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어(金魚)수행자 만봉(萬奉)스님
만봉(萬奉)스님은 1909년 서울 종로에서 부친 이윤식(李潤植) 공(公)의 독자로 태어났다. 속명은 치호(致虎) 만봉은 법명이다. 스님은 6세의 어린 나이에 금화산(金華山) 봉원사(奉元寺)로 출가하였는데 타고난 팔자가 단명할 것이라는 점술가의 예언 때문이었다. 5대 독자의 연명을 위하여 6세 소년은 절로 보내졌다. 만봉(萬奉)이라는 법명을 받은 스님은 8세부터 타고난 예술적 자질을 바탕으로 금어(金魚) 예운(藝云)화상에게 화사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10여 년간 시왕초(十王草), 천왕초(天王草), 여래초(如來草)를 각각 3천장씩 무려 9천여장을 그렸다. 초(草)는 일종의 밑그림 연습 즉 선묘습화(線描習畵)를 말한다. 단청과 불화를 그리는 전문가들인 금어(金魚)는 끊임없이 많은 초(草)를 그린 끝에 비로소 스승으로부터 금어(金魚)의 칭호를 하사 받는다. 선원(禪院)의 건당(建幢)이나 강원의 전강(傳講)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때 나이 18세였다. 조선후기 전통 화사(畵師)의 맥을 이어받은 스승 김 예운화상은 한말 이후 금강산 맥을 이끌어온 불화계의 거장으로서 당시 왕십리 안정사(安靜寺)에 상주하고 있었다.
20세에 처음 편수(片首. 단청책임자)를 맡아 시공한 건축물은 평양의 황건문(皇建門)을 옮겨 복원한 서울 태고사(太古寺 현 조계사)의 일주문이었다. 작업을 마친 만봉은 예운화상에게 그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단청책임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금강산 표훈사 나한전 금단청(1928)을 비롯하여 강원도, 황해도, 경기도, 서울 등 유수 사찰의 주요 전각에 금단청을 시공하였다. 광복이후에도 서울과 경기도를 포함한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의 사찰, 사당, 궁궐, 문화재 건축 등의 금단청장엄의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불이 나버린 숭례문의 단청도 만봉스님의 작품이었다. 단청에 탁월한 공적을 세울 수 있었던 배경은 기초를 탄탄히 닦은 결과라고 스님은 말한다. 단청은 처음부터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찰에서 불화수업에 충실하다보면 저절로 단청기법이 습득되었다는 것이다. 즉 단청만을 위한 공부는 따로 없었으며 평소 불화제작에 충실하다보면 자연히 익힐 수 있는 것이 곧 단청의 기법이었다. 만봉스님이 단청을 익힌 것에 관한 스스로의 고백을 들어보자.
“단청이나 불화 그리는 일이 둘이 아니여. 수천 번의 초를 그리고 그 필력을 스스로 자유롭게 다스리는 경지에 오르면 되는 것이지.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일은 이론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계산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일이라 여기며 하는 것도 아니란 것이야. 이것은 단청에만 속하는 일이 아니고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에도 꼭 들어맞는 이치라네.”
이렇게 계산도 없이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하는 것이기에 만봉은 그의 불화단청작업을 단순히 그림쟁이의 예술이 아니라 수행(修行)이라고 보았다.
“나는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오늘 어디까지하고 내일 얼마나 하고 하는 것마저 계산하지 않아. 그렇게 한다고 그대로 일이 되는 것이 아니여. 오히려 그 시간표에 쫓겨 일을 망칠 뿐이지. 힘이 나면 며칠씩 밤을 세워가며 그리기도 하고 또 더러 며칠씩 쉬기도 하면서 청정한 마음자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여. 붓질이 나에게는 선수행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이 때문이기도 하지.”
대개 요즘 봉원사의 스님들이 다 그렇지만 만봉스님도 한 번 봉원사에 들어온 이래 한 번도 봉원사 밖을 나가보지 않고 100 평생을 살았다. 봉원사는 신라시대에 창건한 1400여년의 전통을 가진 서울의 중요한 비보(裨補)사찰이다. 본래 연희궁 근처에 있었지만 궁궐의 목적 때문에 금화산 자락으로 옮겨 지으면서 새 절(新寺)이라는 이름을 얻어 지금도 새절이라 불리고 그 이름을 딴 동네도 있다. 그래서 수 없이 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고려말 태고 보우선사는 이곳에 머물면서 산 이름을 금발라화(金鉢羅華)가 피어나고 보살의 주처인 금화산이라고 바꿔 부른 뒤 지금까지 금화산이라고 불린다. 안산(案山)은 풍수지리학상 그런 위치에 있다는 것이지 그것이 본 이름은 아니다.
만봉스님의 불화는 예배용, 교화용, 장엄용을 가리지 않고 두루 섭렵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예배용 불화는 불보살님께 귀의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제작한 그림이라고 한다. 조선시대부터 왕성하게 제작된 후불탱화는 거의 대부분 예배용 그림이다. 예배용 불화는 법당 불단의 후불탱화, 괘불화, 신중탱화, 조사영정탱화 등을 말한다. 경전의 내용을 압축 묘사하여 불심의 효과를 나타낸 그림을 교화용 불화라 한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묘사한 팔상도, 부처님의 전생 설화를 그린 본생도, 지옥을 묘사한 지옥변상, 감로탱화, 극락왕생도, 각종의 경변상도 등이 여기에 속한다. 스님은 주석처인 봉원사 법당의 모든 예배용, 장엄용 불화를 위시하여 전국 각지의 사찰에 수많은 탱화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스님이 불화작업 가운데 창작의 열정을 쏟아 부은 분야는 장엄용 그림이다. 장엄용 불화란 불전과 불상 등을 장엄하여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아름답게 승화시키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장엄용 그림은 주로 건축물 각 부재의 단청과 벽화 등에 그려진다. 단청문양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스님은 각 문양의 상서로운 뜻을 이용하여 이 시대의 새로운 장엄용 불화를 창작하는데 몰두하였다. 단지 장식에 지나지 않았던 단청문양이 스님의 붓끝에서 동시대적 새로운 장르의 불화로 현현되었다. 그 중에서도 고려문양을 각색한 보상화문도(寶相花文圖),궁모란도(宮牡丹圖),비룡관음도(飛龍觀音圖),오채영락도(五彩瓔珞圖),달마도,오채쌍봉도(五彩雙鳳圖),오채운룡도(五彩雲龍圖), 등은 평이한 전통적 소재에 현대적 미적 정서를 부여한 창작불화로서 승화되었다. 특히 부귀를 상징하는 의미의 두 폭 가리개 궁모란도는 우리의 전통예술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모체가 되어 현재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또, 달마도를 소장한 사업가는 성공하고, 정치가는 입신양명의 길을 걸었다. 서울 시장 선거에 나왔던 2002년에 당시 여당의 후보였던 김 민석 후보는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스님의 적극적 지원을 받아 선거책자에 공식직함과 사진을 넣고 지원의사를 밝혔으나 야당후보인 이 명박(현 대통령)후보는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태고종의 후원을 받고 봉원사에서 법회에 참석해 만봉스님의 달마도를 받고 즐거워하며 필승을 다짐해 서울시장에 당선되었다. 필자가 옆에서 축원의 말을 하면서 ‘이 후보가 당선된다면 태고종 부처님이 지도하신 것이니까 반드시 태고종에 갚아야 합니다!’라고 하여 당시 만봉스님과 함께한 여러 스님 그리고 이 명박 후보가 크게 웃고 그러마고 약속한 바 있다.
아마도 스님의 정진력은 모든 그림을 수행으로 보는 정신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화가일 수 없듯 봉원사를 중심으로 영산재를 배워 연구하고 연마하는 사람들도 가수나 공연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은 바로 신앙심으로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나의 신앙심을 발현하고 타인의 신심을 증장시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이런 중한 일에 여러 불자님들도 관심을 많이 가져야할 것이다. 신앙심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거기에 다시 노력이 있어야 한다. 노력이란 수행이란 뜻으로 풀어도 된다. 불자는 매사가 다 수행이까. 지극한 신심과 노력이 이 세상을 부처님세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또 근 백여 년을 사시는 동안에도 늘 웃음을 머금고 사시고 천진한 우수개소리도 자주 하셨다.
“ 보통이 중이 고기를 못 먹는다고 하는데 쓸 데 없는 소리여. 나는 못 먹는 고기가 세 가지 있어.”
“그게 무엇입니까?”
“안 줘서 못 먹고,없어서 못 먹고,배 불러서 못 먹지...하하하”
만봉스님은 평소 후진양성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72년 중요무형문화재 단청장으로 지정되기 이전부터 이미 많은 문하생들이 스님의 가르침 속에서 새로운 금어로 거듭났다. 홍 창원선생, 박 정자선생, 인 인섭선생, 김 희정선생 그리고 외국인으로 브라이언 베리선생 등이 만봉스님의 유훈을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큰 나무 밑에는 작은 나무가 산다는 말이 있듯 만봉스님을 능가하는 제자가 아직 안 나오는 것이 아쉽다는 평가이다. 원주에는 스님의 업적을 기리는 박물관이 있다.
1998년 10월 20일에는 평생을 바쳐 전통예술의 계승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한 국가로 부터 은관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90세가 넘어 98세를 일기로 열반하시기 직전 까지 스님은 거동이 불편한 노구에도 불구하고, 평소 하루에 10시간 정도는 거뜬히 붓을 잡았다. 불과 수 년 동안 5회에 걸쳐 불화개인전을 개최할 정도로 지칠 줄 모르는 노선사의 불퇴전의 자세는 이 시대의 모든 후학들에게 벅찬 감동과 귀감으로 승화되었다. 종단에서도 스님을 승정(僧正)으로 모셨고, 불타버린 봉원사 대웅전 불사, 봉원사 삼천불전 불사 등 봉원사 불사와 태고종 총무원을 봉원사에서 성북동 태고사(太古寺)로 옮겨 지을 때도 큰 기여를 하셨지만 태고사에서 사간동 법륜사(法輪寺)로 옮겨 지을 때는 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아 불사를 지휘하셨다. 그 덕에 연 건평 1천6백여 평에 대불보전,총무원,범패 및 불화단청 전수관과 교육장으로 쓰이는 지상 4층 지하3층의 전통불교문화전승관을 지을 수 있었다. 스님께서 열반하셨을 때 태고총림이 설치되어 있는 선암사 연화장에서 다비하였는데 나는 영결 다비식 사회를 맡은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