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어떤 漢詩에 준하는 글을 보았다.
성균관 유생에 대한 내용이다.
나는 묻는다.
조선조에서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의 숫자는 얼마인지를.
건국(1392년) 초에는 150명.
세종 11년(1429년)에는 50명 증원하여 200명
- 생원, 진사 100명
- 기재 100명
숙종 34년(1708년) 75명(임진왜란 후 경비 부족으로 유생을 줄였다.
영조 18년(1742년) 유생 100명으로 늘렸다.
이후 고종(1863년 등극) 초에는 126명으로 증원했다.
조선시대 왕족, 사대부, 양반, 백성, 천민의 숫자의 전체는 얼마쯤일까?
사대부, 양반이 아닌 일반백성, 천민(공노비, 사노비, 칠천(七賤) 등도 성균관, 지방향교에 입학해서 한자 교육 등을 받았는가?
전혀 아니다.
일반 백성, 천민들은 성균관은 고사하고, 지방향교, 서원조차 입학할 수 없었다.
운이 좋다면 동리(마을)의 개인 서당에서나 어깨너머로 한자를 슬쩍 배웠을 게다.
마을 서당에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으며, 또 일정한 학비를 내야 했는데 과연 조선시대의 백성, 천민들한테 그게 가능했을까?
이런 역사적 신분사회, 차등문화의 사실을 도외시하고 2019년 지금도 漢字를 근본하여 성균관 유생 운운하며 한문시를 카페에 게재하는 게 과연 맞는가를 묻는다.
조선조는 잘 거꾸려졌다.
조선초기와는 달리 중기 이후, 후기에는 병약해서 아녀자의 치맛자락에 허덕거리다가 구한말 열강제국에 시달렸다. 결국에는 갑오경장, 동학혁명을 거치고, 을사보호조약(1905년)을 거치고, 1910년 8월 22일에 목을 옭아맨 채 죽임을 당했다.
그 뒤로는 일제제국주의 왜정 아래에서 일본어를 배워야 했다.
'와레와레와 신밍노...덴노하이까 반자이도...'라는 왜놈말이 내 귀에도 선연하다.
시골사람들이 이따금 읊어댔으니까.
1945.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1948. 8. 15.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반 국민한테 소학교 교육을 시킨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조 왕조시대보다 낫다.
일제는 지식을 독점하지는 않았기에.
일반 국민한테도 소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으니까. 단 학비는 비쌌겠지.
나는 1950년대 중반부터 국민학교(요즘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대전으로 전학을 갔다.
시골의 내 동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졸업으로 끝을 냈다.
왜? 가난해서 상급학교인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안 되었기에.
나는 대전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대전에서도 내 동무 가운데 일부는 졸업하지 못했다. 수업료, 사친회비 등을 내지 못했기에...
대전에서도 이 지경이었으니 농촌, 어촌, 산촌, 도시 빈민층의 자녀가 초등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었는가를 묻는다.
현행 중국 글자인 한자는 거의 80,000자에 육박한다.
이 가운데에서 당신은 과연 몇 자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를 묻는다.
지금은 2019년.
최첨단시대이다. 한국의 국력이 신장해서 세계 210개 쯤의 나라에 나가서 활동한다.
우리는 한자가 아닌 영어, 이태리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으로 쏼라 쏼라 하는 세상이다.
오래 전의 일이다.
타부처에서 여직원이 들어왔다. 나는 당시에 영어에 심취했기에 그 여직원한테 외국어를 배우라고 권유했다.
'어떤 외국어요?' 하고 묻기에 '영어는 너무나 흔해 빠져서, 지금 시작하면 너무나 늦다. 러시아를 배워라. 남들이 하지 않는 언어를 하면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 여직원은 오후에 한국외국어대학교에 나가 단기과정을 거치고, 러시아로 언어연수 유학 갔다. 귀국한 뒤에는 당연히 러시아 통역가로 두각을 나타내고...
漢字 고작 몇 字 안다고 해서 한자 단어 몇 개로는 통역, 번역이 되지 않는다.
이미 송장이 되어버린 漢字로써 지식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아직도 지속하는가?
나는 50살까지 솰라 솰라 하면서 외국인과 대화했다.
한 세대 뒤인 큰딸은 솰라 솰라 하면서 해외로 나가고, 통역하고 다닌다.
이런 세상에서 아직도 쪼다, 머저리, 바보, 멍텅구리였던 조선조의 성균관 유생 운운하는가?
漢字 운운하는가?
조선조 519년간은 왕족, 사대부, 양반들의 세상이었지 일반 백성(요즘의 일반국민)의 세상은 아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의 왕족, 사대부, 양반 계급은 전체 인민수의 10%이다.
나머지 90%는 일반 백성, 노비(공노비, 사노비, 천민)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1950년대, 60년대 초에도 시골 이웃집에는 사노비가 있었다.
1894년 동학혁명 이후 사노비 해방이 있었지만 이들은 가진 게 없어서 떠나지 못하고 주인집에서 머슴살이 등을 하면서 살아야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들의 자식들이 문자교육을 제대로 배울 수 있던가?라도 또 묻는다.
정말로 너무나 철이 없다.
국사/역사 지식이 없는 것인가?
조선조 시대상을 알지 못하는 작태인가?
정치현상, 사회현상, 문화현상, 상농공상 등의 경제현상 등에 대해서 당신이 아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한자병에 찌든 당신들이...
하나의 예다.
국보문학 2009년 9 ~10월(통권 15호) P.8 에는 칠언절귀의 漢詩가 올랐다.
가로 세로 각각 7자의 漢字이다.
번역조차도 없어서 나는 전혀 해독이 불가능하다.
2019년 11~12월호 (통권16호) PP. 35 ~37에도 漢詩가 올랐다.
가로 7字, 세로 8字 정형의 漢詩이다.
한글 토씨 하나조차도 없는 완벽한 한자 투성이다.
나로서는 읽을 재간이 없다. 한자는 고작 몇 개만 짐작할 뿐.
이 분의 漢詩는 최근의 국보문학지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은 '한국 국보문학'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漢文문학'에 불과하다.
한자는 우리나라 글자가 전혀 아니다.
단, 차용하여 쓸 뿐이지 우리나라에서 한자 그 자체를 생성 또는 소멸하지는 않는다.
그런 권한은 중국에나 있다.
한글은 1443년에 창제하고, 1446년에 반포했다.
하지만 양반, 사대부는 이를 천시하였고, 부녀자들이나 배우며 익히는 언문에 불과했다.
하나의 예다.
1910년 전후의 공문서 사문서를 보면 거의 다 한자투성이다.
1919년 3월 1일의 독립기념선언서도 거의 다 한자투성이다.
불과 100년 전의 세상일인데도 이 지경이면 그 이전의 세상은 온통 한자투성의 문자생활이었을 게다.
서해안 내 소유의 선산에 가면 개인의 비석이 열댓 개나 있다.
100% 한자여서 나는 읽을 재간이 없다. 나한테는 그냥 돌맹이, 돌덩어리를 깎아서 만든 석공예품에 불과하다.
읽지도 못하는 碑文이 그게 뭐 대단한가?
그냥 한 구석에 일렬로 세워두었다. 종가 종손인 내가 그렇게 했다.
서른 살까지 공부했고, 일흔두 살인 지금까지도 책벌레인 내가 읽지도 못하는 한자라면 그게 다 문자 쓰레기에 불과하다.
한국 문학이 한반도에 국한하여 꼬작거린다면야 까짓것 100% 한자로 쓰던, 국한문 혼용하던 간에 하등의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이다. 한국의 능력이 세계로 넘나드는 세상이다. 중국말이 아닌 우리말로 말하고, 중국글자인 한자로 글 쓰는 게 아니라 우리글인 한글로 글 쓴다.
많은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한국언어를 배우고 있다.
우리 것을 발전시켜서 세계로 수출하면 안 되겠니?
아침 밥상머리에서 아내는 스마트폰을 열어서 유치원에 다닌 손녀가 어린이용 책을 더듬거리며 읽는 영상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곁에는 년년생, 기저귀를 아직도 차고 있는 손자도 그림책을 들고는 자기 혼자서 무어라고 쫑알거린다.
손녀. 유치원생이기에 아직은 학령아동이 아니다. 내년? 내후년에서야 초등학교에 입학할 게다. 그런데 한글로 된 아동책을 읽는다니 나는 놀랐다.
그 어린아이는 뜻도 모르면서도 한글을 읽는다. 유치원생조차도 읽는 한글이다.
그런데 정작 나이 든 노인세대인 우리는 무슨 짓거리를 하는가?
아직도 공맹이나 찾는가?맹공이나 숭상하는가? 2,500년 전의 중국인의 역사, 문화를 받드는가?
그렇게 하려면 제대로 하던지...
중국 문화에 그렇게 잘 알거든 한국역사, 한국문화에 대해서는 얼마큼 아는 지를 설명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