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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제산 오어사
포항 시내에서 포항제철을 지나 929번 지방도로로 오천과 문충리 방면으로 24㎞ 정도 가면 오어사에 도착한다. 오어사 주변에는 1964년에 완공된 만수 면적 12만평에 물의 양도 500만 톤에 이르는 넓은 오어지가 있다. 용이 감싸고 있는 듯한 호수와 기암절벽의 아름다움을 가진 운제산의 산세가 함께 어우러져 승경을 빚는 곳이다. 그리고 오어사는 신라 4대(원효, 자장, 혜공, 의상) 조사를 배출한 우리나라 최고의 성지이다. 운제산은 원효대사가 원효암과 자장암을 명명하고 수도 포교할 때 기암절벽인 계곡 사이에 두 암자를 두고 내왕이 어려우므로 구름으로 다리를 놓아 오고 갔다 하여‘구름 운(雲)’,‘사다리 제(梯)’ 자를 써서 운제산이라 이름을 붙였다. 한편으로는 신라 제2대 남해왕비 운제부인의 성모단이 있어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오어사는 신라 26대 진평왕(579~631)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19대 사찰 중 하나로 당초에는 항사사(恒沙寺)라 불렀다. 이후 원효대사와 혜공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할 때 서로의 법력을 겨루고자 개천의 고기를 한 마리씩 삼키고 변을 보이는데 한 마리가 살아서 힘차게 헤엄치는 것을 보고, 서로 자기 고기라고 해서‘나 오(吾)’,‘고기 어(魚)’자를 써서 오어사가 되었다고 한다. 문제의 고기를 놓아준 곳이 지금의 오어지(吾魚池)이다. 이 이야기는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데, 스님은 1264년에 오어사에 머문 적이 있었으므로 당시까지 전해오는 이야기를 채록한 것이라 한다. 들판 가득 누렇게 오곡과 백과가 익어가는 가을 길을 지나고 꾸불꾸불한 길 몇 구비만 더 돌면 오어사가 보인다. 왼편은 오어지, 오른편은 운제산이 정면으로 보인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물가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오어사의 일주문이 호수와 마주보고 있다. 일주문과 일직선상에 대웅전이 있는데, 일주문 밖 계단에서 서서 문을 통해 대웅전과, 대웅전에서 예불을 드리는 스님과 신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꽤 괜찮은 풍경이다.
오어사의 대웅전은 1985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88호로 지정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문살이 특이하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봉오리에서 꽃이 활짝 피는 모습을 새겨놓았다. 대웅전 왼편으로 요사와 오른편으로 범종각이 있다. 요사와 대웅전 사이 오래된 배롱나무 한 그루가 천년의 향기를 담고 늘 반갑게 맞이해 준다. 대웅전 뒤편으로 삼성각, 산령각, 응진전이 있다. 그리고 마당을 중심으로 왼편으로 요사 2개와 불교용품점이 있고, 오른편으로 요사와 유물전시관이 있다. 오어사 유물전시관은 원효대사 삿갓과 수저를 비롯해 법화경 4점, 오어사 사적지 2점, 대웅전 상량문 등 모두 20여 점의 유물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전시유물 가운데는 특히 지난 95년 오어지 준설공사 중 발굴돼 보물 제1280호로 지정된 고려 동종이 눈길을 끈다. 신라 동종의 주 양식을 계승한 이 동종은 조성연대가 분명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할 뿐 아니라 양각으로 새겨진 각종 장식문양이 우수하다.
봄이 되면 운제산은 진달래 축제가 열리고, 가을에는 단풍으로 온 산이 붉게 불탄다. 더불어 오어사 경내도 만발한 진분홍빛 연산홍으로 붉은 꽃다지를 이루고, 깊어지는 저수지 길을 따라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걸어보는 것도 평소 보기 드문 운치가 된다. 오어사에서의 기쁨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앞쪽에는 원효암이 있고 뒤쪽에는 자장암이 있는데 두 곳 모두 결코 빠질 수 없는 오어사의 자랑거리다. 원효암은 다리를 건너 계곡 깊은 곳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원효암을 가려면 오어지 위의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큰 물고기 떼가 다리 아래에서 유유히 나들이를 즐기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원효암을 오르는 산허리에서 바라보는 오어사는 오어지와 함께 한 폭의 그림으로 앉아있다.
오어사에서 바라보는 자장암은 운제산 꼭대기 암봉 위에 사뿐히 앉아있다. 가파른 산정의 아슬아슬한 풍경은 절로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고 안개라도 끼는 날이면 아예 그 모습을 감춰버리지만, 보기보다는 오르는 길은 수월하다. 자장암에서 내려다보는 오어사는 계곡의 경치에 첩첩이 둘려 싸여 산마루와 굽이돌아 흘러드는 계곡물은 전설처럼 아름답다. 물 위에 내려 살포시 흘러가는 잎새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이 절묘한 선경에 빠져들어 하루든 이틀이든 절벽 위에 앉아있으면 세월을 잊어버리게 된다.
일주문
일주문(一柱門)은 오어지에서 경내로 들어올 때 출입하게 되는 문으로, 근대에 세웠다. 정면에 '오어사' 편액이 걸려 있는데 근대의 서화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쓴 글씨다. 저수지 쪽으로 나있는 사찰로 들어가는 첫 문이다. 보통은 기둥을 한 줄로 세웠다고 해서 일주문이지만 흔히 사찰의 초입에 있는 문을 일주문이라 한다. 일주문에는 들어가자 우측에 목비가 보관되어있으며 좌측에는 고려시대의 범종이 유리관 속에 보관되어 있다.
부도와 비석(浮屠 碑石)
오어사 경내에서 자장암 방면으로 나 있는 등산로 입구에 오어사에 주석하였던 역대 고승들의 부도와 탑비가 모아져 있다. 부도 7기와 비석 1기가 그것인데, 7기 중 5기에 명문이 있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부도의 주인공은 용계성변(龍溪惺卞), 대오종해(大悟宗海), 운묘흡(雲妙洽), 해월 경련(海月敬蓮), 허곡만(虛谷滿) 등이다. 또한 비석은 1740년(영조 16)에 세운 것인데 글자가 잘 보이지는 않지만 사명 대사의 제자 용암(龍岩)의 부도비가 아닌가 한다.
자장암 대웅전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오천읍 항사리에 자리잡고 있는 오어사 산내 암자로서 자장율사가 창건 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인 오어사의 산내암자이다.신라 진평왕(579~631) 즉위시인 서기 578년경 자장율사와 의상조사가 오어사와 함께 창건한 암자로서 , 깍아지른 기암절벽을 이루는 바위 봉우리(일명 천자봉) 위에 사뿐이 내려 앉아 있는 곳이 자장암이다. 자장암에서 내려다 보는 오어사를 감싸 앉은 오어지(오어지)의 튼 호수는 전설처럼 아름답다.
자장암은 법당과 삼성각 요사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근래에 지었다.안에는 최근에 조성한 금동 관음보살좌상과 문수 보현동자상,목각후불탱,신중탱,약사여래탱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뒤에는 1998년에 진신사리를 봉안하여 세운 세존진신보탑이 있다.삼성각은 최근에 새로 지었으며, 안에는 독성상,칠성탱,독성도 등이 봉안되어 있다.
자장암은 땅 위의 높은 절벽위에 세워져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서 일까? 누구라도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하면 모두 성취될 수 있는 곳이라 한다. 그래서 지금도 신라 천년의 관음기도 도량으로서 항상 불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자장암 산신각
자장암 뒤편의 석가진신사리탑. 모르고 가면 그냥 지나칠 수 있다.
자장암에서 내려다본 오어지,날씨가 추워 꽁꽁 얼어 붙었다.
자장암에서 내려다본 운제교, 원효암으로 가는 다리이다. 다리 밑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노닌다.
대성전, 이번에 새로 지은 것 같다.
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다포식(多包式) 단층 건물로 조선 영조 17년(1741)에 중건하였다. 창호는 꽃살창으로 화려하게 짜 각각 삼분합의 문을 달아 장식을 하였다. 내부의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여 연꽃으로 단청을 하였다.
안에는 석가삼존불좌상을 모시고 머리에는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였다.
불단에는 석가삼존불을 봉안했는데 그 위로는 화려하게 장식된 닫집이 그 위엄을 더하고 있다. 불화로는 후불탱을 비롯하여 삼장탱, 신중탱,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다.
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 어느 곳에도 부처님 같으신 분 없나니
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에도 비교할 분 없네.
世間所有我盡見 세상천지 내가 다 보아도
一切無有如佛子 부처님같이 귀하신 분 다시 없도다.
대웅전 불단
연화좌에 결가부좌하여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아미타불을 모신 삼세불(三世佛)이다. 이 삼존은 손가짐만 다를 뿐 상호(相好)와 법의(法衣) 등의 형식이 거의 유사하게 조성되어 있다. 삼존불의 뒤에는 후불탱이 걸려 있으며, 머리 위에는 연꽃봉우리가 조각된 화려한 닫집을 가설하였고 고주(高柱)에는 약간 바랜 불좌상이 그려져 있다. 대웅(大雄)이란 큰 영웅인 석가모니를 이르는 말이다. 큰 힘으로 사마(四魔)를 항복시킨다는 뜻에서 붙여진 부처님의 덕호(德號)에서 유래한 것으로 『법화경』에서 따온 이름이다.
오어사 동종
1995년 11월 16일 오어사의 바닥이 높아져 밑을 파내는 준설 작업 도중에 발견되었다. 이 범종은 신라 범종의 양식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성연대가 분명하고 보존상태가 아주 양호한 고려 범종으로서 각종 장식 문양과 더불어 주조 기술이 우수한 작품이다. 고려 고종 3년인 1216년에 제작되었는데, 몸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제작된 후 오어사로 옮겨 안치된 것이다.
신라의 양식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우선 용뉴(龍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신 위의 용뉴에는 한 마리의 용이 휘날리는 수염이 돋보이는 입으로 여의주를 물고 앞을 주시하고 있다. 몸에 성성한 비늘을 세우고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세 개의 발의 모습이 또한 인상적이다. 이러한 모습은 성덕대왕신종의 용뉴와 비슷하고, 또한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영주시 풍기읍 출토의 금동 용두(龍頭)와도 비교될 만하여 용의 조각 형식에 있어서 양식상 흐름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종신의 위와 아래에는 상대 하대의 횡선 띠 안에 섬세한 무늬를 새겨 넣었다. 종신의 3분의 1되는 곳 위쪽으로는 사각형의 유곽(乳廓)을 만들고, 그 안에 9개의 돌출 된 모양의 유두(乳頭)가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 5개는 발견 당시 이미 결실되어 있었다. 그러나 종신에 범자가 새겨졌고, 음통의 맨 윗부분에 구슬 같은 여의두문(如意頭紋)을 장식하였으며, 신라 범종에서는 뉘어져 있었던 상대(上帶)의 보상화문(寶相華紋) 장식이 조금씩 세워져 있는 것과 같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이것을 입화식(立華飾)이라고 하는데, 고려 범종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종신에서 보면 서로 마주본 채 꽃방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합장하는 보살이 성덕대왕신종의 공양 비천상처럼 밑으로 내려오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고, 다른 두 쪽 면에는 전부 여섯 글자로 된 범자(梵字)가 기록된 명문이 위패 형태 안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연화문 당좌(撞座)를 볼 수 있다. 크기는 현재 길이 96㎝, 가로 56.5㎝로 고려시대에서는 보기 드문 대종(大鍾)이다. 출토된 직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 과정을 거친 후 지난 1997년 7월에 오어사로 돌아와 지금은 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어 일반인도 볼 수 있다.
한편 용뉴의 머리 쪽에 해당하는 종신 부분의 왼쪽 아래쪽 면에는 7행 82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그러나 기존에 판독된 명문 가운데 6행의 …선종(善終)…은 보리(菩提)로 판독되며 보리수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또한 5행의 주(主)는 앞 글자와 똑같은 뜻을 줄여 쓴 고려식 약자(略字)로 밝혀진 바 있다.
범종에 새겨진 명문의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桐華寺都監重大師淳誠與同寺 重大師睛蓮道人僧英之與同發 誠願洪標私貯兼集聚錫鑄成 金鍾壹三百斤縣掛于吾魚 寺以此成善普願法界生主供 道善從者貞祐四年丙子五月十九日 大匠 順光造
이것을 풀이해 보면, 동화사 도감 중대사 순성(淳誠)과 오어사 중대사 정련(睛蓮)과 도인승 영지(英之)가 함께 지극 정성으로 발원하여 두루 시주를 받아 300근의 금종 일구를 이루어 오어사에 걸었으니 일체 중생들이 (넓은 법계의)간절히 바라는 성불의 깨달음을 이루고저 이 공양(소리)를 바치며, 부처님께서 인도하는 곳으로 따르겠나이다. 정우 4년 병자 오월 19일 대장 순광(順光)이 주조하다.라는 뜻이다.
이 명문을 통하여 이 동종이 고려 1216년에 주조되었고, 동화사 순성 대사를 도감으로 하여 사부대중의 힘을 모아 무게가 300근 되는 종을 대장(大匠) 순광이 만들어 오어사에 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감독과 주종자 및 무게와 안치 장소, 연대 등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적혀져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신라시대에서 변화를 보인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종의 변천 과정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오어사 동종은 범종의 이미지에 큰 역할을 하는 용통이 세밀하고 힘찬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있고 양각된 보상화문에 비천상 등의 표현이 섬세하다. 비록 발견 당시에 이미 유두 5개가 없어져 있었고, 명문이 약간 긁혀 있었으나 대체로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하고 외형이 완전하다. 이러한 조건은 고려시대의 공예 및 주조 기술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1998년 보물 제1280호로 지정되었다.
절의 북쪽에는 자장암과 혜공암이 남쪽에는 원효암이 서쪽에는 의상암이 그들의 행적을 밝히고 있다. 이와 함께 원효대사가 쓰고 다녔다는 잔 실뿌리로 엮은 삿갓과 숟가락이 전해져 오어사의 오랜 역사를 반추하고 있다.
원효성사
원효 元曉 (617-686)는 한국불교가 낳은 불멸의 성사(聖師)이다. 그는 대승불교의 건설자인 인도의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龍樹)나 중국불교를 새롭게 열어간 천태지자(天台智者)대사에 비견되기도 한다. 한국불교에서만이 아니라 세계불교사에 있어서 원효의 위치는 그만큼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이름 그대로 민족의 첫새벽을 열어간 원효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동(誓幢)이라 하였다. 서당은 '첫새벽'을 뜻하는데 그의 의미 그대로 비단 한국의 불교사상만이 아니라 철학사상 일반에 있어서도 큰 새벽을 연 밝은 별이었다.
<송고승전>에서는 원효가 일찍이 나이 십세 무렵에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리 영특했던 그에게 일정한 스승은 따로 없었다. 불교가 공인된 지 100년이 지나던 이무렵 신라에는 적지 않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있었다. 원효가 그들을 찾아 배우고 물었지만, 뒷날 佛法의 깊은 뜻을 깨달음에 있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이다. 젊은 날의 원효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는 불교학은 물론 유가(儒家)와 도가자(道家者)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학문을 닦는 한편 수행자로서 간절하고 피나는 고행을 다했던 것 같다. 그가 남긴 다양한 저술들에서 그 편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원효의 행석 가운데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두 차례에 걸쳐 입당(入唐) 유학을 시도했던 그가 문득 스스로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린 일이 그것이다. 원효는 34세때 당에 유학하기 위해 의상(義湘)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갔다가 그곳 순라꾼에게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45세에 다시 역시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해로(海路)로 해서 당(唐)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주계(唐州界)로 향하였다.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그날 밤 원효는 동티(귀신의 장난)를 만나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이는 곧 그에게 큰 깨달음의 한 계기가 되었다.그는 지난 밤 잠자리는 땅막이라 여겨 편안했는데 오늘밤 잠자리는 귀신의 집이므로 이처럼 편안치가 못함을 확인하였다. 이어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고 다시 신라로 되돌아 왔다. 마음밖에 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는 곧 진리이다. 당나라에 진리가 있다면 그것이 왜 신라에는 없겠는가. 그는 이처럼 인간의 내면 속에 간직되어 있는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또한 신라인으로서 주체적인 자각을 이루고 있다. 원효의 이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더욱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어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그가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토리 자체보다도 이 신라인의 주체성, 그리고 이로부터 확장해간 그 사상적 보편성과 세계성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젊은 시절부터 장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열렬하게 유학의 꿈을 품어 온 원효가 한 순간에 전회(轉回)하여 신라로 돌아온 후, 그는 오직 불교학의 연구와 저술 그리고 대중교화에 몰두하였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그의 저술은 100여종 240여권(또는 86부 180여권)으로 알려져 있다. 그 연구 범위도 대·소승불교의 모든 부문을 망라하고 있어, 가히 넓고 깊은 學解와 초인적 저술활동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에서 보인 탁월한 이해와 견해는 중국 석학들까지도 찬탄과 경이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의 저술은 19부 22권만이 1천3백년의 장구한 세월을 뚫고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는 소의 두 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집필했다는 저술배경에 일화도 많은 「금강삼매경소」, 원효사상의 중심 개념인「화쟁」을 풀이한「십문화쟁론」 등은 다행이 남아있다. 그리고 원효철학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주는 연구저작으로는 「대승기신론소」를 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대승기신론」는「금강경」「원각경」「능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의 근본경전인 사교과에 속하는 논서이다. 마명의 저작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치않고 산스크리트 원본은 발견되지 않은채 한역본만 유통되고있다. 그 내용은 치밀한 구성, 간결한 문체, 독창적인 철학체계등 모든 면에서 불교문학사상 최대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대승기신론」은 당시 인도에서 대립하고 있던 중관파와 유가파(유식파)의 양대 불교사상을 지향, 화합시켜「진과 속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진속일여),「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아니라」(염정불이)는 사상을 나타낸 논서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는 현실세계(속)에서 깨달음의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수행함으로써 완성된 인격(진)을 이룩할수 있으며,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염오한 단계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진속일여」,「염정불이」의 사상이다.원효는「대승기신론」을 대하자마자 스스로의 삶과 학문의 목표와 너무나 맞아떨어짐에 감명을 받아 기존의 논의에관한 9종의 연구서를 내 놓았다. 그 가운데서 4권(대승기신론소 2권, 대승기신론별기 2권)이 현재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다. 국가나 종파를 초월하여 널리 유포된「대승기신론」에 관해서는 수백여종의 주석서들이 나와있으나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기신론삼소」라 일컫는다. 중국 정영사의 혜원(서기 523∼592)의 주석서인「정영소」, 신라의 원효대사의 주석서인 소위「해동소」, 그리고 중국 화엄학의 대가 법장(서기 643∼712)의「현수소」가 곧 그것이다.
기신론의 3소 중에서도 원효의 「해동소」는 혜원의 「정영소」를 그 내용에 있어 단연 능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기신론」주석의 백미라 일컫는 법장의 「현수소」는「해동소」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대목이 허다하며 원효의 견해를 표현만 바꿔 재정리한 면도 적지가 않다. 요컨대「현수소」는「해동소」가 있어서 비로소 그를 토대로 저술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의 징관이 스승 법장으로부터「해동기신소의」를 배웠다고 증언하고 있음을「송고승전」도 밝히고 있다.
원효는 젊은 시절에 도당유학을 단념하고 국내에 머물었으나 그의 학문과 사상은 국경을 넘어 중국, 일본, 인도로 멀리 세계화되었다.「불출호 지천하」란 노자의 말과 같이 그는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능히 세계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원효는 그러나 교학연구나 관념적인 사상 속에만 머물러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삼국의 통일을 전후하여 소용돌이치는 한 시대를 살았던 그에게는 왕실·귀족불교도 인도해야 할 대상이었고, 더구나 서민 대중과 고통받는 하층민 그리고 정복지역의 유민들도 다같이 뜨겁게 안아야 할 이 땅의 가엾은 중생들이었다. 원효가 과부가 되어 있는 요석궁의 공주와 짧은 인연으로 아들 설총을 낳고, 스스로 승복을 벗어던진 채 小姓居士라 자처한 일은 분명 놀라운 파격이었다. 그러나 이를 겉에 드러난 액면대로 파계나 타락으로 볼 수 있을까? 그 파계의 소생이 한국 유교의 문묘에 배향된 십팔유현중에서도 첫 번째로 모시고 있는 설총이라니 만만치가 않다.
염정불이 진속일여(染淨不二·眞俗一如)는 그의 학문적 이론이자 종교적 실천의 기초이다. 더럽고 깨끗함이 둘이 아니고 진리의 길과 세속의 길이 본래 같다는 이해는, 진리의 근원인 우리들 一心의 통찰에서부터 나온다. 이미 그것을 확연하게 깨달은 원효에게 성(聖)과 속(俗)의 구별은 무의미했을 터이다. 그는 聖과 俗을 一心으로 아우르고 있다. 그렇게함으로써 원효는 더욱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큰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당시의 승려들 대부분이 왕실과 귀족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성내(城內)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효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지방의 촌락이며 시장거리며 뒷골목을 승려가 아닌 세속인의 모습으로 무애가-무애가는 화엄경의 「일체무애인/일도출생사」(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다번에 생사를 벗어 나리로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노래이다.-를 지어부르고 가무와 잡담으로 서민들 사이에 끼어들어 불법을 설법하는 교화작업에 힘썼다. 누가 그런 기이한 행색의 원효를 이 땅에서 가장 뛰어난 학승이며 왕실에서도 존경받는 고승이라 생각했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자신을 한없이 낮춘 자유로운 성자였고 민중의 벗이었다.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 천민, 부랑자, 거지,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그런 원효를 허물없이 따랐다. 그들은 가슴 절절히 와닿는 생기를 얻었으며, 염불을 따라부르며 정토에 때어날 희망을 키우기도 하였다.
원효의 만년에 대해서는 역시 자세한 자료가 없다. 다만 보살행(菩薩行)으로써 민중교화행을 마친 그는 소성거사가 아닌 원효성사로 되돌아가 穴寺에서 생애를 마쳤다는 기록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신문왕 6년(686) 3월 30일의 일이었다.
자주적인 가성인이자 위대한 사상가로서, 성속(聖俗)을 넘나든 자유인이자 민중의 구제자로서 원효는 그의 70년 생애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다가 갔다.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국사상사의 첫 새벽을 환하게 열어 놓은 원효는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 있다.
혜공대사
혜공대사는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가 천진공(天眞公) 집의 노비로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나면서부터 영특하여 부모에게 수고를 끼치지 않고 자랐으며, 2~3세부터 말하기를 배우는데 어른에게 물어 보는 일이 없이 무슨 말이든지 한번 들으면 모두 기억하고, 또 글도 배우지 않았는데 책을 눈으로 보고도 거에 무슨 뜻이 적혀 있다고 설명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부르고 생이지지(生而知之 : 태어나면서부터 전생을 아는 것)하는 어린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래서 천진공도 그 영특하고 지혜가 뛰어남을 보고 놀라워하였다. 어느 날 천진공은 어린 혜공에게 절을 하고, “지존한 성인께서 우리 집에 계신 줄을 모르고 함부로 떠들고 욕설을 하였으니 그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하였다 한다.
혜공은 나이 4~5세가 되면서부터는 친구와 함께 놀기를 싫어하고 낮이면 산에 올라가서 산새를 쳐다보고 앉아서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 일과였고 밤이면 마당에 나가서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이 일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일찍부터 미쳤다고 흉을 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런 어른들이 미쳤지, 내가 미쳤습니까?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 가운데 사람이 제일이니까 ‘위로는 천문을 통하고(상통천문 = 上通天文)’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통달해야(하달지리 = 下達地理)’하고 가운데로는 인륜도덕(人倫道德)을 알아야 하는 것인데 어른이라고 이것을 물어보면 하나도 아는 이가 없으니 어른이 미쳤지 내가 미쳤습니까?”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고 누가 무엇을 물으면 서슴지 않고 시원하게 대답을 잘 하여 주었다. 어쩌다가 서당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에게 배우지도 아니한 주역(周易)의 지리를 말하고 때로는 엉뚱한 질문을 하여 선생을 당황하게 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즉 이러한 천재가 이 세상에 처져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멋대로 살았고 누구에게 제재를 받거나 지배를 받지 아니하였다. 그야말로 고독한 자유인이었다. 대중처소에는 자기를 꺼려했고, 또한 받아들이지도 아니하므로 언제나 조용한 절에서 지냈으며 적적하면 술을 마시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었다. 혜공은 가끔 술이 대취하면 미친 사람처럼 궤짝을 짊어지고 길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서 부궤(負簣)화상이라고 불렀다.
무궁무진한 지식과 맑은 영대(靈臺 : 마음) 때문에 그가 뒤에 항사사(恒沙寺)에 있을 때에는 원효대사가 경소(經疏)를 지으면서 의문이 있으면 혜공, 원효 두 법사가 술병을 차고 냇가로 가서 물고기를 잡아서 안주 삼아 먹으면서 권하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잔뜩 마시다가 대취하여 농담이 나왔다.
“여보 원효, 우리가 명색이 중의 신분으로 물고기를 잡아먹었으니 이거 누가 볼까 두렵구료. 이래서야 원 체통이 되겠소?”
“그렇게 후회하려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그런 말을 하는 거요. 고기를 먹었더라도 산고기를 뺕아 놓으면 그만 아니겠소?”
“그러기야 하겠지만, 원효, 당신에게 내놓을 신통력이 있겠소?”
“그야 해 보면 알겠지만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소?”
“원효, 당신이 산고기를 내놓는다면 나도 자신이 있소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실지로 시험을 하여 봅시다.”
“그럽시다.”
이와 같이 술주정처럼 떠들면서 두 스님은 한 분은 냇물 위쪽에서 대변을 보면서 산고기를 내놓아 펄펄 뛰게 하고 아래쪽에서 대변을 보니 역시 산 고기들이 나와서 펄떡거리며 뛰놀았다. 그리고 두 스님이 내놓은 물고기가 한데 어울려 돌아다니고 있으니 어떤 고기가 원효의 것이고 혜공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스님은 그것을 보고 서로 나의 고기라 하고 희롱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그곳에 절을 지었는데 이 절의 이름을 서로 내 고기라 다투었다는 전설에 의하여 오어사(吾魚寺)라고 하였으니 지금도 경주 땅에 현존하고 있으며 전국 각 사찰에서 이곳에 방생을 하려 신도들과 왕래를 하고 있다.
‘구담공’이 어느 날 산에 갔다가 혜공스님의 시체를 보았는데 시체에는 구더기가 잔뜩 붙어 있었다.
“혜공같은 도인도 이렇게 참혹한 죽음을 하였는가?”
한탄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성중에 들어와서 본즉 혜공대사는 여전히 술에 취하여서 궤를 지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구담공은 깜짝 놀라며, “도인의 형색이란 알 수가 없구나. 죽었다고도 할 수 없고 살았다고도 말할 수 없으니.....,”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본즉 혜공은 한국에 드문 신승(神僧)이라고도 하겠다. 그 뒤에 혜공은 열반을 하였는데 사후에 그의 몸에서는 사리(舍利)가 수없이 나왔다고 한다.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최근에 지었다. 안에는 범종을 비롯해 목어·운판·법고의 사물(四物)이 있다. 범종과 운판은 최근에 조성하였고, 목어와 법고는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한 것이다.
오어사대웅전(大雄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다포식(多包式) 단층 건물로 조선 영조 17년(1741)에 중건하였다. 창호는 꽃살창으로 화려하게 짜 각각 삼분합의 문을 달아 장식을 하였다. 내부의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여 연꽃으로 단청을 하였다. 안에는 석가삼존불좌상을 모시고 머리에는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였다. 불단에는 석가삼존불을 봉안했는데 그 위로는 화려하게 장식된 닫집이 그 위엄을 더하고 있다. 불화로는 후불탱을 비롯하여 삼장탱, 신중탱,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다.
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 어느 곳에도 부처님 같으신 분 없나니
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에도 비교할 분 없네.
世間所有我盡見 세상천지 내가 다 보아도
一切無有如佛子 부처님같이 귀하신 분 다시 없도다.
대웅전 꽃문살
대웅전 불단
연화좌에 결가부좌하여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아미타불을 모신 삼세불(三世佛)이다. 이 삼존은 손가짐만 다를 뿐 상호(相好)와 법의(法衣) 등의 형식이 거의 유사하게 조성되어 있다. 삼존불의 뒤에는 후불탱이 걸려 있으며, 머리 위에는 연꽃봉우리가 조각된 화려한 닫집을 가설하였고 고주(高柱)에는 약간 바랜 불좌상이 그려져 있다.
대웅(大雄)이란 큰 영웅인 석가모니를 이르는 말이다. 큰 힘으로 사마(四魔)를 항복시킨다는 뜻에서 붙여진 부처님의 덕호(德號)에서 유래한 것으로 『법화경』에서 따온 이름이다.
삼성각(三聖閣)
삼성각(三聖閣)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로 최근에 지었다. 내부에는 보통 삼성각에서 모셔지는 칠성탱, 산신탱, 독성탱과 더불어 용왕탱이 봉안되어져 있다.
산령각(山靈閣)
산령각(山靈閣)은 맞배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1칸씩의 규모로 최근에 지은 전각이다. 안에는 1980년에 조성한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응진전(應眞殿)
응진전(應眞殿)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전각이다. 안에는 금동 석가여래삼존좌상과 후불탱을 비롯하여 나한상 16위, 사자상 2위, 장군상 2위 등이 봉안되어 있는데 모두 최근에 조성하였다. 어칸에는 4분합의 문을 달고 협칸에는 벽을 설치하여 창을 달았다. '응진'은 아라한의 음역으로서 마땅히 공양 받을만한 스승이라는 뜻이다. 내부에는 석가삼존불을 비롯하여 나한상들이 봉안되어 있다.
운제산 오어사에 가면 / 윤완수
햇살이 나무 사이로 뛰어 내린다.
빛바랜 단청위로 일렁이는 물빛
그 속살이 맑다.
족히 백년은 넘은직한
이젠 명패도 희미한 백일홍 나무,
벙벙한 파마 머리에 왕관을 얹어
물소리를 자꾸 나무 아래로 떨구고
헤진 목탁소리로 서성이더니
어느새 너의 눈망울에 내 갇혀 있구나.
물 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작은 다리 위로
거꾸로 선 나도 허우적이고
원효암으로 오르는 바위길 옆,
법당 앞의 푸른 향나무 돌탑처럼 서서
줄기에 뒤엉킨 업장을 태우는지
초록 불꽃으로 너울거린다.
얼룩도 태우고 찌꺼기도 태우고
모두 태우고 나면
불현듯 들려오는 계류의 맑은 물소리
한참을 발 담궈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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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관세음보살_()()()_
관세음보살()()() ♡ 행복 주시는 부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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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관세음보살_()()()_
관세음보살()()() ♡ 행복 주시는 부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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