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무공 묘소. 상당히 좋은 명당에는 틀림없지만,공의 명망에 비하면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여전히 꽃다발과 참배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2001년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돌풍을 일으켰다.2004~2005년에는 KBS가 ‘불멸의 이순신’을 방영했고, 2014년에 개봉한‘명량’은 1700만의 관객을 동원했다.이순신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키워드가 됐다.공의 선영을 통해 그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었다.이순신은 1545년(乙巳)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이정(貞)의 삼남으로 태어났다.공의 조부인 백록(百祿)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었고,부친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공의 유년이 가난했던 이유다.소년 시절 아산으로 주거를 옮긴다.1576년(丙子),공의 나이 서른에 식년무과에 급제하고,초급 장교로서 함경도에 부임해 국경을 수비하는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공은 원래 문과를 준비하였다고 한다.난중일기가 공의 학문의 깊이를 말해준다.
공의 청장년은 함경도에서 육군과 전라도에서 수군의 기지를 오가며 보낸다.당쟁과 무능한 군주가 빚어낸 인사파행으로 공은 마흔 일곱이 돼서야 전라 좌수사가 된다(1591년 辛卯).좌수사는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해역 사령관이다.1592년 4월 왜선 700척이 부산 앞바다를 덮으며 전쟁이 시작됐다.충주에서 배수진을 치던 신립 장군이 패하고 서울 방위의 책임자 도원수 김원명은 대량의 무기와 화약을 버리고 도망친다.4월 30일 선조도 백성을 팽개치고 평양으로 의주로 줄행랑을 떠난다.
▲ 고조부(孝祖),고조모(幸州奇氏) 묘소.그 아래는 증조모(臨陂 진씨)와 증조부(拒)의 묘소.고조부모 묘소는 엄청난 대명당이다.특히,고조모 묘소는 수 많은 전쟁에서 불패의 신화를 이루며 황제에 등극한 주원장과 누루하치의 부모 묘와 대등한 역량의 혈처다.이 묘소가 충무공의 불멸의 전승에 결정적인 추동력을 주었을 것이다.
한편 충무공은 해전에서 승전을 거듭하며 왜적의 보급로를 차단해 조선이 반격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한다.임진왜란 이후 4년여 이어진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1597년(丁酉) 1월에 왜군은 재침을 하는데 선조는 공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한다.군공을 날조하여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 죄목이었다.1597년 3월 13일,선조가 승정원에 내린 비망기다.이순신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사형에 처할 것이로되 고문을 가하여 그 죄상을 알고자 한다.혐의를 밝히지 못하자 백의종군으로 참전을 명한다(4월1일).
백의종군 남행길인 4월 13일 공은 모친상을 당한다.처참한 심경을 ‘난중일기’에 기록했다.“영구를 상여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나는 기진맥진했다.남쪽 길이 바쁘다.다만 부르짖으며 울었다.어서 죽기를 바랐다.”
1597년 7월 16일,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해 조선 전함 300척 이상이 깨어졌고 삼도수군은 궤멸됐다.이런 참담한 상황에서도 공은 그 유명한 해전을 치러낸다.
△명량해전: 1597년 9월 울돌목 지세를 이용한 전투.13척 배로 133척 왜선과 싸워 31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거둠.조선은 전사자 2명 부상자 2명뿐이었다.
△노량해전: 1598년 11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죽자 왜군은 철수를 시작한다.소식을 접한 공은 진린(明將)과 함께 노량에서 500척 왜선과 싸워 200여척 격침,100여척을 나포하는 승리를 거둔다.그러나 공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의 막도 내렸다.
세계 해전사에 남긴 공의 승전기록은 전문가들조차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한다.충무공의 선영을 통해 불멸의 승리와 개인적 비운을 살펴본다.
공의 5대조,고조,증조의 묘소는 지금의 관악구 봉천동 덕수공원 후록에 자리한다.묘역 안은 대흉지와 대명당이 혼재한다.5대조 이변(邊,1391~1473)
은 대제학과 영중추부사(정1품)로 가문의 명예를 빛냈건만 묘소는 대흉지라 후손들의 삶을 어렵게 했을 것이다.고조부모 묘소는 엄청난 대명당이다.특히,고조모 묘소는 수 많은 전쟁에서 불패의 신화를 이루며 황제에 등극한 주원장과 누루하치의 부모 묘와 대등한 역량의 혈처다.이 묘소가 충무공의 불멸의 전승에 결정적인 추동력을 주었을 것이다.고조부 하단의 증조부모 묘소 또한 대명당으로 공의 승전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공의 조부모 묘소는 용인 고기동에 소재하는데 조모 묘소는 근래에 이장한 것이어서 풍수적 판단이 어렵다.
▲ 부모 묘소.충무공 묘소 입구 주차장 뒷산에 자리한다.이 일대는 공의 부모와 형님 두 분이 포함된 덕수이씨 묘역이다.형님들의 묘소는 상당히 좋은 명당에 자리하는데,부모 묘소는 대흉에 걸렸다.공의 전사(戰死)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란 판단이다.
부모 묘소는 충무공 묘소 입구 주차장 뒷산에 자리한다.이 일대는 공의 부모와 형님 두 분이 포함된 덕수이씨 묘역이다.형님들의 묘소는 상당히 좋은 명당에 자리하는데,부모 묘소는 대흉에 걸렸다.공의 전사(戰死)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란 판단이다.
충무공 묘소는 상당히 좋은 명당에는 틀림없지만,공의 명망에 비하면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여전히 꽃다발과 참배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러일 전쟁 때(쓰시마해전),발틱함대를 괴멸시킨 일본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1848년~1934년)는 “나는 일본제국의 총력지원을 받아 몇 차례 승전 했지만,충무공은 모든 것이 열악한 조건에서 대소 수십 차례 전투에서 전승을 했다.나를 그에게 비할 수는 없다”라고 했다. 도고의 승전도 대명당에 자리한 모친 묘소의 풍수적 도움이 있었을 것이란 판단이다.그러나 도고의 묘소는 대흉지에 걸렸다.(동경 다모(多磨)묘원)
손건웅(孫健雄) 풍수유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