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반을 주의하라(막7:9-13) 신앙생활하면서 나를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처럼 중요한 게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생명도 주셨기 때문에, 나는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당연한 헌신이,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할 우리 삶의 의무들을 면제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내 삶에 성실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성실히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과 내 삶에 성실한 것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내 삶에 성실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성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문제는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 삶이야 어떠하든 신앙생활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식이 문제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러한 신앙형태가 만연했습니다. 즉, 신앙과 삶이 분리된 신앙형태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고르반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로써 하나님께 드려졌다, 하나님께 드린 거룩한 것이란 뜻입니다. 이 자체만으로 보면 너무나 아름다운 단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고르반이란 단어 자체는 매우 아름다운 것인데,당시에 이 말이 나쁘게 악용되었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한 것이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께 구별된 것이라, 부모님께 드릴 의무는 이제 없어졌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서 부모에 대한 의무를 저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르반을 선언하는 사람들은 매우 경건한 사람들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종교공동체입니다. 성전에서 칭찬을 듣는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매우 유익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칭찬을 듣고자 고르반을 경쟁적으로 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여기에는 당시 종교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이 고르반 제도를 통해서 부를 챙긴 것입니다. 이 제도를 통해서 사람들을 고르반으로 유도했고, 성전과 자신들의 부를 챙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러한 행위는, 자기들이 만든 전통에 의해 하나님 말씀을 거스리는 행위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에는 분명하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고르반이라는 제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당시 사람들이 즐겨했던 고르반적 신앙생활은 없습니까? 서두에서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이런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교회생활은 열심히 하는데, 집안에서 부모님께 시간을 드리고 효도하는 일에 게으르면 그것이 고르반 같은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전세계에서 가장 열심이 있는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달에 독일의 유명한 전도자인 울리히 파르자니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세미나 중에 그 목사님이 한국교회의 열심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교회는 한국교회의 기도와 열심을 배워야 한다고 몇 번을 강조해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한 말을 들을 때, 한국교회에 속한 저로서는 뿌듯하기도 했지만, 마음 한 편에는 그런 칭찬을 듣기가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다른 나라 교회들에 비하면 확실히 열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의 열심 만큼이나, 우리의 삶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목적이 어디 있습니까? 교회에서 열심만 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점에서 여러분의 부모님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일주일에 한 번 하나님을 뵈러 나와서 두 시간 시간을 드리면, 부모님께도 두 시간은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수입이 있는 분들은, 교회에 헌금하는 것을 줄여서라도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작정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부모님이 병원에 갈 일이 생겨서 급히 돈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부모님이 가진 돈이 없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러면 이 때에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고르반,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것이니 나는 부모님께 드릴것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경우 부모님께 드리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생활과 가정생활이 분리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때문에 가정생활에 소홀히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으로 돌아가십시요. 부모님께로 돌아가십시요. 자녀에게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남편과 아내에게로, 형제 자매에게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디모데전서 5:8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니라"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핑계로 우리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족으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구약성경 맨 마지막 말씀이 어떤 내용인지 아십니까? 매우 웅장하고 대단한 말씀으로 결말을 맺을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평범한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돌아가고 자녀의 마음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말라기서 4:4-6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모세가 명한 율례와 법도, 세례요한이 와서 외친 회개의 핵심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모 마음이 자녀에게로, 자녀 마음이 부모에게로, 남편 마음이 아내에게로, 아내 마음이 남편에게로, 형제 자매 마음이 서로에게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가장 근본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을수록 우리의 마음이 진정 나의 가족을 향해 나가고 있습니까?,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만 잘 한다고 되는 것이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도 함께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만 신의를 지킬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5:23, 24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과 삶은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하게 지내지만, 사회에서는 세상 가치관을 따라 살아간다면 이것이 고르반적인 것입니다. 만일 목회자가 교회에서는 거룩한 모습으로 일하지만, 가정에서 섬기는 모습으로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르반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부흥사 아내가 솥단지를 강대상 옆에 걸어 넣고 살고 싶다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만일 학생이 교회에서는 열심을 내는데, 공부는 게을리 하면 고르반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학생은 학생의 본문에 맞게 공부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직장생활하는 사람이 교회에서는 열심히 섬기는 데, 직장에서 동료들을 섬기는 자세로 일하지 않는다면, 그가 교회에서 섬기는 것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업가가 자기 사업을 통해서 자기 잇속만 챙기려 하고, 직원이나 이웃을 위해 나누지 않는다면 고르반적인 것입니다. 정치인이 교회에서 직분도 갖고 있고, 낮은 자의 모습의 되어서 주차장 봉사도 하지만, 정치현실에서 약한 자들을 위해 정치를 하지 않는다면, 그의 모든 봉사는 위선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생활과 삶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최종적으로 세상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마 6:16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빛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빛은 사람 앞에 비취기 위한 것입니다. 그 빛은 우리의 착한 행실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경건만이 아니라, 오늘 내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개인 경건에 지나치게 강조해 왔습니다. 주일 잘 지키고, 십일조 잘 하고, 술담배 안하면 최고 신자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야 하는 신의와 진실함, 사랑과 섬김, 희생과 봉사 등은 소홀히 여겨왔습니다. 우리는 개인경건 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경건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직경건과 수평경건이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경건을 강조하나, 수평경건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이유는 세상을 너무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은 타락한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 자기 목숨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가장 깊은 곳까지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변화산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쳐다볼 수 없을만큼 눈부시게 변화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들인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 17:4절입니다.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눈부신 천국의 영광 중에 영원히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데리고 산 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 산 밑에는 귀신들려 고통받는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통받는 이 세상을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그 세상 한 복판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빛이 되고 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예수님의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세상이 힘들다고, 더럽다고 피할 것이 아니라, 그리고 들어가서 빛이 되고, 그들에게 참된 삶의 길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어느 성도님 심방을 갔는데, 그 분이 고백하기를 나이트 클럽에서 일을 해서 너무 괴롭다고 했습니다. 그곳을 나오려니 다른 직업을 갖는 것도 쉽지 않고 해서 할 수 없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으면 보통 어떻게 반응합니까? "기도해서 그것을 빠져 나오십시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대부분 이렇게 반응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일들을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죄책감에 빠져 사는 사람들,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그 분에게 저는 "아닙니다. 그곳에서 성도님이 빛이 되십시오. 주님이 그곳에 빛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우리가 피하고 도망할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빛을 가지고 들어가서 빛을 밝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이 우리의 일터이고, 선교현장인 것입니다. 날마다 이러한 사명감을 갖고 세상을 향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고르반,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것으로,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이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과, 사람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때문에 가족을 섬기는 의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혹시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것으로 나를 위로하면서, 가족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처럼, 여러분의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향하기를 바랍니다. 고르반을 주의하라는 뜻은, 우리의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 신앙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이웃 안에서 증거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사람들 앞에서 빛이 되기 위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을 정죄하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장 어둡고 괴로운 삶의 현장으로 깊이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거기서 주님의 빛을 비추십시요.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오신 것입니다. 아멘 |
출처: 잘츠부르크 한인교회, 린츠 한인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남기 목사
첫댓글 아멘...
긴글이라....
고생이 많은데,,, 많이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너무나 좋은 설교문이네요. 저 스스로를 돌아보고 점검하게 되네요.
저역시 감사드립니다,,,
저번주에 처음으로 교회를 갔는데, 목사님이 말씀하신거와 비슷해요..좋은글 감사합니다
에네르님 600번쨰 ..라는 단어가 늘 생각하게 될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믿음의 가족이셨군요
*^*......귀한 말씀들.. 계속 올려주셔요..
네,,가급적이면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요 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