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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차 김유정 소설 [생의 반려] · 수필 [길] 문학여행
-글 : 권창순 : [daum 카페 : 김유정소설문학여행 -2013. 8. 5]
김유정역에 내리니 금병산이 어둡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바람은 시원해 좋다. 길가의 풀들이 끼리끼리 모여 바람에 흔들린다.
먼저 며칠 전에 이름을 바꾼 우체국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젠 김유정우체국!
지금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나라고 모를 배도 아니었다. 궐련에 불을 붙이고 나서 나는 혼잣소리로 “오늘도 편지 했나!” 하고 연기를 내뿜었다. 그제서야 그는 정신이 나는지 내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너에게 청이 하나 있는데.” 하며 도로 영어 사전께로 시선을 가져간다. 제깐엔 내가 그 청을 들어줄지 혹은 않을지, 그게 미심하여 속살을 이야기하기 전에 나의 의향부터 우선 들어보자는 모양이었다. 나는 선선히 받으며 “청이랄 게 뭐 있나? 될 수 있다면 해보겠지.” “고맙다, 그럼········” 하고 그는 불현 듯 생기가 나서 책상서랍을 열더니 언제 써두었던 것인지, 피봉에 넣어 꼭 봉한 편지 한 장을 내 앞에 꺼내 놓는다. 그리고 흥분되어 더듬는 소리로 “이 편지 좀, 지금 좀 곧 전해다우.” 하고 거지반 애원이었다.
-김유정 미완 장편소설 [생의 반려]에서
소설 [생의 반려]는 김유정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다. 몸이 아픈 주인공 유명렬(김유정)은 나명주(명창 박녹주)를 자신이 지극히 존경하는 여성(어머니) 쪽으로 끌어내놓고 연모하기 시작한다. 나명주가 어머니로서 동무로서 연인으로서 그에게 그렇게 필요했던 것일까?
자세한 이야기는 김유정 작가님을 만나 직접 듣기로 하고 서둘러 ‘김유정문학촌’(생가 및 기념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문학촌에는 여름방학과 휴가를 맞아 학생들과 학부모와 일반인들이 사진도 찍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며 관람중이다. 연못에 빨간 연꽃이 두 송이 피었다. 우선 욕쟁이 봉필영감과 사진을 찍고 서둘러 생가 마당을 내려와 소설 [동백꽃]의 점순이가 붙이는 닭싸움을 지켜보는 김유정 작가님 옆에 앉았다.
“곧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우산은 챙겨 왔습니까?”
“예. 작가님은 언제 오셨습니까?”
“나야 늘 여기에 앉아 있지요. 가끔 마음은 하늘나라를 다녀옵니다만.”
내가 작은 목소리로,
“근데 저 심술 언제나 버릴까요?”
“저 심술 때문에 청춘이나 사랑이 더 싱싱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이때다. 점순이가 나를 향해 여우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겨본다.
“여우다! 여우!”
나는 김유정 작가님과 함께 문학촌을 뛰쳐나왔다.
지금 그가 편지를 쓰고 있는 이것이 언뜻 생각하면 연앨는지도 모른다. 상대가 여성이요 그리고 연일 밤을 새워가며 편지를 쓴다면 두말없이 다들 연애라고 이렇게 단정하리라. 마는 이것은 결코 흔히 말하는 그 연애가 아니었다. 그 연애란 것은 상대에게서 향기를 찾고, 아름다움을 찾고, 다시 말하면 상대를 생긴 그대로 요구하는 상태의 명칭이겠다. 그러나 그의 연애는 상대에게서 제 자신을 찾고자, 거반 발광하다시피 하는 것이다. 물론 상대에게는 제 자신이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야기하리라 마는 때로는 폭력을 가지고 상대에게 대들어 나를 요구하는, 그런 궤변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김유정 미완 장편소설 [생의 반려]에서
김유정 작가님과 함께 실레이야기길의 ‘물음표길’을 걷는다. 고추가 주렁주렁 붉다. 매운 냄새가 확 풍긴다.
“작가님 이름으로 우체국 이름이 바뀐걸 아시지요?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이젠 친구에게 부탁할 것도 없고 편하겠어요?”
“무얼요. 그 건 연서가 아니었어요.”
“그러면요?”
“소설에도 나오지만 그 여자의 추악한 부분이란 일일이 꼬집어 뜯어서 발겨놓는 말하자면 태반이 욕설이었지요. 그러니 상대가 답장을 안 할 뿐만 아니라 받기도 거절하였겠지요.”
“그걸 다 아시면서 그렇게 편지를 쓰셨습니까?”
호박꽃이 호박에 기대어 바람에 흔들린다. 흔들리니 더 예쁘다.
“상대에게서 제 자신을 찾고 싶어서지요.”
“작가님 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화류계 인물에게서 자신을 찾다니요? ”
매미 울음이 하얗게, 파랗게 하늘을 날아다닌다.
“남녀 간의 그런 달콤한 사랑이 아니었어요.”
“죄송하지만 작가님의 염인증과 관계가 있나요?”
저만치서 하얀 나비가 나폴나폴 걸어간다.
“슬픈 가족사지요.”
키가 훌쩍 크고 넓적한 얼굴을 가진 학생이었다. 말을 할 때에는 좀 덜하나 선생 앞에서 책을 낭독할 적이면 몹시 더듬었다. 그때 우리는 그를 말더듬이라고 별명을 지었다. 그 대신 그는 말이 드문 학생이었다. 우리는 어떤 때에는 그를 비겁하게도 생각하였다. 왜냐면 그는 여럿이 모인 곳에는 안 갈려고 하고 비슬비슬 피하는 소년이었다.
-김유정 미완 장편소설 [생의 반려]에서
“작가님의 자전적 소설 [형]을 보면 저도 가슴이 아픕니다.”
“저의 형님은 자기 일신을 위해 열사람의 가족이 희생을 하라는 폭군이었지요. 주색에 잠기어 밤낮을 모르는 난봉꾼이었지요.”
묘를 덮어버린 개망초가 하얗게 손을 흔든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제풀로 돌아다니며 눈칫밥에 자랐지요. 아마도 사람들을 기피하는 염인증이 그때 뿌리를 박았는지 모릅니다.”
“일곱 살과 아홉 살 때 어머님과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봉꾼이요, 폭군인 형의 눈치를 보며 자랐으니 사람들이 무섭고 싫기도 했겠군요.”
“제 운명이지요.”
“부잣집 도련님의 운명치고는 안타깝습니다. 아버님과 형님과 그 고롭지 못한 분쟁 없이 형님이 가족을 잘 보살폈으면 작가님이 염인증에 걸리지 않았겠지요. 그리고 결막염이나 폐결핵에도 걸리지 않았겠지요?”
“장담은 못하겠지만 살기는 훨씬 수월했겠지요.”
이때다. 인창고개 쪽에서 여인네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들병이들이다. 얼른 배낭에서 막걸리 ‘봄.봄’을 꺼내어 그들과 작가님과 나눠 마신다. 노래 좀 하고 놀자니까 바쁘다며 이번에는 술만 얻어먹고 들병이들이 일어선다. 그중 제일 나이 어린 들병이가 밤에 주막에서 만나자며 내 옆구리를 쿡 찌른다.
솔잎에 맺혔던 물방울 하나가 내 이마에 툭! 떨어진다.
“누님한테도 많이 들볶였지요?”
“불쌍한 누님이지요. 돈 있는 친정을 둔 까닭에 불행한 여인이 됐지요.”
“돈 때문에 시댁에서 쫓겨났고, 친정밥 먹는다고 형님에게 매 맞고 구박당하고 쫓겨나와 허약한 몸으로 공장살이를 했으니.”
“돈에 한이 맺혀 성질이 그리됐지요. 사직동 동네사람들이 정신병자라고 했으니까요.”
물박달나무다. 덕지덕지 붙어있는 엽서며, 편지며, 사연들이 곱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런 질문이 타당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작가님의 모든 병의 시작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애정의 주림일 것입니다.”
“어머님의 사랑 말인가요?”
“어머님만 오래 사셨다면 저도 다른 청년들처럼 활달했을 것이고 형님도 그렇게 까진 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모정의 결핍을 나명주란 기생을 통해 채우고 싶었나요?”
생강나무 나뭇잎이 바람에 끄덕인다.
“우연히 그리 됐지요. 보고 싶어 늘 가슴에 품고 다닌 어머님 사진 속으로 우연히 들어오게 된 게 나명주(박녹주)이지요. 그 우연이란 게, 집의 일로 봉익동엘 다녀오다 수은동 근처에서 어느 목욕탕을 나오는 한 여인을 보았는데, 창백하고 수심이 가득차고 무표정한 낯으로 먼 하늘을 쳐다보더군요. 삶의 흥미를 잃은 사람처럼 보였지요. 그래선지 나도 모르게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그 집안으로 그를 놓쳐버리고는 넋을 잃은 듯 한참 멍하니 서 있었지요.”
“그리고 그날 밤부터 편지를 쓰기 시작했군요.”
제에게 지금 단 하나의 원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어려서 잃어버린 그 어머님을 보고 싶사외다. 그리고 그 품에 안기어 저의 기운이 다할 때까지 한껏 울어보고 싶사외다. 그러나 그는 이 땅에 이미 없노니 어찌 하오리까. 선생이시어. 당신은 슬픔을 아시나이까. 그렇다면 그 한쪽을 저에게 나누어 주소서.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길을 지시하여 주소서.
-김유정 미완 장편소설 [생의 반려]에서
“위는 작가님이 ‘나명주(박녹주) 선생께’ 쓴 편지 중 일부인데, 이 글을 통해 상대에게서 제 자신을 찾고 싶단 작가님의 심중이나, 같은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나명주(박녹주)가 어머니로서 동무로서 연인으로서 왜 작가님께 그렇게 필요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엉뚱한 대답 같지만, 내가 그녀에게 집착한 것처럼 그렇게 집착하지 마세요.
빗방울이 굵어진다.
“하긴요. 작가님에겐 따로이 한 길이 놓여 있었지요. 내가 어쩜 작가님께, 수필 [길]에 나오는 그 청년 같은 무례를······.”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나의 몸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길’이다. 그리고 ‘길’이라야 다만 나는 온순히 그 앞에 머리를 숙일 것이다. 요즘에 나는 헤매던 그 길을 바루 들었다. 다시 말하면 전일 잃은 줄로 알고 헤매고 있던 나는 요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를 위하여 따로이 한 길이 옆에 놓여 있음을 알았다.
-김유정 수필 [길]에서
“그 길이란, 문학을 말하지요?”
“여러 아픔이 찾아준 길이지요.”
“실레이야기길도 그 길 중 하나 아닌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빗방울이 세차게 떨어진다.
“작가님,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참 좋습니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도 참 좋습니다.”
“실레이야기길에 떨어지는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도 참 즐겁습니다.”
싸리나무가 산안개를 흔든다.
“그래, 독자님은 이 실레이야기길에서 무얼 보고 싶습니까?”
“겨울이라면. 딩금딩금 밟고 간 덕이 엄마의 발자국을 보고 싶습니다.”
“왜요?”
“어릴 적 어머니의 모습이 그리워서요.”
“그래요. 그리움! 이 실레이야기길이 그리움의 길이었음 좋겠네요.”
돌풍에 수어릿골 방죽물이 흔들린다. 나무들이 저희끼리 흔들린다. 우산이 뒤집어 진다.
김유정 작가의 소설 30여편!
그 중 그의 고향 실레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12편이다.
그의 나머지 소설과 수필을 읽고 김유정 작가의 고향을 여행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고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