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의 기능성과 약리활성
徐 榮 俊
◎ 1981년 서울대 약대 제약학과 졸업
◎ 1983년 서울대 대학원 석사학위
◎ 1990년 美위스콘신대 박사학위
◎ 1990∼1992년 美MIT대 박사후 연구원
◎ 1992∼1995년 美예일대 의대 조교수
◎ 현재 서울대 약대 약학과 교수
최근 고추가 다이어트 식품으로 알려지면서 젊은 여성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일본에서는 여성들이 아예 고춧가루나 고추장을 몸에 휴대하며 음식에 뿌려먹는 유행을 낳기도 했다. 흔히들 고추는 강한 매운 맛 때문에 입맛을 돋구며, 지나치게 섭취하면 위장에 큰 해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徐榮俊교수를 포함한 여러 학자들이 최근 고추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발표하면서 고추가 특정 질병에 대한 예방효과 및 간암 억제기능이 있음을 입증했다. 이에 徐교수로부터 고추에 대한 다양한 기능과 효과에 대해 들어보았다.
가지과(Solanaceae)의 초본식물인 고추는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향신료이다. 고초, 당초, 번초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학명은 Capsicum annuum이다. 고추는 고온성 작물로서 우리 나라의 경우, 주로 중부 이남지역에서 재배된다. 인구기준 소비량을 볼 때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고추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중의 하나로서, 국민 1인당 하루 5.1g, 연간 약 2∼4㎏의 고추를 소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볼리비아를 포함한 열대 남미지역이 고추의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7천년 경 멕시코인들이 야생종 고추를 먹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페루에서는 기원전 2천5백년부터 고추가 재배되었다는 화석 증거가 남아 있다. 콜럼버스(Columbus)에 의해 유럽으로 전해진 고추는 스페인, 포르투갈 등을 거쳐 중부 유럽 국가들로 전파되었으며, 서기 1천5백년 경 필리핀을 거쳐 인도, 동남 아시아와 중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오렌지보다 비타민C 많아
우리 나라에 도입된 경로와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광해군 6년(1614 년) 이수광이 저술한 「지봉유설」에 고추를 남만초(南蠻椒)라 칭하고 있고, 일본에서 도입되었으니 이를 왜개자(倭芥子)라고도 부르며 간혹 이를 심고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대략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된다. 한국에 들어온 내력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인들을 독한 고추로 독살하려고 가져왔으나, 오히려 한민족의 체질에 맞아 이후 우리 민족이 고추를 즐기게 되었다는 재미있는 설도 있다.
한편 일본의 여러 문헌에는 고추가 우리 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한다.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에 왔던 풍신수길이 조선에서 고추 종자를 가져왔기 때문에 이를 고려호초라 한다고 「대화본추(1907)」에 기록되어 있다. 민간에서는 장을 담근 뒤 항아리 속에 붉은 고추를 집어넣기도 하며, 아들을 낳으면 새끼줄에 붉은 고추와 숯을 걸어 악귀를 쫓았다.
단순히 음식에 맛과 향을 더하고 미각을 돋구는 기능 외에도 고추는 한방에서 발한, 건위, 구충제로 이용되며, 양방에서는 신경통, 류머티스, 기관지염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겨울철 먼길을 떠날 때 양말이나 신발 속에 고춧가루를 넣어 동상을 예방하기도 했다.
고추는 비타민 A와 C가 풍부한 건강식품이다. 실제로 고추에는 오렌지나 레몬보다 많은 양의 비타민 C가 함유되어 있으며, 당근만큼이나 비타민 A가 듬뿍 들어 있다. 만일 고추를 싣고 유럽으로 향하던 콜럼버스가 고추에 비타민 C가 풍부함을 진작 알았더라면, 과일섭취 부족으로 인해 항해도중 선원들이 괴혈병(scurvy:비타민 C부족으로 결합조직이 약화되고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기게 되는 질병)에 걸려 죽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크림은 통증완화 효과 월등
고추의 독특한 매운 맛은 캅사이신(capsaicin)이라는 알칼로이드 화합물 때문이다. 고추의 종류와 경작 조건에 따라 캅사이신의 함유량은 0.1%에서 1%범위 안에서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캅사이신은 고추씨에 가장 많이 함유되어 있으며, 껍질에도 상당량 들어 있다. 캅사이신은 고추의 이차 대사산물로서, 고추의 발육에는 별상관이 없는 물질이나 다른 식물, 동물들로부터 고추를 보호하고 그 씨를 퍼뜨려 종자의 번식을 도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육상 포유동물들은 캅사이신의 자극성을 감지할 수 있지만 새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해 고추를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으며, 그 결과 고추씨가 이들의 배설물에 섞여 멀리 전파될 수 있는 것이다. 남미원산의 고추가 멀리 떨어진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지역에서도 자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로 생각된다.
한편 캅사이신은 소화액의 분비를 촉진하고 미각을 자극함으로써 함께 섭취하는 다른 음식들의 풍미를 향상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학설도 있다. 캅사이신을 용액으로 만들어 피부에 문지르면 마치 불에 덴 것과 같은 기계적 자극을 느끼는데, 이는 통증 전달물질인 「Substance P」가 순간적으로 유리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캅사이신은 신경말단에서 방출된 「Substance P」를 고갈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이후의 자극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상태를 초래한다. 캅사이신의 이러한 약리학적 성질을 근거로 이 화합물이 함유된 연고가 진통제로 개발되어 OTC 의약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캅사이신 크림제는 당뇨성 신경통, 류마티스성 관절염, 대상포진, 수술 후 통증을 완화시키는데 사용되고 있다.
일찍이 페루사람들은 고추의 분말을 관절염 부위에 발라 사용해왔으며, 기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고추는 민간요법에서 통증을 멈추는데 널리 사용되어 왔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전통의학, 과학적 이론과 실험적 결과를 근거로 한 현대의학의 접목에 의해 「Zostrix」, 「ToppSation」, 「Axsain」, 「Capzacin P」 등의 상품명으로 고추크림들이 시판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제제들은 대게 0.25% 또는 0.75% 함량의 캅사이신을 주성분으로 한다.
최근에 고추가 다이어트 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한동안 고추다이어트 열풍이 불어 닥쳤던 일본열도에서는, 고추를 입에 물고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여성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고추는 신체의 에너지 대사를 항진시키고 동시에 지방의 생합성을 억제함으로써 비만 예방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동물 실험 결과, 고지방 식이(食餌)에 고추를 첨가한 사료를 섭취한 쥐들은 고지방 식이만 섭취한 군에 비해 체중증가가 현저히 줄었으며, 혈중 콜레스테롤양도 낮았다. 캅사이신의 경우도 체지방을 줄여 체중 감량에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최근 국내 및 일본의 과학자들에 의해 보고되고 있다. 이밖에도 고추가 피부미용을 위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여성들은 「파프리카」라 불리는 붉은 고추의 분말을 욕조에 풀어 넣고 목욕을 했다 한다. 최근 국내에서 1회용 티백에 담긴 고추 차까지 등장했으니, 바야흐로 고추의 전성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나 싶다.
흔히 자극성이 있는 매운 음식의 섭취가 위 점막을 손상시켜 만성 위염의 원인이 되고, 결과음식을 일상생활에서 별로 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와 마찬가지로 위암발생률이 높은 것을 보면 매운 음식을 위암발생의 위험인자로 보기는 어렵다.
일반인들의 잘못된 편견이나 속설과는 달리, 상용량으로 섭취하는 고추는 위 점막을 손상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위궤양의 발생을 억제하거나 이미 생긴 궤양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 고추는 위액 분비를 촉진하는 한편 과도한 위산분비는 억제한다. 한편 고추추출물과 그 매운 성분인 캅사이신을 쥐에 투여했을 때, 아스피린이나 알코올로 유도된 위 점막 손상에 대해 보호효과를 나타내었다.
비록 동물실험 결과이기는 하지만, 캅사이신의 위궤양 보호효과는 기존의 궤양치료제인 시메티딘(cimetidine)에 버금가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화학적으로 유도된 궤양 외에도 헬리코박터에 의한 위 점막 손상도 고추에 의해 예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캅사이신이 배양된 헬리코박터의 증식을 억제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다이어트·궤양억제 기능도
고추 섭취가 상대적으로 많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인들에서는 다른 남방민족들보다 위암이나 대장암의 발생률이 훨씬 낮은데, 이는 고추의 캅사이신이 위장관 운동을 촉진하고 위 점막을 방어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반대로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에서 높은 비율로 위궤양이 발생하는 것은 아마도 이들이 앞서 언급한 싱가포르 내 타 인종들에 비해 고추소비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멕시코와 같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도, 매운 고추의 섭취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위암의 빈도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이와 더불어 고추의 소비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미국에서 위암의 빈도가 증가하는 경향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이상의 결과들을 종합해볼 때, 매운 음식의 섭취와 한국인의 높은 위암 발생률이 관계가 깊다는 속설은 재고되어야 하며, 오히려 캅사이신의 위장관 보호 효과에 대한 보다 과학적인 조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민족과 마찬가지로 매운 음식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멕시코에서 실시된 역학조사 결과도 고추 섭취량과 위암발생과는 별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음식의 세계화 가능성
실험동물을 이용한 몇몇 연구에서, 고추 엑기스 및 캅사이신을 처리한 군이 대조군에 비해 종양발생의 빈도가 증가한 결과를 보인 경우도 있으나, 이러한 동물실험 결과가 사람에 있어서의 고추의 발암성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는 되지 못한다. 최근의 연구 결과들은 오히려 고추나 캅사이신이 발암억제제 또는 항암제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캅사이신은 항산화, 염증 억제 작용을 나타냄으로써 조직의 산화적 손상을 막고 종양 촉진이나 진행을 억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부분의 발암성 화학물질들은 우리 몸에 들어와 간에서 대사되어 반응성이 높은 중간체로 활성화된 후 표적세포의 DNA를 공격함으로써 암화 과정을 개시하는데, 캅사이신은 발암원 물질들의 대사활성화를 억제함으로써 발암과정을 억제한다. 필자의 연구실에서 수행한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하면, 캅사이신은 위에서 생성되는 대표적 발암물질인 나이트로소아민의 돌연변이성을 억제하고, 한편 암세포에 처리시 아폽토시스를 통한 암세포의 자살을 유도함으로써 항암 작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고추는 한국국민의 음식문화를 대표하는 김치와 고추장을 담그는데 가장 필수적인 향신료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식품을 의약품처럼, 의약품은 식품처럼(Let food be your medicine, medicine be your food)』이라고 했다. 고추의 기능성과 약리활성을 과학적 방법으로 검증하고 그 결과를 적극적으로 홍보함으로써 우리 조상의 지혜가 담긴 전통식품을 산업화하고 더 나아가 세계화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고추에 들어있는 캅사이신을 비롯한 각종 화합물들의 생리활성 및 약리작용을 세포 및 분자수준에서 규명함으로써 신약 후보물질들의 도출에도 일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