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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11월21일 주민등록증 발급
현재의 주민등록 제도가 뿌리를 내린
것은 박정희 정권이 출범 하면서 였다.
주민등록제도는 멀리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16세 이상의 남자 에게 발급한
호패제도가 있었고 바로 전에는 6ㆍ25때 서울시와
각 도가 다급 하게 발급한 시민증 과 도민증이 있었다.
1962년 5월 10일 주민등록법이 공포
됨 으로써 주민등록 제도의 첫 윤곽이
드러 났으나 몇년이 지나도록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1968년 1월에 1·21 무장공비침투사건이
터지면서 박정희 정권은 주민등록법개정을 서둘렀다.
주민의 동태를 파악하고 남파간첩 등의 불온분자
색출이 용이하도록모든 국민들에게 주민등록증을 발급한다는 내용의 개정안이었다.
1968년 5월 10일에통과된 1차 개정안
은 주민등록 제도의 양대 축을 이루는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를도입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11월 21일부터 18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증이 발급되면서 시민증과 도민증은자동 폐지됐다.
주민등록번호는 주민등록증 발급과 함께 각 개인에게 부여됐다. 번호는앞뒤 6자리씩 모두 12자리로 구성돼
예를 들면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경우는 110101
-100001,110101-200002였다. 앞 6자리는 지역,
뒤 6자리는 개인번호였다.
1975년 부터 현재의 13자리숫자 체제로 바뀌었다. 주민등록증의 재질은 1999년 종이 에서 플라스틱 으로
바뀌 었으며,2013년 부터 IC 칩이 내장된 전자주민등
록증이 발급될 예정이다.
1968년 주민등록증 발급을 통해 법죄 예방 및 수사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민감한개인정보가 담긴
13자리의 개인식별번호가 주민등록증상에 직접
노출되어 있어 개인정보유출 및 오·남용 가능성과 주민등록증의 위·변조 가능성, 주민번호를 통한 국가의
개인 통제가능성 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2010년 아일랜드 IMF 구제금융 신청
▶ 2010년 호랑이 정상회의 개막
“호랑이 살리자” 푸틴·원자바오·클린턴 ‘의기투합’
현재 3200여마리 생존 2022년에 멸종할 수도
다음번 호랑이해엔 야생 호랑이가 멸종될지도 모른다는 경고가 나왔다.
‘세계자연보호기금’의 제임스 리페 사무총장은 ‘호랑이 정상회의’ 개막일인 21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적절한 보호 대책이 실행되지 않는다면, 야생 호랑이가 (동양의 12간지 달력상) 다음번 호랑이해인 2022년엔 멸종될지 모른다”고 말했다고 <에이피>(AP) 통신이 전했다. 야생 호랑이가 남아 있는 13개국의 대표단과 호랑이 전문가들이 모인 이번 호랑이 정상회의는 21일부터 25일까지 열리는데, 특정 동물 한 종의 멸종을 막기 위한 정상회의가 열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데페아>(dpa) 통신은 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 원자바오 중국 총리,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등이 참석했다.
야생 호랑이 수는 100여년 전만 해도 10만마리에 달했지만 현재는 전세계에 3200여마리밖에 남지 않았다고 세계자연보호기금은 밝혔다. 야생호랑이 수가 급격히 줄어든 이유는 밀렵과 산림 벌채에 따른 서식지 감소 때문이다. 호랑이 가죽과 한약재 수요 때문에 최근에도 밀렵은 그치지 않고 있다. 세계 각국이 야생 호랑이 보호 대책을 실행하고 있지만, 개체수는 1998년에 견줘서도 3분의 1로 줄었다. 호랑이 종류 중 발리·자바·카스피 호랑이는 지난 70년 사이 멸종했다.
이번 회의에선 호랑이 보호 대책을 위한 기금 마련 방안이 주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 호랑이보호 프로그램’은 앞으로 5년 동안 3억5000만달러 정도를 기금으로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본다고 추정했다.
‘강한 남자’ 이미지의 푸틴 러시아 총리는 이번 호랑이 정상회의 자국 개최를 주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푸틴 총리는 지난해 시베리아 호랑이에 위치추적 표시기를 달기 위해 직접 마취총을 쏘는 모습이 보도되기도 했다.
▶2004년 안시현 2004년
미 LPGA ‘올해의 신인상’ 수상
▶2004년한글재단 이사장 한갑수씨 별세
▶2000년후지모리 페루 대통령 공식 사임
일본에 체류 중인 알베르토 후지모리(62) 페루 대통령이 21일 자신의 사임서를 의회에 공식 제출했다. 이로써 지난 90년 무명 대선후보에서 일약 대통령에 당선된 후지모리의 10년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됐다. 페루 출생의 일본계 이민 2세인 후지모리는, 1990년 라틴아메리카 사상 아시아계 최초로 페루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취임 후 경제 재건에 착수하였으며 정치적 안정도 이루었다. 그러나 연임을 위한 각종 부정비리로 집권 10년만에 물러나 2000년 일본으로 도주하였다가 2005년 칠레에서 체포되어 2010년 25년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1997년 한나라당 창당
(신한국당과 민주당 통합)
▶1997년 IMF 구제금융 공식 요청
우리나라가 가진 외환이 너무 부족해 국제 통화 기금(IMF)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은 사건이다.
1997년에 일어난 IMF 경제 위기는 우리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다. 많은 기업이 문을 닫고 실업자가 늘어나는 등 경제가 크게 위축되었다. 하지만 정부와 국민들이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예상보다 빨리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① 정부는 1997년 11월에 우리나라가 심각한 외환 위기를 맞았다고 발표한 뒤 IMF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② 우리나라 경제가 위기에 처하자 국민들은 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국민들이 내놓은 금을 정부와 기업이 사들여 외환과 바꾸는 식으로 외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이 때문에 ‘금 모으기 운동’은 ‘제2의 국채 보상 운동’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과 동남아시아는 미국이나 유럽보다 빠르게 발전했다. 1990년대에는 많은 외국 자본이 아시아로 흘러들었다.
우리나라도 금융 자유화와 금융 시장 개방 등으로 인해 외국 자본이 빠르게 늘어났다. 금융 기관들은 이 자본을 빌려 기업이 발행한 어음을 사들였고, 자연스럽게 외국에 진 빚도 늘어났다.
그런데 어음을 발행한 기업이 부도가 나자, 그 어음을 사들인 금융 기관들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97년에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가 어려워졌는데, 외국 투자자들은 빌려주거나 투자한 자본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국제 통화인 달러가 부족해 자국의 화폐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외환 위기를 겪었다.
외국 투자자들은 우리나라 경제에도 불안감을 느껴 투자한 자본을 거두어들였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우수 기업을 망하게 한 다음 싼 가격으로 사들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게 되었고, 우리나라가 가진 외환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국제 통화 기금(IMF)에 긴급 자금을 요청했다.
IMF는 한국에 지원을 해주는 대신, 기업의 구조 조정과 공기업의 민영화, 자본 시장의 추가 개방, 기업의 인수 합병 간소화 등 여러 조건들을 내걸었다.
정부는 조건을 수락함과 동시에 IMF의 관리를 받아 국가 경제를 운영하기로 약속하고 자금을 지원받았다.
김영삼 대통령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정부는 독점 재벌의 해체, 공기업의 민영화, 부실 기업 정리, 노동자 정리 해고의 간편화, 소비 촉진 등 경제 구조를 개편하고 경제 정책도 크게 바꾸었다.
그 결과, 2001년 8월에 IMF에게 빌린 돈을 모두 갚고 IMF 관리 체제를 예정보다 일찍 끝낼 수 있었다. 이로써 IMF 경제 위기도 막을 내렸다.
우리나라는 IMF 경제 위기를 잘 극복해 냈지만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많은 회사들이 문을 닫았고 우수한 기업들이 헐값에 외국 자본가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에 따라 실업자도 크게 늘어났다.
또한 노동자의 해고가 쉬워지고 정규직 대신 비정규직 노동자가 크게 늘어나 고용이 불안정해졌다.
소비 촉진 정책을 위해 카드 발급과 사용을 크게 늘리면서 카드 빚을 갚지 못하는 신용 불량자도 늘어나 ‘카드 대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임창열 부총리가 정부종합청사에서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1996년 이균영 교수 별세
▶1991년 프랑스인 제라르 다보빌 나룻
배로 노을 저어 최초로 태평양 횡단
▶1991년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유엔사무총장에 선출
▶1983년 롯데호텔 미국여인
피살사건 발생
▶1983년 필리핀,이멜다 집행위원직 사임
▶1982년 조선조 마지막 상궁의 한사람 박창복여사 사망
박창복 상궁(1906 ~ 1982)은 김명길 상궁과 함께 대한제국의 황후이자 일제 강점기의 이왕비, 이왕대비였던 순정효황후 윤씨를 모셨던 창덕궁 낙선재 시절의 상궁이다. 처음에 그녀는 창덕궁 세답방 나인(洗踏房 內人)으로 들어왔다가 도중에 본방나인 정씨의 후임으로 지밀로 옮겨왔으며, 그 때 지밀 노상궁들이 네 번이나 와서 선을 보고 혈통을 조사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뚫고 당시 100여명의 젊은 궁녀들 중에서 발탁되었다고 한다.
1982. 11. 22. 동아일보 기사
조선조 마지막 상궁 박창복 할머니 타계; 55년간 궁중에 머물며 윤비의 잡일 시중
생존해 있던 조선왕조 마지막 상궁 중의 한 분인 박창복 할머니(서울 성북구 보문동 3가 218)가 21일 하오 1시 50분 파란 많은 생애를 마치고 타계했다. 향년 80세.
55년 동안 궁중에 머물며 한말의 풍운과 왕가의 낙조를 지켜본 박상궁은 이날 탑골승방의 무의탁노인 거주처인 시자원 구석방에서 쓸쓸히 숨을 거둔 것.
양반집에서 태어난 박상궁이 대궐에 들어간 것은 13살 때 순종황제비인 윤비가 황후로 간택되던 해였다.
당시만 해도 나라에서 부르는 일인지라 좋다 싫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처음에는 「애기항아님으로 부엌에 땔감을 날라다주거나 의복을 가져다 주는 일을 했다.
얼마후 윤비의 눈에 든 박상궁은 윤비의 머리손질을 도맡아 해주는 [짐일]을 맡게 됐다.
당시 박상궁은 정5품의 예우를 받아 나라로부터 매달 1백여 원씩의 녹을 받기도 했다. 쌀한가마에 8원하던 시절이었으니 적지 않은 급료였으며 그 외의 주어진 권한과 자부심도 대단해 부러울 게 없었다.
입궐한 지 25년째 되던 1940년에 상궁칭호를 받았으나 당시는 순종황제가 승하한 뒤라 상감첩지를 받지 못하고 대신 윤비로부터 「입상궁」이란 구두칭호를 받았다.
비록 일본에 나라를 빼았겨 옛날의 부귀 영화는 누릴 수 없었지만 윤비를 모실 수 있다는 생각에 이보다 큰 기쁨은 있을 수 없었다.
해방과 625의 고난을 윤비와 함께 겪은 박상궁이 낙선재를 떠난 것은 윤비의 3년상을 마친 (19)70년.
그러나 의탁할 가족의 없는 박상궁의 말년은 외롭고 비참하기만 했다.
다행히 보문사에서 마련해 준 거처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후배 상궁인 성옥염 할머니(63)와 옛날의 화려했던 궁중생활을 회상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박상궁의 장례는 23일 상오 10시 보문사에서 불교의식으로 거행된다.
▶1981년 중국, 서울올림픽 참가의사표명
▶1980년 한일의원연맹 활동재개 회장 박태준
▶1978년행주대교 개통
▶1976년한-루마니아, 무역-경제협력
협정 조인
▶1972년제7차 개헌안(유신헌법)
국민투표 실시,가결-제4공화국 성립
1972년 10월 17일을 기해 단행된 이른바 `10월 유신`에 따라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 선언문`을 발표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 비상국무회의 설치 등의 비상조치를 취했다. 그 후 자신의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후속조치들을 속속 단행, 10월 27일에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 개헌 반대 발언이 완전히 봉쇄된 가운데 1972년 11월 21일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확정된 `유신헌법`에 따라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통령 선거에 박정희가 단독 출마,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유신체제가 출범하게 됐다.
대통령이 뽑은 사람들이,대통령을 뽑다!!?? 메비우스의 띠 인가?
시대적 현실과 '민도'(民度,국민의식 또는 시민의식 )가 따라주지 못했죠!
유신’ 국민투표 하는 박정희와 박근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운데)가 1972년 11월21일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어머니 육영수 여사와
함께 유신헌법 국민투표를 하고 있다.
▶1971년한국식물학의 개척자
정태현 사망
▶1968년주민등록증 발급 시작
▶1964년조선일보 필화사건.
선우휘 편집국장 등 2명 구속
▶1959년미-소, 과학 기술
문화교류 협정에 조인
▶1957년동-서독간 통상협정 성립
▶1949년제1회 대한민국미술
전람회(국전) 개최
▶1948년 국회,미군주둔요청 결의안
▶1945년 프랑스 드골수반의 사회-
공산-인민의 3당내각 성립
▶1941년 국민근로보국협력령 공포
▶1938년 화재신고 및 응급구호에
관한 전화통화의 건 제정시행
▶1935년 김구 등 한국독립당 결성
▶1928년 홍명희 소설
‘임꺽정’ 조선일보 연재 시작
조선일보에 연재됐던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 첫회 삽화
▶ 1916년 오늘,
'타이타닉호'의 자매선인'브리타닉호'침몰.
HMHS Britannic
1915년 5월, 브리타닉이 드디어 모든 공사를 완료하고 계류중 엔진 테스트도 끝마쳤을 무렵, 병력수송선으로 차출되었던 여객선의 첫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큐나드사의 '루시타니아(RMS Lusitania)호가 아일랜드 연안에서 독일잠수함의 어뢰공격을 받고 침몰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전시 특별 수송선단에 한 자리가 비게 되었고, 그 몫은 이제 겨우 움직일 준비가 끝난 브리타닉에게 돌아왔습니다
1915년 6월, 연합군은 최근에 징발된 여객선들을 갈리폴리 공세전(주1)을 수행할 병력을 수송하는데 활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맨 먼저 큐나드사의 모리타니아(RMS Mauretania)와 아퀴타니아(RMS Aquitania )호가 동 지중해 해역에 처음으로 병력을 싣고 투입되었습니다.
작전이 시작되자 수많은 병력이 갈리폴리 해안에 상륙하였으나 독일과 터키연합군의 선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아퀴타니아호는 돌아오는 길에 부상병들을 싣고 귀환하였습니다.
이후 작전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게 흘러가게 되자 영국 해군성은 본격적으로 부상병들을 귀국시킬 병원선을 운영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퀴타니아호는 한번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대로 병원선으로 전용되었고, 아퀴타니아호의 병력수송임무는
올림픽호가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징발되어 어리둥절한 신병, 브리타닉이 병원선의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병원선으로써 배 전체를 흰색으로 칠하고 녹색 띠와 붉은 십자가를 그려넣은 브리타닉은 검은색으로 도장된 이전의 자매들과는 사뭇 다른 외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배의 이름도 정기여객선, RMS Britannic이 아닌 영국해군 병원선 HMHS(His
Magesty's Hospital Ship) Britannic 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지요.
병원선의 침몰
병원선으로써 브리타닉은 성공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1916년 후반까지 다섯번의 항해동안 무사히 동지중해의
전장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본국으로 귀환시켰으니까요. 그렇지만 눈먼 총알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고, 병원선처럼
평화적인 목적을 수행하는 배라 할지라도 전장에 있는 한 전쟁의 마수를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브리타닉이 여섯번째 항해중이던 1916년 11월 21일 오전 8시 12분, 배가 키클라데스 군도의 케오스(Kea)섬 인근해역을 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우현 아래에서 뭔가가 큰 수중폭발을 일으켰습니다.
폭발의 원인이 독일잠수함의 어뢰였는지 혹은 해역에 부설된 기뢰였는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폭발지점의 위치는
치명적이었습니다. 하필이면 메인 데크까지 연장된 선수의 첫번째 수밀격벽부분이 터져나간 것입니다.(상기 수밀격벽 그림
중 'D'격벽) 설상가상으로 폭발의 충격으로 인해 인근 구역의 수밀문들이 작동을 하지 않아 순식간에 다섯개 구획이 침수되었지만 더이상 침수가 진행되진 않은 덕분에 배는 간신히 떠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초의 폭발이 있은 후 불과 10분만에 브리타닉은 먼저 간 자매, 타이타닉과 똑같은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브리타닉의 선장은 배가 침몰되는 것만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고현장에서 4.8km 떨어져 있던 케오스섬 쪽으로 배를
몰아갔습니다. 그러나, 극히 사소힌 요인이 결국 배를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몰고 갔습니다. 타이타닉 영화를 보셔서 알겠지만, 이들 자매선의 선체 측면에는 현창이 수도 없이 뚫려 있었습니다. 이 현창을 간호사들이 병실의 통풍을 위해 열어두었는데, 배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바로 이 현창을 통해 나머지 구역으로 물이 흘러들었던 것입니다.
▶1912년 알바니아, 독립선언1906년청, 아편금지령 공포
알바니아 공화국은 동남유럽 지역에 위치한 국가이다. 총면적 28,748km²로 2016년 기준 300만 명 가까이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고전 고대 시대 동안, 현대의 알바니아 지역은 여러 일리리아 사람들과 그리스인들의 고향이 되어주었다. 일리리아 전쟁 이후에는 로마 제국에 병합되었다. 1190년, 사상 첫 알바니아인의 국가 알바논 공국이 세워졌다. 이후 15세기에 알바니아는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고, 이후 500년 동안 제국의 식민지배 하에 있게 된다. 이후 유럽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고, 발칸 전쟁이 발발하며 알바니아는 1912년 독립을 선언했다.
▶1898년 황국협회, 만민공동회 습격
독립협회에 대항하려고 정부가 조직한 단체 황국협회의 사주를 받은 보부상들은 1898년 11월 21일 새벽 동틀 무렵 종로에서 집회를 열고 만민공동회를 규탄한 후, 두 패로 나뉘어 만민공동회를 습격했다. 이들은 비무장의 만민공동회를 습격하여, 많은 부상자를 내고 만민공동회를 해산시켰다. 시민들은 만민공동회의 피습 소식을 듣고 정동병문으로 모여들었고 종로의 상인들도 시장을 철시한 채 합세하였다. 인산인해를 이룬 인민들은 돌멩이를 산처럼 쌓고 보부상을 추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파수를 보는 병정들의 도움을 받고, 새문 밖으로 달아났다.
▶1894년 일본군, 청의여순점령
여순 전투(일본어: 旅順攻囲戦)는 청일 전쟁이 벌어지던 1894년 11월 21일 만주의 여순에서 청나라 군대와 일본 제국 육군 사이에 발발한 전투이다. 서양 자료에서는 종종 여순항 전투(Battle of Port Arthur)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 이름은 오늘날에는 1904년 러일 전쟁의 개전이 된 전투를 가리킨다. 당시 일본군이 만주에서 치른 첫 전투로 단 하루만에 전략적 항구인 여순항을 함락시켰다.
▶1866년 조선조 고종, 천주교도 수색령
▶1806년 나폴레옹, 대륙봉쇄령 내려
☞ 유일하게 자신의 영향력 밖에 있는 섬나라 영국때문에 나폴레옹은 늘 속이 탔다. 1803년 이집트 상륙작전을 실패하고 1805년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까지 영국 함대에 대패하자 부득불 군사작전을 포기하고 영국 고립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1806년 11월 21일,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통상·통신을 금지하고 영국의 상선이 유럽 땅에 정박하지 못하도록 폴란드에서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유럽의 전 해안을 봉쇄하는 이른바 ‘대륙봉쇄령’을 베를린에서 공포했다. 그러나 봉쇄령으로 영국보다 유럽 대륙이 오히려 더 큰 경제적 피해를 입게 되자 유럽 각국은 영국과의 밀무역으로 어려움을 타개하려 했다. 특히 영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높아 타격이 컸던 러시아에서 밀무역이 성행하자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나섰으나 결과적으로 몰락을 자초한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1783년 피라돌 데 로제와 마키스 다르
랑드 후작, 950m까지 상승 약 25분
동안 8km 비행. 인류 최초의 유인 비행
▶1694년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 출생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흔히 프랑스 지성사에서 최초의 지식인으로 꼽힌다. 볼테르는 생전에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문인이었고 다작에 능했지만, 명저를 남기진 못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낸 `극단의 시대`의 종교적ㆍ정치적 광기에 맞서 투옥과 추방을 무릅쓰고 이성과 양식을 쫓았다. 프랑스 남부의 독실한 가톨릭 도시 툴루즈에서 한 개신교가 아들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된 이른바 `칼라스 사건`(1761)을 볼테르가 용기와 지혜로 바로잡은 일은 볼테르를 진정한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1579년 영국의 금융업자 토머스 그레셤 사망
토머스 그레셤 경(1519년경 ~ 1579)은 영국의 재정가이다. 영국의 금융업자·무역가로서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의 제창자로서 알려져 있다. 런던의 상인(商人) 집안에서 태어난 그레셤 경은 에드워드 6세, 엘리자베스 1세의 밑에서 재정 고문으로 근무하였다. 화폐의 개주(改鑄)에 노력하였고, 왕립 증권거래소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은 소재의 가치가 서로 다른 화폐가 동일한 명목가치를 가진 화폐로 통용되면, 소재가치가 높은 화폐(Good Money)는 유통시장에서 사라지고 소재가치가 낮은 화폐(Bad Money)만 유통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레샴은 이 현상을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비단 화폐유통시장만 아니라 여러 경제현상에서 관찰되고 있다.
▶ 1394년 오늘,
조선 도읍을 '한양'으로 천도!
고려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선양 받은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도평의사사에 한양으로의 천도를 명하였다. 실제로 한양천도가 최종 확정되고 현실화되기까지는 2년여의 기간이 더 걸렸지만 조선건국초기부터 한양은 새로운 도읍지로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이렇게 천도를 서두른 이유는 고려의 지배층이 엄존하고 있는 개성을 떠남으로써 구지배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것이 조선왕조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속히 떠나려고 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어째서 한양으로서의 천도를 추진했는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한양천도에는 신라 말이래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마다 대두되었던 풍수지리설의 영향이 컸다. 개성의 지덕(地德)이 이미 다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논리인데, 한양은 언제나 주요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천도를 정당화시키고 대내적 동의를 얻어내기 위한 방편이라는 성격이 켰다. 한양을 도읍지로 선택하게 된 가장 실질적인 요인은 한양이 갖추고 있는 인문 지리적 조건이었다.
하나의 왕조가 도읍지를 선택하는 데는 무엇보다 인문 지리적 요인이 중시 되지 않을 수 없다. 한양은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데다가 서쪽이 바다요,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어 무엇보다 군사적인 방어에 유리한 지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군사적인 이점에 더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요건이 교통의 편리함이었다.
당시는 경제생활의 대부분을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농업생산물이 국가재정의 기반이었다. 정부는 조세곡(租稅穀)을 거두어 수도로 운반해 오는데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육상교통은 극히 빈약했기 때문에 육로를 통해 곡물을 운반하는 것은 매우 곤란했고, 조세곡의 대량수송은 수상교통에 의존해야만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국가의 도읍지는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도 조세운반이 편리한 곳에 자리잡아야 했다. 이 점에서 한강 유역에 위치한 한양은 다른 어떤 곳과도 비교될 수 없는 이점을 갖추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지로 점찍은 것도 바로 교통 조건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그 자신이 한양의 형세에 대해 말하기를 “조운(漕運)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이 이수(里數)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후기의 지리서인 『택리지』에서도 “한강변의 강촌들은 모두가 서해의 이점을 이용하여 팔도의 배가 모이는 곳”이라 하여 수운의 편리함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한강은 서해의 바닷길을 서울까지 이어주는 내륙수로였던 것이다.
한양은 외적방어를 위해서도 유리한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한양은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이 평탄한 분지지형인데다가, 남쪽으로 한강이 감싸고 흘러 외적을 방어하기에 좋았다. 한강은 수로로서는 교통로의 역할을 하지만, 육로의 측면에서 보면 육로를 끊는 일종의 장애물이었다. 이 점은 방어의 측면에서는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인 유리함에 바탕 하여 한양은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선택되었다. 1394년 10월, 드디어 조선왕조는 새 도읍지인 한양으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서울은 한반도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으로서 본격적으로 역사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한양은 조선왕조 5백여 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중심무대가 되었으며, 조선왕조가 멸망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그 역할을 지속하고 있다. 또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의 수도가 한강 유역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한강은 명실상부하게 한반도의 역사적 삶을 응축하는 상징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YouTube에서 '역사의 6-70년대 모습'
https://youtu.be/qTwxkQ85xqQ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행디의행복블러그,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