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이중(二重)성! 육신은 정신이 깃드는 집이요 정신의 요술주머니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정신의 장치(裝置)이다. 정신의 발생장치 같은 것이다. 육체 없이는 정신은 없다.
그처럼 귀중한 것이건만 육체는 정신의 감옥이 된다. 육체 때문에 얼마나 정신이 부자유로운 때가 많은가? 육신의 속박! 늙으면 그것을 절감케 된다. 그러나 육신의 감옥을 벗어버리면 정신도 포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신의 종살이를 하면서도 그 장치를 부둥켜안고 오래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육신은 정신의 장치이면서 동시에 감옥이다. 이것이 이중성이다.
나와 우리 형제는 5월 초하루 날에 95세의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는 수년간 노환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감옥을 벗어나는 일이 그토록 어렵고 수고로웠다. 이른바 죽음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요컨대 죽음을 깨닫는 것이다. 무아(無我)를 깨닫는다는 것!
우리는 조상이나 남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맛본다. 전체인 우주를 살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부분은 죽어야 한다. 이것이 존재의 으뜸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다른 대안을 생각할 수 없으며 죽음이 최선의 방안임을 인정하게 된다. 장례를 통해 우리는 ‘나’의 죽음을 앞당겨 맛본다.
進化論과 新創發論
강 병 조
마음이 뇌의 기능이라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유물론을 생각한다. 철학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부수현상론(수반이론)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전체는 부분들의 합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뇌를 전공하지 않은 의사들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뇌와 뇌의 기능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마음이 뇌의 기능이라는 것은 최근 약 20여년 사이에 fMRI나 PET 등 뇌과학의 발달에 의해서 밝혀졌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현상이 뇌의 기능(활동)에 의해서 생기는 현상이라는 창발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무생물들이 여러 가지 조건만 다 갖추어지면 생명체인 단백질로 변하고, 이 단백질이 진화해서 여러 가지 생명체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1000억 개의 뇌의 뉴런들이 100조개의 시냅시스와 <연결>되면서 회로와 네트워크(관계망)를 형성하여 인간의 뇌와 같은 특수한 구조(형태)를 형성하게 되며, 그 뇌가 기능을 하게 되면 마음이라는 현상을 나타낼 수 있다. 이러한 이론을 신창발론이라고 한다. 뉴런은 연결 속에서만 제 기능을 나타낼 수 있다. 고립된 뉴런은 뉴런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 따라서 1000억 개의 뉴런의 합이 뇌의 기능이 아니다. 진화론도 진화하여 신진화론이 대두되었듯이, 뇌과학이 발달된 후에 새롭게 <연결과 관계망>을 중요시하는 창발론을 신창발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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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발론은 진화론의 입장에 서있으며, 마음이니 정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은 뇌가 활동함으로서 창조되어 생기는 뇌의 기능이라고 확실하게 주장한다. 지금은 신창발론이 의학뿐만 아니라 철학 등 여러 분야에서 널리 인정되고 있다.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6년 10월 23일 교황청 아카데미에서“인간이 생명의 초기 형태에서 서서히 발전한 산물이라는 찰스 다윈의 이론이 단순한 가설 이상의 것임을 인정하게 됐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진화론에 꼬리표 하나를 달아두었다. 즉“우리의 몸은 진화된 것을 인정하나 우리의 영혼은 진화된 것이 아니다.”(조선일보 2006년. 10월 23일 자). 가톨릭 내의 진화론 반대주의자들조차“오늘날 가톨릭 지식인들 대부분이 진화를 사실로 믿는다”고 인정했다. 현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위시한 기독교계의 보수 강경파는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오늘날 二元論은 과학과 학문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창조론적 이원론적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졌던 서양 사람들도 지금은 진화론적 일원론적 창발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서양의 기독교는 플라톤의 철학과 데카르트의 사상을 받아들여 서양인들의 사상체계를 형성하였다. 서양철학의 아버지 플라톤은 본질주의자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것이고, 진리는 다른 곳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세상이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하는 합목적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의 사상과 플라톤의 사상은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원론자인 데카르트는 인간의 영혼이 뇌의 송과체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데카르트가 활약하던 시대에는 해부학이 발전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해부학자들은 인간의 뇌를 해부한 결과 도무지 알 수 없는 부분을 하나 발견하였다. 뇌 중간쯤에 있는 송과체란 부분이다. 다른 부분은 좌우 뇌에 짝으로 있는데 송과체는 뇌 복판에 하나만 있다는 것을 전해 들어 알게 된 데카르트는 여기가 영혼의 자리라고 생각하였고, 인간만이 영혼을 가진 존재라고 주장하였다.‘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그런데 얼마 후 도마뱀을 비롯한 온갖 동물에서도 송과체가 발견되었지만, 데카르트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최제천,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 370-371쪽). 실제로 데카르트는 죽은 인간의 뇌도 구경해보지 못한 의학의 문외한이었다.
텍사스대 철학과 승계호 석좌교수는 2007년 6월 석학연속강좌(주최: 대우재단, 조선일보. 주관: 한국학술협회)에서 <마음과 물질의 신비>란 제목으로 新創發論(new emergency theory)을 강의하였다. 서양 현대 철학계에서는 <마음>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독자들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끔 요약문 전체를 여기 옮긴다.
“물리주의의 과격한 지배로 인간의 존엄성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마음은 신체의 무력한 부속물로 진술되는 까닭에 더 이상 신체의 주인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것이‘수반의 교의’이다. 이것은 기존의 부수현상론이나 유물론, 즉 오직 물질만이 진정으로 실재적이라는 믿음이 그 이름을 새로 바꿔 달고 등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새로운 현대판 유물론은 두 가지 신비한 물음을 제기했다. 하나가 인식론적 물음이라면 다른 하나는 존재론적 물음이다. 인식론적 물음은 마음과 물질이 그토록 서로 다른데 어떻게 마음이 물질에 의해 발생하는가 하는 신비와 관련된다. 이러한 신비는 마음과 물질 사이에 존재하는‘설명적 간극’이라 불린다. 존재론적 물음은 정신적 존재자에게는 어떤 것에 작용을 가할 인과적 효력이 전혀 없다는 유물론적 주장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인과적 연쇄는 효력의 연쇄이다. 원인은 결과를 산출할 효력을 가지고 이 결과는 다시 자신의 결과를 산출할 효력을 가진다. 인과적 연쇄가 그 어떤 효력도 지니지 않은 결과를 산출하면서 종결될 수 있다면 그것은 불가해한 것이다. 효력이 전혀 없는 어떤 것이 실존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해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볼 때 효력은 실존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으로 여겨져 왔다. 스피노자(B. Spinoza)가 말했듯이 존재한다는 것은 효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만일 효력이 전혀 없는 어떤 것이 세계에 있다면, 그것은‘효력의 간극’이라고 불려야 한다.‘효력의 간극’과 ‘설명적 간극’이라는 두 가지 신비가 정신적 현상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유기체가 생명 없는 물질에 수반되는 현상으로 여겨진다면 생명 현상에서도 성립한다. 생명과 마음은 효력의 두 간극이다. 비록 그 능력과 수완이 어떤 다른 것보다 더 탁월하다는 점을 흔히들 받아들이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유물론적 세계관이 만들어내는 불가해한 신비이다.
수반 이론은 갈릴레이(G. Gallilei) 물리학의 방법에 따라 서술되어 있다. 이것은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어 전체의 본성을 부분들의 속성과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방법이다. 이것을 가장 훌륭하게 예증하고 있는 것이 입자 물리학이다. 입자 물리학에선 물질을 한층 더 작은 입자들로 분할한다. 그리고 미립자들의 속성을 탐구할 때는 그것들을 고립시킨다. 이것은‘고립의 방법’으로서 생물학의‘연결의 방법’과 대립되는 것이다. 유기체의 세포들은 서로 고립시켜서 탐구할 수 없다. 세포들은 원래가 뒤얽힌 관계망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기능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뉴런에 대해서 성립한다. 개별적으로 고립된 뉴런은 더 이상 뉴런이 아니다. 세포와 뉴런을 탐구하는 데에는 연결의 방법이 필요하다. 그것들이 유기적 기능과 더불어 관찰될 수 있다면, 그것들은 수백만 개의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떤 생물학자들은 세포와 뉴런을 고립의 방법으로 탐구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립된 세포는 오직 인위적으로 고안된 유기적 환경 속에서 그 생명을 유지하는 한에서만 탐구할 수 있다. 전체를 그 부분들로 설명할 수 있을 때 전체는 부분들에 수반된다고 말해진다. 전체의 수반은 전체가 그 부분들로 환원됨을 함축한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세포가 세포들의 관계망 속에서만 기능할 수 있을 때, 이것이야말로 부분들에 대한 전체의 창발이다. 전체는 그 부분들로 환원될 수 없다. 창발은 환원에 저항한다.
철학자들 대부분은 창발론을 사멸한 이론으로 여긴다. 하지만 신(新)창발론은 생명 원리와 같은 창발적 속성들을 언급했던 기존의 창발론과 다르다. 신창발론을 옹호해 온 사람들은 대부분 과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기능과 효력이 대상들 상호간의 연결 속에서 창발한다고 믿는다. 관계망 속에서 연결되어 있는 경우에 세포들이 갖게 되는 새로운 효력과 기능이 그 예이다. 세포들은 고립되거나 무작위적으로 집적되어 있을 때에는 할 수 없던 수많은 일을 할 수가 있다. 이 신창발론자들은 입자물리학과 분자생물학 수준에서 생물학과 심리학 수준에 이르기까지 창발의 수준이 다양함을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선후관계로 이해되는 인과성의 관념을 거부한다. 상위 및 하위 수준의 창발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 속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부분의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인과적 관계는 시간적 선후관계로 한정되어야 한다. 전체와 그 부분들은 동시적인 까닭에 인과관계 속에 존립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하나의 동일한 존재자를 구성하고 있다. 나의 마음과 나의 뇌는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뇌가 마음에 작용한다거나 그 역이 성립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뇌와 마음이 작용한다면 그것들은 하나이기 때문에 함께 작용한다. 뇌와 마음이 어떤 효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들은 하나이므로 함께 그 효력을 가지고 있다. 창발론은 마음과 뇌의 동일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마음이 뇌에 의해 산출된다면, 그 둘은 산출하는 것이 산출되는 것과 같지 않은 까닭에 동일할 수가 없다.
내가 마음과 물질의 관계에 대해 말한 것은 생명과 물질의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유기체의 생명이 그 부분들의 역학적 상호작용에 의해 유지된다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분들의 역학적 상호작용은 그 자체로는 생명을 구성하지 못한다. 동일한 역학적 상호작용이 비유기적 존재자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 미립자들이 하나의 세포 속에서 연결되어 있거나 수백만 개의 세포들이 서로 접속되어 있는 경우 전체의 기능이 그 부분들의 기능과 같아지는 그런 어떤 전체가 창발한다. 부분들의 기능을 역학적 용어로 기술할 수는 있겠지만 역학적 기능이 생물학적 기능은 아니다. 생명의 존립 근거는 세포들의 생물학적 연결이지 역학적 연결이 아니다. 세포 하나 속에 있는 원자들의 작용방식에는 두 가지 차원이, 즉 역학적 차원과 생물학적 차원이 있다. 단백질 접힘 현상이 좋은 예이다. 역학적 용어로 말할 때, 모든 단백질 분자는 아미노산들의 연쇄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역학적 설명으로는 단백질 분자의 생물학적 기능을 설명할 수 없다. 이 기능을 결정하는 것은 단백질 분자의 형태이다. 아미노산들의 연쇄물은 휘감기고 접히면서 특수한 3차원 형태를 이루는데, 바로 이 형태가 특수한 생물학적 기능과 관계하는 것이다. 이 기적적인 단백질 접힘 현상의 작동은 서로 맞물린 분자들의 관계망에 의해 완수된다. 생명의 효력은 이 맞물린 관계망에서 비롯된다. 그런 까닭에 생명의 창발을 유기적 관계망들의 창발로 볼 수 있다.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을 구별할 때조차 역학적 용어로 이를 만족스럽게 진술할 수 없는 것은 양자가 모두 동일한 역학적 법칙을 따르고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있는 개구리와 죽은 개구리를 역학적 규준으로 식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개념은 그 특유의 이해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역학적 이해 방식이라는 개념과는 명확하게 다른 것이다. 전자는 후자로 환원될 수 없다.
생명 없는 물질에서 생명이 출현하거나 뇌에 대해 마음이 발생하는 것으로 창발 현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세포들의 상호연결이 하나의 신체를 만들어내듯 마음들의 상호연결은 하나의 군집을 만들어낸다. 상호연결이라는 동일한 원리가 개별 개미의 신체뿐만 아니라 개미들의 군집까지도 구성한다. 인류를 놓고 보면 창발은 문화를 만들어낸다. 창발론은 물질이 그 잠재력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생명은 생명 없는 물질에 우연히 수반되는 속성이 아니다. 반대로 생명은 자기 본성의 심층에서 창발한다. 마음과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은 오직 물질의 심층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 및 제휴의 효력을 보여줄 뿐이다. 따라서 물질은 호일(F. Hoyle)이 말한 지능적 우주를 따라 지능적 물질이라 불릴 수 있다. 지능적 물질이라는 이러한 관념은 스피노자와 괴테가 주장한 적이 있다.”
승계호 교수님의 신창발론을 들으면서 필자는 석가모니가 말씀하신 緣起를 떠올렸다. 모든 뇌의 조건(緣)이 갖추어지면 정신이란 현상이 창발된다(起)는 말씀은 석가모니의 연기론을 현대적 철학적 단어로 설명한 것이란 생각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신창발론은 신진화론의 이론과도 같으며, Gerald Edelman이 주장하는 神經다윈주의와도 같다고 생각되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몇 년 전 도올 김용옥 교수와의 TV대담에서 진화론을 부정하고‘우연히 생길 수 없다. 신이 계획한 대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러나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면 새로운 것이 창발된다는 이론은 새로운 것이 창조된다는 이론인 것이다.
조선일보 2007년 6월 9일자 신문에‘미생물 창조에 나선 인간’이란 제목의 과학기사가 재미있었다.
참고문헌: 최재천: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 궁리출판. 서울 2007년.
조선일보. 1996년 11월 23일자
승계호: 마음과 물질의 신비(강연 초록집. 2007 제9회 석학연속강좌.
주최: 대우재단. 조선일보. 주관: 한국학술협의회. 2007년 6월 1일)
Gerald Edelman( 황희숙 역):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 (주)범양사 출판부. 서울. 1998년
당시(唐詩) 감상
장 기 홍
금년은 구스타프 말러의 ‘大地의 노래’ 작곡 100주년이다. 이태백의 채련곡(연꽃 따는 노래)이 ‘大地의 노래’의 한 가사가 되어 있기로 여기에 그것을 감상해본다.
埰蓮曲(채련곡, ‘연꽃 따기 노래’) 이태백
若耶溪傍埰蓮女(약야계방채련녀) 약야계(若耶溪) 냇가에 연꽃 따는 처녀들
笑隔荷花共人語(소격하화공인어) 꽃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말한다
日照新粧水底明(일조신장수저명) 새 단장한 얼굴은 햇빛을 받아 물 속에 비치고
風飄香袖空中擧(풍표향수공중거) 바람은 향내 나는 옷소매를 공중으로 펄럭이는데
岸上誰家游冶郞(안상수가유야랑) 강둑에는 뉘 집 귀공자들인가
三三五五映垂楊(삼삼오오영수양) 삼삼오오 노는 것이 수양버들 가지 사이에 어린다
紫騮시入洛花去(자류시입낙화거) 붉은 명마가 洛花를 밟으며 울며 달리니
見此躊躇空斷腸(견차주저공단장) 그들 보며 일 손 잡히지 않고 공연히 창자를 끊듯 애만 탄다.
若耶溪는 중국 절강성에 있는 강이다. 옛날 서시(西施)라는 미인이 이 강가에서 연꽃을 땄다 한다. 이태백은 강가에서 西施를 연상했으리라. 그녀는 월(越)나라 미인으로, 오(吳)나라를 망치기 위해 오왕 夫差(부차)에게 바쳐졌고 그래서 오는 멸망했다. [소주(蘇州)에 가면 오(吳)왕 궐여의 무덤이 있다. 공자가 생존하던 춘추시대의 오나라이다.]
游冶郞(유야랑)은 놈팡이 혹은 풍류객이다. 가문 덕분으로 저절로 벼슬을 하게 되는 양가집 자식들이다. 그들과 연애라도 해보았으면 해서 아가씨들은 애간장이 탄다는 것을 단장(斷腸)이라 표현했다.
작곡가 말러는 단순히 청춘남녀가 즐거이 노는 지상(地上)의 자연(自然)을 노래했다.
남녀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던 시인의 마음을 좀 더 감상해보자. 수양버들 가지 사이로 총각들이 지나가는 양이, 그리고 말을 달리는 양이, 말발굽 아래 낙화(洛花)가 밟히는 양이 모두가 마치 주마등(走馬燈) 같은 세상사(世上事)다. 덧없는 현상계를 보며 시인은 상심(傷心)해 하고 있음이 아닌가?
다음에 당시(唐詩) 두 편을 더 감상해보겠는데, “OO樓에 올라”라는 제목의 한시들이다. 하나는 최호(崔顥, 704-754)의 것이고 하나는 이백(701-762)의 것인데 두 시가 다 “사인수(使人愁, 나로 하여금 근심케 한다)”로 끝난다. 이 구절에 포인트가 있다.
등황학루(登黃鶴樓, 황학루에 올라) 崔顥(최호)
昔人已乘黃鶴去(석인이승황학거) 옛사람 이미 황학 타고 가버리고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그 땅엔 빈 황학루만 남았다
黃鶴一去不復返(황학일거불부반) 한번 간 황학은 돌아오지 않고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긴긴 세월 동안 흰 구름만 유유하다
晴川歷歷漢陽樹(청천력력한양수) 날 맑으니 강과 한양의 숲이 환하다
春草萋萋鸚鵡洲(춘초처처앵무주) 봄풀 우거진 앵무주도 보인다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날은 저무는데 내 고향은 어디쯤인가?
煙波江上使人愁(연파강상사인수) 강 위에 연기가 나를 수심에 잠기게 한다.
여러해 전 나는 무한(武漢, 현지 음으로 ‘우한’이다.)에 갔다가 황학루에 올라 보았다. 무한은 무창과 한양 두 시(市)를 합한 도시이다. 황학루는 시에 있듯이 옛날 누런 학이 머물었다는 큰 누각(樓閣)인데 무창(武昌)의 높은 언덕에 솟아 있다. 누에 오르면 발아래 양자강이 도도히 흐르고 강 건너 한양(漢陽)이 보인다.
시인은 누대(樓臺)에 올라 양자강(현지에서는 長江이라 한다)의 흐름과 하늘의 뜬 구름을 보았다. 날이 저무니 집 생각이 났다. 고향은 멀어서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저녁때가 되어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니 집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그리하여 시인은 수심에 잠긴다.
이태백은 황학루에 올라 최호의 등황학루(登黃鶴樓)를 읽고 감탄하여, 황학루에 대하여는 시작(詩作)을 단념했다. 그 대신 그는 옛 오(吳)나라와 진(晋)나라 땅이던 금릉(지금의 남경)으로 가서 봉황대에 올라 다음 시를 지었다.
登金陵鳳凰臺(등금릉봉황대) 李白(혹은 이태백)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 봉황대 위에 봉황이 놀더니
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류) 봉황 가고 누대 비고 강물 절로 흐른다
吳宮花草埋幽徑(오궁화초매유경) 吳나라 궁전의 화초는 우거진 오솔길에 묻혔고
晋代衣冠成古丘(진대의관성고구) 晋 때의 衣冠의 주인공들이 언덕을 이루었는데
三山半落靑天外(삼산반락청천외) 三山은 푸른 하늘 밖에 반쯤 떨어졌고
二水中分白鷺洲(이수중분백로주) 二水는 백로주로 둘로 갈라졌다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 도무지 뜬 구름이 해를 가리어서
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 장안이 안 보여 나로 수심케 한다.
봉황은 상상의 새이므로 ‘봉황이 놀았다’거나 ‘놀더니 떠났다’ 함도 상상일 뿐이다. 누대 아래 강물이 절로 흐르듯이 다 떠나고 다 변천한다.
이태백(이백, 701-762)이 살던 당나라 때에는 지금의 남경을 金陵(금릉)이라 불렀다. 옛날 서기 250년을 전후(前後)한 삼국시대(吳, 蜀, 魏)의 吳나라다. 오궁(吳宮)이란 남경에 있던 吳의 대제(大帝) 손권의 궁전이다. 吳宮花草埋幽徑은 “궁전의 무성하던 꽃밭은 지금은 잡초가 우거지고 겨우 오솔길이 있다”는 뜻이다.
삼국시대가 지나고 진(晋, 후에 西晋이라 부르게 된다)이 일시 중국을 통일하나 이어 남중국만이 동진(東晋)이 된다. [북중국은 ‘오호(五胡)십륙국.’] 남경은 동진의 제도(帝都, 제국 수도)이다. 그래서 이백은 동진 때 일도 연상한다. 晋代衣冠成古丘는 “당시의 고관들의 시체가 쌓인 공동묘지의 언덕이 되었다”는 뜻이다.
누대에 올라 보니 온 경치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구름은 해를 가리고 뜬 구름 때문에 장안이 보이지 않는다. 장안은 당시의 수도, 지금의 서안(西安)이다. ‘해’는 황제요 ‘장안이 보이지 않는다’ 함은 간신들이 황제의 눈을 어둡게 하여 정치가 엉망이라고 시인의 불평을 한다.
춘추시대의 오나라 땅, 그리고 700년 후 삼국시대의 오나라 땅, 그리고 그 후 동진의 수도가 된 이 땅(남경)에 서서 시인은 당시의 수도 장안도 세월이 지난 뒤에는 허무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뜬 구름 같은 세월이 흐른 뒤 장안은 어떤 모습일까?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공(空)이다! 허무하지 않은가. 그러니 “존재란 무엇인가?” 다 뜬 구름 같다. 그래서 시인은 수심(愁心)에 싸였던 것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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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지 시 항 : 2008년 5월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