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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4월18일 화요일 [(백)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수도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한 돌아섬과 부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2,36-41
† 복음 요한 20,11-18
◈ 오늘의 묵상
마리아 막달레나의 눈물은 사랑과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인류의 죄악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갈 때, 막지 못한 회한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러한 눈물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도록 그녀의 영혼을
준비시켰습니다.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게
만들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그분의 영광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였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을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영광과 은총을 놓치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막달레나가 제자들에게 달려가 ‘주님을 뵈었다.’고 외치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가 사랑으로 가득 차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듯이 우리의 마음도 죽음을 초월하는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삶의 무게를 견디게 하는 사랑이 우리의 영혼 안에 넘칠 때,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우리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분에 대한 사랑이 우리 안에
넘칠 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우리의 사랑으로
2017년 가해 4월18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제1독서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36-41
복음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1-18
늘 아내의 말을 듣고 따라주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당신이
틀렸어요.”라고 말하면, 자신이 분명히 맞는데도 불구하고 “알았어.”
라고 말하면서 아내의 말을 따르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내가 잘못한 것을 알면서도 왜 자꾸 나한테 져주는 거야?”
남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내 사람인데, 내가 당신과 싸워 이겨서 뭐해? 내가 당신과 싸워
이기면 당신을 잃는 것이고, 당신을 잃으면 진 것과 마찬가지야.”
남편의 지는 이유를 다시금 새겨 봅니다. 자신의 말이 맞는데도
상대방에게 지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이기는 대상이 아니라 져 줄 수도 있는 이해해 줄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이기는 것에만 집중하다보니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투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상대방에게 이기려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상대방이 분명히 틀렸는데 고집을 꺾지 않아서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틀린 것만이 가득한 사람을,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면서 헤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이해하는 것이고, 사랑을
위해서는 무조건 져 줄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당시의 죄인들처럼 큰 죄를 지어서 어쩔 수 없이 십자가 죽음을 당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힘을 갖고 계셨고,
주님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이 틀렸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셨던 것은 사랑을 위해 우리들에게 져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모범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리아에게 배웁니다. 그녀는 제자들이 무덤
안을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남아 있었다. 마리아의 사랑은
그녀가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했고 다시 한 번 무덤 안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모두가 등을 돌려서 떠날 때에도 다시 바라보고 다시
돌아보는 사랑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그 결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했지요.
그러나 조금씩 당신을 드러내 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결국 마리아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참 많이 이야기하고 또 듣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그리고 마리아가 보여
주신 사랑을 바로 우리의 사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은 타인에게 얽매여 있다. 타인을 사랑하는데 인생의 반을
소모하고, 나머지 반은 타인을 비난하는데 소모한다.(주베르)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성당. 특히하게 제대가 배 모양입니다.
즐거움은 여기에
“현재가 즐겁지 않다면 그 어느 곳에도 즐거움은 없다. 하던 일을
바꾼다 한들 새로움은 잠시뿐, 기대감은 또다시 실망으로 변한다. 다른
곳을 향한 시선을 거두어 여기를 주목하라. 즐거움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생의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보낸
정약용 선생님이지요. 많은 제약이 있는 곳이지만 그 안에서 특히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을 찾았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면 즐거울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즐거움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고통과
시련 옆에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는 즐거움을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구매하기 위해서 시장을 돌아다니면 어떻습니까? 구매하기
위한 물건만을 생각하고 바라보려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찾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도저히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물어서라도 찾으려고 합니다. 즐거움 역시 내가 보려고
하면 분명히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찾을 수 없다면 다른 이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분명히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카페에서 본 예쁜 장식품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한 돌아섬과 부름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4월18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요한 20,11-18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요한 20,16)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한 돌아섬과 부름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시신까지
도둑질 당했다고 생각하여, 무덤 밖에서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깊은 슬픔에 잠겨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수석사제들과 원로들과 군중들이 만든 죽음의 틀인, 무덤 안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님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여전히 무덤 속에 시선을 두고, 자신의 감각으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20,13). 그런데 ‘뒤로 돌아서자’(20,14), 예수님께서
거기 서 계셨습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무덤 밖에
계십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려면, 내가 바라보는 시선을 완전히 바꿔야 하고,
추구하는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향해야만 합니다.
여전히 자신의 사고에 머물러 있던 마리아는, 바로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20,15) 하고 물으시면서, 눈을 뜨도록
준비시켜주십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 당황스러워하며, 불안 속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20,15).
예수님께 얼굴을 돌렸던(20,14) 마리아는, 두려움 때문에 다시
자신에게 눈길을 거둬들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예수님께서
“마리아야!”(20,16) 하고 부르시자, 그제서야 그녀는 ‘돌아서서’,
예수님께 ‘스승님’ 하고 부릅니다(20,16). 첫 번째 돌아섬과 달리 이 두
번째 돌아섬은, 전인격적인 방향전환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덤이라는 공간과 만질 수 있는 몸의 형상에서 벗어나 완전한
방향전환을 이룬 마리아는, 그제야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부르고 찾는 이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시고, 친구이자 주인으로서 인사를 건넴으로써, 신뢰와 사랑에 찬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자꾸만
주님으로부터 멀어져, 죄악의 어둠에 떨어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로
얼굴을 돌려야 합니다. 죽음의 틀인 무덤과,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몸이라는 한계 속에서만 주님을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해서 죽으신 주님께서는, 죽음 안에 갇혀 계시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요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려면, 나를 사랑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인격적인
초대에 의해, 세상의 원칙과 기준을 뛰어넘는 새로운 관계와 지평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사랑이신 분을 사랑으로 불러야 합니다.
사랑만이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그분을 붙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기쁨을, 나만의 것으로 소유하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부활 신앙은 소유와 욕망의 대상이나
결과일 수 없으며, 함께 나누어져야 할 사랑이요 기쁨인 까닭입니다.
오늘도 물질세계와 감각의 차원에서 떠나 영의 눈을 뜨고,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도록 해야겠습니다. 나의 애착과
소유와 이기심의 자리에서 돌아서서, 죽여도 죽여지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나눔으로써, 영원의 사랑을 노래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마리아야!"(요한 20,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4월18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마리아야!"(요한 20, 16)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중한 이름을 불러주는 거기에 정녕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예수라는 이름이 진실로
우리가운데 되살아 나셨습니다.
아낌없이 사랑한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서로의 이름을 통해 함께 걸어온 시간또한 되살아납니다.
마음을 여는 첫시작은 서로의 이름을 온마음으로 불러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실 때 우리는 되살아납니다.
우리의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됩니다.
서로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 부활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건네는 한마디 한마디의 이름과 말씀이
서로를 살리는 부활의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이름을 불러주는 마음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게됩니다.
존중받아야 할 우리의 이름 우리의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여인아, 누구를 찾느냐?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4월18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여인아, 누구를 찾느냐?
복음: 요한 20,11-18: 누구를 찾고 있느냐?
무덤을 본 베드로와 요한은 집으로 돌아갔다. 마리아가 혼자 무덤에
남아 울고 있다. 그것은 그분께 대한 사랑이었다. 그 때문에 제자들이
무덤을 떠난 뒤에도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마리아는 그분을 사방으로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마리아가 이미 들여다 본 무덤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 것은 이러한 사랑이었다. 사랑의 힘이 배가된 그 갈망은
어떠한 결과로 나타났는가? 그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의 머리맡과
발치에 있는 천사들을 만난다.
천사들은 “여인아, 왜 우느냐?”하고 묻는다.(13절) 마리아가 울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을 시켜 당신의 신비를 알려주신다.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이것은 울 일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마리아는
크게 기뻐해야할 일을 슬픈 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일은 아가에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네.”(아가 3,1)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13절)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고 한다. 아마 천사들은 마리아의
뒤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을 것이고, 천사들의 시선을 보고
뒤에 누가 있다는 것을 안 마리아는 뒤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물으신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15절)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15절)고 하였다. 마리아의 눈은 닫혀 있어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마리아야!”(16절) 하고 이름을 부르신다. 처음에는 여인이라고
부르시고, 다음에는 이름을 부르셨다. ‘너를 알아보는 이를
알아보아라.’는 말씀이다. 마리아는 즉시 “라뿌니!”(16절) 즉
‘스승님’으로 알아본다. 그분은 마리아가 지금까지 찾고 있던 분인
동시에 마리아가 당신을 찾도록 내적으로 인도하신 분이었다. 마리아는
너무 반갑고 기뻐서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17절)고 말씀하신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
(17절) 이 말씀은 우리와 같이 모든 지체로 만들어지신 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분, 죽음 이후에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지만 그 건너가심의 첫 열매를 당신 안에 지니고 계신 인간이었다.
그분은 이렇게 우리가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을 여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결국 그분이 계시는 곳에 그분의 사람들도 있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해
주시면서 두려움을 없애 주신다. 그리하여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였다고 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시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항상 말씀을 살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는 삶으로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부활절의 삶이 이렇게 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자.
- 수원교구 상하 성 모세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청주] 더 많이 사랑합시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4월18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요한20,11-18)
더 많이 사랑합시다.
우리는 너무도 큰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을 보고는
‘넋이 나갔다.’ 또는 ‘혼이 나갔다’고 말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마리아는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큰 슬픔에 잠겨
이른 아침 무덤을 찾아왔는데 무덤이 비어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너무도 놀라 그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추수 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빈 무덤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꽉 차있으니 다른 어떤 것도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다'고 하나봅니다. 자기 안에 갇히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마리아는 넋이 나갔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직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20,16)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 부활에 때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마리아는 “라뿌니!”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10,14). 고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직접 보여주기까지는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그분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요한20,17).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사명을 줍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의 하느님이 곧 나의
하느님이시니 나는 그분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20,18).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듯이 우리도 그
아들과 딸로서 주님을 전해야 할 소명을 일깨워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을 뵙고 전하였듯이 우리도
더욱 간절한 사랑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리아가
절망의 어둠 속에 '서서 울던' 사람에서 제자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는'이가 되었듯이 우리도 복음의 선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분을 만날 수 없고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사랑이
주님께로부터 나오지 않고서는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지 않고는
부활하신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많이 사랑합시다.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합시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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