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위원회
박해람
웅덩이에는 날파리가 왱왱댄다
물결 같은 건 없어 그러니까 소녀의 얼굴이 몇 살인지는 나도 몰라
꽃씨가 흘러나오는
소녀의 얼굴,
왜 태양을 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지
찡그린 꽃씨라고 말하지 않는 거지
언젠가 뒷면에 침을 발라 붙인 달이 아직도 편지봉투에 떠 있다
여름밤위원장의 팔에 달무리가 채워져 있고 땋은 머리를 풀자 여러 개의 밤길이 사라진다
가장 큰 날개는
가장 작은 날개를 먹을 수 없지
부엉이와 날파리는 외계
확성기는 가까운 말
거수를 하는 꽃들의 한 뼘
한밤의 풀밭에 얼굴을 터는
소녀들의 파종기
주근깨라 불리는 검은 별들
돌을 던지면 머물던 장소들이 사라진다는 귓솟말,
방심한 곳에 쪼르리고 앉아 달무리를 올려다보면 부르르 떨리는 웅덩이들,
가상의 뼈를 활짝 여는 하품
여름밤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여름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계절이고
박수는 가장 오래된 의견이다
몇몇 번지는 의견은 제외되었다
*헤르타 뮐러
봄밤
오늘 밤은 정전이어서
봄밤이다
집배원은 배꽃들이 낭비한 봄밤의 고지서를 배밭 주인에게 배달했다
불 끄는 배꽃
화르르 정전
- 박해람 시집, 『여름밤위원회』(시인의일요일,2021)
‘시인의일요일시집’ 첫 책으로 박해람 시인의 『여름밤위원회』를 출간했다.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박해람 시인은 등단 당시부터 예리한 관찰력과 돌연적 이미지, 견고한 묘사력으로 정평이 났고, 시인을 꿈꾸는 문청들이 필사하는 텍스트 1위의 시인에 오르기도 했다. 정작 평론가들이나 문단의 자기장 안에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박했다.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한다는 그의 주변머리가 시인의 생활과 시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문단의 풍류나 사교생활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그가 감수해야하는 자업자득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도 섣불리 그를 무시하지 못한다. 오로지 시만으로 세상과 겨루는 변방의 고수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자신이 서 있는 변방을 한결같이 자기 시의 중심, 이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어내며 스스로가 시인임을 증명하고 있다.
시집 『여름밤위원회』는 등단 23년 만에 펴내는 박해람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쉽게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문체로 구상과 추상의 변형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적 시세계를 구축하는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다시 한번 자기 시의 절정을 선사한다.
1부 봄밤
봄밤 11
북벽 12
창백한 푸른 점 14
저글링 16
여름밤위원회 18
악몽 20
물의 학회 22
흉내 24
눈치 26
망루 28
지구라는 사실 30
연좌제 32
회유 34
감나무를 뒤집자 36
불타는 의자 38
수염이라는 남자 40
의자를 심어 놓고 42
훈자, 강릉 44
2부 만추
폐곡선 49
만추 50
만두 52
작살 54
노자 56
마당이라는, 개의 이름 58
이발소 그림 60
양파의 참을성 62
달에는 펄럭이는 씨앗이 있다 64
트렁크 66
공평한 확률 68
숨통 70
전생을 모함하는 모임에 갔었다 72
새들의 취향 74
여섯 개의 손가락 별명 76
누군가 나무에 돌을 던졌다 78
궤짝 80
편집증 82
어이, 84
질문의 동네 86
사람이 너무 가벼워져서 88
손의 부축 90
근황 92
6월의 담장 94
3부 요동치는 정각에 만나요
흔들린 손 97
요동치는 정각에 만나요 98
빨간 실 100
책의 뼈 102
칼집 104
아랫입술을 깨물면 106
감량 108
미문 110
착석률 112
꿈에서 잠 밖으로 114
네모를 그려 새를 가둔다 116
흉몽과 놀았다 118
폐정일주 廢井日酒 120
술독 122
꽉, 막힌 사람 124
해설 127
채움과 비움, 그 역설의 시학 / 이병국(시인, 문학평론가)
박해람
강릉 출생.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 『백 리를 기다리는 말』
첫댓글 참, 잔잔히 툭, 마음을 건드리고 갑니다. 시란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