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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내 생각에는 설민석과 함께 한국사 강의에는 ‘1인자’라고 여겨지는 최태성은 서울 대광고등학교의 역사 교사로 재직 타가 이제 아예 TV나 YOU-TUBE 전문강사로 나선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때때로 이렇게 역사책을 집필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학교에서 선생님 할 때보다 훨씬 바쁘기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역사 공부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인가에 대해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거를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 있고 왕조나 열전, 혹은 경제사를 역사라고 하기도 하지만, 분야가 다양할 것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가야 시조에 관한 기록은 역사로 보기도 하나, ‘호랑이와 김현의 이야기’, 만어사 돌무지를 ‘동해의 고기비늘’이라고 한 것을 역사라고는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역사가 어디까지인지,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는 많은 공부가 필요한 것 같다. 한국사를 말할 때, 우리는 고조선이 세워졌다는 기원전 2333년을 시작점으로 보고 있고, 그래서 우리 역사를 ‘5천 년’이라고 한다. 정확히 4357년인데 말이다. 아무튼 우리 역사, 즉 한국사는 물처럼 바람처럼 흘러왔다. 역사 속에는 태풍도 있었고, 독재도, 민주도, 전쟁도, 평화도 있었다.
이 책의 저자 최태성 선생은 누구나 한국사에 관심이 많지만, 어디부터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몰라하는 사람들과 학생들을 많이 만났다고 하면며 교양으로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단순한 흥밋거리로 머무는 역사가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꿰뚫는 기본서로서 책을 저술하고 싶었다고 한다. 될 수만 있다면 간단하게라도 책을 요약해 볼 생각을 한다. 책은 내가 보기에 거의 다 알려진 사실을 기술하고 있어서 새로운 것을 찾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책을 요약하기보다 내가 몰랐던 역사 사실을 찾아보기로 말이다.
고려시대 역사에는 삼별초, 호족, 문벌 등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단어들이 많이 나온다. 그중에 ‘별무반’이라는 것도 있는데, 고려 초 성종 때 창원에서 태어난 윤관(尹瓘)이 왕께 건의해 그동안 보병중심의 군대를 기병중심으로 만들 것을 건의해 만든 것이 별무반이다. 물론 이때는 말갈족이라 부르던 유목민족 여진족이 기병으로 되어 있어서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별무반에는 신기군, 신보병, 항마군이 있었는데, 항마군은 좀 생경하다. ‘항마’는 ‘마귀를 항복시킨다’는 뜻으로 실제로 이들은 승려로 이루어진 군대였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부처님의 손 모양을 떠올리게 한다. 고려가 불교국가였다는 것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윤관은 별무반으로 여진족을 격파해 동북 9성을 확보해 영토를 넓혔다. 하지만, 여진이 대대로 조공을 바칠 테니 땅을 돌려달라고 하여 고려는 그 말을 믿고 그렇게 했다. 아마 방어하고 관리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것을 지킬 힘이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절대로 고려를 침략하지 않겠다던 여진은 힘을 길러 금을 세웠고, 마침내 고려를 3번이나 침략한 거란까지 멸망시키고는 중국 본토의 송나라도 남쪽으로 몰아냈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고려에 조공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별무반에 혼줄 나던 여진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그 금나라가 청나라가 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역사다.
권력이 얼마나 좋은 건지, 무서운 건지, 역사를 보면 알 수가 있다. ‘부모자식 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이 권력’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말이 아니다. 고려 시대에는 常班이 구분되었던 사회였으니 ‘이자겸의 난’‘묘청의 난’‘망이 망소이의 난’‘무신정변’등이 여러 번 발생했다. 태조 왕건 때부터 지방호족이 중앙 고위 관리가 되어서 ‘문벌’이라는 세력을 형성하고 특권을 누렸는데, 비주류로서 나라를 바꾸려고 했던 그들이 이제는 보수화되어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변화에 대한 의지보다 지키려는 의지가 강했다. 역사는 언제나 그랬다.
여진이 세운 금나라가 事大를 요구해 왔을 때, 고려조정 실세는 이자겸이 쥐고 있었다. 그는 왕의 장인이자 외할아버지였다. 그는 둘째 딸 문경태후를 16대 예종과 결혼시키고, 셋째 딸과 넷째딸은 예종의 아들인 17대 인종과 결혼시켰다. 인종은 이모들과 결혼한 셈이다. 이런 사람이 금과 전쟁을 치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금의 사대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고도 이자겸은 도를 넘어, 자기 집을 ‘의천궁’이라고 부르고, 생일을 ‘인수절’이라 부르며 왕 행세를 했다. 그럼에도 실제 왕은 이를 거절하지 못했다. 결국 이자겸은 왕이 되겠다고 난을 일으켰는데, 이를 ‘이자겸의 난’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난은 실패로 돌아갔다.
왕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으니, 왕권은 어떠했는지 뻔하다. 인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개경이 아닌 서경출신 신진관리들을 등용해 개혁을 추진하기로 했다. 승려 묘청은 서경출신 개혁파 중 한 명이었다. 고구려 계승의식이 강했던 서경 세력들은 금에 대한 사대는 말도 안 된다며, 기운이 다한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면서 왕을 황제로 칭할 것과 왕권을 회복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금 정벌도 주장했다. 인종도 묘청의 주장에 따를 결심이었으나, 기득권 세력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김부식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서경천도를 반대했다. 끝내 서경 천도가 좌절되자 그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의 난’이다. 하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진압되고 말았다.
역사에 후회나 들이킬 방법은 없지만, 고려 역사에서 ‘무신의 난’만 없었어도, 문무가 합심하여 나라를 제대로 이끌었다면 그렇게 개방적이고 활기찬 고려가 얼마나 발전했을까 하는 가정이 떠오른다. 무장으로 전장에 임한 강감찬, 윤관, 김부식 이들 모두가 무신이 아닌 문신이었다. 문벌의 권력독점으로 무신에 대한 차별이 심했으며, 참고 참던 무신들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 바로 ‘무신의 난’이다.
김돈중이라는 새파란 문신이 연회에서 무신인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우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그냥 장난으로 볼 수 없었다. 조선시대도 그렇지만 수염은 남자에게 아주 중요한 상징이었다. 화가 난 정중부는 주먹을 휘둘렀고, 왕에게 이 일을 해결해 달라고 주청했다. 하지만 인종은 그 말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가 김부식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인종의 뒤를 이어 18대 왕이 된 예종은 무신들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1170년 8월 왕이 신하들과 보현원으로 나들이 나갔다가 무신들에게 수박희라는 놀이를 시켰다. ‘수박희(手搏戱)’는 요즘말로 격투기라고 할 수 있는데 나이 많은 이소응도 수박회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소응은 나이가 예순이 넘어 제대로 경기를 할 수 없었고, 결국 기권했다. 그러자 수박희를 구경하던 문신 한뢰가 경기를 하지 않는다며 그의 빰을 때렸다. 나이도 계급도 낮은 사람이 무신이라고 업신여긴 것이다.
끝없이 쌓여가던 무신들의 분노는 결국 터지고 말았는데, 그날 밤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갓 쓴 자들은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죽여라.”고 외치며 무신들을 제거해 나갔다. 이것이 바로 ‘무신정변’이다. 한뢰와 김돈중을 비롯한 문신들이 살해당했고, 의종은 쫓겨났다. 의종의 동생 명종이 허수아비 왕으로 등극했다. 드디어 문벌 시대가 끝나고 무신들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비전은 없고, 힘만 있었기에 나라가 제대로 돌아갔을 리 없다. 초기에는 권력자가 수시로 바뀌었다. 그러다 마침내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하고는 이후 60여 년간 고려를 지배했다. 무신정권 때 몽골군이 침입해 왔고, 대몽항쟁으로 강화도로 천도하기도 하고, 문화유산이자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된 팔만대장경을 만들기도 했다.
고려시대는 무신정변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고, 조선시대는 임진왜란을 앞뒤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 1392년 개국한 뒤 200년이 되던 해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터졌으니, 그전에는 태평천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랬으니 전쟁에 대한 준비가 있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일본에, 또 중국에 당했음에도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일이 벌어질 때는 나도 마음이 안타깝고 비애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 두 전쟁에 대한 역사를 살펴볼 것도 많지만, 여기서는 줄이고, 조선 숙종 대에 있었던 예송논쟁에 대해 보기로 한다. 여기에는 송시열이 등장하는데, 그는 유일하게 공자, 맹자처럼 존칭으로 ‘자’자를 붙여 부른 유학자로 그가 만년에 귀향에서 풀려나 제주도에서 올라오다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나이 83세에도 원체 장대하고 건강한 체질이라, 사약을 3사발이나 마시고서도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예송(禮訟)논쟁은 장례 예법 적용을 두고 벌어진 사건을 말하는데, 이때 (현종) 논란이 된 것은 상복 입는 기간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으로 2번의 쟁송이 벌어졌는데, 현종의 가계에 그 원인이 있었다. 현종의 아버지는 효종, 할아버지는 인조로 인조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가, 47일 만에 삼전도에서 ‘삼궤구고두례’*를 하고, 삼전도비가 세워지게 한 원인을 제공한 왕이다. 남한산성에서 패해 항복하면서 첫째 아들 소현세자와 둘째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와 소현은 왕이 되지 못하고 죽고, 둘째 봉림이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이 되었다. 효종은 북벌정책을 펼치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삼배구고두례라고도 함)라고도 한다.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명·청대 중국의 인사법으로,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 때 청태종 홍타이지가 항복한 인조에게 인사로 받았다고 한다. 인조와 신하들은 47일간 남한산성에서 벼텼지만, 결국 보급실패로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그날의 치욕은 근처에 송파구 삼전동에 삼전도비가 세워졌고(현재 남아 있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끝까지 항전을 주장했던 김상현 등이 청나라에 끌려가기도 했다. -손자들에게 문자메시지-
문제는 인조로부터 시작된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그런 치욕을 당했음에도 왕비가 죽자, 젊은 새 중전을 들였는데 아들 효종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다. 1차 예송은 효종이 먼저 죽으면서 생겼다. 새어머니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벌어졌다. 이전부터 율곡과 이이로 대표되는 ‘동인과 서인’이 붕당을 짓고 서로 ‘공존’하고 있었으며, 그 후에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다가 남인만 남은 상태에서 남인과 서인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서인을 대표하는 송시열이 효종이 장남이 아니니 예법대로 하자는 것이었고, 남인은 왕가니까 특별대우가 필요하다고 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무려 15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간 마당에 신하들끼리 논쟁을 하니 현종은 빨리 해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원리원칙대로 하자는 송시열과 서인의 주장대로 하게 되는데, 여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이번에는 효종의 아내인 현종의 어머니가 죽었다. 문제는 젊은 시어머니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2차 예송의 시작이었다. 장남의 며느리가 죽었을 경우 시어머니는 상복을 1년간 입도록 되어 있었으나, 장남의 며느리가 아닌 경우에는 9개월만 입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인은 효종이 장남이 아니니 예법대로, 남인은 장남은 아니지만, 왕가의 며느리니까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게 예송에 시달린 현종도 2차 예송이 끝나고 얼마 뒤 죽었다.
현종의 뒤를 이은 외아들 숙종은 영화 등 콘텐츠에 여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묘사되기도 하지만, 그는 우왕좌왕한 인물이 아니었다. 태종 못지 않은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것은 숙종은 그만큼 적장자로써 정통성이 확보돼 있었고, 누구 못지않게 똑똑했다. 조선 역사에는 12살에 왕위에 오른 왕이 3명 있었는데, 단종과 숙종, 고종이지만 수렴청정 이나 섭정없이 바로 왕위에 올라 일을 수행한 왕은 숙종뿐이다. 새 왕이 되었다는 것은 선왕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는 선왕의 평가서라고 할까. 행장을 기록해야 했다. 아버지 행장을 기록하기 위해 예송에 관한 기록을 살피던 숙종은 불쾌함을 느꼈다. 왕을 사대부와 똑같이 취급하는 송시열과 서인들이 괘씸했던 것이다. 숙종은 서인들의 잘못을 행장에 적으라고 했다.
당시 집권당은 서인이었고, 수장이 송시열이었음에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숙종의 나이는 불과 14살이었다. 할아버지뻘인 송시열을 가차 없이 비난할 정도였으니 그의 카리스마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숙종은 서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남인에게 권력을 모두 몰아주었다. 이것을 ‘환국(換局)’이라고 하는데, 붕당(朋黨-政黨)정치의 키워드가 ‘공존’이었다면 환국은 ‘일당제’로 반대당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쪽이 권력을 잡으면 다른 쪽은 폐허가 되어야 했다.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다 사약을 받기도 했다. 숙종은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그것은 그의 정통성이 한몫했다. 45년간 재위한 숙종은 나름의 성과도 남겼다.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실히 하고, 독도 문제도 손본다고 했으나 매듭짓지 못하던 중에 안용복이 해냈다. 안용복은 관리를 사칭했다고 귀양을 가는 처벌을 받았으나, 그 일이 없었다면 일본이 다케시마라고 주장하는 독도문제를 어쩔뻔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에게 시호를 내렸으며, 사육신을 복권시켜 충신으로 이름을 남게 했다.
숙종에 대해 하나 더 살펴볼 것은 인조가 청에 끌려간 두 아들 중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설이 있으나 증거는 없는데, 그럴 이유가 쌨고 쌨다는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했는데도 소현세자가 청에 끌려갔다가 돌아와서 한다는 말이 ‘그곳에서 신기하고 발전된 서양 문물을 많이 보았는데, 청은 생각보다 훨씬 발전된 나라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배워야 한다고 한 것인데, 이런 말을 하는 아들이 곱게 보였을 리 만무하다. 화가 난 인조가 벼루를 소현세자에게 던졌다는 이야기가 야사에 전하고, 얼마 뒤 소현세자가 죽었으니 독살이라는 소문이 있을 만도하다. 또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뒤 며느리인 세자빈 강씨에게도 사약을 내리고, 손자들을 모두 귀양보냈는데 그들의 억울함을 숙종이 모두 복권시켰다. 이것은 단종의 일과도 또다른 차원으로 할아버지가 한 일을 이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숙종의 강한 왕권을 엿보게 한다.
조선의 후예로서, 한국인으로서 가장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역사 장면 중 하나가 ‘민비시해사건’이라고 생각된다. 나라의 국모가 적에 의해 살해되었음에도 당하고 있었던 심정이 어땠을까 싶기도 하고, 그 원수는 두고두고 갚아야 하지 않는가 싶기도 하다. 그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을 연도별로 보면 이렇다. 1875년 운요호사건으로 일본이 개항 요구를 시작하여 이듬해 강화도 조약 체결로 3포가 개항되었으며, 일본에 의한 신식 군대가 들어오면서 구식 군대에 의한 임오군란이 발발(1882년), 그 결과로 청나라 군대가 진입하였고, 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나 실패, 10년 뒤인 1894년 아래로부터의 개혁운동인 동학농민혁명 발발하였으며 이것이 진압되면서 갑오개혁이 일본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신분제가 사라지는 등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개혁안이 많이 받아들여졌다.
1894년부터 10개월 동안 이어진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 일본은 더 적극적으로 조선에 개입하게 되고 청과 가까웠던 민씨 세력은 타개책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다. 일본은 왕비가 자신들의 계획에 방해된다고 시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는데, 1895년 을미년 일로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갑오개혁에 이어서 이루어진 을미개혁을 단행 단발령과 태양력을 사용하게 되는 등 일본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왕비 시해로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꼈고, 스스로 판단해 아라사, 즉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러시아 영향력이 커졌고 서로 견제하다 보니 일러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덕수궁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이때 대한제국은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즉,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과는 달랐다.
세력균형을 이루고 대한제국이 일어났으면 좋으련만, 러일의 세력균형은 오래가지 못했다. 1906년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자 이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가져가겠다는 ‘을사늑약’체결을 요구하고,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5적을 부추겨 조약체결을 강압하기에 이른다. 고종은 이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위종, 이준, 이상설 등 밀사를 파견하지만, 열강들이 말한 평화는 제국주의에 짓밟힌 나라들에게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이런 빌미로 인해 고종은 퇴위 당했고 순종을 앉혀 1907년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는 군대를 해산했으며, 1909년 안중근이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암살하였음에도 대한제국 국권은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넘어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