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18일 오후 4시쯤 인천국제공항 출입국관리사무소.
동남아인으로 보이는 20대
남성이 자진해서 불법체류자라고 신고했다. 그는 모국인
태국으로 출국하고 싶다며 여권과
항공권을 내밀었다. 출입국사무소는 수배 여부 등 간단한 점검만 하고 곧바로 여권에 출국도장을 찍어줬다. 이 남자가 탄 비행기는 오후 6시 48분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다음 날 오전 이 남성은 이달 16일 칠곡군 석적읍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용의자인 태국인 A(29) 씨로 밝혀졌다. 한국에서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외국인이 아무런 제지 없이 달아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살인 사건 피의자가 해외로 도주할 수 있었던 것(본지 20일 자 6면 보도)은 허술한 영장 발부 관행과 미비한 집행 시스템이 한몫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16일 오전 3시 50분쯤 칠곡군 석적읍 모 빌라 앞에서 회사원 최모(27) 씨가 흉기에 찔려 숨졌다. 경찰의 대응은 빠른 편이었다. 경찰은 CCTV 분석을 통해 이날 오후 유력한 용의자로 A씨를 지목했다. 또 A씨가 사건 당일 저녁 한 편의점 현금출납기에서 돈을 찾는 CCTV 영상도 확보했다. 경찰은 A씨의 집과 정확한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토요일인 17일 오전 금융계좌 압수수색 영장을 법원에 신청했다.
그러나 A씨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은 이틀 동안 발부되지 않았다. 주말과 휴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당직 판사가 있지만 휴일에는 집행의 어려움을 들어 영장을 잘 발부하지 않는 게 관행처럼 굳어졌다"고 귀띔했다.
결국 A씨의 금융계좌 압수수색 영장은 월요일인 19일 오전에 발부됐다. 경찰은 1시간 만에 A씨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출국금지 요청을 했지만 A씨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더구나 휴일에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됐더라도 실제로 집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게 수사 관계자들의 얘기다. 통신기록 등은 휴일에도 긴급 조회가 가능하지만 금융자료의 경우 휴일에는 조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김강헌 칠곡경찰서 수사과장은 "영장 발부가 늦기도 했지만 설령 일찍 발부됐다 하더라도 계좌 조회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서 "휴일에도 금융자료 조회를 할 수 있도록 관련 법규 손질이 시급하다"고 했다.
불법체류자들의 자진 출국을 유도하기 위한 법적 제도의 맹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법무부는 불법체류자가 자진신고할 경우 범칙금을 면제하고 항공권을 소지한 불법체류자는 즉시 출국시켜 주는 제도를 시행 중이다. A 씨가 수중에 돈이 거의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범칙금 때문이라도 출국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지역의 한 변호사는 "이번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급박하거나 외국인이 연루된 강력사건은 빠른 영장 발부와 집행이 가능한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칠곡 이영욱 기자 hello@msnet.co.kr