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 날짜 : 2024년 2월 26일(월)
민영환 집터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57 (견지동 38-2)
조계사 일주문 오른쪽 보도 녹지
표석 글 :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이에 분격하여 자결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 집 터(조계사 경내)
원래 지금의 조계사 자리는 1910년 한일합방에 비분강개해 순국 자살한 충정공 민영환이 살던 집이었다
(이전의 집 주인은 순조의 장인이었던 영안부원군 김조순이 이었다)
그 집은 조부 판돈녕부사 민치구의 저택을 민영환의 아버지 민겸호가 더욱 크게 지은 것으로 지금의 조계사와 수송공원에 걸쳐 있었다
민영환이 죽은 후 수송동 집은 매물로 나왔다
그러자 1894년 갑오개혁의 영향으로 서울 한양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돼 사대문 안 출입이 자유로워진 승려들이 도성 내 사찰 건립 부지로서 민영환의 집을 매입했다
북한산 승려들이 주축이 된 건립 주체들은 일찌기 도성 내 사찰건립 계획을 세우고 불교도의 성금으로써 옛 원각사 자리의 매입을 시도했으나, 이미 그곳은 미국인 브라운이 설계한 공원(탑골공원)의 부지로 내정돼 있었던 바, 민영환의 집과 동녕위궁을 매입해 1910년 각황사(覺皇寺)를 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한일합방 후 각황사는 조선불교를 지배하려는 일본 불교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되었으니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가 원종 고문이라는 최고위 자리에 올랐다
이에 한용운 등의 승려가 민족불교 중흥을 외치며 각황사 옆에 태고사(太古寺)라는 절을 세워 한국불교의 총본산으로 삼고자 했는데, 이때 마침 전북 정읍의 보천교 십일전이 경매 물건으로 나왔던 바,(1938년) 이를 구입해 태고사로 이축한 것이 조계사(曹溪寺) 대웅전이다
일부는 민영환이 죽은 뒤 상업은행 두취(頭取 - 은행장)였던 조진태가 잠깐 소유하였으나 이후에는 조선식산은행에 넘어가 비워지게 되었다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1930년대 들어서며 폐가처럼 변했다
♤ 민영환 자결 터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5길 41, 공평동 1)
참정대신·외무대신을 역임하고 다시 시종무관장이 되었고 같은 해(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원임의정대신 조병세를 대표로 백관(百官)들과 상소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비답(批答)이 있기도 전에 일본 헌병에 의해 조병세는 구금되고 백관들이 해산 당하자 자신이 대표가 되어 다시 백관들을 거느리고 두 차례나 상소를 올리고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알고 11월 30일 새벽 6시 전동(典洞) 자기집 청기지인 이완식의 집(현 공평동2번지)에서 국민과 외교사절, 고종황제 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 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喆),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아버지 민겸호(閔謙鎬)는 선혜청 제조 겸 병조판서로 재직 중 1881년 4월 일본 육군소위 호리모도(堀本禮造)를 초빙해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했다
그러나 차별대우 받던 구식 군인의 급료 지급을 미루다가 14개월만에 지급했는데 모래섞인 쌀을 급여로 지급하여 군인들의 불만을 야기, 임오군란 때 난병에 의해 살해되었다
♤ 명함에 쓰여진 민영환의 유서
민영환은 자결하기 전에 총 3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한 통은 2천만 동포에게 고하는 유서였고(명함)
다른 한 통은 미국공사관에 있는 친지(親知: 서로 잘 알고 친근하게 지내는 사람)에게 보내는 유서었으며(두루마리)
마지막 한 통은 고종황제에게 올리는 유서였다
(고종 황제에게 올린 유서는 제대로 보존이 안 되었는지 안타깝게도 현재 실물은 물론 그 내용마저 전해지지 못한 실정이다)
민영환이 사망한 직후 선혈이 낭자했던 그의 의복과 단도는 따로 수습돼 민영환의 자택 내 침실 뒤의 협실에 보관되었다
그런데 약 8개월 뒤인 1906년 7월,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민영환의 의복과 단도를 보관했던 그 협실의 마룻바닥에서 대나무 4줄기가 돋아난 것이다
민영환이 자결한 곳은 조계사 경내에 있는 자택이었다는 설과 의관 이완식의 집이었다는 설로 나뉜다
현재는 이완식의 집이라는 것이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거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