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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묵상글 (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 올해 새해맞이 잘 하시나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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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29 04:22
- 올해 새해맞이 잘 하시나요?
새해맞이.
2025년 새해를 나는 어떻게 맞이할까?
설빔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오래 못 보던 가족과 만남을 기대하며
설레고 들떠서 맞이하던 옛날 아이들과 같이 맞이하지는 않겠지요?
새해맞이는 애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무덤덤합니까?
그래서 새해 소망도 결심도 없이 맞이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묻습니다.
새해가 됐는데도 새해를 맞아들이지 않아 새해가 아닌 사람이 행복할까,
새해를 맞아들여 새해가 새해인 사람이 행복할까?
이것은 어리석은 질문이지요.
새해맞이를 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압니다.
그것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요.
죽은 사람은 새해맞이를 하지 않지요.
그리고 새해맞이를 하지 않는 것은 과거를 그대로 살겠다는 것이고,
새롭게 한 해를 살겠다는 것이 아니지요.
일종의 자포자기요 발전이나 성장/성숙이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새해 들어 복권이라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확천금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도 있지요.
매주 살 때마다 꿈, 희망을 지니고 살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부적을 몸에 지닌 것처럼 복권이 안 주머니에 있으면
한주가 왠지 뿌듯하고 든든하다고 하는데 말하자면 작은 희망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인이 아닌 사람은 새해 아무 소망 없이 살기보다는
하다못해 이런 소망이라도 갖고 사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에게는 확실한 복권이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올해 결심을 하나 하는 겁니다.
곧 올해 나는 행복하기로 결심하고
제가 자주 얘기하듯 무조건 행복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행복하다는 것은 조건에 따라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하지 않겠다는,
조건에 좌우되는 행복을 살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돈이 있건 없건 행복하고,
고통이 있건 없건 행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느님이라는 복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복권은 돈 주고 살 필요 없고 얻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주시기에 다른 복권은 원하지 않고
하느님 복권을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로또라는 복권과 하느님이라는 복권 가운데
하느님이라는 복권이 더 행복을 확실히 보장한다는
오래 숙성된 확신과 새해 들어 새로워진 확신만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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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1.29 07:28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전쟁이 끝났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자기 자리에서 무기를 들고 있었던 남태평양 제도의 일본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들은 종전 후에도 수십 년이나 자기 자리를 지키며 무기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전쟁 끝났다는 말을 들어도 믿지 않았고, 그들은 모두 속임수이고 가짜 뉴스이니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서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남의 나라에서 무기를 들고 힘들게 사는 그 일본군이 자유를 얻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자기들의 힘을 더해서 그 지역을 점령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루빨리 백기를 들어야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으며, 지금의 삶을 보다 더 의미 있는 삶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백기를 들어야 현명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무기를 들고 그 자리를 지키려고만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불쌍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은 무기를 들고 전쟁을 벌이는 사람입니다. 전쟁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불쌍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즉, 그 상대를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고 특히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에 집중하는 사람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백기를 든 것 같고, 그래서 상대에게 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짜로 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 전쟁터에서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입니다.
오늘은 새해의 첫날인 설날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올해는 지난해와 다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게 되고, 새롭게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정하면서 힘찬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과거에 계속 매여 있다면 어떨까요? 과거의 일에 연연하면, 현재에 충실할 수 없으며 동시에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버려야 할 과거의 일은 무엇입니까? 백기를 들고서 떠나야 할 과거의 일들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삶이 아닌,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를 이야기합니다. 바로 주님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올해는 세속의 시간에 머무르기보다 거룩한 하느님의 시간에 더 많이 머무르는 우리가 되면 어떨까요? 진정한 평화 안에서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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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멈추지 않는 이상,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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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과 사람의 아들이 갑자기 오실 것임을 명심하라는 말씀(루카 12,39-40)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 내가 그 어떤 어려움에 있다하더라도, 그 속에서 축복을 느끼는 자는 진정 복된 자입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 자체’를 깨우쳐줍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합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바레크)는 ‘어떤 것을 선사함’이요, ‘주어진 선물’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무생물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축성’될 뿐입니다.
‘축복’이란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곧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요,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그러니 ‘축복기도’는 축복을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축복을 주셔도 그 축복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응답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 주십시오. 당신의 축복이 실현되도록 그가 응답하게 하소서!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참 묘한 것은, 그렇게 축복기도를 하면, 먼저 자신이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거부하고 미워하던 상대를 축복해주는 그 순간,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자신 안에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서 그에게 ‘위하는 마음’을 북돋으신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변화됩니다.
바로 이 소박한 ‘축복기도’가 우리에게 당신의 권능에 응답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줍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공간을 열어 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의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다시 한 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한해 되길 빕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창세 12,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주님!
깨어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여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제가 이미 행복한 것은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임이 나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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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복을 빌어주는 사람
구정 명절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설은 본디 신일(愼日)이라고 하여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데에 근신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우선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날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합니다.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설빔을 해 주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큰절을 받고 세뱃돈을 주며 가정의 화목과 평화, 부와 안녕을 기원하였고 한 해를 살아갈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덕담은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축원의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덕담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2014년의 모토를‘사랑에 사랑을 더하여’로 정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다시 한 번 더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지난 설 명절에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하며‘통통,통통’복을 받으시라고 했습니다. 1.의사소통, 2.운수대통, 3.만사형통. 4.쓰레기통입니다. 서로의 의사소통을 잘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가족은 물론 이웃과도 통해야 합니다. 잘 통하면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하지 않으면 아픕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잘하시길 빕니다. 하느님과 잘 통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립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열어주신 길에 장애가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는 데 있어서 하는 일마다 잘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좋은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모든 것을 담고 품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되시길 다시 한번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공짜로 언제든지 주십니다. 알맞게 주십니다. 그러나 내 잣대로 재고는 받았네, 못 받았네 하면서 투덜댑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알맞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지금 받은 것에 감사하면 감당할 수 있는 축복이 또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명절의 의미는 바로 감사하는 생활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방문하여 조상들을 기리며 차례를 지내고 부모형제, 친척과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은 감사드림의 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사의 원천인 하느님께로 먼저 눈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를 마련하시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혈족만이 아니라 모든 이웃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이요, 사랑받는 존재이고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 민수기(6,22-27)를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면 주님께서 몸소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는 일은 먼저 복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달라고 하기 전에 이웃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베푸는 몫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명절의 두 번째 의미는 복을 빌어주는 생활입니다. 어르신께 세배를 하면서 한 해의 건강과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덕담을 받고 이웃형제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인사하는 것이 오늘 하루만의 인사 치례가 되어서도 덕담으로 끝나서도 안 되겠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만큼 삶의 모범으로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복을 받는 사람도 복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축복하는 삶, 생활로써 복을 함께 나누고 지켜주면서 감사의 마음을 키워갈 때 우리 주변은 더욱 빛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아름다운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감사와 축복의 날에 주님께서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루카12,40)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직한 종처럼 감사와 축복으로 매일을, 순간순간을 늘 깨어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상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며 이웃과 더불어 만남을 기뻐하는 날, 정월 초하루! 모두 모두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가면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다섯 가지의 복을 오복(五福)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유교의 5대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 1편인 홍범(洪範)에 나오는 오복(五福)을 보면, 오복의 첫 번째는 수(壽)로서 천수(天壽)를 다 누리다가 가는 장수(長壽)의 복(福)을 말했고, 두 번째는 부(富)로서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풍요로운 부(富)의 복(福)을 말했으며 세 번째로는 강령(康寧)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사는 복(福)을 말했습니다. 또, 네 번째로는 유호덕(攸好德)으로서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복(福)을 말했고 마지막 다섯 번째로는 고종명(考終命)으로서 일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福)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큰 행복으로 여겼던 이 오복(五福)을 염원하기 위해 새 집을 지으면서 상량(上梁)을 할 때는 대들보 밑에다가 "하늘의 세 가지 빛에 응하여 인간 세계엔 오복을 갖춘다"는 뜻의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 비인간지오복(備人間之五福)"이라는 글귀를 써 넣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서민들이 원했던 또 다른 오복(五福)으로는 1. 치아가 좋은 것 2. 자손이 많은 것 3. 부부가 해로하는 것 4. 손님을 대접할 만한 재산이 있는 것 5. 명당에 묻히는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 세상에서 끝나고 맙니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복을 받았다 해도 일시적입니다. 믿는이들은 영원한 복을 추구합니다. 참으로 복 중의 복은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복을 주관하시고 천상의 복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세성을 넘어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복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기뻐하십시오, 이미 하느님을 차지하시고 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복을 결코,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신명기에는 “너희가 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머리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복을 받으시길 희망합니다.
시편에서는“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고 하였습니다. 만사형통하려면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어 복을 내리시리라. 이스라엘 집안에 복을 내리시고 아론 집안에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낮은 사람들에게도 높은 사람에게도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께서 너희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을 번성하게 하시리라. 너희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분께”(시편115,11-15). 복을 주시는 분은 주 하느님이심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복은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느님의 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마누라의 3金 ? 현금, 지금, 입금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중요한 ‘세 가지 금’이 있다.
돈을 상징하는 황금.
음식을 상징하는 소금.
그리고 시간을 상징하는 지금. 이 세 가지다.
남편이 마누라에게 이 말이 너무 멋있어서 문자 퀴즈를 냈다.
“여보야… 세상 살아가는 데 중요한 3가지 금을 뭐라 생각하노??”
잠시 후 마누라한테서 답문자가 왔다. “현금, 지금, 입금.”
이 문자를 보고 남편이 허덕거리며 다시 문자를 보냈다.
“방금, 쬐금, 입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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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위바위보 할 때 ‘삼세판’이라는 말하곤 했습니다. 한 번에 결정하면 아쉽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에서 무승부가 되면 세 번째에서 결정합니다. 이렇게 하면 아쉬움도 덜어내고, 지더라도 깨끗하게 승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세 번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첫 번째는 교회 전례력으로 시작되는 새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4주 전을 대림 제1주일로 정하였습니다. 교회는 대림 제1 주일을 새로운 한 해로 시작합니다. 대림초는 4개를 준비합니다. 대림초 4개는 ‘춘하추동, 동서남북’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심을 뜻합니다. 대림초는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니 ‘희망’을 갖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높은 산은 깎아내리고, 골짜기는 메우시며 굽은 길은 곧게 펴시는 분입니다. 참된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공정’을 세우시는 분이기에 ‘기쁨’이 됩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품어주시는 아버지처럼,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처럼 하느님의 아들은 죄인까지도 품어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기에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십니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면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양력으로 시작하는 새해입니다. 1월 1일입니다. 이 양력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올해가 2025년이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지 2025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양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국가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의 기준이라는 걸 인정하는 겁니다. 사회의 모든 조직은 양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운전면허증, 여권과 같은 신분증은 모두 양력으로 표기됩니다. 졸업장과 같은 학력 증명서도 모두 양력으로 표기됩니다. 회사에서 급여를 정할 때도 양력을 기준으로 합니다. 비행기, 기차, 호텔을 예약할 때도 그 기준은 양력입니다. 생일, 결혼기념일, 서품 기념일, 축일도 그 기준은 양력입니다. 세 번째는 음력으로 시작하는 새해입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시작하는 새해의 첫날 ‘설’입니다. 음력의 기준은 ‘자축인묘지사오미신유술해’로 시작하는 열두 동물입니다. 저는 토끼띠입니다. 올해는 뱀띠의 해입니다. 올해는 ‘을사년(乙巳年)’ 뱀의 해입니다. 뱀은 다양한 문화권과 종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뱀이 탈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동물, 지혜로운 동물이라고 여겼습니다. 동양 철학에서 뱀은 뱀이 자연의 순환, 지혜, 그리고 생명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12지신 중 뱀은 날카로운 통찰력과 결단력을 가진 동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서는 뱀에 대해서 두 가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유혹의 상징입니다. 사탄은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뱀이 독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뱀에게 물리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어쩌면 그런 점에 착안해서 인간을 유혹한 상징으로 ‘뱀’을 나타냈을지 모릅니다. 저도 산행 중에 뱀을 만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뱀을 피해서 돌아갔습니다. 뱀이 저를 피해서 가는 예는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뱀은 구원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구리 뱀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구리 뱀을 만들어 높이 들었고, 그 뱀을 본 사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유혹과 시련을 겪지만, 이를 통해 성장과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뱀은 인간의 연약함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지혜와 재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뱀에 대해서 성서는 양면성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을사년 새해에는 악의 유혹은 과감하게 물리치면 좋겠습니다. 을사년 새해에는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을사년을 맞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공동체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더 큰 영적, 지적 성숙을 이루면 좋겠습니다.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2025년에는 모두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께로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다. 당신 하신 일을 당신 종들에게, 당신 영광을 그 자손들 위에 드러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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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설’ 명절을 축하드립니다.
올 한해도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설’ 명절은 한해를 시작하며 보내는 우리 고유의 명절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한데 어울려 먹고 마시며 즐거운 이야기 꽃을 피웁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전통에 따라 제사를 지냅니다. 이미 하늘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감사와 기도를 잊지 않는 것 또한 ‘설’ 명절 우리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설’ 명절 안에는 생명의 모습도 있고 죽음의 모습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복음의 내용은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태어난 모든 사람은 다시 하늘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 생명의 주인은 언제고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때와 시간을 알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말합니다.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입니다.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만이 천상의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복음은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 즐겁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천상의 행복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언젠가 천상의 행복도 우리 차지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즐거운 명절 되시고, 행복하세요.
⭐꼭 필요한 한 모금….
하얀 겨울의 어느날
일어나 보니 눈이 소복이 내렸습니다.
산책 겸 기도 겸 걷는 아침 길
뽀득, 뽀득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걷다가 알았습니다.
먼저 눈길을 걸었던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을.
강아지, 고양이 새들의 발자국
무얼 찾아 헤맸는지 모르지만, 이리저리 바쁜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때 기억 속에서 떠오른 누군가의 한마디
‘겨울철 동물은 물이 없어 죽는다네’
냉큼 들어가 물 한 대접을 밖에 놓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해줄 수는 없지만 물 한 잔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목마름이 가장 큰 고통이니까요.
그대의 목마름도 주님께서 채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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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복받은 삶
“감사하라, 겸손하라, 깨어 있어라”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편90,14)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새해 가장 많이 주고 받는 인사일 것입니다. 올해 설날 29일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이 눈내린 말그대로 눈 ‘설(雪)’자 ‘雪날’이 되었으니 웬지 모를 좋은 느낌이 듭니다. 순수의 축복으로 빛나는 흰눈덮인 수도원 주변의 산야를 보니 혼란의 진통을 겪어내고 있는 우리나라도 새롭게 웅비하는 한해가 되리라는 희망이 샘솟는 느낌입니다. 작년 후반부터 불암산앞에 설 때 마다 저를 행복하게 하는, 수없이 나눴던 고백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삶도 행복도 선택입니다. 누구나 축복받은 삶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음이 축복이요, 이렇게 살아있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석할 수 있음이 축복입니다. 찾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고 있는지 삶인지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정의는 축복받은 존재요,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공의 길은 다양하지만 실패의 길은 포기 하나뿐입니다. 하나의 길이 막혔다거 해서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축복의 길을 찾아, 다시 희망차게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침 인터넷에서 유익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설날의 다짐, 뇌를 썩게 하지 않겠다. 소셜 미디어 중독의 폐해...저급한 온라인 콘텐츠에 매몰되지 않고 외로움에 익숙해 지련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출판부가 2024년 단어로 ‘Brain rot’(뇌 썩음)을 꼽았다. 이 단어는 저급한 온라인 콘텐츠, 특히 소셜미디어의 과잉소비로 초래되는 영향에 대한 우려를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사소하거나 하찮게 여겨지는 자료를 과도하게 소비한 결과, 정신적 지적 상태가 퇴보하는 현상이다. ‘뇌썩음’(Brain rot) 이란 표현은 1854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저서 <월든>에서 사용했다.”
참 중요한 깨우침입니다. 소셜미디어의 중독으로 아까운 축복인생 손실을 끼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기쁨은 우리가 축복받은 존재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제1독서 민수기 말씀대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얼마나 멋진 하느님의 축복인지요. 어떻게 하면 축복받은 존재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답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감사하라!" 입니다.
하느님 축복에 대한 당연하고 자연스런 응답이 반응입니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입니다. 믿는 이들의 우선적 특징이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자체가 축복이요 감사할 때 축복도 계속 받습니다. 감사의 발견, 감사의 선택, 감사의 축복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감사로 가득한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입니다. 감사에서 샘솟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감사를 강조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감사할 때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이지만 불평할 때는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입니다. ‘아직도 이렇게 남았네!’ 하면 낙관적 만족의 사람이요, ‘벌써 이렇게 썼네.’ 부정적 불만의 사람입니다.
둘째, "겸손하라!" 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겸손입니다. 영성의 잣대가 겸손입니다. 침묵, 경청, 겸손, 순종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흙(humus)에 어원을 둔 사람(homo)이자 겸손(humilitas)입니다. 흙같이 겸손해서 사람입니다. 사람됨의 본바탈이 겸손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겸손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겸손이 지혜입니다. 무지의 교만이요 지혜의 겸손입니다. 진정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몰라서 교만의 자랑이지 알면 겸손히 감사합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겸손할 것을 촉구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연기처럼, 안개처럼, 구름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덧없는 인생입니다. 모사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입니다. 일을 계획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자랑하려가든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요, 우리가 할 일은 다만 하루하루 날마다 최선을 다하고 결과가 어떠하든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일뿐입니다.
셋째, "깨어 있어라!" 입니다.
깨어 있음의 은총이자 축복입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감사요 겸손입니다. 깨어 있을 때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감사하며 겸손히 살 수 있습니다. 과연 제정신으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깨어사는 자 몇이나 될까요? 아마도 자기를 잊고 사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성당 뒷벽의 양쪽 올빼미 눈 역시 깨어 있음을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도 온통 깨어 있으라는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막연히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찾아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 우리를 깨어 있게 합니다. 아니 주님은 끊임없이 알게 모르게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도대체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기쁨은 없습니다. 깨어 있을 때, 비로소 깨끗한 마음이요, 깨달음의 연속입니다. 깨어 있음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도 참 좋은 영성생활의 방법입니다. 향심기도, 명상기도, 비움기도,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 매일의 공동전례기도등 모두가 깨어 있음의 참 좋은 영성훈련입니다.
우리는 모두 축복받은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인답게 감사하는 삶, 겸손한 삶, 깨어 있는 삶을 삽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축복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옵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우리 손이 하늘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9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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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설에 드리는 기도>
새해가 서는 설!
겸손하고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나를 세상에 보내신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지난 날 낡은 허물 말끔히 털어버리고
나날이 새롭게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소서.
사리고 삼가야 한다는 설!
항상 깨어 스스로를 살피고
더불어 함께하는 벗들을 보살피게 하소서.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게 하소서.
낯설어서 설!
익숙함에 머물러 웅크리지 않고
새로 만날 모든 이와 모든 것 품게 하소서.
두려움 없이 낯섦과 벗함으로써
온 누리 품을 만큼 나를 키워가게 하소서.
한 살 더 먹는 설!
한 살 더 먹는 만큼
더 사람다울 수 있게 하소서.
사랑하고 섬기고 베풂으로써
참으로 사람이게 하소서.
늙어가니 서러워서 설!
온갖 서러움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한걸음 내딛게 하소서.
서러움에 짓눌린 벗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축복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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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 12,35)
절제와 선행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사나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절제와 관련된 것이지요. 등불을 밝힘은 선한 행실로 빛을 내는 것이니, 정의와 연관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일러 주십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 주님께서 오시면, 욕심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사랑의 명령에 순종한 우리에게 합당한 상을 주시어, 온갖 악의 시련에서 벗어나 완전하고 영원한 평화 속에서 지고한 선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게하실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 5,3)
한 위대한 대가는 돌파가 흘러 나옴보다 고귀하다고 말합나다. 그리고 이 말은 옳습니다.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흘러 나왔을 때, 만물이 “여기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라고 해서 나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음으로써 나는 내가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나는 돌파 속에서 나의 뜻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모든 활동과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돌파 속에서 나는 모든 피조물을 능가합니다. 돌파 속에서 나는 피조물도 아니고 하느님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있던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나, 앞으로 영원히 있을 나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모든 천사들보다 더 높은 곳으로 나룰 데려다 줄 추진력을 얻습니다. 하느님을 하느님 되게 하는 만물 속에서 하느니과 그의 모든 활동은 내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추진력 속에서만큼은 막대한 부를 얻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돌파 속에서 나와 하느님이 하나라는 것을 알아채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나는 있던 그대로의 나입니다. 나는 더 작아지지도 더 커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거기서 만물을 움직이는 부동의 원인이기 때문입나다. 이때, 하느님은 사람들 속에서 어떠한 장소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 가난을 통해 영원부터 있었고, 영원히 있을 존재를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느님은 영과 하나가 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가장 엄밀한 의미의 가난입니다.(322)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1절: “아비뇽 유배”와 서구 대이교
그러나 또 부분적으로는 당시 번영하던 상업도시에서 일반적으로 실시되던 현물경제에서 화폐경제로 이행하던 이 시기에 있어서, 새로운 여건에 적응한 것과도 관계가 있었다. 아비농의 교황청이 끊임없는 재정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공납금과 조세를 올리기 위해 거듭거듭 발견한 새로운 수단과 방법의 규모는 무엇보다도 불안과 분격을 일으켰다. 거기에는 종종 성직 매매의 냄새가 풍기던 관면 • 특권 · 은전에 대한 수수료가 있었다. 또 교황에 의한 교회직무 서임에 대한 부과금, 유보와 공직 교회록의 관리에 대한 부과금이 있었으며. 팔리움의 수여에 대하여 대주교들로부터 받던 지불금, 초년도 수익이나 성직자의 유산에서 교황청에 납부해야 했던 교회록 초년도 헌납금이나 성직자 유산 계승의 납금도 있었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십자군이 사라졌으나 여전히 요구되던 십자군세가 있었고, 인노첸시오 3세 때 봉신이 된 나라들로부터 여전히 징수되던 봉토세나 세금이 있었으며 그밖에도 많았다. 이러한 금전이 징계와 파문의 위협으로 예외 없이 징수된 것은 교황청에 대한 불만을 증대시켰다. 특히 독일에서는 바이에른의 루드비히에 대한 교황의 반독일적인 태도 때문에 독일인의 비위를 거슬리게 한 것이 더해져서 불만이 증대되었다.
그것은 이후 수십 년 동안에 증대되어 15세기에는 <독일 국가의 소원(訴願)>에서 반영되었으며 마침내 16세기에는 종교개력 시기의 대량 이탈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아비농의 유배는 전체적으로 교황권의 명성에 한없는 손해를 입혔다. 그것은 인노첸시오 3세 때 교횡권이 누렸던 신뢰를 동요시키고 중대한 위기를 야기시켜, 교황권이 이에 합류하도록 하였다. 즉, 서구 대이교(1378∼1417)와 공의회 우위셜은 그 직접적인 결과였다.(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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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또 한 해를 맞는 민속 설날 /
박윤식 [big-llight] 2025-01-28 ㅣNo.179642
외가로 머슴살이 간 큰애가 와서 마당에 지게를 받쳐놓고 말라 버린 아버지 손을 잡는다. 도회 공장으로 돈 벌러 간 누이도 벌써 와 일손 돕느라 한창이다. 객지에 나간 막내는 빈손이라 못 온다더니, 섣달그믐 한밤중에 사립문 들어섰다. 희미한 등잔아래 초라한 가방에서 버선과 고무신 꺼내어 어머니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낀다. 모두 모였다. “고생들 많았다. 몸성히 왔으니 바랄 게 뭐 더 있겠어.” 설날 아침 차례 지내러 가, 문중 어른께 세배하고 친척과 함께 여기저기 조상들 산소를 찾는다. 하얀 두루마기 차림에 기러기 떼처럼 외줄로 밭길을 간다. 까만 교복의 까까머리, 꽃 댕기 매고 색동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재잘거리는 아이들까지 참 좋단다. 마른 나뭇가지 오가며 지저귀는 까치가 평화롭다. 우리의 고유 명절인 ‘설날’ 옛 풍습이다.
요즘 많은 이가 힘들단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힘든 나날을 보내시는 분들도, 내일은 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 속에 살게다. 이렇듯 희망은 가진 이나 못 가진 이, 배운 이나 못 배운 이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부여된 특권이다. 희망은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며 내일에 대한 꿈이다. ‘설’의 어원은 ‘살’이나 ‘선다.’라고 한다. ‘살’은 한 살 더 먹는 날이라는 뜻이고, ‘선다.’는 장이 서는 것처럼 일 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라나. 그러나 학자들은 ‘삼가다.’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는 뜻에서 나왔다나. 우리 조상들은 이렇듯 한 해를 시작할 때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한단다. 삶이 결코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전능하신 분의 도우심과 조상님들 은덕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임을 수차 느꼈기에 말이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설 아침에 ‘깨어 있으라.’라는 뜻을 되새기자. 그러려면 ‘깨’로 시작하는 말들을 곰곰이 보자. 깨끗하다, 깨뜨리다, 깨닫다, 깨우치다, 등등. 이 말들의 공통점은 다 ‘깨’라는 말이 무언가 부수거나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면 신앙의 의미에서 ‘깨어 있다.’라는 뜻은? 과거의 묵은 자신의 것을 지금 막 깨뜨릴 수 있는 것도. 고정 관념을 깨부수는 것, 하느님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온갖 허물을 깨끗이 치우는 것일 수도. 그렇게 지난 해 낡은 삶에서 깨어나 새 한 해를 맞는 것이다. 그렇다. 참된 것 맞으려면 늘 깨끗함으로 자신을 깨뜨려야 할 게다. 그러할 때에 우리는 정녕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과 친교’를 맺을 수가 있을 게다.
우리가 사는 데에는 다른 이의 도움도, 하느님 은총도 필요함을 그리스도인들은 잘 알게다. 또 한 해를 사는데 필요한 도움을 하느님께 구하자. 하여 늘 깨어있는 마음을 갖자. 우리에게 생명 주신 하느님께서, 이제 또 다른 다짐을 갖도록 한 해를 안기셨다. 경건한 마음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영원한 안식을 청하면서 차분하게 내일의 희망을 설계하자. 민족의 크나큰 명절인 설날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삼가고 조심하라.’라는 의미의 ‘설’을 깊게 새기자. 이렇게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는 ‘자신의 능력에 자신만만해 하지 말고’ 하느님 은총과 조상님의 도움을 구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겠다. 새 옷과 새로운 마음으로 단장하면서 하느님 앞에 깨어 있는 시간을 더 갖도록 다짐하자. 세속의 시간보다 성스러운 시간에 더 머물도록 기도하자. 오늘 우리는 바쁜 세속 생활을 떠나 가족과 공동체의 일체감을 느끼는 명절 기분을 맛본다. 친척들과의 유대감을 새롭게 발견하며 행복을 맛본다. 더구나 믿는 우리는 자신의 뿌리가 가족과 조상을 넘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새삼 되찾는다. “주님, 또 이 한 해 저희에게 평화를 안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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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김동희 모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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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 40)
https://cafe.daum.net/bbadaking/LgBK/2342
설날에
눈사람을
봅니다.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을
기억하는
우리의
설명절입니다.
소중한
길 위의
시간 안에
우리의
설명절이
있습니다.
설명절은
우리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이
서로를 기억하는
소중한 마음임을
깨닫습니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는 것은
마음입니다.
소중한
마음과 마음이
만나
서로를 맞잡는
것이 사람의
길입니다.
사람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준비가
되어 있고
깨어있는
사람만이
마음의 길을
따라갑니다.
준비가 된
사람은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것은
마음입니다.
사나운 시간들을
지나
깨닫게 되는
반듯한
마음입니다.
반듯한 마음이
삶의
열매를 맺습니다.
불행의 시간을
이제 접고
다시
행복해지는
설명절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설날의
새 아침으로
좀 더 행복하고
좀 더 기쁜
새날들을
맞이하시길
또한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현실을
위로하며
우리의 삶에
소중한 것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2025년의
새해
설명절입니다.
"새해엔
더 좋은 일들로
가득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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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찰나같은 이 세상, 섬광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Is9h/2179
한달전 이미 지난 해와 작별인사를 하고 새해를 맞이했지만, 오늘 설날을 통해 다시 한번 새로운 마음, 새로운 각오로 새출발을 할 수 있으니 참으로 좋습니다.
새해 벽두를 맞이할 때 마다 드는 한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야속하게도 세월이 어찌 이리 빠른지, 돌아보니 그야말로 활시위를 떠난 화살같이 빠르게 건너온 세월입니다. 다들 한분 한분 먼저 떠나가시니, 이제 곧 내차례겠지, 하는 생각에 인생의 덧없음을 온몸으로 깨닫습니다.
그래서 설날 때 마다 새롭게 마음을 다잡습니다. 꽃같이 좋은 시절 만끽했으니, 미련이나 아쉬움 내려 놓고 이제 남은 날들 하루하루에 감사하면서,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주님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겠다는, 그런 마음.
그래서 길고 긴 황금연휴지만, 어디 멀리 휴가라도 가고 깊은 생각을 멀리 떨치고 한 송이 어여쁜 꽃 같은 아이들 위해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짜장 소스를 만들고 탕수육을 튀깁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인 야고보 서간은 우리 인간 존재의 실체요 본질을 단 한 문장으로 아주 정확하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특별히 설날 아침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추모하는 분들, 제삿상 건너편에 앉아계신 분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들, 나라며 가문, 공동체나 가정 전체를 쥐락펴락, 좌지우지했던 사람들...
그 권세, 그 위세가 백 년, 천 년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30년, 50년 지나가니, 그 모든 분들, 마치도 한 줄기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우리네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우리 역시 불과 10년, 30년, 50년 후면 어쩔 수 없이 그분들 뒤를 따라나서겠지요.
생각할수록 참으로 아름다운 명문장입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어찌 보면 야고보 서간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강력한 경고장입니다.
이 세상 일에만 목숨 거는 사람들, 영혼이나 상위 가치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사람들, 순식간에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지위나 명예, 권력이나 재산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장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인간 세상 안에서, 인간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는 모든 일들은 다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확실하십니다. 세상 모든 확실성은 오직 하느님께만 기인합니다.
뭐 엄청나고 대단한 것 같지만 우리네 인생 참으로 덧없습니다. ‘한 줄기 연기!’ 참으로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번 뿐인 우리네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전투적으로도 살지도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팍팍하게 살아서도 않되겠습니다.
찰나같은 이 세상, 섬광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해만 뜨면 사라지는 새벽 안개 같은 우리네 삶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시계로 보면 너무나 짧아 아쉬운, 수학여행 같은 우리네 지상 여정입니다. 최대한 기쁘고 신나게,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흥미진진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설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마주한 가족들, 친지들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이 세상 소풍의 둘도 없는 동반자들입니다.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도착할 때 까지 서로 배려하고 서로 도와주라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소중한 인연들입니다.
오랜 만에 가족 친지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설 명절은 서로를 향한 더 많은 배려와 지지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내 목소리는 좀 많이 줄이고, 상대방의 말을 더 많이 경청해야겠습니다. 공동체가 좀 더 살아나기 위해, 내가 좀 더 작아지고 겸손해지며, 좀 더 부드러워지고 온유해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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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35-40: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이다. 우리가 설을 맞이하여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시고 이 땅에 살게 하신 우리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는 이 날, 복음은 종말론적인 가르치심이면서 또한 순간순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한 해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다. 그러기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값진 보물을 차지하는 것은 이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여기서 사용하는 비유는 옛날 일반적이다. 여행을 떠날 때는 기다란 옷을 무릎까지 올려 전대를 묶는 튼튼한 가죽 띠로 묶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행은 캄캄한 밤에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밝은 등불을 밝힐 필요가 있다(35절). 다음 말씀은 전혀 반대이다. 여행이 아니고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만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다.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고 그에게 즉시 문을 열어 주기를 원한다(36절). 오시는 주님은 행복하다고 한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즉시 잔칫상을 차리고 거기서 그들에게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종들이 깨어있다면, 주께서는 밤중의 어느 때에라도 오실 수 있다. 깨어있는 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오실 수도 있다. 어떻든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면 영원한 행복의 종말론적인 명칭인 “행복한” 자들이라고 해 주실 것이다(38절).
예수께서는 일상생활에서 확실히 깨어있을 것을 함께 말씀하신다. 가정의 훌륭한 아버지는 확실히 깨어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하여 강도가 오는 때를 알고 싶을 수 있다(39절).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언제까지 늦어지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어떻든 오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각에, “강도처럼” 오실 것이다(40절).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오신다. 그분은 나의 아내를 통해서, 나의 남편을 통해서, 나의 자녀들을 통해서, 부모님을 통하여,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오신다. 쉽게 말하면, 이웃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때문에도 그 이웃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 사랑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이라는 이정표를 잘못 읽을 때, 우리는 엉뚱한 길로 갈 수 있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항상 오시고 계시지만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깨어있을 때만이 우리는 그분을 뵙고 함께 살 수 있다.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이 모두 항상 깨어있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주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을 닮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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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삼는 방법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언제 오든 준비하고 있으라는 뜻은 ‘꾸준하여라’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또한 우리 집의 주인이 당신임을 명확히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의 집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명령하는 주인을 모십니다.
처음에는 자아인 뱀을 모시고 삽니다.
그러니 뱀의 소굴이 됩니다.
그다음엔 주님을 모십니다.
성전이 됩니다. 내가 나의 주인인 것 같지만, 실제로 나는 집입니다.
집이 주인을 정하는 방법은 그 주인을 위해 꾸준히 하는 일을 정하는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사탄을 위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꾸준히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주인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영화 ‘옥토버 스카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호머 히컴은 1943년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작은 탄광 마을 콜우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에서는 거의 모든 젊은이가, 호머의 형을 포함해, 아버지를 따라 탄광에서 일하게 되리라 기대되었습니다.
호머의 아버지 존 히컴은 광산의 감독관이자 지역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지요.
1957년 10월, 소련이 쏘아 올린 인공위성 스푸트니크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광경을 본 호머는 우주 탐험의 가능성에 강렬한 매력을 느꼈습니다.
아버지는 줄곧 “탄광에서 일하는 게 뭐가 나쁘냐,
호머. 훌륭한 직업이야.”라고 말했지만, 호머는 로켓에 대한 열정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호머의 재능을 꿰뚫어 본 과학 교사 프리다 라일리 선생님이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호지킨병으로 건강이 악화하고 있었음에도, 라일리 선생님은 학생들을 향한 열정과 헌신을 절대 놓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은 호머를 바라보며 “때로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말고, 네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현실적이고 단호한 태도를 지녔던 존 히컴의 말, 곧 “계속 로켓 장난만 하다간 결국 탄광에서 일하게 될 거다.”라는 경고와 선명한 대조를 이뤘습니다.
호머의 초기 로켓 실험들은 실수투성이였습니다. 한 번은 실험 로켓이 산에 불을 내는 바람에 마을 전체와 아버지의 신뢰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호머는 실망을 안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로켓을 아예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침 갱도로 내려가면서, 과연 이 길이 자신의 운명일지 모른다고 체념했지만, 라일리 교사의 말과 스푸트니크를 보았을 때 불타오른 우주에 대한 열망은 절대로 잊히지 않았습니다.
한편 라일리 선생님은 자신의 건강 문제가 악화하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어떤 가능성이 숨어 있었는지 영영 알 수 없잖니.”라는 말로 호머를
다시금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에 자극받은 호머와 친구들은 로켓 제작을 재개했고, 수많은 실패와 연구 끝에 마침내 성공적인 발사에 이르렀습니다.
전국 과학 경진대회에 참가해 호머는 큰 주목을 받았고, 장학금 기회가 열리면서 탄광 밖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호머 히컴은 끊임없는 노력과 라일리 선생님의 변함없는 믿음을 바탕으로 콜우드의 탄광을 벗어나, 우주로 나아가는 로켓을 만드는
NASA에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거는 기대가 과연 그들의 꿈을 살리는지, 아니면 억누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적절한 스승의 응원과 끈질긴 열정이 만나면, 불가능해 보이던 꿈이라도 현실로 바뀐다는 것을 호머의 삶이 여실히 보여 주지요.
또한 누군가의 인정을 당장 받지 못하더라도, 매일 깨어 있으면서 자신의 가능성에 충실할 때
진정한 성공에 다다를 수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매일 준비하고 일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준비하고 있음은 매일 멈추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매일 멈추지 않고 강론을 써서 사람들과 나누는 것도 사실 깨어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해 시작인 오늘 교회를 위해 무언가 매일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할 일을 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일본 도쿄 시부야역 앞에는 하치코 동상이 있습니다.
하치코는 주인이 매일 기차를 타고 출근할 때마다 역까지 배웅하고, 저녁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주인을 맞이하던 개였지요.
어느 날 주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는데도, 하치코는 무려 10년 가까이
매일 같은 시각에 역에 나와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은 하치코를 기념하기 위해 동상을 세웠고,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충성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새해 하루 다만 1분이라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 매일 할 무언가를 정한다면 그것이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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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에게 ‘복’이란,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입니다.』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FWG1/5136
1) 신앙인에게 ‘복’이란,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입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알아보는 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반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은총을 안 주신다고 불평하기만 하고 원망하기만 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떻든 하느님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그런데 하느님께서 주신다고 해서 그 은총이 자동적으로 나의 것이 될까?
은총은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받는 법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받으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인답게 살면서 ‘선’과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은총을 잘 받는 방법입니다.
2) 쓸데없는 것들과 허무한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일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잘 판단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면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 해도 되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희망’인지, 그냥 나의 욕심과 집착일 뿐인지도 잘 반성해야 합니다. 욕심을 희망으로 착각하고, 자기 혼자만의 뜻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우기고, 은총을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그것은 모두 어리석은 일입니다.
3) 신앙인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은 뒤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 1,21).” 하느님께서 주셨다가 하느님께서 가져가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소유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없어진 다음에는 그것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여기서 ‘돈’을 ‘권력’으로 바꿔 생각해도 같은 가르침이 됩니다. 권력은 원래 ‘나의 것’이 아니고,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사랑하는 것도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권력을 따라다니다가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그것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습니다.>
4) ‘설날’이 ‘서러운 날’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을 서러워하는 이들, 또 하느님 앞으로 갈 날이 더욱 가까워진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설날을 서러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인생을 잘못 살고 있다는 표시일 뿐입니다.
신앙인은 ‘설날’을 ‘설레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깨달을 기회를 조금 더 얻은 날, 또는 주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얻은 날로 생각해야 합니다. 기회를 얻었음을 믿는다면,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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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의 강론말씀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Izfk/3573
(이곳 이민사회의 교우들에게 했던 강론입니다. 카페식구들이 이민사회의 어려움을 \ 이해하시라고 또 기도를 청하기 위해서 그대로 옮겨 봅니다.)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
찬미예수님, 교우 여러분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설입니다. 고국에는 지금 설은 센다고 해서 온 가족이 모이고 서로 기쁨의 시간을 갖고 있겠지요. 우리도 비록 고국은 가지 못하지만 우리가 어릴 때부터 불렀던 노래를 한 번 해볼까요?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새로 사 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오늘은 고향에 계시는 부모 친지를 찾아보고, 또 돌아가신 선조, 또 부모들을 위해 제사를 바치고 또 묘소를 찾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로 정성을 다해 빚었던 만두와 떡국, 전 등의 제사 음식을 식구들이 한테 모여 나누며 서로 밀렸던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기도 합니다.
동네 어른들게 세배를 드리고 어린이들은 세뱃돈을 챙기는 기쁨도 나누기도 합니다. 설빔이라고 해서 가난했던 시절 평소에는 입어보지 못했던 옷을 만들거나 사서 입는 설레임과 기쁨은 우리 모두가 갖는 아름다운 추억이기도 합니다.
저는 가난했던 시절 고무신을 받았는데, 그것이 너무 좋아 학교에 갈 때에는 벗고 걸어갔다가 교문에 들어서면서 슬며시 신고 다시 교문을 나설 때에는 벗어서 맨발로 돌아오던 때를 잊지 못합니다. 그렇게 가난했던 시절이 너무도 그립습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도 아니지만 자랑할만한 것도 못됩니다. 그러나 그 가난이 늘 저의 삶, 특히 풍요와 낭비에서 저를 잡아주는 나침반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지역은 틀리고 집안이 다 틀려도 공통적인 것은 전쟁을 겪고 나서 모두 가난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민 사회에서 배고프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때에는 풍요의 사회에 살면서 무감각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삶이 되겠지만 그래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우리가 가난했던 고국의 추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추억이 우리에게는 이민사회에서 더욱 억척스럽게 살아 남을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알고 늘 검소하고 겸손한 자세로 이곳의 삶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또 다시 노래 하나를 부르고 싶습니다. 박건호 작사이면서 박인희 작사인 ‘모닥불’입니다.
모닥불 피워 놓고
모닥불 피워 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 오기 때문입니다. 돈을 모으려는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하며 세상의 덧없음과 예측할 수 없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우리가 살면서 돈 때문에 바둥대며 살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사도의 설명대로 우리의 삶이 늘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타다가 꺼지는 사이에도 연기는 나지만 금방 사라지고 흔적도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너무 모으는 데에만 급급하다보면 사라지는 세상에서 헛됨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세상의 헛됨을 알지만 서로 뜻을 같이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의 헛되고 사라진다해도 여러분은 이국 땅에서 사랑의 공동체를 마련하고 가톨릭 신앙과 교회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사라진다해도 오늘 이 자리에서 행복하고 다행인것은 우리가 바로 선조들을 위해서 또 살아있는 부모나 친지,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신앙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헛됨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깨어서 기다라는 충실한 종의 삶을 이 공동체에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 민수기에서도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주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알려주라는 말씀이지만 또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5)
우리를 통해서 우리는 선조들이 복을 수 있습니다. 또 돌아가신 분들과 친지들을 위해서 우리가 바로 기도하며 미사를 봉헌할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쁩니까?
바로 우리를 통해서, 우리의 얼굴을 통해서 하느님의 축복을 전달할 수 있으니 우리 자신도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오늘 신문에 이 땅의 ‘이민2세가 경제력, 학력에서 미국 평균을 따라 잡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왔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서 이민의 역사를 시작하신 분들의 숨은 아픔과 노고가 없었다면 오늘의 이런 성장의 우리의 모습이 되었을까요? 오늘 설이 주는 교훈은 바로 조상들 뿐 아니라 어른들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자본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어른들은 생산성도 없고 손해를 끼치는 힘없는 계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남모르는 노고가 있었기에 지금은 비록 왜소하고 보잘것 없는 몸이 되었다하더라도 우리는 이분들을 존중하고 공경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민사회에서 이 공동체를 중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아픔을 위로해주고 비방과 비판을 일삼는 일반세상의 풍조와는 다르게 주님을 모시는 이 공동체는 서로 사랑하고 우리 고국의 자랑스러운 문화를 이 땅에서 심고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과 그 부인이 김치를 담그고 그 설명을 자세히 한 것을 이곳 매스컴이 실었던 기사를 보았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김치나 된장, 고추장을 부끄럽거나 숨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의 문화가 이곳에서도 자랑으로 바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2세가 자랑스럽고 더군다나 우리의 반만년의 역사와 전통이 또한 이민 사회에서도 자랑스럽습니다. 우리를 받아준 이 곳 이 땅도 우리가 감사하면서 새로운 자부심으로 이곳에 새로운 문화를 심고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비록 이민사회에 살면서 우리 조상들이 심어준 자랑스러운 문화를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고유 설을 맞으며 우리는 다시 조상들을 기억하고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며 미사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우리도 늘 깨어서 기다리는 충실한 주님의 종으로서, 서로 사랑하는 교우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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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축복을 나누는 축제 ♣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JO4U/2092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설 명절은 새로운 시간의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올 한 해를 하느님께 맡겨 드리며 축복을 청하는 은총의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시며, 자비롭게 대해주시고 평화를 세우시며 함께해주심으로써 축복해주십니다(민수 6,24-26).
이방인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주시고, 그들의 번성을 약속함과 동시에 잘못을 자비롭게 대해주시며, 약속의 땅에서 평화를 누리게 해주신 주님께서는, 새해 첫날은 물론 영원토록 우리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축복을 청하며 모두의 평화를 기원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준다는 것은 평화요 선(善)이신 하느님과 함께 있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평화와 자비를 공유하고 나눔으로써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축복 안에 머물려면 내 삶이 그분의 손에 달려있으며 주님의 축복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미래의 일을 계획하지만 내일 일을 미리 알지 못하며 모든 일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질 뿐입니다(야고 4,14-15). 우리는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4,14)일 따름이지요. 따라서 겸손하게 삶의 모든 계획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것이 우리 도리일 것입니다.
한편 설날은 산 이와 죽은 이들이 함께 만나서 친교를 나누는 축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조상들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나아가 가족들과 이웃과 화해하고 친교를 나누며 부모, 형제, 은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건네는 기쁜 축제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축제 변두리로 밀려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특히 자본과 공권력의 횡포와 폭력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찾아가 함께함으로써 모두의 진정한 축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명절에 나누는 감사와 기쁨이 단순한 민족 전통의 반복과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 사랑과 진리 안에서 인간다운 삶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축제가 되어야겠지요.
나아가 새해를 맞으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축제의 기쁨을 신앙으로 승화시켜나갔으면 합니다. 우리는 축제의 기쁨 안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이며, 나의 소명은 무엇인지 식별해 보아야 합니다. ‘삼가고 조심하는 날’(愼日)인 설날에, 언제 오실지 알 수 없는 주님을 언제든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준비해야겠습니다.
설 명절을 지내며 시작이요 마침이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며, 그분 안에서 친교를 이루고 그분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축복을 청함으로써 모두가 기뻐하는 축제가 되도록 마음을 모았으면 합니다. 아울러 주님의 뜻을 따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로 다짐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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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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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행복은
주인이 종의 시중을 들 정도로 표현됩니다.
즉 주인과 종의 자리가 바뀌는 것인데
이것은 종에게 엄청난 변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아무리 늦게 오더라도
종의 역할은 주인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맞이한 주인에게 상을 차려 주는 것도
당연한 종의 역할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종은 그것에 대한 보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주인은 다릅니다.
종의 그런 역할을 당연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종은 늦게 오는 주인을 맞이하지 않을 때
혼나는 것을 피할 수 있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무리 힘든 일이더라도
그것은 결코 헛수고가 아닙니다.
그 노고를 알아봐주고
그 고생을 갚아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상을 차려 준다는 표현에서
문득 시편 23편을 생각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주님은 목자로 표현되지만
양들을 위한 목자로
그래서 양들에게 상을 차려 주시는 목자로 나타납니다.
양을 길러 팔거나 잡아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잘 이끄는 목자로 묘사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로
어떻게 보면 주인과 종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큰 간격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인과 종의 자리가 바뀌듯
창조주와 피조물의 자리는 바뀔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창조주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님을 맞이하는 노력은
우리에게도 엄청난 행복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시편 23편의 마지막 구절이 노래하듯
일생동안 주님의 집에서 주님과 함께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깨어 맞이하는 것은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다가오시는 주님도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집에서 누릴 영원한 행복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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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2,35-40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오늘은 음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첫날인 ‘설날’입니다. 설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새로운 날이 ‘낯설다’는 의미에서 낯설다의 어근인 ‘설다’가 변해 설이 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한 해가 새롭게 시작되는 날을 의미하는 ‘선날’이 설날로 변했다는 견해가 대표적이지요. 저는 둘 다 신앙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을 멋지게 그려보라고 흰 도화지와도 같은 ‘새 날’을 주신 건 참으로 감사하고 기쁜데, 그 새 날들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그 중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를 부족한 인간은 알 수가 없으니 그런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낯 섬’이 두렵고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래서 그런 점을 최대한 줄여보고자 설날에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는 전통이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건강운, 성공운, 재물운 같은 세속의 복을 손에 쥐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든든하고 덜 불안해진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새로운 날을 의미있게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런 세속의 복이 아닙니다. 새 날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께서 베풀어주시는 축복을 직접 받는 게 훨씬 더 중요하고 또 효율적이기도 하지요.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해를 시작할 때 ‘욤 키푸르’라는 속죄 예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합니다. 내 마음 안에 담긴 죄와 욕망, 부정적인 생각들을 깨끗이 비워냄으로써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축복을 담을 준비를 하는 겁니다. 그런 준비를 미리미리, 제대로 해두지 않으면 새해를 의미 있고 보람차게 보낼 수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이에게 인생은 하루 하루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벅찬 ‘생존’이 될 뿐이지요. 그렇게 하루 하루를 생존하는 것에 그치면 말년이 비참해집니다. 비전도 목표도 노력도 없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나가 버리고 뒤늦게야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없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살아온 날들로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고 누리는 것들에 감사하지 못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교만이 우리를 우물쭈물 살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인이신 하느님을 깨어 기다리는 ‘종’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내가 ‘주인’이라고 착각하면 욕심부리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모든 일에 대가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주인이신 하느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비천한 종과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면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되고, 나를 부르시고 소명을 맡겨 주신 주님의 뜻을 헤아리게 되며 하루 하루를 충실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조금씩 변화되어 완성에 이르는 삶, 후회할 일들보다 기뻐할 이유를 만드는 삶, 참으로 의미 있고 보람된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바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과정에 동반되는 불편함과 어려움을 기꺼이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등불을 계속 켜둔다는 건 주님께서 붙여 주신 신앙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사랑과 자비를 열심히 실천함으로써 기쁨이라는 기름을 꾸준히 보충해준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준비된 모습으로 사는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든 참으로 행복합니다. 2025년 한 해가 우리에게 그런 행복한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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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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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9. 연중 제3주간 수요일, 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
<2025.1.29> 아침을 여는 묵상 (수 19:24~51절)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
❚ 담대하고, 견고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 어떠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까?
➲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24~31절).
다섯 번째로 기업 분배를 받은 지파는 아셀 지파입니다. 아셀 지파는 레아의 여종 빌하의 둘째 아들의 후손입니다. 아셀 지파는 동쪽으로 납달리와 스불론 지파, 서쪽으로 지중해, 남쪽으로 갈멜 산, 북쪽으로 두로에 이르는 지역을 기업으로 분배받았습니다. 야곱은 아셀에 대해 왕의 수라를 차릴 정도로 기름진 것이 그에게서 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창 49:20). 아셀 지파가 기업으로 받은 땅은 해안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데, 해안 지역에 위치한 도시는 활발한 무역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풍족한 지역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셀 지파에게 풍족한 땅을 기업으로 주심으로써 야곱의 예언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견고한 성읍 두로...’는 점령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땅들을 점령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큰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그 땅을 점령하였습니다.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얻은 풍요는 참으로 가치 있고,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때로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직면할지라도 쉽게 포기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아셀 지파가 분배받은 성읍들은 견고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취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지키기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취하고 믿음 안에서 잘 지켜냄으로 풍요로움을 보장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으로 담대히 싸우며 나아갈 때, 풍요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만만치 않은 문제가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산성이 되시고, 힘과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견고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32~39절).
여섯 번째로 납달리 지파에게 기업이 분배되었습니다. 납달리 지파는 빌하가 낳은 둘째 아들의 후손입니다. 납달리 지파가 제비를 뽑아 받은 기업의 경계선과 성읍은 서쪽에는 아셀 지파가 위치합니다. 남쪽으로는 스불론과 아셀이 자리하고 있고, 동쪽 경계는 요단과 갈릴리입니다. 요단 강 건너편에는 므낫세 지파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납달리 지파가 차지한 성읍에는 ‘견고한 성읍’(35절)이라는 표현이 더해져서 납달리 지파 역시 이 지역들을 차지하기가 만만지 않은 곳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납달리 지파가 기업으로 분배받은 지역은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은 쉽게 얻을 수 있겠지만,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고,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곳은 경쟁이 그만큼 치열하고, 차지를 했다 할지라도 지켜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더 큰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좋은 것이라고 무조건 욕심을 내고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 역시 성도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약속된 것에 대해서는 더욱더 견고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고, 누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마지막 때의 영적 전쟁은 그야 말로 치열할 것입니다. 견고한 진이 우리 앞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견고한 믿음으로 싸울 때, 더 큰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견고한 진 앞에서 더욱 견고한 믿음으로 나아가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신실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40~51절).
남은 일곱 지파 중에서 마지막으로 라헬의 여종 빌하의 첫째 아들의 자손인 단 지파가 기업을 분배 받았습니다. 단 지파가 얻은 기업의 서쪽은 지중해에 접한 해안 지대이고, 동쪽에는 베냐민 지파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에브라임 지파, 남쪽으로는 유다 지파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지파의 기업은 나중에 더 확장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 자손이 레셈으로 올라가 싸워서 점령했기 때문입니다. 그 땅을 차지하고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셈을 단이라 하였습니다(47절).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땅 분배가 끝난 후에 여호수아가 딤낫 세라를 기업으로 받음으로써 땅 분배가 모두 마무리 되었습니다(49~51절).
단 지파가 얻은 땅은 위치나 넓이로 볼 때 가장 보잘 것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평하지 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전쟁을 통해 그들의 기업을 더 확장시켜 나아갔습니다. 현재 소유한 것에 대해 불평만 하고 있다면 나아지는 것은 전혀 없고, 오히려 더 나빠지기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한정지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가 나아갈 길을 열어 주시고, 우리 인생의 지경을 넓혀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자신이 가진 것이 적고, 형편이 없어 보일지라도 불평하지 말고 더한 믿음으로 더 큰 은혜를 사모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에 주저앉아만 있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도전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더욱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아가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만만치 않은 문제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갈 뿐 아니라 우리의 지경을 넓혀 주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원망을 버리고 감사로 충만한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19:24~5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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