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94
9월28일[연중 2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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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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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yh5UZD3n10
[서울대교구 서 웅 마오로(전농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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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젊은이 여러분, 꽃같은 시절은 잠시입니다!>
꽃같은 시절은 잠시입니다.코헬렛 저자의 삶과 신앙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그는 인생의 산전수전과 우여곡절을 다 겪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현자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 살고 있었지만, 이 세상을 초월해서 살던 사람, 인생의 지혜와 경륜으로 충만했던 스승이었습니다.
그런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후배들에게 건네는 조언과 권고는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빛나는 보석 같습니다. 두고두고 마음에 새기고, 틈만 나면 연필로 꾹꾹 눌러 필사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코헬렛 말씀을 묵상하면서 개인적으로 크게 반성하게 됩니다.
나는 나름 인생을 좀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 어려운 시대 갈팡질팡하는 후배들에게 지혜와 경륜을 갖춘 선배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때 그따 적절한 조언과 행동으로 젊은이들에게 삶의 이정표가 되고 있는지?
오늘 우리가 봉독한 코헬렛 말씀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참으로 요긴한 말씀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읽고 마음에 새길 명언입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편도나무: 아몬드 나무라고도 합니다. 성막의 등잔대가 아몬드 나무의 꽃 모양으로 만들어집니다.
*참양각초: 근동 지방에서 서식하는 생존력이 강한 나무, 케이퍼 나무로 추정됩니다. 건조한 광야에 뿌리를 내리고 어여쁜 꽃을 피우는 나무입니다. 연어 요리를 먹을 때 이 열매를 절여 곁들여 먹곤 합니다.
젊은 형제 자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꽃같은 시절은 잠시입니다. 순식간에 세월은 흐르고 마치 번개처럼, 섬광처럼 인생이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오늘 하루에 충실하십시오. 젊은 시절부터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께서 기뻐하실 삶을 추구하십시오.
오늘은 다시는 오지 않는 축복과 은총과 구원의 날입니다. 부디 오늘을 허송세월하지 마시고 충만히 누리고 만끽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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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h2z5jxbrT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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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지 않은 진실은 없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기적과 이적에 놀라워하고 있었습니다. 반전을 좋아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하필 이때,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기적을 행하시는 스승을 따르는 기쁨에 취해있던 제자들에게는 좀처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니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해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무지(無知)라고 합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을 영적인 무지라고 합니다. 어떠한 것이든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스트레스를 원하지 않으면 진리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진리는 등 뒤에 항상 십자가를 숨기고 옵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영적인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십자가의 신비에 관해 묻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진리를 알고 싶어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십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작은 진리들을 거부한다면 마지막 때에 진리 자체이신 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손에 넘겨지셔야 하는 이유에 관한 것은 성경에 수 없는 예시들이 나옵니다. 그 한 예를 들어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과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아비멜렉은 이 세상의 왕에게 아무 힘도 없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마음에 들어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는 자신의 여동생이니 맘대로 데려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아내를 그렇게 쉽게 빼앗기는 무력함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왜 남의 아내를 탐내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몰랐다고 항변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니 죄가 아니란 소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죄사함의 중재를 부탁해야만 죄가 사해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비멜렉은 모르고 한 모든 행위도 하느님께 죄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싶어 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저는 신학교 들어갈 때 하느님께 많은 것을 해 드린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영하는 성체에 감사를 드리지 못한 순간순간이 다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마치 아브라함의 사라처럼 무기력하게 넘겨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모든 것을 내어드려도 마땅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관계가 완성됩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도 그렇게 계약을 맺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빚진 것을 깨달아 봉헌할 줄 알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진리라는 이름을 가지셨다면 우리는 진리여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만날 때 이전의 내가 무지요 어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무지한 우리를 빛으로 밝혀주려고 옵니다. 무지한 자아가 죽기를 원하면 진리는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영화 ‘조커’에서 한 남자가 왜 무자비한 악당이 되어가는지를 표현하려 하였습니다. 영화에서 이 남자는 착하디착하게 나옵니다. 그리고 시대와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간다고 표현하려 합니다.
하지만 조커가 빠져있었던 것은 ‘지나친 자기애’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자아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기애는 자아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진리는 자아를 죽이는 칼과 같습니다. 그러니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기를 원치 않습니다. 누가 자기를 찌르는 칼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지식은 이제 어둠만 더 짙게 만듭니다.
조커에겐 엄마가 있습니다. 조커는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늘 웃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엄마는 토마스 웨인이라는 시장이 그렇게 잘 지내는 것은 자신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잠깐 그 집에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커는 엄마의 편지를 보고 자신이 토마스 웨인의 아들이라고 믿게 됩니다. 조커는 그렇게 믿고 싶어 합니다. 피해자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더 많이 주고 더 많은 것을 빼앗긴 억울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냉혹했습니다. 토마스 웨인은 조커의 엄마가 과대망상증으로 미쳐있었고 조커는 입양한 아이라고 말해줍니다. 조커는 혼돈에 빠집니다. 엄마의 병력을 확인합니다. 사실 진실을 알려고 하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선해지고 싶거나, 더 악해지려거나. 여기서 조커는 악해지기로 했던 것입니다. 자기도 과대망상증에 빠져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토마스 웨인의 말대로 엄마는 자기애 과다 성격장애였고 밥도 안 주고 자신을 폭행하여 자신의 뇌까지 손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살해합니다.
만약 토마스 웨인이 거짓말을 한 것이고 그 많은 돈으로 병원의 기록까지 고쳐버렸다면 어쨌을까요? 조커는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은 것입니다.
악당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진리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해 나를 죽이고 싶은지, 타인을 죽이고 싶은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참 진리는 나를 죽이기 때문에 불편한 것입니다. 하지만 조커는 어머니를 죽이며 해방감을 느끼고 기뻐합니다. 나를 죽이며 기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진리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도 진리가 아닙니다. 나를 죽이려는 마음이 없으면 진리도 들어오지 못하고, 그러면 영원히 그 불편했던 진리와 헤어져야 합니다. 그곳이 지옥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진리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불편한 진리를 향한 나의 문이 열리고 참 진리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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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2024년 9월 28일입니다. 이 시간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로부터 2024년이 지나간 날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물리적인 시간 속에서 생활합니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된 현대사회는 이 물리적인 시간의 틀 속에서 바쁘게 돌아갑니다. 시간은 돈처럼 여겨집니다. 평균 시급은 시간당 15$ 정도 합니다. 주차하는 경우에도 시간당 주차비를 계산합니다. 시간은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육상 경기에서 시간은 순위의 기준이 됩니다. 9월 28일이 뜻 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이 결혼기념일, 생일, 축일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9월 28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이것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의미의 시간에 가족들이 만나고, 연인이 만나고, 이웃이 만납니다. 74년 전 9월 28일은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빼앗긴 서울을 되찾은 날입니다. ‘9.28 수복일’이라고 배웠습니다. 이런 의미의 시간들이 모여서 문명이 되었고, 문화가 되었고, 역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약속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시간은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시간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신앙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가치의 시간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신앙인들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 영원한 시간을 찾으려 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에서 우리는 모두 한 줌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의미의 시간에서 우리는 흔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신앙의 시간은 우리를 부활의 문으로 안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물리적인 시간, 의미의 시간 속에 있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난과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사람,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치의 시간을 사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에게 영원의 시간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하느님은 어떤 것을 원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식별’입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한번 써보고, 살아봐야 안다.’ 겉보기와는 다른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식별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식별의 결과입니다. 결과가 좋고, 결실이 있으면 영적식별을 잘 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고, 결실이 없으면 그것은 악의 유혹을 따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위로와 고독’이 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결과는 늘 기쁨과 평화입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도 ‘위로와 고독’이 있습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 결과는 늘 불평과 불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영적식별을 잘 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영적식별을 잘 하는 사람은 3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남의 의견도 충분히 듣습니다. 누군가 영적 식별을 잘 했는데, 교만하다면 그것은 악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둘째는 진중함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습니다. 남의 허물과 탓을 이웃에게 전하지 않습니다. 깊은 바다와 같아서 사람들을 품어 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순종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의견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를 때, 교회를 비판하고 순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영적식별이 아닙니다. 비록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영광의 길이기도 하지만,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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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44-45: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가 있은 다음, 그리고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셔서 감탄하고 있을 때,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하시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절)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감히 물어볼 생각도 못 하였다. 예수님을 그렇게 따르면서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직은 그들이 스승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하시는 것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것임에도 그것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주님을 따라다니며, 체험한 여러 기적, 그리고 얼마 전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으며,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시는 권능의 예수님만 보았기 때문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말은 못 하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고,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시고, 한마디 말씀으로 사탄을 내쫓으셨던 분이 살인자들에게 넘어가시다니! 우리가 그분을 잘못 알았던 것인가?”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신앙은 걸림돌이 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 사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후 전해준 신앙과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예수께 대한 고백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제자들과 같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과 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으로, 예수님으로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이기적인 생각과 물질적인 집착에 팔아넘기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뜻과 말씀을 성경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겠고 깨달아 올바로 생활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앞서 그분이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나와 그분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그분에 대해 올바른 알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게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없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또 실천하면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 강생시키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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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모든 것이 허무라고 말하던 코헬렛이 그다음에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고 하더니, 이제는 젊음을 즐기고 근심을 떨쳐 버리라고 권고합니다.
코헬렛은 오늘 독서에 해당하는 부분 외에도 그의 책 여러 곳에서 인생을 즐기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허무라고 말하던 그의 태도와 모순되게 보여서 어떤 이들은 이 책이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조화시킬 수 있는 열쇠가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코헬렛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없음을 절감하였고, 그래서 인생이 허무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그분께서는 모든 일을 “제때에 아름답도록”(코헬 3,11) 만드신다고 믿을 때, 더 이상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고민으로 삶을 어둡게 만들지 않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 즐기라는 것은 영원한 기쁨이 아닙니다. 코헬렛은 아직 영원한 생명이나 천국의 기쁨 같은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라고 믿으며 맡깁니다. 젊은 시절에는 젊은 시절에 누릴 수 있는 것을 즐기고, 꽃이 피면 그 꽃이 시들기 전에 꽃을 즐깁니다. 젊거나 꽃이 핀 그 순간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가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심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모순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의탁으로 채웠기에, 코헬렛은 허무한 삶 속에서도 오늘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 머문다면, 화답송 시편이 이러한 인간에게 주는 대답이 되겠습니다. “저희 날수를” 헤아린다는 것도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인간, 덧없이 사라지는 인간에게 안식처는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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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파스카의 신비>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9,43ㄴ-45)
1) 이 이야기는 ‘현장 기록’이 아니라, 사도들의 ‘회상’입니다. “우리는 그때 그랬었지.” 라는 회상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서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할 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다.’ 라는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기록했습니다. 복음서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부활 신앙’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고, 묻는 것도 두려워했다는 것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 부활의 ‘놀라움’과 ‘위대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인류 전체를 비추는 ‘영광의 빛’이라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무지의 그림자’입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제자들은 ‘왜 그래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하나로 묶어서 ‘파스카의 신비’ 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살아 계시는 분으로 오셨기 때문에 ‘파스카’이고,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에 ‘신비’입니다.>
2)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을 예고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마태 17,23; 마르 9,31) 그런데 지금 루카복음에는 부활 예고 말씀이 없습니다. 복음서 저자가 생략한 것인지, 필사 과정에서 누락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말씀을 세 번 하셨는데, 세 번 다 수난과 죽음만 예고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도 예고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문에 놀라겠지만 믿음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말씀이고,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넘겨지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라는 말은, “그 일은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 일이어서”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하였다.”라는 말과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라는 말은, 제자들의 머리가 나빴음을(지능이 부족했음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아직 부족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또 하느님의 신비에 속한 일을 알아듣고 이해하려면, 우선 먼저 믿음부터 가져야 합니다. 먼저 믿으면, 언젠가는 이해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수난 예고 말씀을 무서워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말씀을 듣는 것을 싫어했다는 뜻입니다. <생각하기도 싫고, 듣기도 싫으니까, 묻는 것도 싫었던 것입니다.>
3) 우리 인생도 ‘파스카의 신비’의 연속입니다. 살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이 계속 찾아옵니다. 죄를 지어서, 그 죄 때문에 겪는 고난이라면, 그것을 보속으로 알고 견디면 됩니다. 그러나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래서 보속이라고 말할 수 없는 고난들이 많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6ㄴ-7)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우리가 살면서 겪는 고난과 시련은 하느님 나라에 잘 들어가기 위한 ‘단련’과 ‘정화’ 라는 것입니다.>
또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사실 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욥의 인내에 관하여 들었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동정심이 크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야고 5,10-11)
‘파스카의 신비’는 고난과 죽음 너머에 부활과 생명과 참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에 관한 신비입니다. 그 믿음이 있으면 고난과 죽음을 정면 돌파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신앙인들이 고난과 죽음을 향해서 나아간다고만 생각하겠지만, 믿는 우리는 부활과 생명과 참 행복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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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귀담아 들어라>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 상황에서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이어졌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우연히 이 말을 하신 것은 아니고 의도적으로 하신 말씀임에 분명하다.
우선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란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일이다. 예수님이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어 어린이를 고쳐주고 나니까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몹시 놀랐다."고 하였다. 놀랄 만도 하다. 말씀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일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고 그들의 주위를 환기시키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도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그들처럼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하며 들떠 있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들과 제자들은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어제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한 세례자, 엘리야,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 말했지만 제자들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한 사람들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싶어하고 그런 것을 바라고 거기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잘 모르고 다만 병이나 고쳐달라고 그런 것만을 쫓아다니며 거기에 매달리는 신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제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 병을 고쳐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고백한 그리스도는 단순히 병을 고쳐 주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분이시다.
악령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는 것도 좋지만 그 상태에 머물지 말고 한 발짝 더 나아가 "하느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병을 고쳐 달라는 수준에 머물고 만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당신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당신은 나를 구원해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무엇이든지 당신께서 하라는 대로 나는 할 것이며 또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구원자(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라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면 오늘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어떤 희생을 치루셔야 했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분이 치루신 희생을 나도 치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순히 말씀 한 마디로 나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이 가셨고 그 길이 곧 내가 구원받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렇게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아보고 믿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고 하셨다.
사람은 무엇을 듣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듣는 것에 따라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귀담아 들은 것이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마음에 들어 간 말에 따라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것에 의해 행동하게 된다.
마치 땅에 떨어진 씨가 그곳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무슨 말을 귀에 담느냐에 따라서 거기에서부터 열매를 맺게 된다.
루카는 이 말씀 앞에 어린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영이 사로잡히기만 하면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영은 아이를 뒤흔들어 거품을 물게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아들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 달라고 청하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여기에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마르 9,25)고 하였다. 더러운 영이 들어가면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거품을 흘리며 땅에 뒹군다. 아이는 더러운 영이 들어갔고 그 영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귀에 무엇을 담느냐 즉 우리 마음 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매일 욕하는 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는 욕을 하게 되고, 좋은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좋은 말을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법이다.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 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신명 6,4-7)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사람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제자들이 "하느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아마도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자들이 감히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제자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와 지금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을 귀에 담아두지 않으면 그리고 그 말씀이 마음 속으로 들어 가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 없이 우리 나름대로 말하고 행동 할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이 말을 명심하여라."고 "이 말을"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말을 많이 하셨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귀에 담아 두어야할 말은 바로 "이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예수님을 이해하는 열쇠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이해하게 되면 예수님의 다른 말씀과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어떤 말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만큼 "이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는 말은 권고의 말씀이 아니라 명령이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은 내 생명을 바친다는 뜻이다. 내 운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 손에 있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것은 내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요, 다른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하는 종, 즉 봉사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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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제자들이 다가올 예수님의 수난을 두려워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자신들이 바란 예수님과 실제 예수님 사이의 깊고 깊은 간극 때문이었지요. 그 간극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로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일종의 비겁함입니다. 대개 비겁함은 제 잇속 계산과 상응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가 종교적이고 신앙적이지만은 아닐 테지요. 당시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멋진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른바 묵시적 열광의 시대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살아갔습니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내일의 달콤한 인생을 향한 묵시적 환상은 활개를 칩니다. 그런 열망을 단번에 꺾어 버리신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제자들은 허탈과 허무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뚜벅뚜벅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루카 복음은 19장까지 열한 개의 장(9,51―19,48)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예수님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수난을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은 얼마간의 비겁함과 얼마간의 두려움이 뒤섞인, 그야말로 제자들이 복잡한 감정의 다발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 다가갈수록 점차 다듬어진 신앙의 정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꼬여 버린 삶의 방향에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제자들입니다.
신앙이란 알아듣고 깨닫는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몰라서 무모하게 내맡기는 의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 수난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겠습니까. 그저 일상 속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그분께서 함께하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 내는 것이겠지요. 잘 모르지만 이 몸짓이 앎의 또 다른 조각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살아 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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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제1독서 코헬렛의 저자는 인생의 젊음과 아름다운 시절을 기쁘게 즐기되, 하느님의 심판과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만족과 기쁨에 빠져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노년과 죽음 그리고 심판의 때가 올 것을 알고 늘 하느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
기쁘고 모든 일이 잘될 때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찾는 이라야 시련과 불행이 닥칠 때도 그 가운데서 하느님의 현존과 구원 의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첫 번째 수난 예고(루카 9,22)에 이어,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당신 수난을 예고하신 일을 전합니다. 사실 이때는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9,28-36)과 더러운 영을 권능으로 쫓아내신 일(9,37-43) 바로 다음으로, 모든 이가 예수님을 매우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던 때였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루카 18,32; 24,7.20 참조)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으로 어깨가 으쓱하며 한껏 우쭐해졌던 탓인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선뜻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에 대하여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아직은 불길하고 굴욕적인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한결같이 그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작은 시련과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곤혹스럽고 피하고 싶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을 더 열심히 찾게 되고, 그분의 도움과 은총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게 되니 그 또한 감사드릴 일입니다.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일상일수록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그분과 함께 살아, 시련과 단련의 시기를 만날 때도 한결같은 믿음과 평화 속에 굳건히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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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9,44)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다가오는 구절은 바로 ‘귀담아들어라.’라는 표현입니다. 사실 요즘 ‘공감적 경청’이라는 말을 근래에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공감적 경청은 상대방의 관점과 입장에서 듣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아울러 「명량」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참된 리더쉽이 무엇인지 보여 준 이순신 장군도 경청을 소홀히 하지 않았잖아요. 요즘 와서 경영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경청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잠시 공감적 경청에 대하여 ‘이정훈’의 「소통의 기술」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자는 경청의 수준과 단계를 5등급으로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5등급: 상대방을 무시한다. 전달 내용이 하나도 없다. 둘째, 4등급: 듣는 척한다. 자신의 생각 속에 빠지고 집중하지 않음으로 계속 불편해진다. 셋째, 3등급: 선택적으로 듣는다. 즉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내용이 나중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넷째, 2등급: 귀 기울여 듣는다. 내용에 집중해서 듣는다. 다섯째, 1등급: 공감해서 경청한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경청의 단계에서 가장 높은 단계는 바로 공감적 경청입니다. 공감적 경청은 한 마디로 상대방에게 집중하여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상대방의 생각과 느낌 즉 감정까지 깊이 공감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청득심以廳得心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 들음으로써 마음을 얻는다.”라 는 뜻입니다. 우리의 감각 기관 가운데 듣기가 얼마나 중요한 지는 바로 귀는 둘이지만, 말하는 입은 하나로, 이는 곧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때 제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듣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데 우리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말을 배우는 데는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2년 정도 걸리나 제대로 듣는 것을 배우는 데는 60년도 더 걸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못하는 이유는 듣는 사람의 태도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듣고 상대방을 판단하려 합니다.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은연중에 자기 생각대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조종하려는 태도 때문에 잘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감적 경청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늘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능력(?),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늘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편리대로 듣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의 수난이 일어나고 오해와 갈등이 생길 수 있는 지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까, 말씀하시지 않고 특별히 자기들에게만 따로 말씀하셨음에도 알아듣지 못했을까요? 그러기에 “이해하지 못하였다.”(9,45)라는 표현은 성서에 무려 17번이나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저희와 달리(?) 이해력이 부족했을까요. 물론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9,45)라는 말을 통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거의 멘붕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듣고도 듣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마음이 없었으며, 공감적 경청 능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천국은 무한한 공감이 이루어지는 곳, 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제자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처지와 심정을 들어주고 마음을 깊이 헤아려 주려는 마음이 부족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들의 영혼 상태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과도 같은 어둠과 절망을 느낄 만큼 혼란 그 자체였다고 보입니다.
들음을 잃어버린 세상, 들어야 할 내면의 소리는 물론 타인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자연의 소리마저 잃어버린 것이 현대인입니다. 정말 들어야 할 소리보다는 하루 내내 지나치게 오랫동안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살다 보니 청각에 관계된 질병이 증가하고 있다고 하잖아요. 이러니 침묵이 사라졌고, 침묵을 잃어버렸기에 생각함도 잃어버린 세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귀담아들어라.’하고 말씀하신 까닭은 단지 '청각적으로 들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주님의 목소리를 침묵 가운데서 잘 듣고 마음에 새기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향한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침묵 가운데 주님의 목소리를 귀담아듣는 것이며, 이 공감적 경청이 회복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행동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께서 가실 수난의 여정을 동행하고 동반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주님, 당신 말씀에 귀 기울이고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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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하루에 책 한 권을 목표로 책을 읽습니다. 맞습니다. 다독합니다. 물론 많은 분이 이것저것 많이 읽는 다독보다는 한 권의 책이라도 정독하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정독보다 다독이 맞다고 판단됩니다.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오랫동안 한 권의 책만 읽는 것보다는 여러 장르의 책을 다양하게 읽으면서 깊이가 부족해도 넓게 지식을 갖추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질보다는 양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 안에서도 질보다 양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실패라는 ‘양’입니다. 이런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도자기 공예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학기 과제를 내면서 반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평가 기준을 발표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에게는 “50개 이상을 만들면 A, 40개 이상이면 B, 그 이하는 C”라고 했고, 두 번째 그룹에게는 “몇 개를 만들든 가장 잘 만든 한 점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어느 그룹에서 최고의 작품이 나왔을까요?
첫 번째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이 만들면서 실패의 과정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완성도 높은 최고의 작품을 만든 것입니다.
양보다 질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질 높은 ‘나’를 만들려면 양적으로 많은 실패가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멀리하려고 하지만, 이 실패는 성공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양적으로 많은 실패에 질적으로 높은 성공을 가져올 확률도 높아집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가 있었던 예수님이고, 예수님에 대한 평가 역시 대단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상은 정치적 메시아입니다.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할 힘 있는 임금님, 개선장군처럼 늠름하게 들어오는 영광의 임금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없이는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다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이 실패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활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우리 삶에서 모든 실패처럼 보이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 끝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영광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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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라>
학창 시절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잘 모르던 것이 시험을 코앞에 두어서야 이해되는 것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당장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들어놓으면 때가 되어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에 놀라워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셨고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말씀하신 이유는 헛된 이상에 사로잡히거나 허망한 희망에 들떠 있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의 수난을 목격한 후에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은 참으로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니다. '불완전하고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의 손'이 하느님을 죽였습니다. 우리 손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될 때 하느님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 탓이오"를 일깨우는 날 이 되길 희망합니다. 지금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가 되면, 부모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아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제자들도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되고, 오늘 우리도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명심하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그분과의 통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 1,21) 말씀을 귀담아들으면, 때가 되면 그 의미를 알아듣게 되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 1,22)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 1,25)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카 10,38-43)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2) 참으로 들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근본이 섭니다. 경청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충만하게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말씀 안에 굳건한 믿음을 더하고 풍요로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온종일 그것을 묵상합니다. 당신의 계명이 저를 원수들보다 슬기롭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영원히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 119,97)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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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지막까지 사람이기를>
루카 9,43ㄴ-45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그때에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마지막까지 사람이기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사람이
사람에게
불신일지라도
마지막까지
사람에게
믿음인
사람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절망일지라도
마지막까지
사람에게
희망인
사람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슬픔일지라도
마지막까지
사람에게
기쁨인
사람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미움일지라도
마지막까지
사람에게
사랑인
사람이기를
사람이
사람에게
죽임일지라도
마지막까지
사람에게
살림인
사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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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이루신 다음, 산에서 내려와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를 고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그러나 제자들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루카 9,45 참조).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라는 말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순명’, ‘순종’을 표현할 때, 구약성경은 히브리 단어 ‘쉐마’를 사용하는데, 이는 단순히 청각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아듣는 것보다, 말씀하시는 분의 명을 ‘마음의 귀에 담아 행동에 옮긴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들어,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그의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너희 하느님께서는 땅 위에 너희를 높여주실 것이다.”(신명 28,1)
그래서 말씀은 ‘믿음의 순명’과 ‘사랑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따를 수가 없나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너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사실, <성경>을 읽다 보면, 때로는 성경본문이 아무 말씀도 안 할 때도 있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불투명한 말이나 난해할 때도 있습니다. 곧 말씀이 뜻을 감추고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우리가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채로도 사랑의 마음, 순명과 믿음으로 응답하고 따르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알아듣기 어려운 성경본문을 접근할 때, 중요한 것은 ‘신앙’이라고 이렇게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가 장애라고 여겼던 대목들이 실로 크고 거룩한 유익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필로칼리아)
또한 사막의 마카리오는 역시 믿음으로 먼저 ‘실천’할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는 분량에 만족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애쓰시오. 그리하면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바가 여러분의 영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들은 말씀을 비록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한 채로 말씀하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곧 '신비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성으로 이해하는 바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삶은 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당신께 오라고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말씀, 혹은 삶은 품고 살아야 하는 선물이요, 그것을 통하여 그것을 주신 분을 만나야 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생은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셨듯이, 오늘 우리도 형제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는 ‘부활 신비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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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9,45)
주님!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해도 신비를 살아가게 하소서.
죽음에 넘겨져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죽어 사라져 되살아나는 사랑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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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생을 즐겨라>
-그러나 창조주 하느님을 기억하여라-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시편 90;1,14)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고개를 돌려 내가 지나온 길을 확인하면 걷는 자세가 곧아진다.”<다산>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요 새로운 각오입니다.
“행했는데도 얻지 못했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며 원인을 살펴라. 자신이 바르면 천하가 자기에게 돌아온다.”<맹자>
자신이 바르면 하느님은 친히 보호자와 방패가 되어 도와 주십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추하게 ‘늙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가을 열매들처럼 곱게 ‘익어가는’ 인생이면 좋겠습니다. 바로 지혜가 그렇게 품위있게 합니다. 지혜로운 자가 겸손한 자요, 겸손의 지혜가 아름답게 빛나는 익어가는 인생이 되게 합니다. 오늘로서 코헬렛 제1독서는 끝납니다. 오늘 내용 역시 얼마나 풍부하고 좋은 자극이 되는 지 모릅니다. 역설적으로 허무주의의 병(病)이자 약(藥)임을 깨닫습니다. 허무의 가시가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허무는 바로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을 찾으라는, 기억하라는 신호요, 하느님의 초대장입니다.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사랑과 지혜의 하느님뿐입니다. 시종여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같은 하루 꽃같이, 시같은 하루 시같이, 비움을 지극히, 고요히 함을 두터이' 하며, 아름다운 선물 인생을 살 일입니다. 우리 인생의 의무요 권리요 책임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보답입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은 어느 하나 생략하기가 아깝습니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며 단숨에 읽혀 집니다. 코헬렛 성서가 아니곤 어디서 누구에게 이런 교훈을 들을 수 있을까요? 참으로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코헬렛이요 이래서 지혜문학에 속합니다. 비단 젊은이뿐 아니라 늙은이에게도 귀한 가르침이, 깨우침이 되는 코헬렛입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알고 보니 코헬렛은 순수한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허무주의자요 현실주의자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이를 입증합니다. 젊음의 날은 물론 늙음의 날에도 읽고 배우고 깨달아야할 코헬렛의 지혜입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이 닥치기 전에,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한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늙음이요 죽음입니다. 코헬렛은 참으로 지혜로운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허무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입니다. 결코 꿈속에 사는 낭만주의자가 아닙니다. 젊은이는 물론 늙은이도 배워고 익혀야 할 지혜입니다. 이래야 늙은이는 늙은이대로 치매에 걸리지 않고, 가을 단풍처럼, 저녁 노을처럼, ‘곱게’,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레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늙어가면서 심신이 서서히 무너지기 전, 철이 남으로 창조주를 기억함이 유비무환이겠지만, 무너지는 중에도 당황하지 말고 사랑의 생명줄인 창조주 하느님의 끈을 놓치지 말고 꽉 잡고 살라는 것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아주 오래전 피정지도시 묘비명을 미리 써보라는 과제에 이 구절을 택한 수도자로 인해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허무는 하느님의 초대장입니다. 허무로 시작해서 허무로 끝나는 코헬렛,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허무주의자로 살라는 각성을 새롭게 합니다. 오늘 코헬렛 독서에는 없는 마지막 부분 말씀이 코헬렛 현자의 말씀이 참 정답고 고맙습니다.
“내 아들아, 책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일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고달프게 한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보자.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
하느님 지혜이신 영원한 최고의 현자, 예수님의 오늘 말씀도 우리에게 참 귀한 지혜의 가르침이 됩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후, 또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 절정에 있고 사람들은 모두 들떠 있어 제정신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몹시 놀랐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할 때 예수님은 찬물을 끼얹듯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못 알아 들었고, 묻는 것 조차 두려워하였지만, 제자들에게 지혜로운 평생화두가 되었을 말마디입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없는 부활의 영광은 환상일 뿐이요,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영성이 진짜 영성이자 참지혜이며 우리 삶을 날로 깊게 하기 때문입니다. 파스카 예수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정의 일치와 더불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건강한 허무주의자, 이상주의자, 현실주의자로서의 삶이겠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소서.”(시편90,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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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부활의 대전제인 죽음!>
오늘 복음(루카 9,43ㄴ-45)은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갖추신 분, 곧 사람이시면서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여러 곳에서 드러났는데, 먼저 '많은 기적을 통해서', 그리고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때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이 드러날 때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 오신 궁극적인 목적을 드러내는 '마지막 표지인 십자가', 곧 '죽어야 부활할 수 있다는 결정적 표지인 십자가 사건'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결정적 표지인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에 걸쳐서 제자들에게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복음 전체를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나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죽어야 부활한다는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수난과 죽음 없는 영광과 부활을 원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희생과 봉사 없는 구원, 고통 없는 기쁨, 죽음 없는 부활을 바라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한번 각자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곧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내가 죽어야 살 수 있다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12,7-8)
"아버지, 이민홍 베드로의 영혼을 아버지 품 안에 받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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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 44)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는
참사람이
계십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우리들에게
넘겨지십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언제나
하느님 마저
자신의
이해득실에 의해
넘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사람입니다.
넘겨지심으로
삶의 소중함을
다시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사람을 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람들의 손에
당신의 목숨을
맡기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힘 없이
우리들에게
넘겨지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넘겨지면서도
사람을
도와주시는
놀라우신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짓밟지 않습니다.
오히려
넘겨지심으로
오랫동안의
악순환을
끊으십니다.
넘겨지심이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내어주시는
사랑임을
십자가의 수난에서
배웁니다.
우리의 사랑은
다 내어주시는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하느님
사랑 없이
존재할 순
없습니다.
내어주시는
사랑을 향하는
사랑의 참된
새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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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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