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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묵상글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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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28 04:04
-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사뭇 잘못 알고 있다는 뜻에서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한 다음 하느님 뜻을 이루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히브리서는 우리의 오해를 정정해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당신 형제요 어머니라고 주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 뜻을 이룰 수 있을지 묵상코자 합니다.
이것을 우리 부모 자식의 관계에 빗대어 이해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부모가 제일 원하는 것은 고작 옷이나 먹을 것을 사 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나 옷을 가지고 오는 것보다 자식이 손주와 함께 오는 것을 원하고,
돈이나 옷보다 당신 뜻을 따르기를 더 원합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작 돈이나 옷을 원하지 않습니다.
제 뜻을 이해하고 제 뜻에 함께하는 동지(同志)를 더 원합니다.
예를 들어 저에게 옷을 선물하는 분보다 제가 하는 협동조합의
취지에 동감하고 그 활동을 같이하는 동지가 더 낫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곧 하느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대사제이신 예수님께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원하시는 것은
우리 구원을 위해 동물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몸을 바치는 것 곧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곧 하느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시지만
실은 우리에게 당신 전부를 바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
우리 자신을 몽땅 바치는 것이 아닐까요?
이는 프란치스코의 말 그대로입니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두지 마십시오.”
서로에게 서로를 바치는 것,
그래서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것,
이것을 제사라고도 하고 봉헌이라고도 하지만 실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을 실천할 때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이신 주님을 잉태한
주님의 어머니들이 된다고 하시는 오늘 주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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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1.28 06:32
밤새 몰아치던 폭풍우가 물러난 아침, 파도에 휩쓸려온 불가사리가 해변에 수도 없이 널려 있었습니다. 해변을 걷던 어린 여자아이는 불가사리를 하나 집어 바다로 던졌습니다. 또 하나를 주워 그것도 바다로 던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한 노인이 다가와 말을 겁니다.
“꼬마야! 지금 뭐하니?”
“불가사리를 바다로 돌려보내고 있어요.”
“하지만 얘야, 이 해변에는 수십만은 못 되더라도 수만 마리나 되는 불가사리가 널려 있단다. 네가 몇 마리 구해준다고 별 차이가 있겠니?”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불가사리를 또 집어서 바다로 던졌습니다. 그리고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쟤한테는 큰 차이가 있죠.”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아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유명한 이야기를 알고 있어도 실천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 하나로 무슨 변화가 있을 수 있냐면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환경 문제가 심각하다고 서로 이야기하지만, 나 혼자만 지켜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랑 실천도 그렇습니다. 누구는 사랑을 실천한다고 누가 알아주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서 시작하는 사랑 그 자체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온 인류가 구원의 길에 들어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주님께서 알아주십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주님의 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알리지요.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시면서,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면서, “이들이 내 어미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물학적 가족을 무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진정한 주님의 가족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길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나라에서 새로운 가족이 이루어집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당신의 뜻을, 즉 사랑의 길을 걸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삶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 모든 것이 역전되고 맙니다. 당연히 지금 당장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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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아 있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있다(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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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당신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립과 충돌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환영받아야 할 당신의 백성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친척들에게마저도 몰이해와 배척을 받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하여 당신의 진정한 영적 가족이 드러나게 됩니다.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을 둘러보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
이는 당신의 영적 가족의 ‘두 가지’ 모습을 드러내줍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 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들고 소외받고 가난하나 구원을 갈망하여 몰려와 예수님 둘레에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들입니다. 이는 엄청난 사실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인데,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 한 가족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설혹 피를 같이한 혈육이라 하더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에서 열 두 사도를 뽑으시면서,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시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영적 가족은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함께 하는 사람이요,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함께 지내는 동행자요 동반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가 아니라, ‘실행’하는 이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이라는 절대가치 앞에서 혈연이라는 세상가치는 힘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니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이라할지라도. 곧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주위에 둘러앉아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하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명’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앞서지 말고, 먼저 자신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장소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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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한번 맺어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끊을 내야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혹 여러 사정으로 인해서 부자의 관계를 단절하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핏줄로 맺어진 연결 고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있는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하고 말하였더니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반문하시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 라고 하셨습니다. 얼핏 보면 핏줄로 맺어지는 관계를 무시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당신의 참된 가족이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근처에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삶을 엮어가야 가족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공동체를 형성하고 결속시키는데 초석이 되는 것은 혈연, 지연, 학연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태어난 모든이와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맺어지는 새로운 부모 형제, 자매의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형제님, 자매님! 하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무늬만 형제자매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는 태양이 형님이요, 달이 누님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몫을 다하였을 때 그 모두가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는 “하느님은 영이시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영이시니 영적인 분을 만나려면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을 떠서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영적인 관계가 먼저입니다. 어떤 외적인 관계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면, 혈연이나 지연, 학연을 먼저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직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은 탓에 “예수님께서 미쳤다”, “악령이 들렸다”(마르3,22) 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회당으로 왔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기적을 믿었지만, 그런 능력을 어디서 받았는지 의심하였습니다. 결국 육친의 가족은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눈뜬 가족은 예수님 안에 있기 마련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모마리아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족입니다.
가끔 어떤 사람은 “가족을 먼저 챙겨야지 성당을 우선하면 되겠느냐?” 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당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성당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이 가족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혹시 누가 가족을 소홀히 한다면, 그는 더더욱 성당에 나와서 주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야 합니다. 신앙과 삶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나의 가족은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이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한마음 한뜻을 이루고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핑계로 가족에 소홀하지 않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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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라스 성당은 48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2년 후면 50년이 됩니다. 교우들은 지금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성당을 기억합니다. 처음 시작은 다운타운에 있는 성당이었다고 합니다. 그성당의 이름을 ‘다운타운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시내 중심가에 있어서 주차에 어려움이 있었고, 교우들이 늘어나면서 성당 신축과 이전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교우들은 신축하기 전에 임시 성전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 성당의 이름을 ‘창고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창고 성당에서 지내는 동안 지금의 본당을 신축하였고, 본당 설립 40주년이 되는 2017년에 지금의 성당이 완공되었습니다. 성당 신축 과정에서 모든 교우가 마음을 모았습니다. 성당의 건물은 다르지만, 성당의 이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같습니다. 우리는 다운타운 성당이나, 창고 성당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다. 새로운 성당이 우리에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율법과 계명으로 이어지는 신앙을 다시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34년 사제 생활하면서 많은 곳에 있었습니다. 성당은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 적성, 시흥5동에 있었습니다. 많은 추억과 기억이 있습니다. 슬픔과 기쁨이 있었고, 고독과 위로도 있었습니다. 교구청에서도 있었습니다. 사목국, 청소년국, 성소국에 있었습니다. 교우들과의 만남보다는 교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제들과의 갈등과 연대가 있었습니다. 캐나다에서는 ‘영신 수련’을 공부했습니다. 어느덧 20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 공부했던 영신 수련은 제 사제 생활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뉴욕에서는 ‘미주 가톨릭평화신문’에서 일했습니다. 뉴욕에서 코로나 팬데믹을 겪었습니다. 신문사 운영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5년의 임기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뉴욕에서 동북부 ME와 꾸르실료를 맡았습니다. 모든 일에 열정적인 봉사자들을 보았습니다. 저는 작년 2월에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왔습니다. 이곳에서 임기를 마치면 더 이상 새로운 사목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저는 이제 제가 사목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시간과 장소는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사제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겁니다. 사제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참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겁니다.
예전에 집안 어르신들이 이렇게 이야길 하셨습니다. ‘사제가 될 사람은 이제 집안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은 사제가 되면 말씀도 높여서 해 주셨습니다. 사제가 하는 일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몸을 축성하기 때문입니다. 강론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독신을 통해서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고 사목에 전념하기 때문입니다. 순명을 통해서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34년간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참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찾았습니다. 신자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고, 외로운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나에게 줄 것이 있는 사람을 형제처럼 대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형제처럼 대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내가 신세를 진 사람을 형제처럼 대하는 것 또한 사람의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가장 굶주리고, 헐벗고, 아픈 사람을 형제처럼 대하라고 하십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들 또한 형제처럼 대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십니다. 달라스 성당에서는 새 신자 환영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선물도 드리고, 새로 오신 분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식사합니다. 한국에서 오신 분, 타 주에서 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같은 하느님을 믿고, 같은 신앙을 가졌기에 모두 가족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낯선 곳에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신앙을 가진 분들의 따뜻한 환대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는 모두 같은 형제’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도움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내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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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들으면 꼭 생각나는 다른 복음 내용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첫째와 둘째 아들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포도밭에 일손이 부족하니 가서 일손을 돕거라.’라고 말했습니다. 첫째 아들은 싫다고 말했지만 이내 마음을 돌려 일하러 갔습니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고 말해놓고 가지 않았습니다.
이 둘 중 아버지의 말을 실천한 사람은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가 내 어머니요 형제라고 말합니다. 누구나 아버지의 말씀을 듣습니다. 누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는 바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물론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나를 희생하기는 어렵습니다. 내 것을 챙기는 것보다 나누는 것을 선택하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위의 복음, 즉 첫째 아들이 처음 싫다고 말했던 것은 포도밭에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양 아래 허리 숙이고 온종일 일하는 것은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길을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포도밭으로 갑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에게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느 때는 우리의 고통이 눈에 보이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성모님의 길이 그랬듯이, 주님의 길이 그랬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사랑과 나눔의 길을 걷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입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더듬지 않는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말을 더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재밌는 사실에 과학자들이 연구를 해봤더니 인디언들 세계에선 ‘말더듬’이란 단어 자체가 아예 없다고 합니다. 말더듬이란 말 자체가 없으니, 말더듬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프랑스에선 나비와 나방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냥 둘 다 ‘빠삐용’인 것이죠. 나비는 아름답고 나방은 징그럽다 느끼는 우리에겐 참 흥미로운 일입니다
많은 철학자가 사람들은 ‘말’에 예속되어 산다고 말합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면 부정적인 삶이 되고, 긍정적인 말들은 긍정의 삶으로 이끈다는 것이죠.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부정적인 말들이 많습니까.
지금이라도 부정의 언어들을 조금씩 제거해 나가보는 건 어떨까요!
추워 죽겠네…. 보단 시원하다! 고 말이죠.
긍정의 말들이 늘어날 때 긍정의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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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누가 '하느님의 한가족', '예수님의 참가족'인가?
“하느님의 뜻을 살행하는 사람들”
오늘 복음은 짧지만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강렬합니다. 우리의 내적시야를 한없이 넓고 깊게 해 줍니다. 복음 내용을 구체적으로 인용하며 나눕니다. 예수님 둘레에는 군중이 에워싸고 있고 군중들은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를 상징하는 듯, 지금 미사장면과 흡사합니다. 이어 전개되는 대화입니다.
“보십시오.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예수님께서는 즉시,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반문하신후,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십니다. 흡사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 주님의 제대 주변에 미사전례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내 누이요 어머니다.”
참 충격적인 강렬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참가족인가? 에 대한 답을 줍니다. 바로 장소와 시간, 국적과 인종, 종교와 언어, 문화를 초월하여 그가 언제 어디에 있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는 누구나 예수님의 참가족이자 하느님의 한가족이라는 것입니다. 비단 그리스도교가 아니더라도 비록 무신론자라도 그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면 넓은 의미로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혈연가족을 넘어서 참으로 넓고 깊은 의미로서의 모든 인류를 일치시킬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래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도 나오는 듯 싶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했던 두 예도 생각납니다.
“노년의 품위 유지의 우선적 순서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탐욕의 근원인 돈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혈연가족은 얼마나 많은지요! 너무나 자주 주변에서 목격하는 일들입니다. 하느님 믿음 중심의 연대가, 참으로 견고한 하나의 공동체,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를 형성해 줍니다. 바로 이의 생생한 증거가 당대 예수님 중심의 제자공동체요, 명실공히 평생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여기 요셉 수도형제들 공동체요, 그리고 미사에 참석한 형제자매들 모두가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한가족 공동체에 속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한가족에 속할 수 있는 구원의 기회는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수록 거기 삶의 중심에서 예수님도 만날 수 있고 마리아 성모님은 물론 무수한 성인성녀들도 만날 수 있을 것이며, 예수님의 참가족으로서 형제애도 연대의식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평생 하느님의 뜻을 실행했던 주님의 예스맨이 마리아 성모님이셨고 다음 말씀이 성모님의 순종의 믿음을 요약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부전자전이기보다는 모전자전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이에 해당됩니다.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은 그대로 예수님의 평생 삶을 요약합니다. 그대로 마리아 성모님을 닮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에 거푸 2회 나오는 예수님의 고백과 일치합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참가족에 속한 우리 모두의 공통적 하나의 고백이 있다면 참삶의 의미가 되는 이 고백하나뿐일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참가족이자 하느님의 한가족에 속하는 교회의 모든 성인성녀들이요 오늘 기념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빛나는 모범입니다. 13세기 이탈리아 귀족 출신의 성인의 생몰연대를 보니 만49세까지 100% 삶을 연소시킨 성인이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성인보다 27세를 더 살고 있네요. 가톨릭교회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쌍벽을 이뤘던 대학자였고 당대에는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성 보나벤투라와 함께 명성을 날렸던 성 도미니꼬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였습니다. 성인에 관한 인품과 전설적 일화 넷만 소개합니다.
“그는 천품이 유순하고 더할 나위 없이 순결한 일생을 살았고, 오직 진리만을 사랑하며, 신적학문과 인간의 학문을 두루 관통하여 통달하고 있었으며, 마치 태양처럼 자신의 높은 성덕으로 세상을 뜨겁게 하고 자기 학문의 광채로 세상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성인은 1273년 12월 성 니콜라오 축일 미사후 절필하였는데 조수가 그 이유를 묻자, 성인은 “나는 계속할 수가 없어. 내가 이제껏 쓴 것들을 내가 보았고 나에게 계시된 것이 비하면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해.” 대답합니다. 성인의 겸손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만 49세 사망시 유언으로 침대에 누운채 하늘을 보며 남긴, “내 벗인 죽음이여, 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네.” 임종어도 그가 얼마나 분투의 노력을 다한 고단한 삶이었는지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가 선종전 경당에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나눴다는 대화도 감동적입니다. 문틈에서 엿들었던 동료수사가 전하는 전설적 일화입니다.
“토마스야! 넌 참으로 나에 대해 참 잘 말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니? ”
토마스가 예수님께 드리는 답은 예수님의 친구들이자 제자들인 우리 모두의 언제나 소원과 일치합니다.
“주님! 오직 당신만을 원합니다(Nothing but youself, Lord!).”
더불어 생각나는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임종어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Lord! I love you).”
더불어 생각나는, 늘 나눠도 늘 새롭고 좋은, 마음 설레게 하는 제 자작 애송 고백시도 나누고 싶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무려 27년전 고백시이지만 지금도 그 마음, 그 사랑은 그대로입니다. 새삼 한평생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했던 예수님의 참가족에 속한 성인들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수행함으로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가 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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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나 그 사이>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다.”(마르 3,31ㄴ-32ㄱ)
“하느님을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
당신께서
기꺼이
내가 되시듯
내가
조금씩
당신처럼
되어감으로써
당신과 나
그 사이
좁혀지고
당신께서
기꺼이
내가 되시듯
내가
오롯이
당신처럼
됨으로써
당신과 나
그 사이
사라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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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마르 3,31)
가족 관계의 질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 가족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가득하신 그분께서는 마리아를 가족에 분명히 포함시키셨습니다. 마리아가 아버지의 뜻을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하시고 거룩하신 스승께서는 사람들이 당신께 알려 드린 이른바 사적이고 개인적인 어머니의 이름마저 하찮게 여기셨습니다. 그것은 천상 가족에 대비되는 지상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되지 말고, 그대 어머니께 감사드리십시오. 육적 은혜를 영적인 것으로 갚아 드리고, 한시적 은혜를 영원한 것으로 갚아 드리십시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 5,3)
하느님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모든 존재와 모든 구별을 뛰어넘으십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존재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이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나는 나 자신을 바랐고, 나 자신을 알았으며, 지금의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야말로 나 자신의 원입니다. 나의 시간적인 존재를 본뜬 것이 아니라, 나의 영원한 존재를 본뜬 것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나의 존재를 따라서, 나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태어나지 않은 존재를 따라서 향상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것입나다. 시간 속에서 태어난 나는 죽을 수밖에 없고, 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어야 할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시간 속에서 태어난 나는 시간이 흐름에따라 죽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나의 영원한 탄생 속에서 모든 것이 태어났고, 나는 나 자신과 만물의 원인이었습니다. 만일 내가 나 자신과 만물의 원인이 되기를 바랐더라면, 나도 만물도 생각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없었다면, 하느님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인 것은, 내가 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인이 아니었다면,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322)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성심에 대한 묵상
첫 번째 시리즈
첫 금요일 신심
소개
첫 금요일 신심은 이미 잘 알려지고 널리 퍼져 있으며,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 이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이 신심은 그리스도께서 복된 마가렛 마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기원으로 하여 매달 첫 번째 금요일에 합당하게 성체를 영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세운 것입니다. 첫 금요일 성체성사를 통해 얻어진 여러 가지 은혜와 특혜를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 신심이 채택된 곳마다 개인 뿐만 아니라 전체 교구와 공동체에서도 가장 놀랍고 위안이 되는 경건과 성화의 열매를 맺었다고만 말씀드리면 충분합니다.
이 성심에 대한 묵상은 각각 짧은 실천적 자기 반성을 위한 몇 가지 요점이나 주제가 뒤따릅니다. 각 묵상의 끝에는 영적 독서를 위한 적절한 내용이 "모방의 글"에서 발췌되어 배정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첫 번째 묵상 시리즈의 결론에서 제공되는 기도는 매 번 첫 금요일에 성체를 영한 후에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 제공된 묵상, 반성, 기도는 또한 성심 축일의 노베나로 사용하거나 연중 다른 때에도 큰 이익을 가지고 활용될 수 있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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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삼위일체 하느님은 이성보다 오직 믿음으로 /
박윤식 [big-llight] 250127. 21:01 ㅣNo.179622
이탈리아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1225년 무렵 몬테카시노 수도원과 나폴리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 들어가 대 알베르토 성인의 제자가 되었다. 파리에서 공부한 성인은 독일 쾰른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곳 신학교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철학과 신학에 관한 훌륭한 저서를 많이 남겼는데, 특히 ‘신학 대전’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술로 꼽힌다. 1274년에 선종하였으며, 1323년에 시성되었다.
성인의 부모님은 그를 좋은 교육을 받아 훌륭한 지도자가 되도록 나폴리 대학교로 유학을 보냈지만, 그는 그곳서 도미니코회의 스승을 만나 수도자가 되려는 뜻을 품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성인이 고위 성직자가 될 수 있는 베네딕도회가 아닌 미천한 수도회에 입회하는 것을 바랐으나, 성인은 가족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도미니코회에 입회하고는 오랜 학업을 이어갔다.
성인은 저명한 신학자로 이름난 대 알베르토 성인의 문하생이 되어 신학 박사 학위와 사제품을 받았다. 대 알베르토 성인은 그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이 말 없는 황소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울부짖음으로 전 세계를 가득 채울 것이다.” 주로 파리와 이탈리아를 돌며 강의한 성인의 대표작인 ‘신학대전’은 현대 신학의 뿌리로 받아들여질 만큼 위대한 사상을 담고 있다.
그는 요한 2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비오 5세 교황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언되었다. 그리고 레오 13세 교황에 의해 모든 대학교와 대학,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면서 ‘보편적 박사’ 또는 ‘천사다운 박사’로 불리며, 모든 신학생이 그의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성인의 유해는 1369년 1월 28일 프랑스 수도원으로 옮겨졌기에, 이날을 성인의 축일로 기념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즐기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엄히 꾸짖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성인은 ‘벙어리 황소’라고 불릴 정도로 조용하고 겸손하고 진중했다. 그리하여 그 황소의 울음소리가 세상 끝까지 울려 퍼져, 그는 위대한 가톨릭 신학자로서 로마 교황청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책인 ‘신학대전’을 집필했다. 하느님의 존재를 다양한 방식으로 입증하려 한 성인은 결국 ‘삼위일체, 육화(肉化), 원죄, 창조는 인간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다.’라며, 그것은 ‘철학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했다.
‘신학대전’이 완성되자 하느님께서 토마스에게 나타나셨다며 전해지는 이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구나. 그 대가로 무엇을 바라느냐?”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하느님, 저는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성인께서 언급한 그대로 하느님은 결코 이성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오로지 믿음으로만 알 수 있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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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모함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 기적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구마와 치유의 기원에 악이, 그것도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이 자리하고 있다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지어냈습니다.
예수님의 신적 속성과 구원의 업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 그럴듯하면 그 거짓말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 확신하게 됩니다.
그들이 매우 똑똑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똑똑한 이들도 예외가 되지 않는 ‘거짓말의 신비’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거짓된 이해와 비난이 가족과 친척들조차 장악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그들은 그분에 대하여 들은 것만 가지고 예수님더러 미쳤다고, 마귀가 들렸다고 단정 지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혈연관계라고 해서 죄와 악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받고 주님 교회의 일원이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죄악이 저절로 피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거짓과 죄악의 덫에 걸려 비참해진 것을 알고 하느님 자비를 향하여 두 손을 뻗을 수 있을 때, 그리고 용서와 사랑, 구원과 치유를 베푸시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응답하며 걸어갈 때 우리는 빛 안에서 거듭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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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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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오늘 복음의 앞선 부분, 즉 어제 복음과 연결해서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께서도 소문을 들으신 것 같습니다.
아들이 더러운 영이 들렸다는 소문을 듣고
아마 걱정이 되신 나머지
아들을 찾아오신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다는 것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그들이 생각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어머니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하지만 밖에 서서 예수님을 부르시는 모습은
걱정이라기보다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싶어하시는 것이
더 큰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을 찾고 계신다는 말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려는 예수님을
믿는 것도 포함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 둘레에 앉아 있는 군중들도
예수님의 어머니께서 들은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기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혈연가족들은
반신반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전혀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안에 의혹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의혹에도 당신을 받아들이고
당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당신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소문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직접 확인하려는 모습도
참 좋게 느껴집니다.
소문만으로 단정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혹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혹에도 하느님을 떠나지 않을 수 있는지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물어보십니다.
무조건 믿으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십니다.
의혹을 버리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의혹은 내 의지로 없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의혹이 있어도
하느님 곁에 머무를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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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 35)
하느님의 뜻은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실행입니다.
예수님의 실행안에
혈육보다 뜨거운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믿음과 실행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몸입니다.
우리의 실행으로
말씀의 길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우리의 삶은
말씀의 실행으로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말씀의 올바른
실행은 먼저
우리의 뜻을
내려놓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말씀과
실행의 관계입니다.
말씀과 실행으로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삶안에서
더욱 구체화됩니다.
하느님의 뜻에서
두 개의 가장
큰 축(軸)은
말씀과 실행이듯
하느님 말씀을
이웃과 우리자신에
실행하는 복음의
사람되십시오.
실행으로
우리모두는
형제가 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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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님을 폄하하는 말씀이 아니라 성모님을 극찬하고 칭송하는 예수님의 말씀!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역사 여정 안에서 성모님의 역할과 기여를 인정하지 않고, 그분의 존재,
그분의 탁월한 신앙과 동정성을 부정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모님의 동정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삼는 복음 구절이 있는데,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르코 복음서입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마르 3,32)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위해 출가하신 다음 성모님께서는 이제 내 역할은 다 끝났다,
큰 짐 덜었다, 이제는 편안하고 여유 있는 노년을 보내야지, 사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의 안테나는 오로지 예수님께로 향해 있었습니다.
오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몸은 건강할까? 식사는 제때 하고 있을까?
무슨 도움이라도 되어드릴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렇게 노심초사하면서 지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성모님에게 걱정스런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당대 나름 시국을 주름답던 주류 세력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대사제들과 맞서서 날선 대화를 주고받는데,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논쟁을 거듭하니, 저러다 제 명대로 못 살겠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운 성모님께서는 날이 새자마자 예수님이 머무시는 집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성모님 일행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찾아오셨다고.
위 표현에 따라 성모님의 동정성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신이 나서 외쳤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 외에도 적어도 아들 2명, 딸 2명을 슬하에 두었다.’
성모님의 동정성은 허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정통 교부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예수님 시대 형제, 자매라는 용어는 협의적으로도 사용되었지만, 광의(廣義)적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동일한 부모에게서 출생한 자녀들도 형제 자매라고 불렀지만, 사촌, 팔촌 등 친척들에게도 형제, 자매라고 칭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온 형제들과 누이들은 성모님의 친 자녀들이 아니라 사촌이나 오촌 형제자매들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 34-35)는 예수님의 말씀은 걱정이 되어 찾아가신 성모님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억울하고 큰 상처가 될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이 대목을 묵상하다보니,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위 말씀은 성모님을 힘들게 하신 말씀, 성모님을 무시하는 말씀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신앙인들 가운데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잘 실행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알쏭달쏭한 말씀은 성모님을 가장 극찬하고 칭송하는 말씀이 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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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31-35: 예수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인 사람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절). 이 말씀은 당신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기신 것도 아니다. 부끄럽게 여기셨다면 그 태를 거쳐 나오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5절) 마리아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기 때문에 마리아는 가장 확실한 가족이시다. 우리는 당신 가족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야 한다.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기 위한 요건을 말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이다. 어머니라는 것은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낳아줄 수 있다면 그것은 가족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선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태도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 있어야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가족이란 육적인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이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즉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육신을 잉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때문에 더욱 복되신 것이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혈연관계는 그들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것도 복되시다고 천사도 엘리사벳도 말하였다. 그보다 더 행복하게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라는 친족관계조차 마리아에게 아무런 유익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참조: 마태 3,8-10; 루카 11,27-28; 로마 9,1-8). 주님께서 마리아를 칭송하신 것은 혈연관계로 당신을 낳아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이 말씀은 마리아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요한 1,14 참조), 자신을 지어내시고 자신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을 지켰기에 복되다는 것이다. 즉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셨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말씀이다. 말씀을 실천하는 삶으로 가족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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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버지를 버려야 진짜 나의 삶이 시작된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혈육의 관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또한 ‘자유로운 어른’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부모나 가족의 뜻에 휘둘리면 아직 독립한 어른은 아닙니다.
가끔 주위에서 아이들이 가출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왜 아이들이 가출할까요?
어떤 아이는 엄마, 아빠 없는 곳에서 잠시라도 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엄마, 아빠의 뜻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독립하여 어른이 되고 싶다는 뜻입니다.
가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에게 빚진 게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상 가출해도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다는 생각에 행복할 수 없고, 자존심 때문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면 나쁜 길로 빠지기 십상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니얼 페리는 웰튼 아카데미의 밝고 열정적인 학생으로, 새로 부임한 교사 존 키팅의 영향 아래 연기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발견합니다.
셰익스피어 공연에 대한 니얼의 열정은 엄격하고 성공을 중시하는 아버지 페리 씨의 기대와
극명히 대비됩니다.
무대 위에서 느끼는 기쁨과, 훗날 의대 진학을 포함해 제대로 된 ”미래를 준비하라는 아버지의 강압 사이에서 갈등하는 니얼은 자기 주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합니다.
니얼이 학교 연극 ‘한여름 밤의 꿈’에서 중요한 역을 맡게 된 순간, 그는 마침내 인생의 목적을
찾았다고 느끼며 벅찬 행복감에 사로잡힙니다. 여기에 힘을 실어준 인물이 오늘을 살고 꿈을 찾으라는 키팅 선생님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를 알게 되자 즉시 연극을 그만두고 공부에만 전념하라고 명령합니다. 니얼은 아버지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연극에서 찾은 자유를 놓치기 싫어 갈등하며, 결국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키팅 선생님이 “오늘을 잡아라(Carpe Diem)”라고 격려하지만, 니얼은 아버지의 요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몰래 공연을 강행합니다.
공연이 대성공을 거둔 직후, 페리 씨는 니얼을 나무라며 웰튼 아카데미에서 퇴학시키고
군사학교로 보내겠다고 위협합니다.
깊은 상실감과 압박감에 사로잡힌 니얼은 아버지의 기대와 자신의 꿈을 결코 조화시킬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또다시 아버지와 맞설 용기를 내지 못한 그는
파멸적 절망감에 굴복하고,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그의 나약함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아버지의 의지에 맞서지 못한 데 있었기에, 그 결말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니얼이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버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키팅 선생이 아버지를 대체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아버지가 주는 것만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른이 되려면 부모보다 더 많이 주는 부모를 찾아야 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로운 어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에릭 리델은 1902년 중국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의 자녀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의 삶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지 직접 체험했습니다.
성장하면서 교육을 위해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뛰어난 달리기 재능을 발견했고, 곧 ‘나는 스코틀랜드인(The Flying Scotsman)’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육상계에서 명성을 얻었음에도, 그는 모든 재능이 하느님께서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주신 것이라 믿었습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 자격을 얻었을 때, 그가 가장 자신 있던 종목인 100m 경기가
주일(主日)에 열릴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일을 오로지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지켜야 한다는 그의 신앙적 확신과 충돌했고, 가족은 물론 영국 대표팀 관계자들도 그에게 종목 포기를 말리고 출전하라고 강하게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여겨, 결국 가장 잘 뛰는 100m가 아닌 400m에 나가
예상을 뒤엎고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
이후 많은 이들이 에릭 리델을 비난하거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나를 지으신 하느님께서는 내가 달릴 때 기뻐하심을 보신다.”라고 고백하며,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과 기쁨과 위로를 나누었습니다.
올림픽 후에는 세상적 명예를 누릴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선교사로 지내며, 현지인들과 한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일본군의 억류 캠프에 갇히는 시련을 겪었을 때에도 함께 수용된 사람들과 하루하루를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지내며 서로를 돌보았습니다.
1945년 뇌출혈로 사망하기까지, 에릭 리델은 언제나 가족이나 주변인들의 기대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따랐으며, 같은 뜻을 품은 이들에게 영적인 형제이자 스승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만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이라는 복음적 가르침을 몸소 보여 주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총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에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난 이들과 사귀어야만 진정한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들이 됩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아직은 모기처럼 세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친구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사람을 만나지 진정한 하느님 가족의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관계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만이 우리를 독립된 어른으로 만들고
좋은 친구들과 함께 행복해질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말합시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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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믿음은 생각이 아니라 삶입니다. 신앙은 생활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1-35)”
1) 앞의 20절-21절에,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에게 온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0-21).”
이 번역만 보면,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한 것이 되는데, 원문을 보면,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붙잡으러 나섰다.’는 ‘집으로 모셔가려고 했다.’입니다.
<친척들은, 또는 가족들은, 예수님께서 너무 바쁜 생활을 하시면서 당신의 몸을 혹사시킨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는 여러 가지 나쁜 소문들을 염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앞의 20절-21절의 ‘친척들’과 31절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같은 사람들입니다.
성모님이 오신 것은, 예수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고, 미쳤다고 생각한 것은 더욱더 아니고,
‘여러 가지로 걱정스러워서’일 것입니다.
제대로 식사도 못하시고 일만 하시는 예수님이......
2)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들은 내 어머니가 아니고 내 형제들이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자.” 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혈육을 부정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당신의 ‘참 가족’, 또는 ‘영적인 가족’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나의 ‘참 가족’이다.”, 또는 “나의 ‘참 가족’이 되려면 나를 믿어야 하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나의 ‘참 가족’이 되려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 말씀에 ‘내 어머니처럼’이라는 말을 넣어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 어머니처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나의 ‘참 가족’이 될 수 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첫 자리에 계시는 분이고,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3)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말에서
‘두 아들의 비유’가 연상됩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28-31ㄱ)”
전에 어떻게 살았느냐보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믿는다고 생각만 하거나 말만 하면서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쭉정이’입니다.
믿는다고 고백하고, 믿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알곡’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1ㄹ-12).”
쭉정이는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될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고, ‘알곡’은 그 자격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알곡들만’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4)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된다는 말과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6-17).”
여기서 “그분께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가리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곧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고,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생각이 아니라 ‘삶’입니다.
<“신앙은 곧 생활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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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3,31-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식구들 중에 밖에서 사고를 치고 다니는 ‘골칫덩이’가 있으면, 그로 인해 가족 전체에게 근심 걱정이 생기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나가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며 떠돌이 생활을 한다고 들었을 땐 그러려니 했지만,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는 행동을 하고, 과격한 언사로 기득권층의 심기를 건드리며, 수많은 군중들을 선동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더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얼토당토 않은 일들을 하고 다니는 걸 보니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러 나선 것이지요. 아직 예수님의 정체와 신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인간적인 손익으로 그분을 판단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식을 예수님도 들으셨던 것일까요? 당신 둘레에 앉아있는 군중들을 가르치시던 와중에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라는 보고를 들으시고도 별로 반가운 기색이 없으십니다. 보통의 경우 집을 오래 떠나 있으면 가족들이 그립고 보고 싶은 게 일반적인데, 심지어 그 가족들이 일부러 나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다고 하면 버선발로라도 당장 마중 나가는 게 당연할텐데 그러지 않으신 겁니다. 심지어 “누가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냐?”고 보고한 이에게 반문하심으로써 마치 예수님께서 당신을 찾아온 가족들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으시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십니다. 거기에 더해 당신 주위에 앉은 이들, 당신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냉정하게 말해 ‘남남’인 이들이 당신 가족이라고 하시니, 혈연으로 맺어진 육적인 가족관계를 무시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닙니다. 혈연관계를 뛰어넘는 보다 친밀한 관계를, 인간적인 부족함과 약함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 이상적인 관계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함이지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모두가 그분 안에 속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영적인 가족관계입니다. 이 관계의 특성에 대해 천주교에서는 ‘가톨릭’(Catholic)이라는 용어로 표현합니다. 이 단어는 ‘보편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의 기준에 억지로 맞추는 천편일률이 아니라, 생각과 기준과 가치관이 다른 이들을 모두 아우른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명으로 따를 수 있는 참된 분, 즉 하느님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 구성원 모두가 하느님을 참된 아버지로 여기기에, 같은 믿음을 지닌 이들을 형제요 자매라고 부릅니다. 그 호칭은 아직 별로 친하지 않은 어색한 관계에 있는 이들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같은 아버지로 모신다는 이유로, 우리 모두가 그분께 대한 믿음 안에서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는 믿음으로, 그들에게 허물과 잘못이 있어도,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언행으로 나를 아프게 해도 나의 친형제 자매를 대하듯 이해와 용서, 포용과 사랑으로 끌어안겠다는 의지가 담긴 표현인 것이지요. 이처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핏줄보다 강한 유대로 맺어진 가족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효도하는 일이며 하느님은 당신께 효도하는 착한 아들 딸들에게 큰 은총과 복을, 더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영원토록 누릴 유산으로 물려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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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내 형제, 내 어머니”
신앙인의 관계는 특별한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 왔다는 기별을 받고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4)
우리의 정서대로라면 머니와 형제들에게 잠깐 기다리라는 사람들을 시켜 전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시간의 여유가 없으니 잠깐 후에 만나겠다는 기별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내 형제, 내 어머니가 바로 이들이다.’라고 대답하신다면
우리 자신도 사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동양의 ‘화두 話頭’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진리를 얻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라고 할까요? 얼핏보면 전혀 상관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질문의 의도가
진리를 얻기 위한 것이라 데에는 뜻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누가 내 형제 어머니이냐?’는 질문은 주님을 찾아 나선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나 군중이 가족만큼이나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형제나 어머니를 소홀히 대한다기
보다는 현재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교우, 수도자, 사제가 된 사람들은 믿음의 공동체의
신비를 이루고 있고 일치의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낫다.’라는 우리의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본당을
중심으로 또 수도 공동체나, 교구 공동체를 중심으로 모인 이들이 일치를 우리는
매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에서 제일 실감있게 체험하는 것은 몇 백명의 사제들 기숙사에서 이름도 모르는
나라의 사제들까지도 미사 중에 공동기도 중에 일치를 이루는 것은 오늘 복음이 매일의
생활에서 현실화되는 것임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성체에서부터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르기까지
일치의 모습은 매일의 기적이기도 합니다.
내 형제, 내 어머니가 바로 하느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진리임을 우리는 가슴에 새기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오늘도 함께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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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목숨 바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참 가족 ♣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는다는 말을 듣고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3) 하고 반문하십니다. 이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35)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참 가족이 되려면 인간관계에 매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늘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셨고, 자신을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으로 자처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영성이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 그분과 일치하는 삶을 말하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은 무엇이며 어떻게 실행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뜻은 세속적인 가치 기준으로는 알 수 없지요. 주님의 영(지혜 9,17), 성경 말씀과 계시, 기도와 영적식별, 사랑 실천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단순한 추론의 결과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을 하느님의 뜻이라 합니다(1테살 4,3). 거룩해지려면 사랑이신 하느님과 일치하여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의 사람이 되어 사랑을 영원토록 실행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되기 위한 요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뜻은 사랑에서 우러나온 자발적이고 친밀한 순종으로 실행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하시거나 허락하시는 모든 일에서 우리의 뜻을 그분의 뜻에 합치시키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지요.
오늘 제1독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셨는지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옛 질서를 대변하는 율법과 죄를 씻지 못하고 오히려 죄의식을 새롭게 갖도록 하는 제물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이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다 하십니다(히브 10,1-3). 구약의 희생제물로는 백성들의 죄를 없애지 못함을 아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속죄제물로 바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셨습니다. 그분은 강생으로 세상에 오신 그 순간부터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때까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참다운 제사를 바치신 완전한 대제관이셨습니다. 제사가 아니라 목숨을 바쳐 인류를 거룩하게 하신 것이지요.
우리도 목숨 바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새로운 영적 가족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나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기고, 내 기준이 아니라 기도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기꺼이 사랑을 실천할 때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지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예수, 내 하느님 나의 전부여!"(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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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라반의 말씀사랑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와 벗이 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친가족처럼 형님-아우, 언니-동생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면 참 멋지겠지요?
저는 그런 점에서 참 복이 많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훌륭한 분들과 많은 친분을 맺고 살아가니까요.
근데 무엇보다 신나는 일은 예수님의 친구요 형제라는 것, 그리고 그분의 가장 멋진 작은형제요 만인의 형제였던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의 형제란 사실이지요. 그러다보니 그분들이 맺어주시는 또다른 수많은 멋진 형제들도 있지요. 벗님들을 포함해서 말이죠.
벗님은 어떠시나요? 내가 형-동생, 형님-아우님, 엄마-이모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내 피붙이 가족 친지밖에 없나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벗님을 당신 동생이요 누이로 삼고싶어 하시네요. 신나지 않아요? 그런 분의 친구가 되는 것도 황송한 일인데 나와 형제가 되어 주시겠다니요!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공간이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밖에"(마르 3,31)와 "그분 둘레"(3,32) 그리고 "당신 주위"(3,34)입니다. 크게 외부와 내부로, 그리고 내부에서는 주변부와 바로 옆으로 동선이 그려집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있고, 예수님을 찾는다고 전해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곁에' 모여 말씀을 듣고 있는 이들을 향해,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3,34) 하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주위로 몰려와 당신의 말을 듣고 머무르는 이들에게 혈연과 친족의 경계를 넘어,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의 지위를 허락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곧 이어서 당신과 한 가족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덧붙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3,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참 어려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고 단순합니다. 즉, 열일을 제쳐두고 사랑하는 이 곁에 머물러 그분 말씀을 듣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라 하시니까요.
물론 육신적 필요와 가족 생계의 의무를 지고 살아야 하는 "몸"을 지닌 인간으로서, 모두가 늘상 주님 곁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만, 주님 곁에 머무른다는 것의 여러 차원을 생각한다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까지 시간과 공간, 에너지 모두를 봉헌해 주님 곁에 머물러 사는 삶도 있을 수 있고, 또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면서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도 있습니다. 주님께는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삶이 없기에, 예수님께서는 그중 어떤 삶의 형태도 배제하지 않으실 겁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당신의 뜻"(히브 10,7.9), 즉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셨음을 일깨웁니다. 그런데 "당신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위해 미리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은, 일반 사제들이 속죄를 위해 바치는 제물이나 예물이 아니었습니다."오히려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히브 10,5)
그 어떤 값지고 훌륭한 예물이나 짐승의 살과 피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바치실 "몸"을 마련해 주신 하느님.
사실 우리가 예물이랍시고 바치는 헌금이나 자선금은 물론, 우리의 재능이나 시간, 에너지, 목숨까지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 편에서는 엄청난 희생을 바치듯 생색내며 드리는 것들이, 실상은 진작에 주신 분께 제 때가 되어 되돌려 드리는 수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몸"을 바치심으로써 죄에 물들어 질척거리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하느님의 뜻이고, 또 하느님과 하나이신 당신 뜻이기에 온전히 하나되어 이룩하신 순명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몸" 덕분에 우리도 그분 곁에서 예수님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마르 3,35)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몸" 역시 주신 분께 고스란히 되돌려 드릴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를, 그리하여 인류와 세상에 물든 죄와 고통과 눈물 자국을 닦아내어 "거룩하게" 해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는 매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마태 6,10) 기도합니다. 또 매일 기도에서 나갈 때 "저희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며 행동하지 않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공동체 기도서, 나가는 기도) 하고 기도합니다.
오늘 이렇게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랑하는 나의 벗님이요 형님인 예수님 곁에 머무르면서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분의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가 됩시다. 그리고 우리의 맏형이요 오빠이신 예수님처럼 우리의 한 몸을 바쳐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다짐합시다.
이런 초대를 받은 벗님에게 축하드립니다. 멋진 형님, 멋진 오빠와 함께 복된 삶을 만들어 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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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하나님이 주신 영적 기업을 누리는 삶
<2025.1.28> 아침을 여는 묵상 (수 19:1~23절)
❝하나님이 주신 영적 기업을 누리는 삶❞
❚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필요한 것들을 풍족하게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 영적 기업을 지키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 절대적 신뢰가 필요합니다(1~9절).
일곱 지파들 중에서 두 번째로 시므온 자손의 지파가 기업을 분배받습니다. 그런데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기업 가운데서 기업을 분배받게 됩니다. 그 원인으로는 인구수의 감소입니다. 광야 생활 초기의 인구 조사기록(민 1:22)과 후기의 인구 조사 기록(민 26:14)을 비교해 보면 시므온 지파의 인구가 29,300명에서 22,200명으로 급격하게 감소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시므온이 바알브올에 가담한 죄를 범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쪽 네겝 지역의 열세 성읍들(2~6절)과 네겝 지역의 두 성읍과 평지 지역의 두 성읍(7절), 그리고 네겝의 라마까지 이어지는 성읍들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들(8절)을 분배 받았습니다. 시므온 지파가 분배 받은 성읍들 중 절반 이상이 유다 성읍과 중복되어 소개되고 있습니다.
시므온 지파와 유다 지파가 받은 기업들을 비교해 보았을 때, 얼핏 하나님의 불공평한 처사가 아닌가 하는 오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지파의 상황에 맞게 기업을 분배하셨습니다. 가끔 다른 목회자들과 교회들과 우리 자신 그리고 우리 교회를 비교하면서 ‘하나님은 참 불공평하시다...’라는 불평을 털어놓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신뢰하는 믿음이 없으면 현실의 삶을 이해 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게 됩니다.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있을 때, 현재의 상황을 풀어갈 수 있는 정답을 얻을 수 있게 되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성숙한 믿음이 필요합니다(10~16절).
스블론 지파는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아 분배 받은 성읍들과 마을들이 모두 열둘이었습니다. 스블론은 북쪽에 정착하게 된 다섯 지파 중에서 가장 먼저 기업을 받았고, 가나안 땅 북쪽 내륙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창 49:13절의 야곱이 스블론에 대한 예언을 따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스블론은 바닷가에 살며, 그 해변은 배가 정박하는 항구가 될 것이다...’(새번역)...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 땅은 넓지도 않고,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스블론 지파는 그 땅에 대해 불평하거나 문제를 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정하게 어떤 일들을 결정했다 하더라도 결과에 수긍하지 못하고, 불평과 불만의 세력으로 남아 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 중직자를 선출하는 과정 속에서 결과에 대한 후유증으로 어려움을 겪는 교회들이 종종 있습니다. 불평하기보다 감사함으로 모든 결과들에 수긍하는 사람이 성숙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전에 어느 기관에 지역 총무 면접을 본사에 보고 나오는데, 전체적인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때는 실망보다는 입술에서 ‘자유하자.. 자유하자..’라는 말이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역시나 좋지 않았습니다. ‘내 옷이 아니다..’라고 고백할 때, 오히려 평안함과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주어진 모든 환경에 감사하는 성숙한 믿음을 품는 삶이어야 합니다.
➲ 믿음의 충성이 필요합니다(17~23절).
네 번째로 잇사갈 지파가 제비를 뽑아 그들의 가족대로 기업을 분배받습니다. 잇사갈 지파가 분배받은 기업은 아주 비옥한 이스르엘 평야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18절). 이스르엘 지역은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남북을 잇는 무역로가 통과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점령하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담대히 싸워 그 땅을 차지 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 기업은 모두 열여섯 성읍과 마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업은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치열한 영적 싸움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강한 적의 무리 앞에 주저앉아 있거나 그 싸움을 피해버린다면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영적 기업을 얻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얻은 기업을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삶에 가장 밀접하게 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믿음으로 충성하는 삶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도, 누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의지하여 믿음으로 담대히 싸워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충성하는 자를 주님은 찾고 계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도 삶의 형편을 잘 아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영적 기업을 지켜내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워 보여도 은혜와 복을 맘껏 누리기 위해 부지런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아갈 수 있기를(19:1~23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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