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삶은 언제나 시행착오의 연속입니다. 사실 준비된 삶이란 연약하기만 우리들에게 항상 어려운 숙제 같은 것이죠.
뒤돌아 보면 후회스러운 부분은 항상 남아있는 법입니다.
'자립은 가능하지 않다'는 통상적인 진리를 의심하기 위해, 최악의 가능성에도 살아남기 위해, 山에는 버섯을 심고, 동네의 유휴지에는 온갖 작물을 심었지요. 농생태학도 모른채, 옛날 우리 인류 조상들이 그러했듯이 먹어보고 물물교환도 해 볼려고 생각하였지요.쌀을 얻기위해 밭벼재배 시도, 麥류의 도정시도, 等은 시행착오의 연속들이었지요. 이 시행착오는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주 잡곡의 식량작물에 나타나는 '가라지'의 행태는 우리의 행동거지와 아주 비슷합니다.
농생태학적으로 '가라지'는 돌연변이種일수도 있고 식물의 생존전략일 수도 있읍니다. 원래 '가라지'란 단어는 경상도 말로 가래치, 성경에서 얘기하는 '가라지'로써 조의 어린 잎과 유사한 방아풀의 잎을 의미합니다.
어린 방아풀의 잎과 조의 어린 잎은 잘 구별되지 않아 김을 매려다보면 조의 어린 잎을 다치게 할 우려가 대단히 많읍니다.
논에 침투한 '가라지', 즉 피도 식량이 곤궁한 시기에는 피농사만 따로 농사짓기도 하였읍니다.
보리나 밀밭에 '가라지'로써 침투한 호밀이나 귀리는 처음에는 천대 받았지만 나중에는 나쁜 환경에서도 자랄 수 있는 독립된 種으로써 자립한 種이 되었읍니다.(재배식물의 기원, 다나까 마스다께)
성경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가라지를 제거할때는 많은 노력과 선별과정을 요구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가라지와 같은 사람으로부터 상처받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착한 농작물은 누가 규정하는가? 그것은 이기적인 인간이 합니다.
우리들은 벼, 보리 밀이 '가라지'로부터 상처받듯이 '가라지'도 인간으로부터 받은 상처에 살아나기위해 전략적으로 진화한 것 입니다. 우리 사회의 전통이나 관습은 문화가 되어 작물의 재배를 또 규제하게 되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저는 생존을 위한 나의 모든 것은 '가라지'와 같은 행동전략이라고 '커밍아웃' 하고 싶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