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7년(1574) 10월 10일, 선조는 경연이 끝난 뒤 이조참판 유희춘과 함께 사서오경의 언해(諺解.
한문으로 된 책을 언문으로 번역하는 일)에 관해 논의했다.
“사서오경의 구결(口訣. 한문 문장을 읽기 쉽도록 토를 다는 일)과 언해 방안을 경이 모두 자상하게
정리해놓았으니 그 공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혼자 감당하기에는 일이 너무 과한 듯하니 국(局)을 하
나 설치하여 7인 정도의 관원을 뽑아 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소?”
이때 유희춘의 나이는 62세, 늙어죽기 3년 전이었다. 게다가 그는 『주자대전』의 교정작업을 겸하
고 있었다. 사서오경의 언해라는 막대한 일을 감내하기에는 관원 7명을 데리고 하더라도 벅찬 일이
었다. 다만 한문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주의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에 선조와 일부 신하들이 그러한 발
상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10월 19일, 조강(朝講. 석학들이 오전 중 임금에게 학문을 강의하는 일)에서 선조는 다시 이 문제를
꺼냈다. 유희춘은 조정 내에서 사서오경의 언해작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면서, 굳이 사업을 진
행하려면 퇴계 이황이 이미 언해 및 주석(註釋)을 마쳐놓은 것이 있으니 이를 토대로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 선생이 사서오경의 언해 및 주석 작업을 했다는 얘
기 역시 금시초문으로 매우 놀라운 정보다. 이에 선조는 단호한 결심을 밝혔다.
“사서오경의 언해사업에 대해 중신들이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과인은 반드시 이를 수행할 것이오. 사
서오경의 언해를 모두 마친 다음에 한꺼번에 올리면 보기에 벅찰 것이니 언해가 이루어지는 대로 하
나씩 올리도록 하시오.”
이때까지만 해도 선조는 학문적 열정이 넘치고 결단력도 충만했던 듯, 세종대왕도 엄두를 내지 못했
던 사서오경의 언해를 감행할 단호한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이후 유희춘은 직접 『대학』과 『논
어』의 언해를 마치는 대로 한 권씩 선조에게 바쳐 감수하도록 했다. 선조는 철종을 제외한 조선의
모든 왕들처럼 사서오경에 통달해 있었다. 언해를 마친 유희춘은 신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인 전라도
해남으로 내려가 2년 뒤 눈을 감았다. 그러나 무슨 까닭에선지 선조가 명한 국(局)도 설치되지 않았
고, 유희춘이 사직한 뒤부터는 언해도 더 진척되지 않았다. 아마도 선조가 아직까지는 신하들의 극심
한 반대를 물리칠 만한 권력이나 정치적 수완이 없었던 듯싶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선조는 재위 17년(1584), 교정청을 설치하여 사서오경의 언해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사서오경의 언해작업이 완성된 것은 4년 후인 선조 21년 10월 29일이었다. 선조
가 느낀 보람과 기쁨이 실록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지난 갑신년(1584)에 교정청을 설치하고 학문하는 선비들을 모아 사서오경의 음석(音釋)을 교정하
고 언해를 달도록 했는데, 이때(1588)에 이르러 모두 마쳤다. 이는 학문적으로 매우 큰 보람이요 기쁨
이니, 주상은 관계자들을 차례로 논상(論賞)하고 태평관에서 어주(御酒)와 1등 풍악을 하사하였다.>
언해작업에는 정개청‧정구‧정철‧최영경‧한백경 등 당대 최고 문사들이 모두 참여했다. 그러나 언해된
사서오경을 출간하기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원고가 모두 사라져버렸다. 망할 놈의 왜놈들! 선
조의 의지는 한결같아서, 전란 후 다시 사서오경의 언해를 추진했다. 그러나 실록 어디에도 사서오경
의 언해를 마쳤다는 기록은 없다.
재위 34년(1601) 9월, 선조는 홍문관에 『주역』의 언해를 명했다. 그러나 홍문관 대제학은 현재 자
신들의 실력으로는 『주역』을 언해할 수 없으니 별도의 기관을 설치한 뒤 널리 인재를 구해 시행함
이 옳다고 대답했다. 국내 제일의 학자들이 모인 홍문관에서 사서오경 가운데 하나인 『주역』을 언
해할 실력을 가진 자가 없다는 말도 이해할 수 없고 선조가 달랑 『주역』만 언해하라고 명한 이유도
이해할 길이 없지만, 무정한 저자는 아무 해명이 없다. 어째든 『주역』 언해작업은 1606년 3월 20일
에 완성되었다. 실록에는 『주역』 언해가 끝난 뒤 『시경』 언해도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다는데, 사
서오경 중 나머지 책에 대한 언급은 없다.
선조의 사서오경 언해작업은 왕이 최초로 훈민정음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지금까
지 왕족들과 양반들은 훈민정음을 천시하여 언문‧암글‧반절‧뒷간글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던 훈민정
음을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떠받들던 사서오경 언해에 사용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선조의 공덕은 존중
되어 마땅하다. 선조가 어떤 왕이던가? 이순신 장군의 공적을 시기하여 임진왜란 후 공신 책봉조차
하지 않으려던 것을 유성룡의 간곡한 진언으로 겨우 책봉한 편협한 왕이 아니던가. 그런 왕이 사서오
경 언해작업에 그처럼 애를 썼다는 사실은 선조의 이미지를 일신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AI 발달로 인한 인공지능 로봇의 역활이 매우 긴요하게 일상에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독거노인의 무료한 일상을 달래주는 말하는 로봇이 함께 공존하는 스웨덴 가정, 택배는 물론 모닝커피 까지 타주는 일을 한다니 참으로 희한한 세상이 되어갑니다. 물론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동반자의 역활을 하고 있으니 친근감을 마다 할 이유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