곡으로 떡을 만들라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너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네가 옆으로 눕는 날 수 곧 삼백구십일 동안 먹되>(9절).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온갖 잡곡을 다 모아 떡을 만들라고 하시고 모로 누워자되 좌편으로 누워 390일, 우편으로 누워 40일을 지내며 그 거친 떡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부드러운 떡이 아니라 거친 잡곡 떡, 그것도 반듯이 누워 편히 자지말고 모로 누워 390일과 40일을 자면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더구나 그 떡이 딱딱하게 굳어지면 그걸 다시 인분에 구워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은 모로 누워자고 줄로 몸을 동이고 거친 떡을 먹는 것까지는 견디겠는데 인분에 떡을 구워 먹는 것 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인분을 다른 것으로 바꿔달라고 하자 하나님이 다시 쇠똥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는 다 에스겔로 하여금 유다의 죄악과 허물이 얼마나 고약한 것인가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지금 에스겔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은 그것이 그대로 유다가 범죄할 때마다 겪으시는 하나님의 아픔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쇠똥으로 떡을 구을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기를 허락하노니 너는 그것으로 떡을 구울지니라>(15절).
쇠똥, 그래도 인분보다는 냄새도 덜 나고 섬유질이 많아 화력도 좋았습니다. 실제 티베트 유목민들은 야크 똥을 말려 긴 겨울용 땔감으로 사용하는데 그 어떤 나무 연료보다 유용하다고 합니다. 스리랑카 사람들도 코끼리의 똥을 말려 땔감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아무튼 에스겔은 인분 대신 허락하신 쇠똥을 연료로 딱딱하게 굳은 거친 떡을 구워 먹으며 인간의 냄새나는 죄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에스겔로 하여금 유다의 죄악을 온몸으로, 피부로, 삶으로 체험하고 느끼며 더욱 절절한 심정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외치고 전달하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에스겔의 그런 행위 계시는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실제 당하게 될 최악의 상황을 연기한 예언극이기도 했습니다.
<... 내가 예루살렘에서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 떡과 물이 부족하여 ...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16-17절).
부정한 떡의 표적
전준구 목사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밀과 보리, 콩과 팥, 그리고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아 떡을 만들되(9절), 인분 불에 구워 떡을 만들고(12절), 이런 부정한 떡을 모로 누워있는 390일 동안 먹으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열국에 흩어진 유대인들도 이런 부정한 떡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정한 떡의 표적은 예루살렘이 포위 된 후에 당할 환란과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영적 계시의 말씀입니다.
에스겔에게 주신 부정한 떡의 표적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영적진리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떠나면 부정한 떡을 먹게 된다”는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13절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열방에 흩어지면서 부정한 떡을 먹게 됩니다. 흩어질 때 부정한 떡을 먹게 됩니다. 떠날 때 부정한 떡을 먹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은 달라붙는 일, 흩어지지 않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룻이 이방여인이며, 남편이 일찍 죽은 불행한 여자였지만 나중에는 증손자가 왕이 되고(다윗 왕), 그 후손 중에 역사적 예수님이 출생하는 영광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어머니인 나오미를 놓치지 않고 달라붙었기 때문입니다. 참 신앙은 포도나무 가지가 원줄기에 붙어 있듯이 주님께 붙어 있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정한 떡을 먹는 환란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2. “섞어 살면 망한다”는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9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밀과 보리, 콩과 팥, 그리고 조와 귀리를 섞어서 빵을 만들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심판 중에도 좋은 떡을 만들어 먹게 하는 사랑을 베푸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원래 하나님의 법에는 섞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다. “다른 육축과 교합하지 말라, 두 종자와 함께 심지 말라, 두 재료로 직제한 옷을 입지 말라”(레19:19)는 법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에스겔은 지금 이것저것을 섞어서 만드는 아주 부정한 일을 행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승리하는 축복자가 되기 위해서는 섞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은혜 받는 일과 세상 욕심을 내는 일, 하나님의 영광과 육신의 영광, 긍정적인 믿음과 부정적인 믿음을 섞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거룩한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3. “영을 살리는 일에 집중해야 부정한 떡을 피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14절 말씀에 보면 에스겔이, “오호라 주 여호와여 나는 영혼을 더럽힌 일이 없었나이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정한 떡은 영혼이 더러워진 사람이 먹는 재앙이라는 뜻입니다. 에스겔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부정한 떡을 먹는 재앙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부정한 시대에 악한 영이 역사하는 시대에 거룩하고 정결하게 사는 믿음의 승리자가 어떻게 될 수 있습니까? 길은 하나입니다. 영이 사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영이 죽고 흙(육체)이 남으면 뱀이 찾아오게 됩니다(창3장). 영혼이 잘되어야 범사가 잘되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요삼1:2).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해야 모든 것이 더해지게 됩니다(마6:33). 이 말씀 붙들고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전준구 목사(대전 가양교회 담임)
경겁 중의 떡, 민답 중의 물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 대로 우리들의 지나간 삶을 돌이켜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회한의 표지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표지들을 바라볼 때 한편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시는 그러한 부끄러운 일을 행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경계하는 표로 삼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남유다 백성들에게 주셨던 이러한 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경겁 중의 떡'과 '민답 중의 물', 곧 극단적인 놀람과 낙심 가운데에서 당하는 굶주림이 그것입니다. 에스겔이 먹고 마셨던 이 부정한 음식물들은 임박한 남유다 왕국 멸망의 예고인 동시에 선민(選民) 이스라엘에게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표지였습니다. 아울러 이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표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음식물들이 의미하는 바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에 대한 대가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들이 범하였던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1, 참을 수 없는 치욕입니다.
본문은 남유다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부정한 무리처럼 살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13절). 그리고 이 경고대로 그들은 얼마 후 선민임을 자랑할 만한 성결한 삶을 살 수 있는 여건을 완전히 박탈당한 채 그토록 치욕스럽게 여겼던 부정한 떡으로 연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 죄의 가장 즉각적인 대가는 참을 수 없는 치욕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 역시 범죄 후 가장 처음 겪어야 했던 것은 바로 부끄러움이었습니다(창 3:10). 이와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고도 돌이키지 않는 불의한 자들이 겪을 대가는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의 큰 수치임을 성경은 곳곳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시 53:5;단 12:2). 그 누구든 자신이 범한 죄를 회개하지 않는 한 수치라는 멍에는 절대 벗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흑 지금 우리의 모습이 이처럼 범죄로 인하여 이웃과 우리의 대적들에게 큰 수치를 당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사단의 비웃음과 그 수하들의 조롱을 벗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철저한 회개를 통해 죄를 제거하는 것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영육의 극심한 피폐입니다.
본문은 또한 남유다 백성들이 극심한 기근을 당하게 되며 그 가운데 쇠패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17절). 예루살렘은 하나님 의 극진한 사랑과 보호 가운데 에서 참◎로 아름답고 풍요롭게 성 장하였던 도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크신 사람과 그 사랑으로 인한 물리적 번영을 종교적, 도덕적 타락을 위한 재물로 사용하는 어처구니없는 죄악을 범하였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그 얼굴과 마음을 등졌던 것입니다(신 31:20). 그 결과 그들에게 주어진 대가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영육의 극심한 피폐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함으로 오는 핍절과 영의 기갈로 인한 곤핍(암 8:11)뿐만 아니라 언제 있을지 모르는 적군의 공격에 항상 가슴 졸이며 겨우 목숨만을 연명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경겁 중의 떡과 민답 중의 물은 이처럼 죽음보다도 못할 남유다 백성들의 삶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오늘날에도 이 사건을 통하여 교훈을 받지 못하고 거듭 범죄하는 자에게 엄격한 경고를 계속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풍성한 말씀이 주어진 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 말씀을 깨달아 우리의 죄악을 돌이킴으로써 이렇듯 괴로운 떡과 물을 받기를 단호히 거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돌이킬 수 없는 멸망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 이스라엘. 특히 그 중에서도 제사장이었던 에스겔에게 부정한 떡을 먹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12절). 그런데 더욱 두려운 것은 그 사건이 곧 남유다 백성 전체가 그처럼 부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예고하는 것이 었다는 사실입니다(13절). 수백 년간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한 경고에 도 불구하고 선민으로서 마땅히 칠하여야 할 성결한 삶과 여호와 신앙을 지키지 못했던 결과는 이처럼 전체가 부정한 백성이 되어 왕국의 멸망이라는 징계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같은 남왕국 유다의 멸망은 그 누구도 부당하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멸망을 당하지 않도록 이미 수차례 경고하시고 회개를 권면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심판을 택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대에도 우리를 권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 말씀에 얼마나 순복하며 회개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범죄하여 돌이키지 않는 자의 결국은 완전한 멸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에스겔이 경겁 중에 먹었던 떡과 함께 변함없이 우리를 경고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백성들 앞에서 에스겔이 먹고 마셨던 그 음식들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썩어 없어져 지금은 형체조차 남아있지 않음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 떡, 그 물과 함께 경고하셨던 하나님의 음성은 이천 오백 년 이상의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지금도 우리의 귀를 울리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죄에서 돌이키지 않고 여전히 죄 가운데 행한다면 우리가 이를 결국도 참을 수 없는 치욕과 영육의 극심한 피폐와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을 당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를 향해 권고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복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에스겔의 상징행위
에스겔 4:1-17
에스겔이 하나님의 파수꾼으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가득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받아먹고서 바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이 벙어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입을 열게 하실 때에만 말할 수가 있습니다. 파수꾼이 벙어리가 되어 꾸짖지 아니하면 이것은 완전한 심판입니다. 파수꾼이 고함을 지르는 것은 아직 돌이킬 기회가 있지만 꾸짖지 아니한다는 것은 돌이킬 기회가 없고 이제는 심판만 집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벙어리가 되어서 말은 하지 못하지만 행동으로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노드라마의 배우가 무언극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말하는 것 보다 더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제사장으로 성전에 들어갔다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요한이 태어난다는 말을 듣고서 믿지 못하여 벙어리가 됩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날 때에 그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물을 때에 서판에 요한이라고 이름을 쓰니 그 혀가 풀려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요한이 보통 아이가 아님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지금 말없이 연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일 년이 넘는 기간을 무언극만 하고 있습니다. 그 무언극은 4:1-5:4절까지 계속됩니다. 무언극이 끝나고 그 상징행위의 뜻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4장 안에서 에스겔의 상징행위만 살펴보겠습니다. 말을 하지 않고 상징적인 행위를 하지만 그 뜻은 유다백성이라면 다 무엇인지 알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그 상징행위로도 지금 유다와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보겠습니다.
4:1-3절입니다. 에스겔에게 토판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토판에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라고 합니다. 토판이 굽기 전의 토판이라면 부드럽게 그려질 것이고 구운 토판이라면 조각도 같은 것으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런 토판의 그림들이 최근에도 바벨론지역의 발굴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왕들이 조공을 받는다든지 적을 정복한 내용들을 그림과 글로 새겨둔 것들입니다. 이런 토판에 에스겔이 예루살렘의 지도를 그리면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과 왕궁과 주택과 길들이 표시되면 알아봅니다. 그 성읍을 그린 토판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를 흙으로 에워싸게 만듭니다. 그리고 사다리를 세우고 공성퇴를 둘러 세웁니다. 이런 모양은 옛날에 성을 공격하는 방법들입니다. 예루살렘이 포위가 되고 공격을 받는 모습입니다.
3절을 봅니다. 이렇게 성읍이 포위되어 공격받는 모양을 만들어놓고서 다시 철판을 가져와서 에스겔과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징조가 되리라고 합니다. 무슨 징조입니까? 예루살렘의 성읍이 포위되고 공격된다는 징조이지만 더 심각한 징조가 철판으로 막아지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지금 1인 2역을 담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역할도 해야 하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역할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적으로 공격을 받아도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적이 물러갑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단절을 보여주시는 상징인 철판으로 에스겔과 성읍 사이에 가로 놓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적이 쳐들어와서 성읍이 망하는 것 보다 더 무서운 심판의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9:2절입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스라엘의 죄악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갈라놓고 그의 얼굴을 가리게 한 것입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성읍이 이스라엘의 역할인데 그 사이에 철판을 세워놓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의 삶의 형편이 어려워지고 막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직장은? 은퇴 후의 대책은? 사업은? 경제상황은? 교회의 운영은? 이런 두려움들보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 더 두렵게 여겨지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철판에 막힌 것입니다.
4:4-8절입니다. 또 다른 상징행위가 나옵니다.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의 죄악을 짊어지되 네게 눕는 날 수 대로 그 죄악을 담당하라고 합니다. 왼쪽으로 누워서 390일, 오른 쪽으로 40일을 담당하는데 하루가 일 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에스겔의 얼굴을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여 팔을 걷어 올리라고 합니다. 심판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줄로 몸을 묶어서 에워싸는 날이 끝나기 까지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행위를 1년을 넘게 하여야 합니다. 에스겔도 힘이 들겠지만 그의 아내도 이런 남편을 볼 때에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보시면 아내가 먼저 죽습니다. 아내가 죽어도 울지도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상징행위는 죄악을 담당하라고 하는데 이것이 대속이냐 아니면 유대인들의 벌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냐에 대하여 대부분 대속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이 결국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몇 사람은 대속의 역할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처럼 대신 고난을 당하는 것이며 에스겔이 벙어리가 되어있는 것처럼 이사야 53장에서도 그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두 가지가 중첩되어 있다고 봅니다. 에스겔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을 담당하는 것이 벌을 받는 것과 대속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포로로 잡혀오는 것은 죄악에 대하여 벌을 받는 것이 언약대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소망이 있고 그 과정이 대속의 과정이 됩니다.
그러면 왼쪽으로 누워 390일을 말하는 것은 390년의 죄악을 담당하는데 에스겔로부터 소급하여 올라가면 솔로몬의 성전 완공시대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북 이스라엘의 죄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죄악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나서 이스라엘은 곧 우상숭배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오기 까지 늘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임을 고발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 쪽으로 40일은 아직 남은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기간이 포한되는 40년으로 봅니다. 이 둘을 합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한 430년과 같은 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의 이러한 상징행위는 심판과 동시에 대속의 기능을 보여줍니다.
4:9-17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하는 그 날수동안 먹을 양식과 마실 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여섯 가지 혼합곡물로 떡을 만들어 옆으로 눕는 날수대로 먹는데 그 양이 이십 세겔과 물은 육분의 일 힌입니다. 이것은 한 끼의 식사분량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굶어죽지 아니할 정도의 양만을 저울에 달아서 먹어야 합니다. 음식과 물을 저울에 달아서 먹는다는 것은 성위 포위되거나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음식이 핍절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행위입니다. 그리고 떡을 구워먹되 인분에 구워먹으라고 합니다. 인분은 성경에서 부정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인분으로 떡을 구워먹으면 부정하게 되기에 에스겔이 자신은 자기 영혼을 더럽힌 적이 없다고 합니다.
14절을 봅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정결규례를 지켜왔다고 합니다. 마치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고 할 때에 베드로가 이런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고 하는 장면과 같습니다. 이 정도로 모든 유법을 지킨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 그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셔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부정한 것입니다. 에스겔의 말을 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게 합니다. 이러한 형벌이 주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뢰하여야 할 여호와 하나님은 의뢰하지 않고 그들의 양식을 의뢰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식으로 말하면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는데 물을 저축하지 못할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그러므로 16-17절을 보시면 그 양식을 끊어버리니 저울에 달아서 먹고 두려워 떨며 물을 마시며 떡과 물이 부족하여 피차에 두려워하여 떨며 그 죄악 중에 쇠패하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되는 것은 이미 언약의 저주대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레위기 26장을 봅니다. 1-13절까지는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순종하면 복을 받지만 14-46절에서는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유가 레위기 26장에 다 나와 있습니다. 14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러나’로 시작하면서 모든 명령과 규례를 준행하지 아니하면 재앙을 내린다고 합니다. 파종한 것을 대적이 먹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치신다고 합니다. 그대로 청종하지 아니하면 7배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18-23절에서 하늘이 철과 같이 되고 땅이 놋과 같이 된다는 말씀은 기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수고가 헛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여도 청종하지 아니하면 다시 일곱 배가 더 재앙을 내리신다고 합니다. 들짐승을 보내어 자녀를 움키고 가축을 멸하며 너희의 수효를 줄인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들짐승은 세상의 성공이라는 들짐승이 우리의 자녀를 삼키고 있다고 봅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자기 어머니를 죽인 사건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하여도 주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면 다시 7배의 재앙을 더하십니다. 결국 최종적인 재앙이 일어난 것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상태입니다.
26절입니다. “내가 너희가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양식을 저울에 달아서 먹는 상징행위를 통하여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그들에게 레위기 26장의 말씀이 성취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하여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더욱 심한 재앙이 쏟아지는데 자신의 자식을 잡아먹는 일까지 북 이스라엘에서 일어났습니다. 결국은 포로로 잡혀가게 하심으로 약속의 땅은 오히려 안식을 하게 됩니다.
40-46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대항함으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항하여 그들이 원수들의 땅으로 끌려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을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여호와께서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누가 기쁘게 그 형벌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그렇게 많이 잘못하였다고 이렇게 재앙을 받느냐고 원망을 합니다. 순순히 포로로 잡혀가서 재앙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왔습니다. 이들이 순순히 형벌을 받겠습니까?
그러므로 에스겔이 대표로 여호와의 벌을 받습니다. 390일을 모로 누워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하고 40일을 또다시 모로 누워서 유다의 죄악을 담당합니다. 에스겔이 기쁨으로 그 형벌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시키신 일이기에, 여호와의 영에 의하여 세움을 입었기에 자신은 그 죄를 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죄를 담당하는 일에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지금 주의 영에 의하여 죄를 담당하는 에스겔은 이것이 자신들의 죄로 인한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자기의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형벌을 기쁘게 받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의 영으로만 됩니다.
그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여호와께서 그 원수들의 땅에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며 미워하지 아니하면 아주 멸하지 아니하면 그들과 맺은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라고 함으로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바벨론이며 유배지입니다. 이곳에서 살며 고생하는 것이 다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이라고 여기며 이 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기쁨으로 이런 환난을 맞이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홀로 이 저주와 재앙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은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일이 예수님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줄 알고 십자가에서 대신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시고 이제 성령을 부어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 성령을 받은 자는 놀랍게도 세상의 환난을 기쁨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4:12-19절입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야고보서 1:1-4절입니다.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자신이 잘못하여 욕을 얻어먹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한 고난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이 있으시다면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땅이 바벨론이라는 유배지이기에 예수 믿고 사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세상의 힘을 믿지 않고 살려고 하면 집안에서 먼저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힘을 추구하는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고 살려고 하면 교회에서도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 핍박을 기쁨으로 견뎌내라고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아시고 에스겔이 상징행위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보여주었듯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상징행위가 됩니다. 믿음으로 오는 환난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