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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감엄이설에 주의하라.
231229(금요심야)
창 2:15-3:24
오늘 말씀의 핵심으로 아래의 세 구절을 먼저 소개하라는 감동을 주셔서 즉시 받아적고 소개해 드린다.
(잠 16: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사 1:19-20) 『[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시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십일조를 내야만 복을 받는다?”라는 타이들로, “교회에 헌금을 내고 십일조를 내는 행위는 더 나은 나의 경제력을 보장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일조를 내야, 헌금을 내야 복을 주시는 조건부 사랑이 아니다.”라는 강한 확신을 주장하는 사람을 보았다.
이상의 주제를 직접 언급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엇비슷하게 인용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켜 사망과 저주의 길로 이끄는 사탄의 간교한 계략을 살펴보겠다.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엇비슷하게 인용하여,
사람의 영혼을 미혹시키는 매우 간교한 자이다.
사탄이 뱀 속에 들어가서 접근한 사람은 인류의 시조 아담이 아닌, 그의 아내 하와였다.
사탄은 왜 아담이 아니고 하와에게 먼저 접근을 하였는가?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듣고 알고 믿고 있는 상황이었고,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담에게서 전해들을 때 대충대충 들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사탄과 하와의 대화 속에서 그런 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천지창조 후 아담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창 2:16-17)
[16] 동산 각종(히. kol: 모두, 전체)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하시며,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어주셨다.
그 이후 사탄이 가장 간교한 뱀을 통해 하와에게 접근하여 은근슬쩍 말하였다.
(창 3:1)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히. kol)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먹되,
단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씀하신 풍성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모든 것을 금하시는 인색하신 하나님으로 바라보게 하는 부정적인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하와의 답변이 다음과 같았다.
(창 3:2-3)
[2] ...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사탄의 간교한 말이 하와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은 결과였을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동산 나무의 열매”라는 하와의 말로 축소되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라는 하와의 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이 빗나갔고,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하와의 말로 확대되었고,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확정적인 말씀이,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는 불확실의 하와의 말로 둔갑되었다.
사탄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뱀의 독이 든 이빨과 같은 서슬이 시퍼런 말로 즉시 물어버렸다.
(창 3:4-5)
[4] ...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아담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하와에게서 변형되어 있음을 확인한 사탄은,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강한 미혹[迷惑]의 거짓말로 치고 들어가며, 거기에 한 수를 더하여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는 그럴 듯한 미혹의 거짓말까지 추가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 선악을 알게 되어”라는 사탄의 말은, 하와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던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었기에 하와로 하여금, ‘그의 모든 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것이구나!’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탄의 미혹의 거짓말을 들은 하와는 사탄의 의도대로 미혹되어 버렸다.
사탄에게 미혹된 눈으로 그 나무를 보았더니 그 나무가 사탄의 말처럼 보여졌다.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탄의 말에 잠식당하자,
하와는 사탄의 말대로 행동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었다.
(창 3:6)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만 사탄의 말대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 남편까지 그 일에 가담시켰고,
그 남편까지도 하와를 통해 사탄의 말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었다.
(창 3:6)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 결과는 처참하였다.
그들의 눈이 밝아지기는 하였으나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덮고 있었던 하나님의 영광이 걷히므로,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보고 비정상적인 부끄러움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이 원망과 불평으로 바뀌었으며,
부부의 사랑과 신뢰가 굴종과 억압으로 바뀌었고,
하와에게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이 더해지고,
아담에게는 농사지을 땅이 저주를 받으므로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
죽을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게 되는 수고로움이 더해졌으며,
에덴동산에 쫓겨나고 생명나무로부터 분리되는 저주를 받아야 했다.
죄 없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미혹의 말로 무너뜨린 사탄은,
죄 없는 둘째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접근하였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고 뒤트는 똑같은 방법으로 예수님까지 미혹하려 하였다.
하지만 둘째 사람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아시는 분이셨기에,
사탄의 3번의 미혹의 말들에 대하여, “기록되었으되 ...”, “또 기록되었으되 ...”,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라는 하나님의 정확한 말씀으로 응수하셨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마 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마귀는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 수종드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시 103:20-22) 『[20]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1]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이 말씀처럼 천사들의 사명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유, 무선으로 전 지구촌이 하나 되어 움직이는 시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대하여 다니엘에게 말씀하신 바,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12:4)는 말씀의 실제를 보는 듯하다.
성경적인 바른 말이 온라인을 통해 전 지구촌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반대로 성경을 가감하고 뒤틀어 만들어낸 사탄의 다른 교훈들도 빠르게 확산되는 부정적인 면도 있음을 본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엇비슷하게 인용하며 하와를 미혹시킨 것처럼, 온라인에서 성경을 엇비슷하게 인용하며 “복음” 혹은 “교리(교훈)”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키려는 시도들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음을 본다. “올바른 복음” 혹은 “올바른 교리”라고 그럴듯한 제목으로 올려졌지만, 그런 것들 중에 사도바울이 말한 바, 성경의 진리와 “다른 복음”(갈1:7,고후11:4), “다른 교훈”(딤전6:3)들도 많이 있음을 알고 극도로 조심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 것들의 목적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후 11:3-4) 『[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그렇다면 성경의 진리와 일치하는 “바른 말,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의 진리와 불일치하는 “다른 교훈, 다른 복음”을 어떻게 올바로 분별할 수 있는 것일까?
첫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성품 혹은 언약과 일치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둘째, 그 구절이 기록된 성경의 문맥과 일치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셋째, 신구약 성경 전체의 문맥과 일치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넷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과 일치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딤전 6:3-5)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구체적인 실제의 예를 들어보겠다.
(고후 12:7-9)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육체에 가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두 가지의 견해와 해석이 있다.
첫째 견해, 사도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간질, 혹은 안질”과 같은 육체의 질병을 의미한다.
둘째 견해, 사탄의 사주를 받고 사도바울의 사도직을 공격하던 “거짓 교사들”을 의미한다.
어느 견해가 맞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째 견해가 맞는 견해이다.
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첫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성품 혹은 언약과 일치하는가를 살피기.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시는 분이시다.
(출 15:26) 『...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시 103: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기도와 마음의 소원대로 응답해주시는 분이시다.
(시 145:18-19) 『[18]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19]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이상의 두 구절 속에 나타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언약에 비추어볼 때, 자신의 육체의 가시가 떠나기기 위해 세 번이나 간구하였던 사도 바울이 말한 육체의 가시가 육체의 질병일 수 없다.
둘째, 그 구절이 기록된 성경의 문맥과 일치하는가를 살피기.
본문자체에서 ①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는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육체의 가시란 곧 사탄의 사자를 의미한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 쓰여진 “사자(헬. agglos, 앙겔로스)”라는 말은 “천사 angel, 심부름꾼 messenger”를 의미하는 말이지, 어떤 질병이나 물건 등을 의미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② 본문을 담고 있는 고린도후서의 기록목적도 사도바울의 사도직을 공격하고 있었던 고린도교회의 거짓 교사들의 공격에 대한 사도바울 자신의 변호서로서 사도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진짜 사도가 맞다는 내용의 서신이기 때문이다. 전문맥인 11:13-14에서 그의 사도직을 공격하는 자들에 대하여 “거짓 사도, 속이는 일꾼, 사탄의 일꾼들”이라 칭하였고, 그 중심에는 사탄이 있는데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헬. agglos, 앙겔로스)로 가장”한다고 설명하였음을 본다.
셋째, 신구약 성경 전체의 문맥과 일치하는가를 살피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의 어법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육체에 가시가 무엇이었는가? 가나안에서 사탄을 숭배하던 가나안 7족속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가난에 들어가기 직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사탄을 숭배하는 가나안 7족속을 싹 진멸해 버려야 한다는 명령을 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후일에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괴롭힐 수 있으니 그들을 미리 싹 진멸하라는 명령이었다. 다시 말해 구약성경에서 육체에 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탄의 앞잡이(사자)들을 의미하는 표현이었지 육체의 질병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민 33:55)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수 23:13)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
(삿 2: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말한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란 육체의 질병이 아닌, 사탄의 사주를 받아 그의 사도직을 공격하였던 고린도교회의 거짓 교사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넷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과 일치하는가를 살피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 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 병자들 가운데 치료해 주시기를 거부하여 돌려보낸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고, 또 “그 질병은 너를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질병이니 그냥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마 8:16-17)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12: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그렇기에 사도바울이 말한 육체의 가시가 그 어떤 육체의 질병을 의미하는 것일 수 없다.
이상과 같은 검증과정을 철저히 거치지 않고, 사도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가르쳐진 대로, 그가 가지고 있었던 안질 혹은 간질을 의미한다는 미혹의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치유의 은총을 100% 확신하는 믿음에 실패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치유의 은총으로부터 벗어나는 아픔과 슬픔을 맛보게 될 것이다. 실제로 나에게 치유기도를 받으러 오신 분들 가운데 이러한 미혹을 교정 받는 동시에 하나님의 치유의 은총을 경험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기억하고 명심하며 극도로 조심하라.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엇비슷하게 인용하며 하와를 미혹시킨 것처럼, 온라인에서 성경을 엇비슷하게 인용하며 “복음” 혹은 “교리(교훈)”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키려는 시도들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음을 ...
십일조에 대하여 ...
서두에서 언급한 바, 재정전문가라는 어떤 사람이 “십일조를 내야만 복을 받는다?”라는 타이들로, “교회에 헌금을 내고 십일조를 내는 행위는 더 나은 나의 경제력을 보장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일조를 내야, 헌금을 내야 복을 주시는 조건부 사랑이 아니다.”라는 강한 확신을 주장하는 사람을 보았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듯한 매우 그럴듯한 사탄의 감언이설로 사람들의 영혼을 미혹시키려는 그 사람의 사특한 주장이 대충 아래와 같다.
“(말 3:8-10)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기에서 십일조를 잘못 이해하면 십일조를 내면 넘치도록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돈이 필요한 그러한 째째한 분이실까? 십일조를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간증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가 돈으로 계산하는 돈이라는 물질을 숭상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십일조는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돈의 액수를 수입의 10%라는 절대적인 돈으로 환산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계산하는 이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교회에서 (마 6:26, 킹흠정) 『공중의 날짐승을 보라. 씨 뿌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먹이시나니 너희는 날짐승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아니하냐?』, 이 구절을 인용하며 그저 주님께 기도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나 냉정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쫓겨나는 분들이 계시고 병원에 가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분들이 믿음이 작아서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복을 마치 잘 먹고 잘 살고 병에 안 걸리고,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라는 인간적인 해석을 하는 우리의 욕심과 무지함이 아닌가 싶다. 결국 이것은 그리스도인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아주 이기적인 것과 다름이 없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내일 먹을 물질적 풍요라는 이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걱정과 우울에 빠져서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미 주신 것을 다 누릴 수 있도록 내가 더 믿고 노력하는 평강함을 주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십일조를 내야, 헌금을 내야 복을 주시는 조건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모든 복을 받았고 이미 누리고 있다.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서 변함없이 사랑하신다... 교회에 딱 10%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나누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원하신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주님의 자녀로써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 그것이 하늘에 복을 쌓는 모습일 것이다. 한 번도 하나님은 21세기 교회가 반드시 십일조를 거둬야 한다고 그 원칙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이상과 같은 그 사람의 주장과 성경해석이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진리와 일치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사람의 주장은 에덴동산에서의 사탄의 말과 다르지 않다. 왜 그런가 찬찬히 설명해 보겠다.
그 사람이 인용한 말라기의 줄친 부분을 그 앞뒤 문맥과 함께 다시 전체로 보겠다.
(말 3:7-12)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사람은 말라기 3:8-10만을 인용하며, “여기에서 십일조를 잘못 이해하면 십일조를 내면 넘치도록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돈이 필요한 그러한 째째한 분이실까? 십일조를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간증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가 돈으로 계산하는 돈이라는 물질을 숭상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라는 주장을 했는데,
이 말씀의 도입절인 7절을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단순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그 사람이 인용한 말라기 3:8-10의 말씀이다. 그 구절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면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야 하는데, 그 규례가 바로 하나님의 것인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인용한 그 말씀에 이어지는 결론적인 말씀인 11-12절의 내용이 무엇인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도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단순한 말씀이다. 그들의 주 사업인 농사가 잘 되어 부자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결국 십일조를 내면 넘치도록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 이해가 도대체 뭐가 어떻게 어느 부분에서 잘못된 이해라는 것인가? 도대체 어떤 근거로 “여기에서 십일조를 잘못 이해하면 십일조를 내면 넘치도록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돈이 필요한 그러한 째째한 분이실까? 십일조를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간증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가 돈으로 계산하는 돈이라는 물질을 숭상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십일조는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돈의 액수를 수입의 10%라는 절대적인 돈으로 환산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계산하는 이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황당한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종 모세가 불신앙의 세대가 다 죽기까지의 40년의 광야생활을 끝내며, 광야에서 다시 태어난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광야에서 죽어간 그들의 불신앙의 선조들에 대하여 회상시키면서,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부탁이 무엇이었는가?
(신 5:32-33) 『[32]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으로 사역에서 버림받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여호수아에게 그 지도력을 위임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여호수아에게 말씀해 주신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되는 비결이 무엇이었는가?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수1:7)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은 십일조를 내야, 헌금을 내야 복을 주시는 조건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모든 복을 받았고 이미 누리고 있다.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서 변함없이 사랑하신다... 교회에 딱 10%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나누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원하신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주님의 자녀로써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 그것이 하늘에 복을 쌓는 모습일 것이다. 한 번도 하나님은 21세기 교회가 반드시 십일조를 거둬야 한다고 그 원칙을 가르치지도 않았다.”라는 주장을 펼쳤는데,
그렇다면 십일조에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인 말라기 3:9의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는 이 말씀은 잘못 기록된 말씀이라는 의미인가 되묻고 싶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 고린도전서 9:13-14의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또 무엇인지 묻고 싶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던 십일조가 아니면 그 무엇이라는 말인가?(민 18:21-24, 느 13:10-14 참조) 구약시대의 성전봉사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십일조로 먹고 살았던 것처럼, 신약시대의 복음 전하는 자들(목회자들)도 동일하게 십일조로 먹고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그리 용감하게, “한 번도 하나님은 21세기 교회가 반드시 십일조를 거둬야 한다고 그 원칙을 가르치지도 않았다.”는 무식한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인가? 외식적인 십일조를 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치유에 대하여 ...
오늘날의 교회에 팽배해 있는 치유에 대한 사탄의 미혹들은?
* 오늘날에는 치유의 역사가 없다.
* 모든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질병으로 인해 고통당할 때, 그가 다시 치유 받을 것이라고 믿도록 권유하지 말아야 한다.
* 치유는 내가 감당할 사역이 아니다.
* 하나님께서는 질병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 우리는 질병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상과 같은 말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치유에 대한 비성경적인 미혹의 말들이라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는 선별적이고 제한적이었는가? 아니다.
(마 8:16-17)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9:35-36)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 12: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치유에 대한 성경의 약속들은?
(출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출 23:25-26) 『[25]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26]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시 103:3) 『그(여호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고전 12: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시나니...),』
이상의 말씀들과 같이
하나님은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끊임없이 치유사역을 행하셨다.
성령님은 병고침의 은사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초대교회에서의 치유는 선별적이고 제한적이었는가? 아니다.
실제로 초대예루살렘교회에서도 모든 병든 자들이 다 치유되었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행 5:12-16)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16]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all of them were healed / they were healed every one.)』
치유와 구속사역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안에는 치유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씀한다.
(사 53:4-5) 『[4] (예수 그리스도)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의 모든 질병이 치유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한다. 성령의 영감에 의해 이사야 선지자는 치유가 하나님의 구속 계획안에 포함되어있음을 말한다. 이사야 53장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질병도 담당하시고 고통도 가져가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음을 본다.
이사야 53장4,5절에 “질고”, “슬픔(고통)”, “나음을 받았다.”는 말들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사야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우리의 몸의 질병과 고통에서 나음을 입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 죄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질병까지도 담당해 주셨다는 성경의 선언도 사실임을 알아야 한다.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께서는 마태와 사도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요한을 통하여 바로 그 부분을 정확하게 설명하심을 본다.
(마 8:16-17)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healed all the sick. / cured all who were sick)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by his wounds you have been healed.)』
(바울. 갈 3:13-14)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가난, 질병, 영적 사망, 신28장)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요 3:14-15)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치유의 모형과 실체로서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갈보리 십자가의 모형인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본 모든 사람을 치유하셨다(신21:8-9). 그 때 놋뱀을 본 사람들이 모두 나았다면 지금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모두 나을 수 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맞는 것이다.]
기도에 대하여 ...
오늘날의 교회에 팽배해 있는 기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과 사탄의 미혹들은?
* 하나님의 뜻이면 기도를 안해도 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리 기도를 해도 안된다.
* 기도를 하면 응답이 오기도 하지만 항상 응답이 오는 것은 아니다.
* 기도를 드린 후에는 “이것이 만일 주의 뜻이거든 이루어지이다.”로 마무리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말들이 부분적으로는 맞을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매우 잘못된 믿음 쪽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미묘한 미혹의 말들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상과 같은 기도에 대한 위험한 가르침과 미혹의 말들을 조심해서 듣고 정확히 잘 분별해 내야 한다.
(겔 36:3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사 65:16)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마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건강한 신학을 세우고 말씀으로 기도해야 한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막 11:22-24)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Ekete pistin theou (Have faith of God)]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란?
-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 이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누리는 것이다.
좀 더 자세하고 더 많은 주제들을 접하기 원한다면,
다음과 같은 주제로 다루어진 미혹씨리즈를 들어보기 바란다.
1. 구원의 확신에 대한 미혹
2. 영적권위와 질서에 대한 미혹
3. 재정에 대한 미혹
4. 치유에 대한 미혹
5. 기도에 대한 미혹
6. 영적은사에 대한 미혹
7. 마술에 대한 미혹
8. 종교다원주의의 미혹
9. 영적전쟁은 능력대결인가 진리대결인가?
10. 영적전쟁, 능력대결인가 진리대결인가?
https://cafe.daum.net/gvlove0691/FDTQ/31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의 다음과 같은 무서운 경고로 이 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갈 1:7-10)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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