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하지 말라
민수기 14 : 20 – 38
성경은 원망하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고’(11,23), ‘시험하고’(22), ‘원망’(27)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원망하는 그들을 ‘전염병으로 쳐서 멸하고’(12), 약속의 땅을 들어가지도 못할 뿐(33) 아니라 보지도 못한다(23)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망하는 자는 구원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13,14장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며 유리하다가 죽었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고 시내 광야를 지나 2년 반 정도 되어서 바란 광야 가데스까지 와서 진을 쳤습니다.(12:16) 가데스는 아말렉인과 가나안 인의 골짜기가 바로 앞에 있는 바란 광야의 북쪽으로 가나안에 들어가는 입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각 지파 중에서 한 사람씩 보내어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2) 여호와께서 가나안을 정탐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날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원망만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머잖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열두 명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두루 정탐하고 돌아와서 모세와 이스라엘 온 회중 앞에 보고했습니다.
열 명이 먼저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 우리가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그 땅은 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모든 백성은 키가 크고 장대하며 아낙 자손은 거인으로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고 악평하여 말했습니다.(13:31-33)
이스라엘 자손은 열 명의 정탐꾼이 악평하는 말을 듣고 소리 높여 밤새도록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1-4) ‘악평’은 사실을 긍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나쁘게 평가하고 말해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낙심하도록 합니다. 그들이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도록 한 것입니다.
‘원망’은 ‘못마땅하게 여겨서 탓하거나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생각 대로 되지 않는다고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망하는 것’을 ‘나를 믿지 않은’(11) 불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를 거역’(9)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원망’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믿지 않는 불신과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2)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의 학대에서 그들을 빼내어 출애굽 시켜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불평하고 원망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극도로 분노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11,12)
모세는 여호와께 ‘이 백성의 죄를 사하시옵소서’라고 간절하게 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전염병으로 진멸하는 것은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지만,(13-20) 그들의 죄를 온전하게 사하여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을 들은 그대로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여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35)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조상들에게 주기로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도 못할 뿐 아니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3,30)
‘결단코’라는 말을 두 번이나 거듭 말씀하신 것은 절대적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망’은 구원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을 따라 다시 광야로 들어가라’(25) 말씀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가나안에 머잖아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들이 원망하였기 때문에 다시 광야로 되돌아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을 정탐한 날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쳐서 40년(2년 반은 광야를 지나온 것 포함)을 광야를 방황하며 유리하며 당시 20세 이상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원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출생하고 자라고 원망하지 않은 출애굽 2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하며 그들이 메고 온 포도와 과일(13:23)을 보이고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14:8)고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이라고 말한 것은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만이 가나안 입성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적으로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수가 아닐지라도 진리가 다수를 이깁니다. 악평한 열 명의 정탐꾼의 믿음과 여호수와 갈렙 두 사람의 믿음이 달랐습니다.
악평한 그들은 ‘우리가 능히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리라’(13:31)고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고 싸워주신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이 ‘여호와께서 우리를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14:8)고 말한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고 싸우신다는 믿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그 땅 거주민은 강성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다(28)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은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을 보고 스스로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32,33)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를 마르게 건너고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과 백성을 전멸시킨 일을 듣고 간담이 녹고 정신을 잃었다’(수2:9-11)고 말했습니다. 여리고 뿐 아니라 가나안에 사는 모든 족속까지 정신을 잃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그들은 우리의 먹이(밥)라 말했습니다.(9) ‘보호자가 떠났다’는 말은 비조직적이고 질서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먹이라’는 말은 마치 우리가 ‘식은 죽 먹기라’는 말처럼 그들을 대항하고 쫓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비유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을 생각합니다. 메뚜기 떼와 같은 블레셋 사람들과 키가 큰 골리앗을 보고 사울 왕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려워 떨고 숨었습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골리앗을 쳐서 이겼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인도하시고 도와주신다는 생각과 내가 해야 하느냐는 생각에서 믿음의 척도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와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실 때 ‘말씀(言)’을 ‘씨(種子)’로 비유하셨습니다.(마13:19,31) ‘씨’는 생명이 있어서 밭에 뿌리면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와 같이 ‘말’도 능력(생명)이 있어서 들은 대로 행하게 됩니다.
상담학에서 ‘말’(言)을 ‘생명의 말’과 ‘사망의 말’로 나눕니다. ‘생명의 말’은 낙심한 사람을 위로해서 용기를 주며 일으켜 세웁니다. 그러나 ‘사망의 말’은 듣는 사람을 더욱 두렵게 만듭니다. ‘원망’은 사람을 죽이는 ‘사망의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성공하는 것이나 실패하고 어려움에 빠지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물며 사고를 당하거나 병들고 죽는 것도 누구의 잘못이기 전에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믿고 알아야 합니다.
뜻하지 않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지 말고 조용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묵상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지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알게 되면 원망하고 낙심하던 일도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결혼해서 부부가 되고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이요 섭리입니다. 결혼을 잘못하고 부모를 잘못 만났다고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한 짓인가를 깨달아 알게 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무엇을 하든지 두려워하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믿고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복을 받게 됩니다.
출애굽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기 위해 광야를 여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교회’라고 합니다. 광야교회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하기를 믿고 바라는 지상교회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6,37)고 말씀하셨습니다.
‘말(言)에 씨가 있다’는 말처럼 내가 한 말은 때가 되면 크든 작든 반드시 결과를 보게 됩니다.
인자가 오시는 날 심판주가 되신 주님께서 악평하고 원망하는 그들을 심판하시고 지옥에 던져 영원한 불꽃 속에서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10:1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고보도 ‘원망하지 말아야 심판을 면하리라’(약5:9)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원망’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는 악평해서 원망하게 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원망하지 맙시다.
‘원망’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인도하시고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원망은 불신앙입니다. 원망은 자신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인도하시는 삶을 살다가 주님 오시는 그날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