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한 내용과 뛰어난 문학적 가치로 사랑받고 있는 그리스 신화 이야기는 누구나 한두가지쯤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세이렌(seiren) 자매의 이야기는 흥미롭기만 하다. 요괴 자매가 사는 곳을 배들이 지나갈 때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홀려 암초투성이의 섬으로 다가오도록 해서, 결국 목숨을 잃게 만든다는 내용이다.
세이렌은 아름다운 외모와 풍부한 상반신, 고운 피부를 가졌는데 또 다른 매력이 아름다운 노랫소리다. 세이렌 자매가 연주하는 키티라와 피리, 노래의 하모니는 마법의 소리이자 누구든 정신을 잃고 황홀경에 빠져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장송곡이었다. 경보를 뜻하는 영어 단어 ‘사이렌(siren)’은 그리스 신화의 ‘죽음을 알리는 소리’에서 비롯돼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목숨까지 앗아갈 만큼 매혹적이었던 세이렌의 목소리는 과연 어땠을까?
세이렌이 반인반수 요괴였다는 점으로 생각해보면 발성과 공명기관은 인간보다는 새에 가까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새의 선조인 양서류의 성대는 숨을 쉬기 위한 개폐 기능만 갖고 있다가 파충류로 진화하면서 약 8주 정도 된 태아의 성대와 비슷한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후 조류와 포유류의 성대는 호흡 뿐만 아니라 소리를 낼 수 있는 기관으로 발달했다. 즉, 새들은 진화 과정에서 독특한 소리와 멜로디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새들은 넓은 범위의 주파수를 만들어내며 빠르게 성도의 길이를 변화시켜 소리의 높낮이를 만든다. 이렇게 만든 소리는 4만~ 7만5000Hz의 주파수와 높은 공명도를 갖게 된다. 공명이 심한 2500~3000Hz의 소리는 사람 뇌 속의 감성 중추인 대뇌변연계를 자극해 성적 흥분과 함께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성악가의 노래 또한 이와 비슷한 주파수를 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황홀경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소리로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대뇌변연계를 자극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흔히 뇌를 하나의 덩어리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3개의 서로 다른 뇌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뇌간이다. 이 뇌는 생명 유지장치의 뇌로 가장 많은 신경세포를 포함하고 있으며, 배고픔, 체온 조절, 조건 반사 등 생존과 관련된 기능을 조절하는 부분으로 대뇌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다. 두 번째 뇌는 대뇌변연계다. 이 뇌는 생존 전략을 조절하고 원초적 본능에 작용한다. 열정, 공포, 생체리듬과 같은 모든 감정적 양상을 유발하기도 한다. 대뇌변연계는 후각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소리와 연관된 기억이나 상황에 자극되어 본능적인 행동을 유발한다. 세 번째 뇌는 인간의 뇌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대뇌피질로, 음성 및 목소리와 신체 행동을 조절해 명령을 내리는 사령탑 역할을 한다.
특정 고주파수 영역대의 공명이 깊은 목소리는 대뇌변연계를 직접 자극하는데, 이때의 자극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성적 욕구와 함께 감정적 몰입을 유발시킨다. 사람의 귀는 1000~2000Hz의 소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오페라 가수의 공명 깊은 소리는 2000~3000Hz수준이다. 이 소리가 고막을 울리고 중간귀를 거쳐 청각기관인 와우각으로 전달된다. 전달된 소리 신호는 청각신경을 통해 대뇌변연계를 자극한다. 대뇌변연계는 감정을 통제하는 감성중추와 연결되어 있어 결국 오페라 가수의 목소리는 감성중추를 자극한다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의 애교 섞인 목소리나 매력 넘치는 목소리 또한 고음역에 속한다. 본능적으로 감정적인 변화가 생기면 이 신호가 대뇌변연계를 거쳐 시상에 전달되고, 다시 목소리를 생성하는 미주신경을 통해 성대와 후두근육을 조절해 상대방을 유혹하거나 사랑을 속삭일 때 나오는 높은 주파수의 목소리를 만드는 것이다.
세이렌의 목소리 또한 새들의 발성기관에서 나오는 높은 음역대의 소리와 유사한 것이었다고 보면 왜 선원들이 그 매혹적인 목소리에 유혹되어 황홀경에 빠지게 되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게 된다. 사람을 유혹하는 천상의 목소리는 결국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고주파의 비밀에서 온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예송이비인후과] 김형태 원장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